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돈암서원(論山遯巖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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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논산 돈암서원(論山遯巖書院)은 1634년(인조12년)에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그의 사상을 잇기 위해 창건되었다. 1660년(현종1)에‘돈암’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

'돈암'은 서원이 창건되었던 곳인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하임리 숲말 산기슭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임리(林里)에 위치한 구지는 현재 서원이 자리 잡은 곳에서 서북으로 약 1.85km 떨어진 곳이다. 숲이 울창하므로 숲말 또는 임리라 부르게 되었다.

돈암서원은 1880년(고종 17) 현재의 위치인 연산면 임3길 26-14로 이건하였다. 이전한 이유는 원래 서원이 있던 곳의 지대가 낮아 홍수로 서원에 물이 들어와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서원은 동향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펼쳐진 일대의 들판을 내다보고 있다.[1]

돈암서원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4-4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3년 사적 제 383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국내 현재하는 총 637개의 서원중에서도 세계문화유산잠정 관리로 등재된 9개의 서원중에 하나다.

면적은 5,590㎡(약 1,690)평으로 숭례사(崇禮祠)를 중심으로 하는 제향공간과 양성당(養性堂)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공간, 전사청(典祀廳)을 비롯한 관리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조12년(1634)년 건립된 이후, 고종 17년(1880)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그 후 1950년대, 1970년대 두 차례의 대규모 보수 및 증축 후에 1997년에 동재와 서재 그리고 관리사인 고직사가 개축하였다.[2]

창건배경

돈암서원의 창건 배경은 사계 김장생(1548~1631)의 강학기반을 유서로 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현재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등 4명의 위폐를 모시고 제향하고 있다.

조선시대 예학(禮學)의 종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장생의 강학활동은 그보다 먼저 아버지 황강(黃崗) 김계휘(金繼輝)(1526~1582)가 건립한 정회당(靜會堂)에서 시작되었다. 김계휘는 조선중기의 신진사류 중 한 명으로 학문과 덕망이 뛰어났다. 그는 1557년 권신 윤원형의 의해 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연산으로 낙향하였다. 이때 김계휘는 연산에 정회당을 건립하여 후학양성과 향촌의 교화에 힘썼으며, 각종 서책을 준비하여 수준 높은 강학을 펼쳤다. 그러나 임진과 정유의 양란으로 인해 중단된 정회당에서의 강학 전통은 김장생에 의해 계승되었다.

김장생은 정유재란 직후인 1601년(선조 34)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다가 이듬해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한 북인이 집권하자 낙향하였다. 낙향후 돈암서원에서 약 1.7㎞ 정도 떨어진 옛 아한정(雅閑停)터에 서장을 열어 양성(養性)이라는 편액을 걸고 강학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30여 년을 머무르며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력을 다했다. 이곳에서 대체로 서인(西人)들과 동문수학하였는데, 양성당은 명실공이 호서지역의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하는 산실이자, 이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활동 할 수 있는 정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사계 김장생이 1631년 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학덕을 기리는 문인들은 곧 바로 서원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김집을 필두로 출외 유사 23명, 충청도 사림 56명이 서원 건립을 발의하는 통문을 발송하였고, 천안군수, 나산현감, 전 군수 윤전, 김전망, 임위, 송준길, 송시열, 이유태 등이 참가하였다. 마침내 1658(효종9) 돈암서원의 추배를 허락했고, 1660년(현종 1년)사액(賜額)서원이 되었다.[3]


건축구조와 건조물

호서지역의 지리적 특징이 건축에 끼친 영향은 우선 건축물이 험준한 경사지나 절경지에 입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호서지역의 서원은 대체로 굴곡이 심하지 않는 않은 구릉지이거나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돈암서원의 건축물 배친는 약한 구릉지를 이용하여 전면에 강당을 두고, 후면에 묘당을 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식 배치이며, 전면에서서부터 산앙루(山仰樓), 외삼문(外三門), 내삼문(內三門), 사우(祠宇)가 중심 축선상에 순서대로 배치되고 있고, 그 좌우로 응도당(凝道堂), 동서재, 장판각(藏板閣), 정회당(靜會堂), 수직사(守直舍)등의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4]

돈암서원의 배치는 전체는 크게 묘당(廟堂)구역, 강학(講學)구역, 유식(遊息)구역, 수직(守直)구역이라는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된다. 가장 중요한 묘당구역은 제일 뒤쪽 지형적으로 서원 내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사당 전면에 내삼문을 두고, 주위는 사괴석 담으로 둘러져 있다. 서원 내에서 사묘를 배치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요소는 지형조건이다. 사묘는 사자(死者)의 위패를 봉안하는 곳이므로 상징적으로 서원 내에서 지형적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둔다. 천인합일(天人合一)하려는 사묘의 향천성(向天性)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돈암서원 사당도 이러한 배치원리에 따라 배치기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강학구역에는 강당인 양성당(養成堂)과 그 앞 좌우에 동서재를 배치해 두었다. 서쪽은 정의재(精義齋), 서쪽은 거경재(居敬齋)이다. 원래 구지에서는 응도당(應道堂)이 강당이었으나 이전 과정에서 양성당을 먼저 이건하면서 강당 자리에 배치하게 되었다. 응도당이 나중에 이건 될 때 강당 자리에 들어서지 못하고 양성당 동남쪽으로 비켜 배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가 없는 2동의 강당이 있는 서원이 되었다. 따라서 강학공간은 양성당, 동·서재, 그리고 응도당이 모두 포함하는 큰 권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강학공간을 좀 더 확대하면 정회당, 장판각도 포함된다.

돈암서원을 관리하는 수직사 구역은 서원의 북편에 배치하고 있다. 하나는 관리인이 거주하는 경회당이고, 다른 하나는 제향을 준비하거나 제기 등을 보관해 두는 전사청이다.

돈암서원에는 입덕문 앞에 산앙루(山仰樓)를 건립하면서 유식(遊息)구역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산앙루 주변에 담장을 둘러 독립된 하나의 공간영역이 형성되었다. 산앙루가 구지에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인이 안 되고 있다. 돈암서원 이건비문《連山遯巖書院之碑》의 기록을 보면 산앙루가 있었다고 단정하기가 어려운 점이 보인다.[5]

또 다른 건축물로는 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과 하마비(下馬碑)·송덕비(頌德碑), 홍살문이 있다.

점경물로 돈암서원 원정비(遯巖書院 院庭碑)가 있다. 현종 10년(1669)에 세웠는데, 돈암 서원 원정비는 돈암 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서원의 구조를 남기기 위해 건립한 비석이다.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의 학문과 성품을 칭송하는 글도 새겨 놓았다.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쓰고 전서체의 제목은 김만기가 썼다.

돈암서원지비(遯巖書院之碑)는 양성당 중수비이다. 돈암서원이 이건하게 된 연유와 이건당시의 기록,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송병선이 짓고 송도순이 글씨를 썼다.

이외로 내삼문 안 묘당공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제향의 동입서출(東入西出)하는 의식절차에 따라 우측은 관세대, 좌측은 정료대가 위치하고 있다.

돈암서원과 실천적 기호예학

김장생(1548~1631)이 살았던 16~17세기는 사화(士禍)와 반란과 잦은 전쟁으로 조선의 지배체제가 크게 흔들리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 1589년(선조 22년)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과 기축사화(己丑士禍)로 동인과 서인의 골이 깊어졌다. 혼란을 겪던 조선사회는 이제 더 이상 기존의 성리학 이념만으로 사회적 문제를 대처 할 수 없었다. 가치관과 윤리의식이 혼란에 빠져 사회적 기강이 급격하게 무너졌고,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처음부터 다시 재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요구되었다. 그 수습책으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이 예학(禮學)이다.[6]

예(禮)는 원래 천지의 질서이고, 천하국가의 정장(典章)이며 법도(法道)이며 사람의 일상 생활을 하는데 가운데에 마땅히 지켜야 할 의식규범이다. 그래서 주희는 예를 천리의 절도 있는 문체(文彩)요, 인사(人事)의 의식과 법칙이라고 풀이하였다.[7] 이와 같이 예는 인간의 정감을 절제하도록 만들고 또 외적 표준이 되는 규범으로 격식화하는 양식이다.

김장생은 거의 새로 건국된 나라나 마찬가지가 된 조선사회가 예(禮)가 그런 구실을 하는 수단이라고 여겼다. 예란 유교사회에 사회생활을 하는 전 분야, 전 영역을 엮어가는 그물망 같은 것이다. 이런 예(禮)를 학문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김장생이다.[8] 김장생의 예학은 이이의 성리학과 송익필의 예학을 종합하여 승화하였다. 또한, 김장생과 김집이 연산을 중심으로 다진 기호학파는 관념적 도덕세계보다는 현실적 경험세계를 더 존중하는 학맥을 형성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으로 국가의 전례에 대한 변례(變禮)가 대두되었을 때, 김장생은 종통·왕통을 수호하는 입장에서 사친에 대한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과례(過禮)를 범하려는 세력과 맞서 올바른 전례를 만들었다. 사례에서도 가장 어려운 상례와 제례의 변례문제에 대하여 시의에 맞도록 예를 정립함으로써 예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장생의 예학이 우리나라 사상사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한 나라의 풍속을 순화하여 후세에 끼친 영향이 예학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다 우리나라 예학이 김장생에 의해 비로소 체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9]

법(法)이란 사건이 발생한 후에야 금하는 데 비하여, 예(禮)는 사전에 금하는 작용을 하며, 법은 규정하는 바가 소극적인데 비하여 예는 규정하는 바가 적극적이라는 점에서 법보다 예가 사회질서의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혼란과 무질서,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사람이 살아가는 질서와 윤리로써 사계 김장생의 예학(禮學)이 주는 교훈이라 하겠다.


사진 및 도면

사진

도면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 김태완,「사계 김장생의 예학과 정치사상」,『율곡사상연구』, 2010, 제21집, 율곡학회.
  • 노재현, 최종회 외「연산 돈암서원(遯巖書院) 구지(舊地)의 원형경관 탐색」,『한국전통조경학회지』, 2012, 제30권, 41호, 15~16쪽.
  • 조준하,「김장생의 예학 사상」,『기호학파의 철학사상』, 1995,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 안장헌, 이상해,『書院』, 1998, 열화당.
  • 정순우,『서원의 사회사』, 2013, 태학사.
  • 최종희, 문창순,「연산(連山) 돈암서원(遯巖書院)의 입지(立地)와 공간구성(空間構成)에 관한 연구」,『자연과학』, 2008, 제19권, 1호, 9쪽.
  • 한국서원연합회,『한국의 서원유산Ⅰ』, 2014, 도서출판 문사철.
  • 한국서원연합회,『한국의 서원유산Ⅱ』, 2014, 도서출판 문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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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출처: 노재현, 최종회 외 「연산 돈암서원(遯巖書院) 구지(舊地)의 원형경관 탐색」,『한국전통조경학회지』, 2012, 제30권, 41호, 15~16쪽.
  2. 최종희, 문창순, 「연산(連山) 돈암서원(遯巖書院)의 입지(立地)와 공간구성(空間構成)에 관한 연구」, 『자연과학』, 2008, 제19권, 1호, 9쪽.
  3. 한국서원연합회,『한국의 서원유산Ⅰ』, 2014, 도서출판 문사철. 447~487.
  4. 한국서원연합회의 같은 책, 447~487.
  5. (재)한국의 서원통합보존관리단
  6. 한국서원연합회,『한국의 서원유산Ⅰ』, 2014, 도서출판 문사철.
  7. 조준하,「김장생의 예학 사상」,『기호학파의 철학사상』, 1995,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8. 김태완,「사계 김장생의 예학과 정치사상」,『율곡사상연구』, 2010, 제21집, 율곡학회.
  9. 조준하의 같은 글, 278쪽.
  10. http://www.congnamul.com
  11.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12. 출처: (재)한국의 서원통합보존 관리단
  13. 문화재청 홈페이지
  14. 돈암서원의 강당이다. 돈암서원의 건물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건물로 다른 서원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로 보물 제1569호로 지정보호 받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15. 부친 김계휘가 건립한 강학당.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16. 사당인 숭례사는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네 분의 위패를 봉안 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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