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불가론 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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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론자들이 개항을 반대하는 논거는 2가지로 하나는 그들이 가지는 사상적 지향이며, 또 하나는 개항으로 인한 경제적 폐단이었다. 그들의 기본 논리는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철저한 화이관(華夷觀)이었다. 서양세력 침략의 첨병인 천주교를 유교적 사회질서를 부정하는 요소로 인식했으며,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전통적인 '예교질서(禮敎秩序)는 곧 정(正)', '서양문명은 곧 사(邪)'라는 인식을 토대로 척사위정(斥邪衛正)을 주장했다.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분별이라는 화이관 명분론에서 세계를 인식했던 유학자들에게는 제국주의 열강의 중화(中華:중국)와 소중화(小中華:조선) 침략은 커다란 위기였다. 이 위기의식은 개항에 대한 철저한 반대, 즉 '서양침략[西洋化]은 인류의 금수화(禽獸化)'로 발현되었다. 이항로는 유교적인 우주관, 유교적인 강상(綱常)의 유무에 의해 명(明)을 중화의 나라로, 우리나라를 소중화의 나라로, 청나라는 중국을 지배하지만 이(夷)로, 그리고 서양과 그 앞잡이인 일본을 금수(禽獸)라고 규정하여, '화이인수지별'(華夷人獸之別)로 구분했다. 그의 제자인 최익현도 〈병인의소 丙寅擬疏〉 에서 서양족속은 이적만도 못하니, 곧 금수로 사람의 얼굴만 지닌 것이라 하면서 서양이나 일본을 인수지별(人獸之別)에 의거하여 인식했다. 그는 "서양과의 화호교역(和互交易)은 인류가 금수로 떨어진다"고 했다. 이 금수화는 주로 정신적·문화적 폐단으로, "서양의 사학(邪學)이 전래되어 아들이 그 아비를 아비로 여기지 않고, 신하가 그 인군을 인군으로 여기지 않게 되어 예의가 시궁창에 빠질 것이며, 양물(洋物)이 대부분 기기음교(奇技淫巧)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타락시키는 기구여서 민생들의 일상생활에는 도움되는 바가 없고, 이를 사용하면 예의를 지키던 사람들이 재물과 여색에만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부복궐척화의소 持斧伏闕斥和議疏〉 에서는 "청나라와의 강화와 일본과의 강화가 동일하다는 지적은 어린애들의 소견과 같다"고 했다. 즉 "청인들의 뜻은 중국의 황제가 되어 사해를 진무하려는 데 있기 때문에 인의(仁義)의 이름을 빌어 중국의 패주노릇을 흉내냈던 이적에 그치는 것이며, 이적도 사람이라 그 도리 여하를 불문하고 이소대사(以小大事)로서 피차 교호했지만, 왜적들은 화색(貨色)만 알고 인리(人理)는 조금도 모르는 금수로, 금수와 교화하여 근심없이 보존할 수 있으리라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왜인은 서양의 앞잡이인 구적(寇賊)으로 서양과 심리(心理)가 통하고, 왜인들은 서양옷을 입고 서양대포를 사용하고, 서양배를 탔으니 왜와 서양은 일체(一體)라는 것이었다. 즉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을 전후한 서구자본주의의 침투에 대한 경제적 위기의식은 그대로 일본에 의한 개항을 반대하는 척화론으로 흡수되었다. 그것은 화이론으로부터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으로 귀결되었다.

또한 개항을 반대하던 척사론에서는 경제적인 문제도 지적하여 양물배격론(洋物排擊論)·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 등의 형태로 개항에 따르는 경제 폐단을 역설하였다. 이것은 양물이 기기음교하여 재물과 정욕을 조장하는 통화통색(通貨通色)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나왔다. 동시에 서구자본주의의 요구를 일본이 대행하는 경제침투라는 역사인식도 있었다. 이항로는 "저들의 물건은 손으로 만들어서 하루의 생산으로도 남음이 있고, 우리의 물건은 땅에서 생산되어서 일년의 생산으로도 부족하다. 부족한 것을 가지고 남는 것과 바꾸면 우리가 어찌 곤궁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자급자족적인 봉쇄경제론을 주장했다. 기정진(奇正鎭)은 양적(洋敵)인 천주교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우선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외국과의 통상은 우리의 산해(山海)를 저들의 보고(寶庫)로 삼으려는 것"이라 하면서 양물금단론을 주장,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을 간파함으로써 개항을 반대했다. 최익현도 "적들의 욕심은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는데, 저들의 물화는 모두 음사기완(淫邪奇玩)하고 수공업 생산품이어서 그 양이 무한하고, 우리의 물화는 모두 백성의 생명이 달려 있는 토지생산품으로 그 양이 유한하여, 이 교역으로는 매년 거만금을 들이게 되어 수년 후에는 전국의 황량한 땅과 쓰러져가는 집들을 보존하지 못하고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했다. 즉 일찍이 이항로가 지적했던 봉쇄적인 자급경제의 유지를 목표로 했다. 의병전쟁 단계에서도 "통상을 금하지 않은 것이 실로 화단(禍端)이 되었다. 처음부터 음란하고 부정한 물건을 만들어서 우리 백성의 풍속을 문란케 하였다"고 종래의 척화론을 거론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통상 자체는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이를 계기로 이루어지는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침탈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학문체계 내에서 개항을 반대하는 상소운동, 그리고 1882년 〈조선책략 朝鮮策略〉으로 인한 신미척사론(辛未斥邪論)과 개화파의 개혁사업을 부정하는 상소운동으로 진전시켰고, 나아가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전쟁을 통하여 무장항쟁을 전개하였다.→ 내수외양론, 위정척사론



출처KU


"개항불가론"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timeline.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1g1906a>

[2014. 6. 7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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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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