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신성동(新成洞)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新成洞有古人 (신성동유고인)     신성동엔 옛 사람의 풍습이 있으니, 
兩李門前一逕 (량리문전일경) 두 분 이씨 정려문이 한길로 연결되네.
竊想當時忠孝烈 (절상당시충효렬) 당시의 충성 효열 가만히 생각해 보니,
炳然星日海天 (병연성일해천) 동쪽 바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누나.


○ 이문위(李文偉)는 청해 이씨 청해백(靑海伯)의 후손이다. 강화부의 부윤 이중로(李重老)363)의 아들이다. 인조 갑자년(1624)에 이괄 (李适)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 그의 아버지 이중로는 방어사로서 강음(江陰)의 마탄(馬灘)에서 적과 대항하였는데 군대가 패하자 의리상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물로 뛰어들어 죽었다. 적장인 이수백(李守白)364)은 평소 이중로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는데 물속에서 그 시신 을 가져다가 목을 잘라다가 이괄에게 바쳐 공을 노렸다. 이괄이 패하자 이괄의 머리를 가져다가 관군에게 보내고 이괄의 난이 평정되 자 조정에서는 그를 사형시켰다. 이문위는 그 아우 이문웅(李文雄)과 반드시 보복하려는 마음먹었다. 마침내 이수백을 큰길가 사람이 많 은 곳에서 목을 쳐서 그 목을 가지고 대궐에 들어와 죄를 청하였는데, 상이 현명하게 여겨서 삼사에 특용하였고, 이름을 드러내어 충청 병마사까지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서 이문위의 어머니 정씨는 목릉(穆陵 : 선조)의 재상 정언신(鄭彦信)의 딸이었다. 이중로가 절개를 지키다가 죽음에 미치자 몸소 전장을 돌아다니며 시신을 수습하고 상을 치렀는데 탈상을 하지 않으니 친척들이 모두 예를 넘어서는 것을 의심하였다. 얼마 안 있어 두 아들이 이수백을 베니 정씨가 그것을 듣고 통곡하면서 “아이들이 능히 그 일을 해냈구나.”라고 하고는 수백의 머리를 가져다가 이중로의 영전에 고하고 제사상을 차렸다. 이때까지 모두 11년이 걸렸다. 사람들은 능히 놀라고 탄복하였다. 이문위가 죽자 그 제문을 하사하였는데 “일문의 충효는 고금에 보기 어렵구나. 주곤(州閫)을 지내면서 큰 실적이 있었구나.”라고 하였다.


○ 아들 이수(李脩)는 관직이 사평에 이르렀으며 이수의 아들은 이광도(李廣道)365)이다. 숙종 을유년(1705)에 진사가 되었고 문과에 급제하여 세 임금을 섬겼으며 사간으로서 종성부사에 제수받았고 임지에서 죽었다. 그 후손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


○ 연안 이씨는 연봉(蓮峯) 이기설(李基卨)366)의 아들인 충민공(忠敏公) 이돈서(李敦敍)367)이다. 그 일이 충렬사의 주(註)에 보인다. 그 후손 교리 이중련(李重蓮)368)의 고손은 이의록(李義祿)인데 여기서 살고 있다.


인물

  • 이중로(1577∼162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진지(鎭之).
  • 이수백(?∼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무신.
  • 이광도(1673년 출생) 자는 대중(大中), 본관은 청해(靑海).
  • 이기설(1556∼162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峯).
  • 이돈서(1599∼1637)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륜(子倫), 호는 만사(晚沙).
  • 이중련(1765년 출생) 본관은 연안(延安). 1790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 2위로 합격했다.

참고

  • 신성동(新成洞) : 하점면 신삼1리 신성동, 동촌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