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수덕사(禮山修德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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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는 호서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덕숭산(德崇山)의 아름다운 경관 속에 자리한 유서 깊은 절이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은 북(北)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西)로는 오서산, 동남(東南)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싼 중심부에 서 있다.

수덕사는 백제시대 지명법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다. 중국의 사서(史書)인 '북사(北史)', '수서(隨書)', '주서(周書)'에 “백제에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등 12개가 있지만 그 중에서 현재까지 그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오로지 수덕사뿐이다.

수덕사 이야기

창건설화1

홍주마을에 사는 ‘수덕도령’은 사냥에 나갔다가, 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그 낭자를 수소문했고, 그 낭자가 건너 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덕도령은 덕숭낭자에게 여러 번 청혼했으나 전부 거절당했다. 수덕도령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구애했고,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신의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수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탐욕스러운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한 순간 불이 나서 절이 모두 불타버렸다.

다시 목욕재계 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 생각에 또 다시 불이 나서 절을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만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 절이 완성되자 덕숭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은 했지만, 수덕도령이 자신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허나,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았고, 그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가 사라져버렸고, 도령의 손에는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했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났다. 오늘날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이후 이 절은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고 불리었고, 그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창건설화2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하여 중창불사를 해야 했으나, 당시 스님들은 불사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때 빼어난 미모를 가진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나섰다.

이 여인의 빼어난 미모는 ‘수덕각시’란 이름으로 주변에 소문이 났고, 이 여인을 보기 위해 몰린 사람들로 수덕사는 연일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 중 신라의 대부호이자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는 수덕각시에게 반해 청혼하기에 이르렀다. 여인은 불사가 원만성취되기만 한다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했고,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 만에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공덕주로서 참석한 청년은 여인에게 함께 떠날 것을 독촉했고, 이에 여인은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다’고 한 뒤, 사라지려고 했다.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 하자,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그 틈으로 여인은 사라져버리고, 버선 한 짝만 남았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을 수덕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광경을 본 정혜라는 청년은 삶의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수덕사의 볼거리 및 중요 보물

수덕사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대웅전(大雄殿)은 국내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가운데 봉정사 극락전(鳳停寺極樂殿, 국보 15)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국보 18)에 이어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양 옆에는 승려들의 수도장인 백련당(白蓮堂)과 청련당(靑蓮堂)이 있고, 앞에는 조인정사(祖印精舍)와 3층석탑(충남유형문화재 103)이 있다. 그리고 1,020계단을 따라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만공탑·금선대(金仙臺)·진영각(眞影閣) 등이 있고, 그 위에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운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부속 암자로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했던 환희대(歡喜臺)가 있으며, 선수암(善修庵)·극락암 등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특히 견성암에는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설립되어 있다. 그밖에 주요 문화재로는 수덕사노사나불괘불탱(보물 1263),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1381), 수덕사칠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181), 수덕사유물(거문고, 충남문화재자료 192), 수덕사 소장 소조불상좌상(충남문화재자료 384) 등이 있다.


대웅전(국보 제49호)

‘수덕사에 가는 것은 대웅전 때문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덕사에서 대웅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수덕사의 건축 연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지금의 대웅전은 1936년에서 1940년에 걸친 중수 때, 대들보에서 나온 묵서에 의해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되어졌음이 밝혀져 고려 시대의 연대가 확실한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정면에서 대웅전을 살펴보면, 맞배지붕의 지붕양식은 안정된 형태의 전통건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기둥은 아래서부터 점점 굵어지다가 사람의 키 정도 높이에서부터 다시 가늘어지는 배흘림기둥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건물의 기둥과 지붕을 연결하는 공포의 구조가 주심포를 취하고 있다는 것도 건물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대웅전은 측면 역시 정면 못지않다. 기둥이 놓여있고, 그 위에 대들보와 종보가 차례로 놓여 있는 구조는 정면과 또 다른 고대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대웅전 건축 양식은 고려시대 목조건물의 일반적인 경향을 띠고 있데, 특히 정교하게 다음어진 부재들과 치밀한 결구법, 섬세한 장식 등으로 매우 치밀한 공예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삼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03호)

3층석탑은 건축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83년 9월 29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3층석탑의 기단은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위층 기단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의 2층 탑신과 초층 옥개석이 약간 파손되었으나, 다른 부재는 완전하다. 탑신은 각 층마다 우주가 있고, 옥개석은 각 층이 4단의 받침을 가지고 있다. 또 상면에는 1단의 괴임으로 그 위의 탑신을 받고 있으며 옥개석은 반적이 있는데 3층 옥개석과 노반이 1석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보륜과 보개를 가지고 있다.


사진 및 도면

사진


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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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문화재청 예산 수덕사 대웅전
  2. 문화재청 수덕사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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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연주 철학
편집 서소리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