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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 21일 전남대에서 열린 전대협 임시중앙위원회에서는 송갑석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제4기 전대협 의장으로 선출한다. 이를 통해 제4기 전대협은 그 출발을 알린다.

전대협은 1990년을 90년대 대전환기를 맞이하기 위한 중요한 시기로 인식하고, 학생회가 학우들 속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 광범위한 학우들과 함께 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제기한다. 또한 미국 반대 투쟁과 1천개 과 방북교류와 북한 바로 알기 사업 등을 통한 대중적 통일운동, 한국사회 민주화를 가로막는 악법 철폐를 투쟁노선으로 제시한다. 특히 상층 중심적인 사업방식이 아니라 아랫 단위의 집중을 기반으로 다수의 학우들이 주인이 되어 투쟁에 나서는 대중투쟁 노선을 제시하며 새로운 대중운동 방식을 주요하게 제시한다.

3월에는 개강 맞이 사업인 신입생 환영회, 개강총회, 총학생회 출범식 등을 통해 학우들과 학생회의 결합력을 높여내고 학우들의 생활터전에서부터 학생회 사업의 토대를 축적하는 행사들이 진행되었다. 특히 부당한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벌어졌다.

전대협은 4월을 대중운동의 고양기로 규정하고 4.19 30주년 기념투쟁을 주요한 계기로 잡았다. 4.19 30주년 기념투쟁은 각 학교별 기념식, 거리선전전, 기념 마라톤, 가두시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4월 19일 당일에는 전국 155개 대학에서 6만 여명의 학우들이 투쟁에 나서는 전국적 대중투쟁을 전개하였다.

전대협은 5월로 접어들면서 5월 9일 민자당 창당대회 반대투쟁을 시발로 하여 민자당 분쇄투쟁의 포문을 열어나간다. 전대협은 민자당의 반민족적, 반민주적, 반통일적 행태에 대해 백만 학우들의 분노를 표출키로 하고 5월 9일 학교별 5.9 출정식을 갖고 도심에서 시민들과 함께 대규모 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한다. 5월 9일 투쟁을 약 8만 여명의 청년학생, 시민들이 참가한 17개 도시 거리투쟁으로 폭발되었다. 언론들은 5.9 투쟁을 '6월 항쟁 이후 최대규모의 시위' 라고 보도하였다. 이는 당시 민자당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당시 투쟁이 가장 크고 격렬하게 벌어진 곳은 서울이었으며, 서총련 소속 대학들은 과토론회, 전체총회 등을 통해 동맹휴업, 수업거부 등을 결의하고 당일 투쟁 준비를 해나갔다. 서강대의 한 과는 분임토의에 기초한 과총회를 열어 전체 과학우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기가 할 일(예를 들면 투쟁에 나가는 학우를 위해 도시락 싸오기, 복학생의 경우에는 정장 차림으로 투쟁에 나가 박수 쳐주기, 연행된 학우 면회 가기 등)을 정하여 전체 학우들이 참여하는 투쟁을 만들어냈다. 서울에서의 5.9 투쟁은 수만 명의 시민과 청년학생들이 시청 앞 광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강력한 투쟁이 되었으며, 미문화원은 시민들에 의해 불타기에 이르렀다.

전대협은 이후 광주에서 광주민중항쟁 10주년 기념투쟁 및 제 4기 전대협 출범식을 치러낸다. 민자당 정권은 청년학생들과 각계 민중들의 광주 결집을 막기 위해 전국 각 도시의 역, 터미널과 광주로 통하는 주요 도로, 광주 시내, 전남대 등에 수만 명의 전경을 배치하고 이중삼중의 검문검색으로 학우들을 연행하였다. 하지만 광주로 향하는 전대협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학우들은 검문검색을 피해 두세번씩 차를 갈아타면서 광주로 향하였다. 5월 19일, 기차를 타고 광주로 향하는 신장호 열사(대유공업전문대)는 장성역에서 내리려다 경찰의 검문을 보고 다시 기차를 탔으나, 백만 학우들과 함께 하려했던 열사는 장성역을 막 출발하여 천천히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가 목숨을 잃고 만다. 민자당 정권의 비열한 원천봉쇄는 또 한명의 젊은 청춘을 죽음에 이르게했다. 열사는 장성역에서 발걸음을 돌려 다시 기차를 타면서 동행한 후배들에게, '식민지 조국에서는 내 나라, 내 땅도 마음대로 밟지 못하는구나' 라는 말을 남겼다. 5월 19일 저녁이 되어 난관을 뚫고 전남대에 도착한 학우들은 3만 명이 훨씬 넘었다. 전남대를 원천봉쇄하던 경찰의 물리력은 학교 안 학우들의 투쟁과 학교 밖 광주시민들의 투쟁으로 무너졌으며, 전남도경국장은 어쩔 수 없이 집회를 허가한다. '광주항쟁 10주기 계승 청년학생 전국대회 및 제4기 전대협 출범식'은 전남대 대운동장을 꽉 매운 7만여 명의 청년학생과 광주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펼쳐졌다.

한편 1990년 조국통일운동은 소수 선각자와 청년학생들만이 아닌 각계 국민들과 단체들이 함께 하는 대중적 통일운동으로 발전한다. 88년, 89년 통일운동의 성과는 남,북,해외 3자 연대 통일기구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을 창설로 이어진다. 전대협은 7월 27~29일, 한남대에서 300여명의 전국 과학생회장이 참가한 가운데 '전국 과학생회장 통일다짐 수련회'를 개최하고, 700여명의 통일선봉대를 구성하여 전국을 돌며 통일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서총련 서부지구는 범민족대회 성사투쟁을 힘차게 벌이는 것과 함께 각 학교에 북한방문 접수창구를 마련하고 학우들의 힘으로 북한 대학생과 독자점 회담을 추진하는 자주교류 사업을 펼친다. 또한 중앙대 예술대 학우들은'남북 대학생 예술작품 교류전 추진 위원회' 를 구성하여 1천개 학과 방북교류 투쟁의 모범을 만들어내며 범민족대회 기간 중에 진행할 통일예술 작품전과 기념공연을 준비했다. 전대협은 8월 13일 판문점에서 남, 북, 해외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진행하는 범민족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연세대로 집결한다. 범민족대회 남측 추진본부는 판문점에서 범민족대회를 어떤 탄압에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고 13~17일까지를 범민족대회 기간으로 정하여 연세대 각종행사를 진행하고, 8월 15일에는 판문점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1990년 범민족대회, 전대협의 혈서, ]

8월 15일 판문점 범민족대회 출정식을 진행한 후 대표단은 판문점으로 향했은나, 노태우 정권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대표단의 판문점 행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청년학생들은 서울 시내 곳곳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며 시민들을 만난다. 범민족대회 남측 추진본부는 8월 16일, 범민족대회 보고대회, 17일 범민족대회 폐막제를 갖고 '남, 북, 해외 7천만 동포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대동단결할 수 있는 범민족적인 통일운동체를 결성을 위해 노력할 것' 등의 7개 항의 결의문을 발표한다.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전민족적 통일열기에 밀린 노태우 정권은 민주애국세력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한다. 10월 24일에는 전대협 송갑석 의장이 연행되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전대협 간부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된다. 이는 전대협을 와해시키려는 책동이었다. 하지만 전대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송갑석 의장 석방 투쟁을 비롯한 공안탄압 분쇄 투쟁을 펼치며 노태우와 민자당 정권에 맞서나갔다.

출처

범민련 남측본부


편찬자 : 김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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