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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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가을 답사


최응현(崔應賢)
대표명칭 최응현
한자표기 崔應賢
출생일 1428년 4월 3일
사망일 1507년
본관 강릉(江陵)
수헌(睡軒)
보신(寶臣)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저서 상례고정편(喪禮考正篇)
대표직함 참판
최치운(崔致雲)
강릉함씨 현령(縣令) 함화(咸華)의 딸


최응현(崔應賢, 1428년 4월 3일 ~ 1507년)은 강릉 십이향현 중 일인인 조선의 문신이다.

생애

최응현은 필달의 18세손으로 자는 보신(寶臣), 호는 수헌(睡軒)이다. 부친은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고, 모친은 강릉함씨로 현령을 지낸 함화(咸華)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기고 유희를 하지 않아 다른 어린이들과는 크게 달랐다. 나이 13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예를 극진히 하며 삼년상을 마치니 마을 사람들이 효성을 칭찬하였다.

1448년(세종 3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4년(단종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보직이 되었는데,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강릉훈도를 자원하여갔다. 그 뒤 저작·박사·전적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1462년(세조 8)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가 되어 1년 만에 양친(養親)하기 위하여 사퇴하였다.

그 뒤 고성·영월 두 고을의 군수를 역임할 때 선치하였으며, 만기가 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성균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1483년(성종 14) 대신의 천거로 집의가 되고 이어 예빈시(禮賓寺)·봉상시(奉常寺)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이어 송도에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옥사가 있었는데 그가 파견되어 명석하게 해결하여 상으로 안마(鞍馬)를 받았다. 1487년 호남의 수적(水賊) 10여인을 잡은 공으로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를 지내고 충청도감찰사에 임명되었다.

1489년 대사헌, 1491년 경주부윤, 1494년 한성부좌윤을 거쳐 1497년(연산군 3)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임금의 뜻을 거스른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500년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고, 1505년에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늙었다는 이유로 사임하자 형조참판으로 임명되었으며,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하다.

최응현은 지금의 삼척시 신기면 도경리 남쪽 오십천 강 속에 정자를 지어 놓고 산수의 경관을 관상하곤 하였는데, 그 정자가 바로 척주팔경(陟州八景)의 하나인 회강정(廻江亭)이다. 이 정자가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바위에 새겨진 ‘회강정’의 자각(字刻)만이 남아 있다.

최응현은 최치운과는 달리 영남지방의 사림들과도 교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응현이 학문적으로 가르침을 준 강릉지역 유림의 결사체인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 가운데 최여림(崔汝霖)이 김종직의 문하로서 김굉필·정여창 등과의 교유한 것이라든지, 최응현이 김종직과 그의 문인 이목과 시를 주고받은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응현은 성리학에 정통하였고, 예학에 깊어 『상례고정편(喪禮考正篇)』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최응현과 오죽헌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은 최응현의 부친인 최치운이 창건한 집이었다. 그 후 이 집은 최응현에게 상속되었다가 그의 둘째 딸이 이사온[1]과 혼인하자 딸에게 상속되었다. 이사온과 최응현의 둘째 딸 사이에는 율곡의 외할머니인 이씨가 무남 독녀로 태어났다. 이씨가 그의 부모로부터 오죽헌을 상속받아 친정에 살았으므로 사임당 또한 그곳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조선 초기 재산상속의 관행에 따라 오죽헌은 최응현의 둘째 딸 최씨(이사온의 처)에게 상속되었고, 그 후 이사온의 딸 이씨(신명화의 처)에게 상속되었다가 권처균에게 상속되었다. 권처균은 뒤뜰에 줄기가 손가락만하고 색이 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후에 집 이름이 되었다.

일화

최응현의 활동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고 강직한 성향을 잘 보여주는 것은 그가 사헌부의 장관인 대사헌이 되었을 때였다. 정현왕후(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의 생모)의 족친인 윤탕로(尹湯老)가 성종의 국상 기간인 졸곡(卒哭. 삼우가 지난 뒤에 지내는 제사) 전에 기생과 동거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대간과 홍문관은 이를 집요하게 탄핵하다가 구금되었다. 이때 최응현은 ‘여타 조정의 관리라 할지라도 졸곡을 마치기 전에 기생과 간음하면 죄를 용서할 수 없는데, 윤탕로가 왕비의 지친으로서 슬픔을 잊고 창기의 집에 묵었으니 대간이 논쟁을 고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3개월 이상 대간과 홍문관에 의해 제기된 논박은 윤탕로가 파직된 뒤에도 계속되어 직첩을 환수당하고 경기에 부처(付處)된 뒤에야 일단락되었다. 이에 대해 이목(李穆)은 공의 충직을 가리켜 “권신의 면전에서 정치의 옳고 그름을 간할 때는 서릿발이 해를 뚫을 듯 엄격하여 아무도 그를 얕보지 못했고, 비록 왕의 노여움을 살 줄 알면서도 화복(禍福)을 가려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사후 추모사업

중종 2년(1507) 정월 5일에 향년 80세로 졸(卒)하니, 그해 4월에 강릉 조산(助山) 갑향(甲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인조 23년(1645) 8월에 최치운·박공달·박수량·최수성·최운우와 함께 강릉 향현사에 배향되었다.

최응현의 묘소에 비가 있었으나 오래되어 마모되자 후손들이 최응현의 행적을 명확히 알 수 없을 것을 염려하여 숙종 4년(1678)에 후손들이 묘소 입구에 신도비를 세웠다. 비문은 최응현의 외현손인 율곡 이이가 지었다. 신도비는 현재 강릉 대전동 즈므마을 입구에 있는 삼현비각 안에 아버지 최치운, 손자 최수성의 신도비와 함께 관리되고 있다.

참고

도서

  • 박도식, 『강릉의 12향현 자료집』, 강릉문화원, 2004.

웹사이트


  1. 이사온의 본관은 용인(龍仁)이고 생원(生員) 출신으로 벼슬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