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From Underwood To Ellinwood (1901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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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가 엘린우드에게 보낸 보고서
(1901년 1월 8일)
식별자 R19010108UTOE
한글명칭 언더우드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1901년 1월 18일)
영문명칭 Horace G. Underwood's Report To Frank F. Ellinwood(Jan 8, 1901)
발신자 Underwood, Horace G.(원두우)
수신자 Ellinwood, Frank F.
작성연도 1901년
작성월일 1월 8일
작성공간 서울
자료소장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번역문출처 김인수,『언더우드 목사의 선교편지』,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2.



Dr. Horace G. Underwood
Seoul, Korea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인물
한국, 서울
Jan. 8, 1901 1901년 1월 8일
Rev. F. F. Ellinwood, D.D.
New York, N.Y.
엘린우드 박사
뉴욕시, 뉴욕주
Dear Dr. Ellinwood, 엘린우드 박사님께
I have just heard of the action of the Pyeng Yang station in regard to the Christian News, which was passed, I am told, on Dec. 5, 1900. As you know through my letter, I had not expected that the mission would approve of the appropriation, which I had not (as I said in my letter) asked for. I have been told that on Dec. 5, 1900, that it was󰡒moved that in regard to the appropriation asked for the Christian News; since it is a paper started and conducted without the authorization, approval or control of the mission, we request that the appropriation be not granted". In regard to the starting of the paper, it was started when Dr. Speer was out here, so he will know all about it. I had been over and over again urged by the committee of the 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 to start a paper, which I declined to do. The K.R.T.S. had then asked Dr. Vinton whether he could give his time to it and his reply was that if I could take charge he would assist and do all he could to make it a success. Even then, I did not see my way clear to the starting of the paper, but some months later, the way being open Dr. Vinton and I decided to start the same without any expense to the Board or the mission, and after a general consultation with all the members of the Seoul station, we started the paper in April 1897. We were under the impression that it was something that would be heartily welcomed by every missionary in the land. We received very strong letters us by all means to go on with the undertaking, from every quarter. Only in one section did we hear of any disapproval and this was from Mr. Lee of Pyeng Yang, who thought the paper ought not to be started unless it was under the mission control.
『그리스도 신문』에 대한 평양지부의 결정사항에 대해서 방금 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900년 12월 5일에 통과됐다고 들었습니다. 제 편지를 봐서 아시겠지만, 선교부에서 제가 요구하지도 않은(제 편지에서 말씀드렸던 대로) 비용 지출을 승인하리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1900년 12월 5일에, “『그리스도 신문』은 선교본부의 인가나 승인 또는 관리를 받지 않은 채 창간하고 발행한 신문이므로 이를 위해 요청된 비용 지출이 승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결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 신문은 스피어 박사가 이곳에 있을 때 창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어 박사가 이에 대한 모든 사항을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조선성교서회의 위원회에서는 제게 신문 사업을 시작하라고 거듭 권유했습니다만 저는 사양했습니다. 그 후 한국기독교서회에서는 빈턴 의사에게 이 일을 맡을 시간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빈턴 의사는 “언더우드 박사가 책임을 맡는다면, 이 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제가 신문 창간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몇 개월 후에 길이 열려서, 선교본부나 본부에 부담을 지우지 않은 채 이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울지부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전체적으로 상의한 후에, 1897년 4월에 우리는 이 신문을 처음으로 발행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이 나라에 와 있는 선교사들 모두가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다는 인상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시작한 이 일을 계속해 나가라’고 강하게 말하는 내용의 편지들이 도처에서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단, 평양에 있는 이(李)길함 목사에게서만은 "이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들었습니다. 이 목사는 "이 신문이 선교부의 관리 하에 있지 않다면 발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Knowing the history of papers both in the States and on the Mission field, and how few there were under the direct control of the church, that most of them were private enterprises, working however for the good of the church. Knowing that if the paper took this stand, it must eventually meet with general approval throughout the land. We have done our best to make the paper a success. From year to year as you know from my report, I have reported to the mission what the Christian News has been doing, and from year to year my report has been received and adopted by the mission, and not one word of disapproval has the mission as a mission, ever given and although from time to time, I have publicly and privately asked for suggestions as to improvement or criticism of the paper and they have never been given. The paper has not met with the hearty support that I could have wished it had in the northern station. I had thought it was the term to which they objected but I have been told that this is not to what they object. I have again and again solicited criticism, but I have not had a single word of suggestion, advice or criticism from a single member of Pyeng Yang station. It does seem to me that if there are things that they do not like about the paper, they could easily write and make suggestions. It certainly is my aim to make the paper as far as possible, meet all the needs and requirements and I do not hesitate to state and believe it can be proved very clearly that the Christian News is by all odds the best paper published in Korea. Indirectly I have been told that there has been criticisms made. I have been given to understand that one party withdrew their support from the paper because under its farm items, it had an article showing how tobacco could be more advantageously  ? than it is at present done in Korea. I have been informed indirectly, that the exception has been taken to some of the statements in the paper, but I have never been informed as to what these statements were. We have correspondents both native and foreign in different parts of the land. Nothing that is sent us is published unless it comes with their signature. They are as far as we are able to judge trustworthy men. If we find that they send us news items or other statements that are incorrect their correspondence is no longer received, but how can any paper be sure that all of its general news items is reliable. As far as we are able we sift all news and we take every precaution that can be taken by any paper at home. It has just come to me indirectly that the paper does not receive enough oversight. I think they make this statement because they know I will be away in the country for two months or more at a time but they seem to be entirely ignorant of the amount of matter that is prepared before I go to the country. And when I do go I always leave the general oversight in charge of Dr. Vinton, if he is here, or of Mr. Hulbert. In addition to this I have given certain departments of the paper to missionaries as sub-editors and as a rule when they are more especially of my own mission in whom I have confidence, I do not always revise their columns. Two years ago at the time of the annual meeting, a certain action taken by the mission was thought best not to be given out publicly. The next issue of the paper to my surprise contained the whole thing. When asked how this happened, I had to state to the Mission that I did not know it was there. The reason was that it was in a department, which was in the entire charge of one of the most trusted of our missionaries, who has held almost every office in our mission that our mission has to offer. I did not care to mention names to show where the blame lay. It was a mistake a brother had made and the Christian News bore the blame lay because one of its staff had made the mistake. That however has been held up against me to prove that the paper has not sufficient oversight. I do not expect to keep watch over all those that are on the staff of the Christian News, but we make certain individuals responsible for certain pages. We have agreed as to our line of policy. If that policy is not carried out, that individual will be called to task by the paper, but we do not care to publish the names of those who have in this way gone contrary to the policy of the paper. I mention this to show you plainly, how such a difficulty could occur and the editor-in-chief altho he gives considerable oversight to the paper, at that time being exceptionally busy, I did not know that it was published. It came in the items of the church news which were at that time being collected and prepared by the gentle man who had charge of that department.
그렇지만 미국을 비롯해 선교지에서 발행된 여러 신문의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았던 신문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문은 개인이 하는 사업이었지만, 동시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발행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신문이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면 결국 온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신문이 성공적인 신문이 되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 보고서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해마다 저는 『그리스도 신문』에서 하는 일들을 선교부에 보고했고, 매년 제 보고서는 받아들여져 채택되었습니다. 선교부에서는 이에 대해 반대 의사를 나타내는 단 한 마디의 말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간혹 제가 공석이나 사석에서 이 신문에 대한 발전적 제안이나 비평을 해달라고 부탁했었는데도, 그런 말은 전혀 듣지 못했었습니다. 북쪽 지방의 선교지부에서는, 이 신문에 ‘제가 희망했던 진심 어린 지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쪽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용어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이것이 그들이 반대하는 문제는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거듭해서 비판의 의견을 말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평양지부의 단 한사람도 제게 제안이나 충고나 비판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신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으면 제게 간단히 편지를 써서 이에 대한 제안을 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이 신문이 필수적인 내용들을 다 갖추고 여러 요구 사항을 만족시키도록 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리스도 신문』이 한국에서 발행되는 신문들 중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난 신문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입증될 수 있다”고 저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확실히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 비난을 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그리스도 신문』의 “농가란”에, 어떻게 담배 잎이 한국에서 지금보다 더 효과적으로 자랄 수 있는지 보여 주는 글이 게재(揭載)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이 신문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신문에 실린 내용의 일부에 대한 이의 제기가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는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한국 내 여러 곳에 한국인 및 외국인 통신원들을 두고 있습니다. 그 통신원들의 서명과 함께 전해진 소식만 신문에 기사로 싣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그 통신원들은 모두 신뢰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혹시 어느 통신원이 사실과 다른 기사나 소식을 보내온 것이 밝혀지면, 그 사람이 보내오는 글은 더 이상 받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과연 어느 신문이 그 모든 기사 내용이 다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한 우리는 모든 기사를 자세히 검토하고 있으며 본국의 신문사들이 하는 예방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신문에 대한 감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두 달 정도 혹은 그 이상 지방에 내려가 있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제가 떠나기 전에 얼마나 준비 작업을 많이 해 놓는지 전혀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자리를 비울 때면 언제나 저는, 빈턴 의사가 이곳에 있으면 빈턴 의사에게 아니면 헐버트 씨에게 총감독의 책임을 맡게 합니다. 이외에도, 신문의 몇몇 부분들에 있어서는 다른 선교사들이 부편집인으로 일하게 해 두었습니다. 다들 제가 신뢰하는 사람들이고 특히 제 일을 저보다 잘 알고 있는 경우에, 제가 그들이 쓴 글을 교정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2년 전의 연례회의가 있었을 때 선교부에서 어떤 결정을 내린 다음, 이에 대해서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게 좋겠다고들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신문의 그 다음 호에는 그 모든 내용이 다 실려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느냐”고 사람들이 물었지만, 저는 “이런 기사가 나게 될 줄은 몰랐다”고 선교부에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많은 신뢰를 받는 이들 중 한 사람이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던 부분에 이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 선교부의 거의 모든 직임을 다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의 책임이었는지를 알리고자 그의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한 형제가 범했던 실수였으며, 그에 대한 책임은『그리스도 신문』이 져야합니다. 간부 중 한 명이 실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게 “이 신문에 대한 감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시인하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신문』의 간부들이 담당하고 있는 모든 부분들을 제가 다 감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신문의 몇몇 부분에 대해서는 몇몇 사람들이 각기 책임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반적인 방침의 방향성’에 대해 합의를 보았습니다. 만일 합의한 사항을 이행하지 않으면, 그렇게 했던 사람은 신문에서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신문의 방침을 거스른 사람들의 이름을 공표(公表)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질 수 있는지 박사님께서 분명히 알게 해 드리고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편집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바쁜 순간에도 신문을 자세히 살펴보지만, 저는 그런 내용으로 신문이 발간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문제가 되었던 기사는 교회 소식란 안에 있었는데, 당시에 그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던 그 점잖은 분이 그에 해당되는 여러 소식을 수집하여 그 내용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In regard to all these complaints and differences, if they could be brought to me, I would have somewhat of an opportunity of correcting them, but as I said before, not once has a single member of the station at the North brought a criticism to my notice. I do not want to seem as who I was finding fault with the brethren up there. My only fault is that if they have faults to find with me they do not let me know what it is.
이러한 모든 불만사항과 의견 차이 등이 제게 전해졌다면, 어떻게든 제가 바로 잡아 볼 기회가 있었겠지만 이미 말씀드렸던 대로 북쪽 지역의 선교 지부에서 제게 한마디라도 비평의 말을 해 주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가 그쪽에 있는 형제들의 흠이나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제게 불만이 있는데도 제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 제 유일한 불만입니다.
With regard to their paper, I regret very much indeed that the Board has not seen fit to grant its approval to the paper that they decided to start. I was surprised when I heard it was starting. I wished much that the force and energy put in their new paper could have been combined with that put in the Christian News and made that one strong self-supporting paper. But if the brethren up there do not see eye to eye in these matters then I believe in letting them have their own paper, and while I was in Pyeng Yang. I talked over with those who were to have charge of their paper, some of the details and general means by which they could obtain the advantages of low postal rates, and I really think as they have their press there and are desirous of starting the paper, that it would be a good idea to grant them permission so to do. I trust that the Board will reverse their decision and allow the new paper to be started. I really feel that any steps that may be taken in connection with the uniting of the efforts of the two would be futile, especially as there might be in the minds of the Pyeng Yang brethren that I had been opposing the paper.
그쪽 사람들의 신문에 대해 말씀드리면, 본부에서 ‘그 사람들이 창간하기로 결정한 신문에 대한 승인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 무척 안타깝게 생각됩니다. 저는 새로운 신문을 창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들이 신문을 위해 쏟아 붇는 힘과 역량이 『그리스도 신문』을 위한 그것과 합쳐져, 강한 힘을 발휘하며 자립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신문이 태어나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의 형제들이 이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 나름의 행동 권한을 갖게 해 주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평양에 있는 동안, 그 신문 발행을 맡게 될 사람들과 우편 요금을 줄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해 상세하고도 포괄적인 내용으로 대화를 나눈 바 있었습니다. 그곳에 자신들의 인쇄소를 보유하고 있고 신문 창간을 무척 바라고 있기 때문에 신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본부에서 이전에 내리 결정을 취소하고, 새로운 신문이 발행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두 신문의 성과를 하나로 연합하고자 하는 조치는 그 어떤 것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다른 무엇보다, 평양에 있는 형제들은 제가 그 신문의 발행에 대해 반대했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n conclusion in regard to the paper, I would like to state that I had the opportunity, and a rare one at that, of pushing the paper throughout the Pyeng Yang station, but knowing how the brethren felt refrained. A gentleman, resident in Seoul, who was very much interested in the starting of the paper in '97, when he heard of the opposition Mr. Lee had to the same, offered to bear the expenses of sending a foreigner down to Pyeng Yang to travel throughout the whole province and canvass for subscriptions to the paper. This I deemed would not be the best course to take and declined the offer.
신문에 대한 말씀을 이제 맺으면서, ‘평양 지부 전역에 걸쳐 『그리스도 신문』이 퍼져나가게 할 수 있는, 보기 드물게 좋은 기회가 제게 있었지만 그렇게 했을 때 그 형제들이 어떤 느낌을 받게 될 줄 알기에 자제했었다’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1897년, 그 신문이 창간되는 것에 지대한 관심이 가졌던 한 신사분이 있었는데, 이 분은 이길함 목사가 이 신문에 대해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신문 구독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외국인 한 사람을 평양으로 보내고, 전 지역을 가가호호 찾아다니게 하는 데 드는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저는 그 제안을 사양했습니다.
Trusting that out of all the differences of opinions and all these obstacles that we find in the way, that which is right and for the glory of God' kingdom may be done.
서로 의견이 다르고 도중에 여러 장애가 있다고 해도,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한 일들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With kindest regards from us all, I remain, 박사님께서 평안하시기를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yours sincerely, 안녕히 계십시오.
H. G. Underwood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인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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