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차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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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시대에는 불교가 억눌리고 생활이 검소해짐에 따라 다도가 쇠퇴했지만 역시 승려들 사이에서 명맥이 이어져 왔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차와 선(禪)을 하나로 생각한 대흥사 초의선사에 의해 다도는 크게 부흥했으며, 그와 교분을 가졌던 정약용이나 김정희 등 선비들도 차에 심취했었다.

조선시대의 차 문화

조선의 차문화를 말할 때 초의 선사(艸衣禪師ㆍ1786~1866)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초의 선사는『동다송(東茶頌)』이란 책을 지어 고래(古來)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차문화(茶文化)를 살리면서 그 정신을 중정청경(中正淸境)으로 정립, 중국이나 일본다도와 확연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 한국 차문화를 중흥시킨 초의 선사가 오랫동안 주석하면서 다선불이(茶禪不二) 정신을 이끌어 냈던 한국다선의 조정(祖庭)인 해남 대흥사의 다풍(茶風)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다선을 지켜온 조정, 대흥사 선다일미 원류

13대 종사(宗師)와 13대 강사(講師)를 배출해 낸 대흥사는 서산문도(西山門徒) 중 가장 번창한 소요태능계(逍遙太能系)와 편양언기계(鞭羊彦機系)가 함께 살면서 서산문풍을 드높였던 곳이다.

청허휴정(淸虛休靜ㆍ1520~1604)의 법맥을 잇는 제자만도 천여 명에 이르고 있으니 한국불교계 모든 승도(僧徒)가 청허법손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청허의 적손은 사명유정(四冥惟政) - 편양언기(鞭羊彦機) - 소요태능(逍遙太能) - 정관일선(靜觀一禪)으로 이어졌다. 대흥사는 편양언기(鞭羊彦機ㆍ1581~1644)에서 연담유일(連潭有一)을 거쳐 한국 차문화의 중흥조인 초의의순(草衣意恂)과 아암혜장(兒菴惠藏), 범해각안(梵海覺岸) 등 유난히도 많은 다승을 배출했다.

한국다선의 원류는 임제의현(臨濟義玄) 문하에서 양기방회(楊岐方會)가 나와 임제의현(臨濟義玄) - 황룡혜남(黃龍慧南) - 양기(楊岐) - 백운수단(百雲守端) - 원오극근(圓悟克勤) - 호구소륭(虎丘紹隆)을 거쳐 석옥청공(石屋淸珙) - 태고보우(太古普愚)로 이어져 왔고, 그 뒤 서산문도로 이어져 편양언기(鞭羊彦機) - 풍담의심(楓潭義諶) - 월담설재(月潭雪齋) - 환성지안(喚醒志安) - 호암체정(虎巖體淨) - 연담유일(蓮潭有一)을 거쳐 완호윤우(玩虎尹佑) - 초의의순(草衣意恂)으로 대흥사의 다풍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원오극근 선사가 일본인 제자에게 네 글자로 써 준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진결(眞訣)이 일본 나라의 대덕사에 보존되면서 일본 다도의 전유물처럼 되어왔다. 그러나 양기방회(992~1049), 원오극근으로 이어지는 다선의 정통맥은 한국으로 이어졌다. 원오극근에서 호구소륭(1077~1136)으로 이어지는 다선의 정통맥을 청허 선사가 이어와 초의의순에 의해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한국다선의 조정 대흥사가 차지하는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기 때문이었다.


추사ㆍ초의ㆍ다산 통한 차문화 부활

초의가 살았던 19세기는 혼란기였다. 조선의 음차(飮茶) 풍습 또한 자연 쇠퇴했으나 서산문도를 중심으로 차문화는 꺼지지 않았다. 그 시기 다신으로 불리는 초의 스님과 당대 금석학의 최고봉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ㆍ1786~1856),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ㆍ1762~1836)이 만나면서 조선시대 차문화의 틀이 형성되어 갔다.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은 만덕산 백련사(白蓮寺) 혜장(惠藏) 스님을 만나면서 차에 눈을 뜬다. 혜장은 다산에게 『주역(周易)』의 원리를 배웠고, 다산은 혜장에게서 다도(茶道)를 터득한다. 그 무렵 다산은 혜장 스님으로부터 대흥사에 기거하던 초의 스님을 소개받는다.

「초의대종사탑비(艸衣大宗師塔碑)」에는 이렇게 전한다. 다산승지(茶山承旨)로부터 유서(儒書)를 받고 시도(詩道)를 배워 교리에 정통하였고 크게 선경을 얻어 마침내 운유의 멋을 지었다.

초의는 다산의 아들 유산의 소개로 추사를 만난다. 초의는 제주도에 귀양 간 추사에게 해마다 차를 선물했는데 추사는 그 답례로 명선(茗禪)이라는 휘호를 선물한다. 원오극근이 쓴 茶禪一味에 견주어 추사는 茗禪을 쓴 것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이 조선에 널리 퍼졌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초의와 교류했던 다산 정약용은 음차흥음주망(飮茶興飮酒亡)이라 했다. 차를 마시면 흥하고 술을 마시면 망한다는 이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 다도문화를 정립한 초의의 다풍은 일본 다도문화를 앞지르고 있다. 일본다도를 완성한 센노리큐(千利休)는 다도정신을 화경청적(和敬淸寂)으로 정립했는데 초의 선사는 중정청경(中正淸境)으로 정리하여 중국이나 일본다도와는 다른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초의 선사의 다도관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이가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사위인 홍현주(洪顯周ㆍ1793~1865)이다. 초의가 홍현주의 부탁을 받고 지은 것이 『동다행(東茶行)』이다. 그러나 오늘날 『동다행』은 전해 오지 않고 필사본인 『동다송(東茶頌)』만 전해 올 뿐이다. 또 초의 선사에게 영향을 받은 차인으로는 자하신위(紫霞申緯ㆍ1769~1847)가 있다. 신위는 초의 선사의 부탁으로 선사의 스승인 완호윤우(玩虎尹佑ㆍ1758~1826)의 탑명과 서문을 써 준 인연으로 초의와 가까웠다. 『신위록』에는 초의 선사가 손수 만든 차를 받아 달여 마시면서 시흥(始興)의 자하 산 속 서재를 지키는 자하에게 그의 시를 받으러 오는 제자나 시화(詩畵)를 나누려고 찾아오는 선배들은 끊이지 않았다. 는 구절이 있다.

그처럼 초의 선사가 이룩한 차문화 공간에서 초의가 추사와 다산을 만났고, 남종화(南宗畵)를 개척한 소치는 초의를 만나면서 새로운 그림세계를 개척한다. 또한 정조대왕의 사위인 홍현주는 초의가 새로운 차의 세계를 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세기 초의가 차문화를 중흥시키지 못했다면 오늘날 우리 차문화는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대흥사는 초의의 다풍을 이어 범해각안(梵海覺岸)과 금명보정(錦溟寶鼎) 선사가 배출했다. 그 중 범해각안 선사는 초의의 다도를 계승했다. 범해는 초의가 돌아간 지 12년이 되던 해 「초의차(艸衣茶)」란 시를 지었다.


곡우절 맑은 날

黃芽葉未開 노란 싹잎은 아직 피지 않았네

空精炒出 솥에서 데쳐 내어

密室好乾來 밀실에서 말린다

栢斗方圓印 모나거나 둥근차 찍어내고

竹皮苞裏裁 죽순 껍질로 포장하여

嚴藏防外氣 바깥바람 들지 않게 간수하니

一椀滿香回 찻잔에 향기 가득하네.


그는 대흥사의 13대 강사의 한 분으로 추앙될 만큼 학문적 명성을 드날리기도 했다. 또 초의 선사의 다풍을 이어간 선사로 다송자 금명보정(錦溟寶鼎) 선사를 들 수 있다. 그는 다송자(茶松子)로 알려졌는데 차시 80여 수를 남겼고 초의 선사가 쓴 『동다송』을 필사해 냈다. 금명 스님은 범해 스님으로부터 감화받아 초의 선사 다풍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가 편찬한 『백열록(栢悅錄)』에 초의 선사의 『동다송』과 범해(梵海)의 『다약설(茶藥說)』을 직접 수사(手寫)하여 넣었던 것이다. 그의 전차(煎茶)라는 차시를 보자.


차를 달이다[煎茶]

有僧來叩趙州 스님네가 찾아와서 조주문을 두드리면

自愧茶名就後庭 다송자 이름값에 후원으로 나간다

曾觀海外草翁頌 해남의 초의 선사 『동다송』을 진작 읽고

更考唐中陸子經 당나라 육우의 『다경』도 살피었네

養精宜點驚雷笑 정신을 깨우려면 경뢰소驚雷笑가 알맞겠고

待客須傾紫茸馨 손님을 맞을 때는 자용형姿茸馨이 제격이니

土銅甁松雨寂 질화로 동병 속에 솔바람 멎고 나면

一鍾舌勝醍靈 한 잔의 작설차는 제호보다 신령하다.


이렇듯 대흥사의 다풍은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교의 차 역사와 전개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승려의 생활),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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