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서태지(본명:정현철, 1972년 2월 21일 ~)는 90년대 대중음악을 선두했던 인물로, 서태지와 아이들 소속으로 활동했었으나, 90년대 후반 돌연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 후, 2000년대에 솔로로 컴백하여 활동하고 있다.

개요

서태지는 양현석, 이주노와 함께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으로 활동했던 가수이다. 1990년대를 문화대통령이라는 명칭으로 불릴만큼 좌지우지했으며, 아이돌문화의 시초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서태지는 X세대들의 새로운 신드롬이었다. 서태지는 현재 서태지컴퍼니를 운영 중에 있으며, 소속으로 있기도 한데, 서태지가 NELL과 같은 가수를 키우기도 했다. 또한, 故 신해철과의 가족으로도 알려졌으며, 그와 돈독한 우정을 자랑하기도 했다.

생애 [1]

어린 시절 (1972년 ~ 1989년)

서태지는 1972년[2],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구한말시절 군인이었던 증조부 이래로 줄곧 종로구에서 거주하였다. 재동초등학교를 거쳐 대동중학교(지금은 폐교) 2학년 때인 1985년에 친구들과 ‘하늘벽’이라는 밴드를 만들었으며, 음악에 심취하여, 열정과는 달리 가출을 자주 하며, 중학교 3학년 때는 전체 537명 중 꼴찌를 할 정도로 공부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이듬해 서울북공업고등학교 (건축과, 현 학교명: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음악과 학교생활을 병행하는 건 맞지 않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부모님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중퇴를 하였다. 그후 대학로를 전전하다가, 멤버 구인광고를 보고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활동을 채 하기 전에 해체가 되고, 이후 그는 당시 신중현이 운영한 록 카페인 신촌 '우드스탁'에서 이중산을 만나 그의 밴드에서 베이시스트로 잠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연주를 유심히 본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에게 스카우트되었다.

전성기:1990년대

시나위의 해체 이후 새로운 음악 활동을 모색하던 서태지는 1991년에 양현석, 이주노를 만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하고 1992년 4월, 1집 《난 알아요》를 발표하였다. MBC의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를 통해서 데뷔하게 된 그들은 방송 3사 가요 순위를 모두 석권하였으며, TV 저널 올해의 스타상, 서울가요대상 최고 인기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대한민국 영상음악 대상, 골든디스크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과 신인 가수상,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 등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모든 상을 휩쓸었고 《난 알아요》는 데뷔 음반으로는 최다판매량인 17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1993년 6월에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 II는 첫 활동 곡으로 〈하여가〉를 발표하여 국내 최초로 20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다시 한번 가요톱텐 등의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휩쓸었다. 그리고 1994년 8월에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을 발표하였다. 3집에는 기존 음반에서는 볼 수 없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가 수록되었고 통일을 다룬 〈발해를 꿈꾸며〉의 성공과 교실 이데아 소동 등 크나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1992년 ~ 1995년에는 환경 문제를 주제로 당대 아티스트들이 모인 환경 콘서트인 《내일은 늦으리》에 참가하여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더했다. 일본에도 진출하여 1994년에는 일본판 음반을 발매하였다.

3집에서 댄스적인 색채를 없애고 , 메탈 등을 선보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5년 10월,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을 발매함과 동시에 갱스터 랩 스타일의 〈컴백홈〉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컴백홈〉 방송 출연 당시 립싱크 공연때에 마이크를 아예 소지하지 않는 등의 파격 행위도 이어졌다.

1995년 12월에 큰 활약을 펼친 후에도 길거리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펼쳐 〈필승〉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등 인기몰이를 계속하였으나, 1996년 1월 19일에 MBC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 방송된 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돌연 중단하였다. 1월 31일에는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른 창작의 고통 그리고 화려할 때 미련없이 떠난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연 그룹 해체와 잠정은퇴를 발표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이날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그리고 잠정 은퇴 소식은 전 사회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각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 뉴스가 되었고, 각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다. 2월에는 베스트 음반 'Goodbye Best'를, 6월에는 싱글 '시대유감'을 발표했다.

가수의 평가

  • 2005년 당시 이문세가 하던 이문세의 오아시스라는 프로그램에서 서태지가 나이가 3살 더 많은 양현석에게 반말한다는 양현석의 말을 듣고, '싸가지없다.'라고 말을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3]
  • 2000년 경 서태지의 컴백 당시 밴드 노브레인이 비판하며, 서태지 안티 공연을 열기도 했다.

<응답하라 1994> 속 서태지

응답하라 1994의 등장인물 조윤진은 서태지의 광팬으로 나온다. 서태지의 패션을 따라하고, 콘서트에도 가고, 은퇴 소식에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느끼기도 하는 소녀의 팬심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이 중 조윤진은 서태지와 만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사실 실제 서태지는 아니고 개그맨 정성호로 촬영한 거 였다고 한다. 이 장면에서 서태지는 조윤진에게 꼬깔콘을 주는데 이는 서태지 전설로 팬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라고 알려져있다.

*응답하라 1994에서 서태지와 만나는 장면 영상


이외에도 조윤진으로 인해, 서태지와 관련한 다양한 아이템들이 응답하라 1994 내에 등장하였다. 이는 아래의 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회차 사진 내용
5화 서태지 꼬깔콘.jpg 조윤진이 서태지를 직접 만나, 꼬깔콘을 얻는 장면이다. 이는 실화라는 주장이 많으며, 전설로 알려져있다.
14화 Stj.jpg 조윤진이 서태지가 주도했던 비니 패션 등을 따라하고 있다. 이 당시, 서태지 패션은 현재의 GD패션보다 파급력이 컸다고 한다.
15화 15화 카세트테이프 서태지.png 조윤진이 서태지의 창작 고통을 이유로 한 돌연 은퇴로 인해, 카세트테이프를 보며 슬퍼하는 장면이다. 이 당시 많은 소녀 팬들이 서태지의 은퇴를 아쉬워했고, 극성 팬 같은 경우에는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문화적 의의 [4]

뮤직비디오의 활성화

1980년대 초반 미국MTV가 개국하면서, 음악문화에서 뮤직비디오란 새로운 장르가 한 부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5] 그리고 10년이 지난 한국에서는 날로 발전하는 미국의 뮤직비디오 문화와 비교하면 뮤직비디오란 개념조차 확립되지 않은 노래방에서 사용하는 영상음악만이 존재했다. 방송과 가수들은 음악의 한 문화로서 뮤직비디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개념도 미비했다.[6]

하지만, 서태지는 이 뮤직비디오를 자신의 음악에서 표현의 한 도구로 삼았다.[7] 방송에서 적극적으로 뮤직비디오를 활용했으며, 당시 한국의 촬영기술은 미비했지만 이제는 영상음악이 아닌 그 구성에서 미국의 뮤직비디오와 같은 수준의 완성도 높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냈다.[8]

기획사와 가수 관계의 재정립

가요계에서 기획사 시스템은 가수 개인의 의사나 희망보다는 매니저와 기획사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불합리한 제도였다. 서태지 역시 데뷔 당시 이 악습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만든 음악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마스터 테이프를 들고 기획사들을 전전했고, 기획자 유대영을 만나 앨범 제작과 방송 데뷔를 할 수 있었다. 데뷔 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큰 인기를 누렸고, 기획사는 최대한 많은 이익을 위해 엄청난 스케줄을 요구하였다. 훗날 서태지는 이때 음악을 만들 시간이 너무나 적어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모두 힘들었고, 이것이 팀 해체의 한 원인이었다고 고백하였다.

데뷔 3개월 후 서태지는 결국 매니저와 결별 선언했다. 이때부터 서태지는 지금까지 본인의 모든 스케줄 및 관리를 자신이 직접 하기 시작했고, 이후 요요기획을 설립하여 기획사와 매니저에 가수가 고용되어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가수가 기획사와 매니저를 고용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현재도 서태지는 특정 기획사 소속 아티스트가 아닌 자신만의 기획사 ‘서태지컴퍼니’를 차려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초상권 개념의 확립

1990년대 초까지 저작권, 초상권이라는 단어는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1992년 9월 국내 비디오 산업의 저작권 분쟁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판권 소송으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 사건의 출발은 전 매니저와 결별을 하기 전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판권을 놓고 매니저가 서태지의 동의 없이 한 비디오 제작자와 판권계약을 했던 일에서 출발했다. 서태지는 서태지대로 자신이 고른 제작회사와 판권계약을 마친 상태였지만 이 때문에 동시에 두 곳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가 발매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 외에도 몇몇 프로덕션에서 불법으로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이미 시판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태지는 이들을 고소하고, 뮤직비디오에 대한 저작권을 들어 서태지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끝내 이겼다.

이와 더불어 시중에는 이미 불법 영상집들과 나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들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사진이 불법으로 인쇄되어 싸구려 상술의 일환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서도 서태지는 초상권이라는 당시로써는 정말 생소했던 개념을 들어 철저히 대응해 나갔다.

서태지는 예전부터 아티스트가 기획사나 음반저작권협회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개진한 바 있으며, 이에 따라 스스로 독립 기획사를 차려 활동 중이며, 2006년부터는 음악저작권협회를 상대로 저작권료 반환 소송을 진행 중이다.

새로운 패션 문화의 창조

서태지는 거리패션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1990년대 패션유행을 선도했다. 1집 〈난 알아요〉에서는 밝은 랩댄스곡에 어울리도록 상표를 떼지 않은 원색 의상과 컬러풀한 티셔츠를 착용한 스쿨룩 패션을 선보였고[9] 2집 〈하여가〉에서는 새로운 장르인 레게와 힙합에 맞춰 힙합바지와 레게머리를 했다. 힙합바지는 방송불가 판정을 받아 다른 스타일로 금세 바꿔야 했지만, 레게머리는 청소년층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10] 특히 2000년에 서태지가 귀국할때 입고 들어온 삼지창 흑백무늬의 옷은 명절 전후 경향의 옷가게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었다. 또한 비니패션 등도 등장했다.

서태지 패션이 이렇게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유니섹스 디자인이라는 점과 비만 등으로 열등감을 갖기 쉬운 몸매를 드러내지 않아 몸매에 민감한 젊은 세대들에 영향을 끼치는 등의 사회적 요인 또한 작용하였다는 시각도 존재했다.

서태지 신드롬

서태지는 90년대 이후 한국 대중문화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데뷔 이후 신세대들에게 받은 열광적인 지지와 영향력은 기존 기성세대들에게는 새로운 충격이었다. 언론에 의해서 붙여진 '문화대통령'이라는 별명은 그 파급력을 잘 표현해 준다. 언론들은 '왜 하필 서태지인가?'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 서적·시사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법들로 '서태지 신드롬'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다이어그램

관련문서

이 문서 관계 관련 문서
《서태지》 는 ~에 소속된다.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 는 ~를 대표한다. 서태지컴퍼니
《서태지》 는 ~와 관련있다. 신해철
《서태지》 는 ~와 관련있다. 이문세
《서태지》 는 ~와 관련있다. 노브레인
《서태지》 는 ~와 관련있다. 양현석

바깥고리

각주

  1. <출처>위키피디아-서태지
  2. 동시대 가수였던 박진영과 동갑이다.
  3. 서태지에 대한 이문세의 막말, 유라준
  4. <출처>위키피디아-서태지
  5. 케빈 레인컬러 역, 《브랜드 매니지먼트》, 140쪽
  6. 예하미디어, 《요점 영화로 생각하기》 제10장 서태지와 아이들 굿바이 뮤직 비디오:대중음악
  7. 한국의 음악감독들 태지매니아
  8. 영상문화의 이해 - 서태지와 뮤직비디오, 2005년 4월
  9. 대중음악과 패션 - 주간한국
  10. <출처>2집 앨범 하여가 돌풍, 조선일보 ,정종헌, 1993-07-19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