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평화공원
목차
제주 4.3 평화공원[1]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제주 4.3 평화공원은 4.3 사건 당시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공원 안에는 제주 4.3 평화기념관, 위령제단, 위령탑, 봉안관 등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위령제단은 연중 4.3 희생자에 대해 참배를 진행하는 곳이며, 그들을 모시고 있는 위패봉안실이 따로 마련되어있다. 봉안관은 4.3 유해발굴사업시기에 발굴된 396기의 유해 봉안이 있는데 각 비원에는 희생자의 성명과 성별, 당시 연령 등을 기록해 두었다.
제주 4.3 평화기념관
4.3 평화기념관에는 총 6개의 특별 전시관이 있다. 제1관에서는 주민들의 피신처로 활용되었다는 천연동굴을 주제로 한 역사관이 있으며, 제2관에서는 해방과 좌절이라는 주제로 해방 후 3.1절 기념행사에서 사망한 6명의 민간인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제3관에서는 무장봉기와 분단 거부라는 주제로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무장봉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제4관에서는 학살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5관과 6관에서는 진상 규명 운동으로 상처를 극복해내는 과정과 관람 후의 소감문이 걸려 있다.
제주도 4.3 사건[2]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1947년 3월 1일,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고, 제주읍에서는 북국민학교의 3·1절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다. 이때 기마경찰이 다친 아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되었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그때까지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사회가 들끓기 시작했다. 제주4·3의 도화선이라 불리는 ‘3·1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한 3•1사건에 항의하여 1947년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제주도민의 민•관 총파업에 미국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했다. 본토에서 응원경찰이 대거 파견됐고,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반도는 분단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반된 민심과 5•10단독선거 반대투쟁을 결합하여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무장대는 5•10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보내고 5•10 총선거(200개 선거구)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이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해하는 불순세력의 음모로 판단했다. 미군정은 미군 대령을 제주도 총사령관으로 파견해 무리한 검거작전을 감행하며 6•23 재선거를 시도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하자 충격을 받았다. 결국 제주도에 대한 강경 토벌작전이 실시되어 도민들이 집단 희생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된 뒤 정부는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증파하여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치고, 대대적인 강경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게 된다.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대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됐다. 이때부터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생하기 시작했다.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중산간 지대뿐만 아니라 소개령에 의해 해안마을로 내려간 주민들까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폭도라 지목당하는 것만으로도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1949년 5월 10일에야 재선거가 치러졌고, 그해 6월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기나긴 수난의 세월을 보낸 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 5,000~3만 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가운데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세계적인 냉전 상황과 한반도 분단체제의 고착화 과정에서 발발•전개된 제주4•3사건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집단 희생으로 귀결되었고, 이후 반세기를 넘어 진상규명운동의 과정을 거쳐 명예회복을 통한 화해와 상생의 해결 과정을 밟고 있다.
사진
관련 사이트
참고 자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특별법’의 목적에 따라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어 작성되었으며,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후세 사기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이 보고서가 ‘4·3특별법’이 제시하고 있는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가는 소중한 자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서문>
제주4·3바로알기
이 책자의 자료는 정부에서 발행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의 내용과 이 보고서 발행 이후 보완된 자료들을 간추려 정리했습니다. 자료의 갈증을 해소하고 믿을 수 있는 4·3자료로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출처
- ↑ 출처 : https://www.visitjeju.net/kr/detail/view?contentsid=CONT_000000000500535#tdetailInfo
- ↑ 출처: https://jeju43peace.or.kr/kor/sub01_01_01.do
기여
역할 | 이름 | 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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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슐레누르달클르츠 임혜혜 | 한국문화학 |
편집 | 최여명 | 한국문화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