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문묘(文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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仰止樓前肅肅 (앙지루전숙숙)     앙지루 앞에서는 마음이 숙연하네, 
大成殿屹聖師 (대성전흘성사) 대성전 우뚝하니 공자님의 자리일세.
三綱五典明明敎 (삼강오전명명교) 삼강과 오륜으로 밝은 가르침 밝히니,
天地同流萬億 (천지동류만억) 천지와 함께 흘러 억만년을 이어가리.


○ 성묘(聖廟)는 부의 서쪽 성안에 있다. 외삼문(外三門)의 편액은 앙지루(仰止樓)이며, 내정전(內正殿)은 대성전(大成殿)이다.

○ 전하기를 몽골이 성을 허물 때에 위판(位版)을 볼음도[甫音島]에 옮겨 모셨는데, 비록 징험할만한 문헌이 없지만 옛터와 위전은 모두 섬안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옮긴 시기와 그 터는 모두 상고할 수 없다. 인조 갑자년(1624)에 유수 심열(沈悅)이 소동문(小東門) 바깥 송악의 동쪽 기슭 아래에 세웠는데 7년이 지나 경오년(1630)에 유수 이안눌(李安訥)이 비로소 위판을 받들어 명륜당(明倫堂)에 세우고 시를 지어 게시하였고, 이중명(李重溟)이 돌에 새겨서 그 일을 기록하였다. 그 해에 향교를 승격시켜 학교로 삼아서 비로소 학궁(學宮)이라고 칭하였다. 대체로 송도에서 신관(新館)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횡당(黌堂)이라고 하였다. 제도가 학궁(學宮)이라고 칭하면서 이때부터 새로와졌다. 현종 계축년(1673)에 유수 민시중(閔蓍重)이 성내(城內) 남산 아래로 옮겨세웠다. 영조 신해년(1731)에 유수 유척기(兪拓基)가 “관아가 부에서 가까이 있는 것은 받들고 공경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것을 재우(齋宇)와 포주(庖廚)를 옮겨서 세웠다. 이때부터 질서정연해졌다. 병술년(1766, 영조 42)에 유수 동악(東岳)의 5대손 이은(李溵)이 중수한 일을 기록한 비석을 교문(校門)의 바깥에 새겨서 누각을 세웠다.



※ 대성전(大成殿) ○ 10 칸으로 다섯 성인의 위패를 모셔서 안치하였다.

○ 동쪽의 종향(從享)한 분은 다음과 같다. 비공(費公) 민손(閔損),설공(薛公) 염옹(冉雍), 여공(黎公) 단목사(端木賜), 위공(衛公) 중유(仲由), 위공(魏公) 복상(卜商), 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頓頤), 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

○ 서쪽에 종향한 분은 다음과 같다. 운공(鄆公) 염경(冉耕), 제공(齊公) 재여(宰予), 서공(徐公) 염구(冉求), 오공(吳公) 언언(言偃), 영천후(穎川侯) 전손사(顓孫師), 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 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

○ 동무(東廡)는 4칸이다.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

○ 서무(西廡)는 4칸이다. 문창공(文昌公) 최치원(崔致遠),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문원공(文原公) 이언적(李彦迪),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

○ 제기고(祭器庫), 신문(神門), 명륜당(明倫堂), 예방(醴房), 강당(講堂), 전사청(典祀廳), 공수(供需), 중문(中門), 동서재(東西齋), 포소(庖所), 비각(碑閣), 홍전문(紅箭門), 외삼문(外三門), 유제기(鍮祭器), 보궤(簠簋), 용작(龍爵), 작(爵), 작대(爵臺), 향로(香爐), 향합(香盒), 준(樽), 촉대(燭臺), 분(盆), 사제기(沙祭器), 목두(木豆), 상변(杻籩), 목촉대(木燭臺), 목작대(木爵臺), 축판(祝板), 향상(香床), 축상(祝床), 조상(俎床), 관(盥), 관세상(盥洗床), 폐광(幣筐), 가자(架子), 가자복 (架子袱), 제복(祭服), 제복궤(祭服櫃), 부(釜), 식정(食鼎).

○ 교생(校生) 원안(原案) 200인, 별안(別案) 54인, 동몽(童蒙) 170인, 재직(齋直) 20명, 노(奴) 4명, 비(婢) 7명, 위전(位田)은 망도(望島)에 130두락(두락), 각 면(面)에 수전(水田) 129두락, 한전(旱田) 55두락.

○ 복호미(復戶米) 100두.

○ 동몽미(童蒙米)는 이름마다 각각 2두이다.

○ 접량미(接粮米)는 150석이다. 병자년에 유수 조영국(趙榮國)이 처음으로 300석을 갖추고서 관창에 소속시키고 관리하였다. 매년 10분의 1을 소모된 것으로 취해서 유생들이 사용하는 식량으로 삼았다. 흉년에 이르러서는 소모 곡식을 줄였으며 이 수를 간직하였다.

○ 석전(釋奠)은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지낸다.

○ 서(黍), 직(稷), 도(稻), 량(粱), 양(羊)의 희생은 소 한 마리와 돼지 한 마리 희생으로 대신하였다. 폐백을 시행하는 데에는 절차가 별도로 있었다.

기행지도

인물

  • 심열(1569∼1646)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학이(學而), 호는 남파(南坡).
  • 이안눌( 1571∼163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 이중명(생몰년 미상)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구주(鷗洲).
  • 민시중(1625∼1677)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공서(公瑞), 호는 인재(認齋).
  • 유척기(1691∼1767)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 이은(1722∼1781)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