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화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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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문석

꽃 화(花), 무늬 문(紋), 자리 석(席)으로, 말 그대로 꽃무늬를 놓은 돗자리라는 의미로, 예로부터 꽃돗자리라 불렀다. 강화도에서 나는 왕골은 순백색 완초의 기질이 살아있어 기품 있는 화문석을 만들어낸다. 우수한 품질 덕에 화문석은 고려시대 송나라와 원나라에 수출되는 인기품목으로, 조선시대에는 청나라와 일본에 보내는 선사품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문양

조선 중기만 해도 용, 호랑이, 십장생 등이 주류를 이뤘고 일반 가정에서는 백색자리(무늬를 넣지 않은 왕골 돗자리)를 주로 사용했다.

왕골=

왕골은 봄에 씨를 뿌려 5월에 모내기를 한다. 7~8월 성인 남자 키만큼 길이가 자라면 왕골을 수확해 건조시킨다. 잘 말린 왕골은 각양각색의 물을 들여 틀에 올린다. 날실로는 대대로 칡넝쿨을 가공해 사용했으나 현재는 나일론실을 이용한다. 틀에는 고드렛돌에 감은 날실 두 개를 하나로 묶어 1.5cm 간격으로 매단다. 왕골 겉감과 속감을 한데 모아서 고드렛돌을 돌려 가며 화문석을 짜낸다.

조선시대에는 [세종실록], [임원경제지], [교동군읍지] 등 여러 문헌에서 강화 화문석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조선 실학자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誌)]에서 ‘웬만큼 사는 양반집에는 화문석을 자리로 쓴다’라고 밝힌다. 일제강점기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던 일제도 화문석만큼은 높은 품질을 인정해 오히려 장려했다. 강화 화문석은 여름에는 통풍효과가 좋고 겨울에는 냉기를 흡수한다. 오래 쓰더라도 윤기가 쉬 사라지지 않고 질겨서 잘 부스러지지 않는다.


화문석 문화관

강화군 송해면 일대에는 전통 방식 그대로 화문석을 짜는 화문석 체험마을과 문화관이 있다. 강화 화문석은 품질이 좋아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강화도에서만 연간 4만 9천 점이 생산됐다. 당시에는 강화 농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4천여 가구가 화문석 제작에 종사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눈에 띄게 제작 가구 수가 줄었다. 마을에 화문석 짜는 집 이젠 10여 가구가 남아있다. 강화 화문석은 고려 중엽부터 가내 수공업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 39년 동안 수도 역할을 담당하던 강화에서는 왕실과 관료를 위해 최상품 왕골 돗자리를 제작했다. 화문석 체험마을이 들어선 곳은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이웃마을 양오리에는 화문석문화관이 자리했다. 당산리 주민들은 양오리에서 화문석을 배워왔다고 말한다. 130여 년 전 양오리의 한충교 선생이 조선 왕실의 의뢰를 받아 화문석 문양을 다양하게 개발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