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5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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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

용인 지역에서 언제부터 오일장이 열리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산림경제(山林經濟)』, 또는 각종 ‘읍지’류 등을 통해 조선시대 중기 이후 장시(場市)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후대로 내려올수록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오일장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수가 증가하여, 17세기 후반에는 오일 간격으로 열리면서 전국적으로 일반화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17세기 후반부터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정비되는데, 용인은 남교(南郊)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영남대로’와 ‘삼남대로’가 통하는 곳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거지로 인식할 정도였다.

특히 용인은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했던 ‘9대로’ 중 제4대로에 해당하는 ‘동래로’의 관문에 해당한다.

동래로의 중요 경유지인 낙생(樂生), 용인 현내(縣內), 김량(金良), 배관(排觀). 석원(石院) 등지에 장시가 열렸는데,

이들 지역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서울과 수원, 안성 등과 연결되면서 지역의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이들 장시 가운데 현내장, 김량장, 배관장[배감장, 백암장] 등이 모두 현재 용인시 행정 구역 안에 위치한 장시였다.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 19세기 중반에 간행된 『임원경제지』, 『대동여지통고』, 『용인현읍지(龍仁縣邑誌)』,

양지·죽산의 ‘읍지’ 등을 보면, 당시 용인에는 용인현 소재지의 현내장과 김량장, 남사 지역의 도촌장,

그리고 양지 방면의 개천장[개나리장]과 배감장[백암장] 등이 있었다.

이후 개천장은 폐지되었으나 나머지는 그대로 계속되어 오다가 도촌장이 사라지고, 현대에 들어와 송전과 원삼, 모현 지역에 새로운 모습의 재래시장이 서기도 하였다.

현황

  •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성남 모란시장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큰 장으로 꼽혔다. 그후 대형마트 등이 들어서며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만물상이라 일컬어지는 장인만큼 여전히 규모가 큰 편이다.


  • 주민들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장날은 매달 5·10·15·20·25·30일로, 용인 중앙시장 부근 금학천변에 장이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