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1 김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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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김복진의 불상

김복진의 삶과 예술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의 호는 정관(井觀)이며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 대불을 조성한 근대조각의 개척자이다. 충북 청주에서 군수 김홍규(金鴻圭)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동생은 시인  김기진(金基鎭)이다. 1920년에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일본 불상조각과 근대조각의 대가인 다까무라(高村光雲)에게 배웠다.[1] 졸업반 시절에 제국전람회에 입선하고 귀국해서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이여 입상하면서 일찍부터 두각을 보였다. 미술 외에도 문학과 연극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김기진, 이서구 등과 신극운동 단체인 토월회(土月會)를 만들기도 했다. 한편으로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보여 조선공산당 활동으로 인해 6년 여의 수감생활을 보내야 했다.[2] 수감생활 중 목불상을 조각한 것이 계기가 불교예술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동경 유학 시절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었다는 김복진은 출옥 후 화재로 소실된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 대불 복원을 맡게 되었는데 심사과정에서 전통 불상 제작 장인을 제치면서 불교예술에도 이름을 높이게 된다.[3] 이때 금산사 미륵 대불 조성의 대시주 김수곤과의 인연으로 1940년에는 당시 새로운 기술이던 시멘트 공법을 도입하여 법주사 미륵 대불 조성을 맡게 된다. 그러나 이 무렵 갑자기 어린 딸을 잃게 되면서 ‘부모가 돌아가신 데 따라 죽으면 효자라 하고, 남편을 따라서 (죽으면) 열녀라 하는데, 부모가 자식을 따르면 무어라고 할까’라고 실의에 빠져 지내다 딸이 떠난 지 한 달 만에 급서하고 말았다.[4] 법주사 미륵 대불은 김복진이 머리만 완성한 채 사망하여 30여 년이 지난 1964년에서야 제자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됐으나 1986년에 안전상의 문제로 해체됐다.

김복진이 남긴 조각작품은 41점을 헤아린다고 한다.[5] 6년여의 수감생활 중 만들었던 목불까지 더하면 규모를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더구나 동상과 인물상 등도 많이 의뢰받았기에 전체 규모는 어림잡아도 백여 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생 김기진이 보관하던 작품은 한국전쟁 중에 모두 불타고 다른 곳에 보관되던 작품들 또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두 사라지면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은 소수의 불상 작품에 불과하다. 근대조각의 개척자로서 김복진 이룬 예술적 성과에 비하면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라 할 것이다.

김복진 불상의 디지털 큐레이션 필요성

김복진이 조성한 불상 작품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본격적인 불상 작품의 제작 시기는 출옥 이후인 1935년경부터 사망한 1940년까지 5년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감옥의 면회자들에게 판매되었다는 김복진의 수감생활 중 목불상의 수는 알 수 없지만, 자료로 남아있거나 현존하는 불상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6] 아쉽게도 아래의 10개의 작품 중에서 현존하는 것은 세 작품(2,3,8번) 뿐이다.

1) 1930 <관세음>(木彫) (金容鎭 소장, 1940년 유작전 출품작)
2) 1935 <계룡산 소림원 미륵입상>(석고) (현존)
3) 1936 <김제 금산사 미륵전 본존상>(소조) (현존)
4) 1936 <불상습작> (제15회 조선미전 출품작, 소림원 불상과 동일작 추정)
5) 1936 <서울 영도사 석가모니불입상>(석고)
6) 1937 <불상> (조선미술원 낙성기념 소품전 출품작)
7) 1937 <관세음>(석고) (金炯元 소장. 1940년 유작전 출품작)
8) 1939 <예산 정혜사 관음전 관음보살좌상> (현존)
9) 1940 <청주 용화사 불상> (제작중 사망)
10) 1940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시멘트) (제작중 사망. 제자 등 타인이 1964년 완성)

근대 조소 예술의 선구자이면서 불상 예술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룬 김복진이었지만 오랫동안 망각되었다가 1995년에서야 뒤늦게 알려지게 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왔다.[7] 그러나 김복진의 예술작품은 실물로 현존하는 것이 많지 않아서 그의 예술세계를 살피기에는 한계가 있다.

실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각종 문헌과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김복진의 작품을 디지털 세계에서 복원한다면 아날로그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은 가능하다. 현존하는 실물 작품과 함께 이미 사라진 작품이라도 문헌 기록과 사진 자료를 연결하여 디지털 세계에 구현한다면 김복진의 작품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환경의 지리적 정보를 3D 지도상에 나타냄으로써 예술 활동과의 관련성을 탐구하고, 실물로 존재하는 작품은 VR 기술로 구현하여 시각적 효과를 높이고, 각각의 작품과 관련된 문헌, 이미지, 동영상 등 개별적인 지식 자원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디지털 환경에서 수행하는 자기 주도적 지식의 탐구와 표현이 디지털 큐레이션[8]이며 디지털 백과사전의 새로운 모습이다.[9]

디지털 큐레이션 방법

김복진의 불상 작품을 디지털 큐레이션하는 방법은 시각적 인문학[10] 방법인 사진과 가상 현실 기술(파빌리온, 컴플렉스), 그리고 네트워크 그래프를 활용하였다.

  1. 사진은 위치정보를 포함하여 제공한다.
  2. 파빌리온이란 디지털 세계에서 역사/문화의 현장을 체험하고 관련 지식의 문맥을 탐색할 수 있게 하는 가상 현실 콘텐츠이다.[11]
    1. 촬영한 VR 파노라마 이미지가 있을 경우(금산사, 법주사)는 해당 이미지를 파빌리온으로 구축하며, 이미지가 없을 경우(소림원, 정혜사)는 기존 웹서비스에서 제공하는 거리뷰 또는 2D 지도를 연결하였다.
  3. 컴플렉스란 여러 개의 파빌리온을 함께 열람할 수 있도록 편성한 저작물을 말한다.[12]
    1. 3D 지도 서비스인 Cesium 지도를 바탕으로 각각의 파빌리온을 연결하였다.
  4. 네트워크 그래프란 온톨로지 설계 방법[13]을 기반으로 지식 자원의 개체 간의 관계를 그래프로 구현하는 방법이다.[14]
    1. 위키 기반의 네트워크 그래프와 데이터베이스 기반의 그래프를 혼용하였다.[15]

사진 / 김복진의 불상


파빌리온 / 금산사, 소림원



컴플렉스 / 금산사, 법주사, 소림원, 정혜사


네트워크 그래프 / 위키 기반(금산사와 김복진)


네트워크 그래프 / 데이터베이스 기반(김복진의 불상)

김복진과 미륵불은 몇 가지 흥미로운 연관성이 발견된다. 진표, 김수곤, 김복진의 긴밀한 연관성이다.

김복진이 조성한 미륵 대불이 위치한 금산사와 법주사는 모두 통일신라 시대 승려인 진표[16]와 관련이 있으며, 정유재란 때 호국사찰로 활동하다가 왜군에게 전소된 후 재건된 경험을 공유한다. 또한 천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두 사찰의 미륵 대불 재건 과정에서 전통 장인이 아닌 신식조각가 김복진이 참여했다는 점과 대시주 김수곤이 경제적인 지원을 담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 윤범모, 「금산사 미륵전 불상과 김복진」, 『한국불교학 제88집』, 한국불교학회, 2018.11.30, 62쪽
  2. 김복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영희, 「1935년 금산사 미륵불 조성 입찰 - 사찰불사를 둘러싼 전통과 근대의 경합」,『동악미술사학 제24호』, 2018, 129~131쪽
    김영희는 불교계의 전통을 중시하는 인식에서 근대적인 다양성을 수용하는 태도로 전환하는데 김복진의 영향이 있었음을 지적하며, 김복진 이후로 불상·불화 제작에 전통 화승·조각승이 아닌 근대교육을 받은 화가·조각가의 참여가 많아졌다고 한다.
  4. 윤범모, 「금산사 미륵전 불상과 김복진」, 『한국불교학 제88집』, 한국불교학회, 2018.11.30, 59~60쪽
  5. 강순형, 「신식조각가 김복진의 불상작품 보기」, 『문화재 제30호』, 국립문화재연구소, 1997
  6. 윤범모, 「금산사 미륵전 불상과 김복진」, 『한국불교학 제88집』, 한국불교학회, 2018.11.30, 64~65쪽
  7. 강순형, 「신식조각가 김복진의 불상작품 보기」, 『문화재 제30호』, 국립문화재연구소, 1997, 105쪽.
    강순형은 김복진이 다시 관심을 얻게 된 계기가 윤범모의 글「반세기 동안의 망각, 김복진의 발자취를 찾아서」(1995)라고 밝히고 있다.
  8. 김현, 미술관 속 동물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정보학 수업자료, 2021
  9. 김현, 「유교문화 디지털 아카이브를 위한 디지털 큐레이션 모델 연구」, 세계유교문화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마스터플랜 연구, 2020. 3. 11쪽
    "시맨틱 웹 기술을 기반으로, 유관한 지식의 조각들이 다양한 방향으로 지식의 문맥을 형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디지털시대 백과사전의 새로운 모습이다."
  10. 김현 외, 『디지털 인문학 입문』제2편-Ⅲ. 시각적 인문학, 2017. 1쪽
    "시각적 인문학(Visual Humanities)이란 인문지식을 시각적인 형태로 전환하여 그 활용성을 높이려는 시도이다."
  11. 김현, 「파빌리온_제작_방법」,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정보학 수업자료, 2021
  12. 김현, 「컴플렉스_제작_방법_2021」,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정보학 수업자료, 2021
  13. 김현, 「유교문화 디지털 아카이브를 위한 디지털 큐레이션 모델 연구」, 세계유교문화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마스터플랜 연구, 2020. 3. 21쪽
    "대상 자원을 ‘클래스’(class)로 범주화하고, 각각의 클래스에 속하는 개체(individuals)들이 공통의 ‘속성’(attribute)을 갖도록 하고, 그 개체들이 다른 개체들과 맺는 ‘관계’(relation)를 명시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온톨로지 설계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14. 김현, 「네트워크_그래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정보학 수업자료, 2021
  15. 데이터베이스는 MS의 SSMS(SQL Server Management Studio)를 이용했다.
  16. 금산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되었으나 대사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신라 경덕왕 때 진표가 중창을 한 시기이며,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후로 진표가 중창하였다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산사, 법주사), 법주사에서는 진표의 제자인 영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