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0-201A.episode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Links
E0-201A	서울_인왕산	hasContextualElement
E0-201A	서울_백악산	hasContextualElement
E0-201A	정도전	hasContextualElement
E0-201A	무학대사	hasContextualElement
E0-201A	경복궁	hasContextualElement
E0-201A	종묘	hasContextualElement
E0-201A	사직단	hasContextualElement
E0-201A	육조거리	hasContextualElement
E0-201A	산수비기	hasContextualElement
E0-201A	주례(周禮)	hasContextualElement
E0-201A	시경	hasContextualElement

#End

Theme

태조 이성계의 양팔, 산으로 설전을 벌이다

Synopsis

인왕산이 조선의 우백호가 된 이유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결정하고 정궁의 위치를 정할 때 태조의 양팔인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설전을 벌인 것과 관련이 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아 정궁을 세우고 동향으로 배치해야 한다고 한데 반해, 정도전은 백악산(白岳, 북악산)을 주산으로 남향으로 정궁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정도전의 주장대로 경복궁은 백악을 등지고 남향을 바라보게 되었고, 북악산은 주산(主山), 남산(南山)은 안산(案山), 낙산(駱山)은 좌청룡(左靑龍), 그리고 인왕산은 우백호(右白虎)가 되었다.

정궁이 남향으로 지어지게 되자, 무학대사는 “신라(新羅)의 고승 의상대사가 지은 《산수비기(山水祕記)》를 보면 도읍을 선택하는 자가 만일 중의 말을 믿게 되면 약간 오래 갈 희망이 있고, 정가(鄭哥) 사람이 나와 시비를 하게 되면 5대를 가지 못하여 자리다툼의 화가 생기고, 200년이 못 가서 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리는 난이 날 것이니 조심조심 하라.” 고 하였다. [2] 무학대사의 주장을 일정부분 받아들여 경복궁을 지을 때 무학대사의 의견을 반영하여 궁궐의 화기를 막기 위해 정문에 돌로 만든 해태상을 세우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동으로 만든 용을 넣어두었다. 그러나 과연 ‘5대 후의 자리다툼’은 계유정난, 즉 수양대군의 왕위찬탈(1453년)이 일어났고, 1592년‘200년 후의 난’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정도전의 주장은 옛날부터 제왕(帝王)은 남쪽을 바라보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법도라는 유학의 이념과 질서에 근거한 것이다.[3] 이외에도 정도전은 유학을 대표하는 경서 중 『주례(周禮)』의 원리인 ‘左廟右社 面朝後市(좌묘우사, 면조후시)’에 따라 궁궐과 종묘, 사직단, 관청, 시장 등 주요한 공간의 자리를 잡았다. 즉 북악(北岳) 아래에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세우고 그 왼쪽인 지금의 종로4가 자리에 선왕(先王)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를, 오른쪽인 인왕산 아래 자락에는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사직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육조 등 조정의 주요 관청들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좌우에 배열해 세우고, 종로에 저잣거리(시장)를 조성하도록 했다.

또한 정도전은 궁궐의 주요 건물 하나하나에 유교적 이념과 민본주의 의지를 새겨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이란 이름은 유학의 삼경(三經) 중 하나인 『시경(詩經)』의 ‘기취(旣醉 : 이미 술에 취하다)’라는 시의 구절 중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 곧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네. 군자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에서 뜻을 취하고 글자를 따와 경복궁(景福宮)이라고 하였다. [4]

이처럼 궁궐의 위치 및 이름 등 한양의 건설은 유학의 사상과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Storytelling Network


주석

  1. 「사실(事實)」, 『삼봉집 제8권- 부록(附錄)』
  2.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대동야승(大東野乘)』
  3. 「경도(京都)」,『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1권』
  4. 태조4년 1395년 10월 7일, 『태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