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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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두산백과 '세조'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로 출생

1417년 세종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휘(諱)는 유(瑈), 자는 수지(粹之), 시호는 혜장(惠莊)이다. 윤번(尹璠)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왕위에 등극하여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되었다. 형인 문종에 비해 학문보다 무예(武藝)에 능하고 병서(兵書)에 밝았으며, 진평대군(晉平大君)·함평대군(咸平大君)·진양대군(晉陽大君)이라 칭하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에 봉해졌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홍위(단종)가 즉위하자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한 야망을 가지게 되었다.

왕위찬탈

수양대군은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 등 30여 인의 무인세력을 휘하에 두고 왕권을 찬탈하려는 계획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1452년 10월 수양대군은 조선의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명나라로 부터 환심을 얻어야 했으며 그 목적으로 사은사를 자처하여 명을 다녀왔다. 1453년(단종 1) 10월 10일 무사들을 이끌고 김종서를 살해한 뒤 사후에 왕에게 알리고 단종을 압박하여 왕명으로 중신들을 소집,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찬성(贊成) 이양(李穰) 등을 궐문에서 죽이고 우의정 정분(鄭苯) 등을 유배시켰다. 그리고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하였다. 역사에서는 이를 계유정란(癸酉靖難)이라고 불렀다.

조선 7대 왕위에 오르다

이와 같이 일거에 실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조·병조판서(吏曹兵曹判書),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하면서 병마권을 장악하고 좌의정에 정인지(鄭麟趾), 우의정에 한확(韓確)을 임명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 찬양의 교서를 짓게 하였다. 1455년 단종을 겁박하여 왕위를 자신에게 선위하게 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상왕으로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이미 유학이 정치적 이념으로 자리잡은 조선에서 충신들에 의해 단종 복위를 도모하려는 사육신(死六臣)사건이 일어났다.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류성원이 주도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세조를 살해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자의 가족까지 모두 참수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회적 불안이 높아졌고 세조에 대한 민심은 흉흉해졌다. 후대에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란은 권력욕 이외 명분없는 반란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치적에는 괄목할 만한 것이 많다.

세조의 치적

①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六曹)의 직계제(直啓制)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1467)을 계기로 유향소(留鄕所)를 폐지하고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② 국방력 신장에 힘써 호적(戶籍)·호패제(戶牌制)를 강화, 진관체제(鎭管體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방위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中央軍)을 5위(五衛) 제도로 개편하였다. 북방개척에도 힘써 1460년(세조 6) 북정(北征)을 단행,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두만강 건너 야인(野人)을 소탕하게 하고, 1467년(세조 13) 서정(西征)을 단행, 강순(康純) ·남이(南怡)·어유소(魚有沼) 등으로 건주(建州)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하삼도(下三道) 백성을 평안·강원·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고 각도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

③ 경제정책에서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과전을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수입을 늘렸다. 또한 궁중에 잠실(蠶室)을 두어 비(妃)와 세자빈으로 하여금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주해(蠶書註解)》 《양우법초(養牛法抄)》 등의 농서를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④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자 집현전을 폐지하였으나 문교면에도 진력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그는 즉위 전에 《역대병요(歷代兵要)》 《오위진법(五衛陣法)》을 편찬했으며, 1465년(세조 11)에는 발영 ·등준시(拔英登俊試)를 두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다.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훈사십장(訓辭十章)》, 《병서대지(兵書大旨)》 등 왕의 친서를 저술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사서(史書)를 편찬하도록 했다. 국초 이래의 《경제육전(經濟六典)》, 《속육전(續六典)》, 《원육전(元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 등의 법전과 교령(敎令)·전례(典例)를 종합 재편하여 법전을 제정하고자 최항(崔恒)·노사신(盧思愼)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성종 때 완성을 보게 한 것은 그의 치적 중에서도 특기할 만하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세조 7)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信眉)·김수온(金守溫) 등에게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등 불경을 간행하게 하는 한편, 《대장경(大藏經)》 50권을 필인(畢印)하기도 했다. 그의 능은 경기 남양주시의 광릉(光陵)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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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1. 두산백과 '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