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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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인

[柳夢寅 ]






이명 자 : 응문(應文) 호 : 어우당(於于堂), 간재(災齋), 묵호자(默好子) 시호 : 의정(義貞)


출생 - 사망 1559년(명종 14) ~ 1623년(인조 1)


출생지 서울 명례방(明禮坊)


본관 고흥(高興)


직업 설화문학가


가족관계 할아버지 : 유충관(柳忠寬) 아버지 : 유당

조선중기 때의 설화문학가 서울 명례방(明禮坊) 출생.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 · 간재(艮齋) · 묵호자(默好子). 사간 충관(忠寬)의 손자, 진사 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혼(成渾)과 신호(申濩)에게서 수학하였으나 경박하다는 책망을 받고 쫓겨났기에 성혼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1592년 수찬으로 명나라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오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였다. 왜란중 그는 문안사(問安使) 등 대명외교를 맡았으며 세자의 분조(分朝)에 따라가 활약하였다. 그 뒤 병조참의 · 황해감사 · 도승지 등을 지내고 1609년(광해군 1) 성절사 겸 사은사로 세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그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는데 왕은 그를 불러 남원부사로 삼았다. 그 뒤 한성부좌윤 · 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 등에 은거하며 성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리하여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하였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방랑생활을 하였다. 그해 7월 현령 유응경이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음모를 꾸민다."고 무고하여 국문을 받았다. 마침내 역률(逆律)로 다스려 아들 약과 함께 사형되었다. 서인들은 중북파(中北派)라 불렀으며 끝내 그를 반대세력으로 몰아 죽인 것이다. 그는 이때 관작의 추탈은 물론 임진왜란의 공으로 봉하여진 영양군의 봉호도 삭탈되었다. 정조 때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서(篆書) · 예서 · 해서 · 초서에 모두 뛰어났다. 그의 청명(淸名)을 기려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文淸)이라는 사시(私諡)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 봉향하였는데, 신원된 뒤에 나라에서도 다시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운곡사를 공인하였다. 고산(高山)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이 있다.

어우야담(於于野譚)

야담집(野談集). 본디 한문본으로 5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권1은 인륜편, 권2는 종교편, 권3은 학예(學藝), 권4는 사회편(社會篇), 권5는 만물편(萬物篇)으로 되었는데, 후인의 손으로 번역되어 사본으로 널리 전해졌다. 야사(野史) · 항담(巷談) · 가설(街說) 등이 수록되었는데 흔한 음담패설이 아닌 풍자적(諷刺的)인 설화와 기지(機智)에 찬 것들이다. 그 중 〈홍도(紅桃)〉라는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원에 살고 있던 정생(鄭生)은 같은 시골처녀 홍도(紅桃)와 약혼했으나 홍도의 아버지는 정생이 무식하다고 거절했다. 이에 홍도는 부모를 설득, 정생과 결혼하여 그 다음 해 아들 몽석을 낳았다. 선조 임진년에 왜란을 맞아 종군한 정생이 남원을 지킬 때 홍도는 남장하여 남편을 따랐고, 몽석은 조부를 따라 지리산으로 피난했다. 정생과 홍도는 끝내 함께 있지 못하고 흩어졌다가 요행히 중국에서 만나 절강(浙江)에 살면서 아들 몽진을 발아 중국여자에게 장가들였다. 그후 또 난리를 만나 다시 남원으로 돌아와 드디어 한집안이 모두 모여 단란하게 살았다.

출처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1998., 한국사전연구사한국사전연구사 로고, 제공처의 다른 책보기표제어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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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유몽인 [柳夢寅]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