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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군진(軍鎭)과 민보(民堡)를 아울러 부르거나 군사적 거점(據點)에 진(鎭)을 두고, 그 아래 작은 단위의 시설로 보(堡)나 수(戍)를 거느리게 한 군사 시설의 단위를 통칭하는 용어이다. 조선시대 지리지(地理誌)에서는 군사적 거점과 시설을 다룬 편(篇)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육군과 수군에게 모두 사용된 용어이기도 하다. 예컨대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 지리서인『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성곽(城郭)과 관방(關防)을 구분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인 18세기 중엽의『여지도서(輿地圖書)』와 여러 읍지(邑誌)들에서는 성지(城池)와 관액(關?)으로 구분하거나 성지와 진보(鎭堡)를 구분하여 항목의 이름으로 사용하였고, 19세기 중엽의『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도 성지와 영아(營衙) 및 진보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구분은 먼저 현재 존속되고 경영되는 도성, 읍성, 산성, 관성(關城) 등의 경우는 성곽이나 성지 등으로 구분하고, 관방과 영아 및 진보에서는 군사적 목적이 강한 수도권과 변경 지역의 병영과 수영의 성곽과 첨절제사 및 만호가 주둔하는 진(鎭)과 그 아래의 권관(權管) 등이 파견되어 지키는 보(堡)와 수(戍) 등을 관방, 혹은 진보로 구분하였다.[1]
  • 진(鎭)이 처음 설치 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의 일이며, 특히 신라의 기록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책(柵)을 설치하여 국경 요새지의 방어 거점을 만드는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하대(下代)에 이르러 해안 거점에 큰 규모의 진이 설치되었다. 유명한 것으로는 북진(北鎭), 당성진(唐城鎭), 혈구진(穴口鎭), 청해진(淸海鎭), 패강진(浿江鎭) 등이 있었다. 진에는 두상대감 혹은 대사가 진장(鎭將)으로 파견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 하부 기구와 시설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다만 군(郡) 단위의 비교적 큰 관할구역을 거느리고, 진 아래에 여러 성(城)과 작은 보루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이들 진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한층 정비되었다. 고려의 북계(北界) 지역은 천리장성(千里長城)이 축조되기 이전부터 축조되기 시작한 여러 주성(州城)과 진성(鎭城)들을 연결한 것인 동시에 관성(關城)을 둔 것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남부 해안지역에도 방어를 위한 수(戍)가 증설되었다.[2]
  •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영토가 확정된 세종 대에 이르러 중앙과 지방의 군사편제를 일원화하고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도성의 축조기법을 모델로 하여 지방의 군사 거점과 특히 군사상 반드시 방어가 필요한 국경 지역의 방어망을 치밀하게 조직화하고 시설을 늘렸다. 이 과정에서 북방의 육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조선 영토지역에 산의 능선을 따라 행성(行城, 장성)을 축조하였고, 강물과 시냇물이 흘러 강으로 들어가는 어구를 구자(口子)라 하여 야인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성벽을 축조하였다. 이들 성벽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수막(把守幕)을 두어 3인 1조의 보초가 세워졌고, 또 일정한 구역마다 군사 지휘관을 두었으며, 그 지휘, 감독의 군사적 방어 명령체계가 중앙정부에 의해 결정되어 하달되었다. 당시의 지역별 방어망과 시설은 세종 대 초기의 것이『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조정을 거쳐 16세기 전반의 상황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조선 후기의 상황은 각종 읍지와 관방 지도 등에 기록이 남아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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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고고학사전, 성곽봉수편, 진보
  2.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고고학사전, 성곽봉수편, 진보
  3.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고고학사전, 성곽봉수편, 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