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의 시대별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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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구려시대의 매듭

고구려 초기에 비단과 비단실이 생산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잘 나타나있다. 이러한 고구려시대의 생활상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것이 황해도 안악군 유순리에 있는 안악3호분의 벽화이다. 이 벽화에서 묘주가 앉은 배경의 방장 장식에 매듭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무용총 무용도에는 표문豹文이 있는 복장을 한 남녀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남녀 무용수의 허리에 띤 평직으로 된 폭이 넓은 띠는 광다회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좌측 사진은 고구려 안악3호분 묘주 인물도이고, 우측 사진은 무용총 무용도(고구려 5세기경)이다.

<자료출처: 한국전통매듭, 균형과 질서의 미학. 국립중앙박물관. 2004>


고구려벽화.jpg

2.백제시대의 매듭

백제에서도 의복에 매듭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띠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색복조에 의하면, "조회와 제사 때 쓰는 관에 나솔 이상은(16관등의 어섯번째 등급)은꽃으로 장식을 했고, 장덕(7품)은 자색 띠, 시덕(8품)은 검은색 띠, 고덕(9품)은 적색 띠, 계덕(10품)은 푸른색 띠, 대덕(11품)이하는 황색 띠, 문독(12품)부터 극우(16품)까지는 모두 흰색 띠를 했다." 로 하는데 여기에 보이는 각 색상의 띠는 다회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고 한다.

3.신라시대의 매듭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끈목과 매듭의 사용이 매우 활발했음을 입증하는 기록과 유물들이 있다. 삼국사기 색복조에 의하면 신라 상당대나마와 적위대사는 실로 짠 갓끈을 매었다고 전한다. 흥덕왕 9년에는 교지를 내려 호사스런 복식과 장식을 금하는 복식금지령을 내리고 각 신분별로 적절한 복식 형태를 제시하였는데 그 중에는 허리띠와 장화 끈 장식에 대한 규제가 있었으며 6두품, 5두품 여성의 허리띠 장식에 금은사 공작미, 비취모의 끈을 착용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띠의 구체적인 종류는 알 수 없으나 매듭이 당시 의복이나 장신구에 널리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통일신라 상원사범종.jpg

4.고려시대의 매듭

고려시대의 매듭은 선화봉사고려도경과 불화, 불복장 출토물에서 살펴볼 수 있다. 고려불화에서 표현된 매듭은 매듭의 형태라기보다는 끈목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고려 말기 문신인 이제현(1287~1367)의 모습을 담은 «이제현 초상»에서도 매듭 장식을 볼 수 있다. 1319년 이제현이 충선왕(1275~1325)을 모시고 중국 원나라에 갔을 때 충선왕이 진감여陳鑑如라는 원나라 화가를 시켜 그리도록 한 작품으로 유소가 달린 의자, 서책과 청동정 등이 우리나라 초상화 전통과는 전혀 다른 형식임을 보여준다. 그림 속의 유소는 원나라의 것일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 양국간의 밀접한 문화적 교류를 감안한다면 반대로 이를 통하여 고려시대 생활 가구에 유소가 장식되던 분위기를유추해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이제현 초상.jpg 고려시대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jpg

5.조선시대의 매듭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매듭의 종류와 용도는 더욱 다양해져 실생활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사용된 매듭의 용도를 살펴보면, 매듭이 가장 발달된 노리개와 주머니, 이동 수단인 연, 연, 가마, 실내 장식용인 발걸이 유소, 세조대 등이 있다. 그밖에 악학궤범 제 6권을 보면, 소, 비파, 박, 해금, 등의 악기에도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파평윤씨 유소.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