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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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의 역사

홍차 어원은 19세기 중엽부터 홍차를 생산해 수출하려 했던 일본인이 자국내의 녹차를 일본차로 부르고 유럽인이 마시는 차를 차의 빛깔이 붉다고 하여 홍차라고 부르던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유럽식 홍차의 기원은 16세기 중엽 중국에서 시작된다. 우룽차(Oolong tea)는 홍차보다 덜 발효된 것으로 원래 중국에서 만들어져 유럽에서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강발효된 우룽차가 유럽인에게 환영을 받으면서 보다 강하게 발효된 차로 자리를 잡게 된다. 녹차와 우룽차의 차이를 설명하는 통역 과정을 거치면서 영어 'Black Tea'의 어원이 되었다는 것이 현재 가장 강력한 가설이 되고 있다.

중국의 음료인 차가 유럽으로 들어간 것은 1598년 네덜란드동인도회사에 의해서였다. 1662년 찰스 2세가 포르투갈에서 온 캐서린 왕비와 결혼하면서 영국에도 차 문화가 전해졌다. 차는 영국에서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18세기 초에는 영국이 차의 최대 소비국가가 되었다.

그 후 영국은 오랜 전쟁과 차의 가격폭락 등으로 인한 본토의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당시 식민지이던 미국에 대한 차의 무관세 독점판매권을 제정했다. 1773년 식민지 자치정부의 지나친 조세간섭에 대해 불만을 품은 과격파들이 차 상자를 바다에 버린 이른바 '보스턴차사건'은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영국의 왕 조지 3세는 막대한 차를 수입하는 데 드는 비용을 중국에 아편을 판매해 번 돈으로 충당했다. 점점 더 많은 양의 아편을 판매해서 영국은 큰 이익을 보게 되지만, 아편전쟁(1840∼1842)이 발발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차의 유통은 클리퍼선에 이어 기선의 출현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유럽 사람들은 차란 중국 이외의 토지에서는 절대로 생육되지 않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이유는 중국이 차의 수출이란 유리한 대산업(大産業)을 타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차의 종자, 묘목의 수출을 엄중한 통제 속에서 금하고, 재배기술이나 제차법에 대하여도 극단의 비밀주의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무역으로 많은 이윤을 얻는 것에 만족하다가 1823년 영국의 탐험가 로버트 브루스 소령이 아삼 지방에서 원주민이 마시는 차를 보면서 아삼종 차나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인도 정부나 동인도회사는 당시 이 신종 차나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아삼의 신품은 홍차산업의 혁명을 초래했다. 신품종의 차는 찻잎의 크기가 중국종의 3배쯤 되고, 열대기후에 잘 견딜 뿐만 아니라 홍차로 가공하면 종래의 중국차에서 볼 수 없는 뛰어난 맛을 내는 우수한 것이었다.


홍차의 재배지

1848년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포춘은 중국 상인 또는 몽골 고관의 모습으로 변장해 중국을 정탐한 결과 차의 제조 비밀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포춘이 훔친 기문종 차의 종자와 묘목은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북부, 중국 등과의 국경지대에 인접한 다르질링 지역에서 재배되는 데 성공하며, 다르질링 홍차가 탄생하게 됐다.

현재 스리랑카는 세계적 홍차 산지이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섬 최대의 산업은 커피였다. 1841년 도시 캔디 근교에 아삼종 차나무가 재배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재배는 보다 나중의 일이었다. 1869년 스리랑카(실론)에 돌연 발생한 병해로 커피밭이 전멸하고, 신규 식림도 심각하게 오염되어 국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때 커피를 대신할 작물로서 등장한 것이 아삼종의 홍차였다.

세계 3대 홍차로 다르질링, 우바, 기문을 꼽는데, 그것은 이 당시의 홍차 생산과 관련이 있다. 런던의 옥션에서 호평을 받았던 홍차는 아무래도 대량생산이 시작되고 가격이 떨어진 아삼 홍차가 아니라 이 3가지 홍차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홍차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는 인도, 스리랑카, 케냐, 중국 순이며, 녹차를 포함한 차 전체를 보면 중국이 인도 다음이다. 그밖에 홍차를 생산하는 국가는 생산량 순서로 인도네시아, 터키, 러시아, 이란, 파키스탄, 말라위, 베트남, 아르헨티나, 방글라데시, 탄자니아, 르완다, 짐바브웨,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며, 그밖에 이들 나라의 인근 국가들에서도 재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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