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과 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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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가상현실

답사하지 않았음.


개괄

명칭 | 영녕릉(英寧陵)은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95호 (1970년 5월 26일 지정)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중부대로2629번길 85 (왕대리)


좌표 | 북위 37° 18′ 26.21″ 동경 127° 36′ 10.80″


경치 | 두 개의 왕릉은 700m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이를 잇는 오솔길은 짧지만 조붓한 흙길이라 정감이 있고, 숲이 아늑하고 한산해 걷기 좋다. 5월 중순부터 10월초까지만 산책로로 개방한다. 약간의 오르막과 약간의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이라 가볍게 걸을 만하고, 이리 휘고 저리 돌며 길이 이어져 있다.


제작시기 | 조선


영녕릉 사진이 많은 블로그 | [1]




영릉

한 마디로 하면[1]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에 있는, 조선 세종[2]과 그 비 소헌 왕후의 능. 당시의 경기도 광주,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던 것을 예종 1년(1469)에 이곳으로 옮겼다.


좀 길게 얘기하자면[3]

- 유형 : 유적
- 시대 : 조선
- 성격 : 능
- 건립시기·연도 : 1446년(세종 28), 1469년(예종 1) 이건
-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왕대리)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195호
- 문화재 지정일 :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5호. 당초 영릉은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죽자 광주(廣州) 서강(西岡)에 쌍실의 능을 만들고 그 우실(右室)은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이 죽자 합장하였다. 이 능제(陵制)는 『국조오례의』치장조(治葬條)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묘제의 기본이 되었다.

능의 석물은 병석(屛石) 가운데 영저(靈杵: 공이)·영탁(靈鐸: 방울)·지초문양(芝草文樣)을 빼고 운채(雲彩)와 십이지신상만을 새겨 조선병석문(朝鮮屛石文)을 확정하였으며, 혼유석(魂遊石)의 고석(鼓石)은 5개에서 4개로 줄였고, 기타 양식상 바꾸어 고친 것이 약간 있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徐居正)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다시 옮기자는 의논에 따라 여주로 옮겼다.

능제는 세조가 죽은 뒤부터 크게 바뀌어 병석과 석실제를 폐지하고 회격(灰隔)으로 하여 합장하고 능 앞에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임을 표시하였을 뿐 단릉과 마찬가지로 하였다.

여주로 영릉을 옮길 때 천장도감(遷葬都監)에서 석물을 함께 옮기자고 하였으나 왕명에 의하여 그 자리에 묻었다. 1973년에 석물들을 발굴하여 청량리 영휘원(永徽園) 북쪽에 세운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다. 혼유석, 장명등(長明燈), 2기(基)의 무관석과 문관석, 4기의 석수, 7기의 망주석과 구 영릉터에 세웠던 세종대왕신도비가 그것이다.


눈 씻고 뜯어보자면

아무리 풍부한 사진 자료[4]라고 한들, 우리의 성에 차겠는가?
눈 부릅뜨고 직접 관찰하자!
답사를 하는 목적이 여기에 있으니까. ^^


  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2.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세종'
  3.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여주영릉'
  4. 『두산백과』: '영릉'



녕릉

인물 | 조선 제17대 효종(孝宗,1619~59) &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1618~74)


조선 제17대 효종(孝宗,1619~59) |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병자호란으로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온갖 고초를 겪었다. 1645년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에 귀국하여 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왕에 즉위했다. 효종은 대동법을 실시해 백성의 조세부담을 덜어주었고,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효종은 무엇보다 북벌정책을 수립하고 군비 개편은 물론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그러나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659년 41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1618~74) | 인선왕후는 봉림대군을 따라 8년간 심양에 머물며 현종을 낳고, 1645년 귀국해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따. 원래 효종의 능은 건원릉 서쪽 산줄기(원릉 자리)에 병풍석을 갖춘 왕릉으로 조성되었다. 1673년 현종 때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하여 여주의 영릉(英陵)곁으로 옮겼다. 그 다음해에 인선왕후의 능이 동원(同原)에 택정되어 왕릉 아페 왕비릉을 써서 앞뒤로 나란히 쌍릉을 이루었다.


무덤 형식 및 배치 |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이다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정자각 뒤 봉분은 오른쪽이 왕비릉이고 왼쪽이 효종릉이다. 왕비릉엔 둘러쳐진 곡장이 없고 왕릉에는 곡장이 있다. 영릉은 다만 쌍릉이면서 앞뒤로 엇비슷하게 위치를 잡고 있어 지형과 상관 없이 애당초 ‘나란히’ 놓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의 석물들은 똑같이 갖춰져 있는데, 배치와 양식은 조선전기 '국조오례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위치 | 구리(九里) 건원릉(建元陵) 부근에서 1673년(현종 14년)에 현 곳으로 이장하였다.


재실 | 조선왕릉 재실 중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겨져 있어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어있다.또한 재실 안에 심어진 수령 300년의 회양목은 키가 크고 나무의 모양이 양호한 노거수로 평가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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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ources - 위키백과[2] - 국가 문화 유산 포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