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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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1]
(『(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국립중앙박물관
대표명칭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2]
한자표기 『(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작성시기 1638년 12월
소장처(원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파리 국립도서관(어람본193장)), 이 외 규장각(강화부본 164장)
반차도 ‘중궁전자별궁예궐시반차도(中宮殿自別宮詣闕時班次圖)’



내용

1635년(인조 13)에 원비인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는 3년 후인 1638년에 장렬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였는데, 당시 인조는 44세, 장렬왕후는 15세였다. 장렬왕후는 본관이 양주(楊州)이고 아버지가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 어머니가 전주 최씨(全州崔氏) 대사간 최철견(鐵堅)의 딸이며, 1651년(효종 2)에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받았다. 바로 이 자의대비의 복제문제로 인해 1659년(현종 즉위)과 1674년(현종 15)에 기해예송(己亥禮訟)과 갑인예송(甲寅禮訟)이 발생하기도 했다. 시호는 장렬(莊烈)이며, 능은 구리에 있는 동구릉(東九陵)의 휘릉(徽陵)이다.


의궤의 구성

이 의궤는 권수 구분없이 1책으로, 표지를 포함해 총 396면이다. 이중 도설(圖說)이 9면(채색), 반차도(班次圖)가 8면(채색)이다. 앞뒷면에 약간 불에 그을린 흔적은 있으나, 대체로 양호하다. 별도의 목차는 없으나 그 순서를 살펴보면 도감의궤는 계사(啓辭), 감결(甘結), 예관(禮關), 의궤(儀軌), 논상(論賞) 순이다. 각방의궤의 경우, 일방의사색(一房衣榭色)[계사(啓辭), 감결질(甘結秩), 실용질(實用秩) 등], 일방포진색(一房鋪陳色)[감결질, 실용질, 공장질(工匠秩)], 이방연색(二房輦色)[감결질, 실용질, 공장질], 의장색(儀仗色), 삼방옥책색(三房玉冊色), 삼방기명색(三房器皿色), 중궁전자별궁예궐시반차도(中宮殿自別宮詣闕時班次圖), 서압(署押) 순으로 실려있다. 본문의 경우, 별도의 내제(內題) 없이, 바로 1638년 10월 3~4일에 삼간택(三揀擇) 시행을 위해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사가 나온다. 당시 간택이 지연되었는데, 간택에 응하는 가문이 없었고, 또한 이전 가례의궤들이 전란으로 사라져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보관된 실록을 참고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10월 5일에는 삼간택을 위한 가례도감이 설치되었고, 이날 이조단자(吏曹單子)에는 도제조(都提調)에 좌의정 신경진(申景禛), 제조(提調)에 행 공조 판서(行工曹判書) 구굉(具宏), 예조 판서 이현영(李顯英), 호조 판서 이명(李溟) 및 낭청(郎廳) 8명 등이 도감 관원으로 임명되었다. 이어서 17개 항의 도감사목(都監事目)에는 인력 운용 및 물자 조달 등에 관한 규정이 실려 있고, 도감의 처소는 광화문(光化門) 밖 옛 병조(兵曹)로 정했다. 계사는 도감(都監) 등의 계사와 전교(傳敎)가 날짜순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주된 내용은 도감의 인원 차출, 각종 물품 마련, 의식 진행 등에 관한 사항이다. 10월 6일자 계사에는 감조관 및 도감 관리, 도청 원역 명단이 실려 있고, 10월 7일자에는 책비(冊妃)가 머무는 별궁의 장소를 봉림대군 집으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친영례(親迎禮) 장소도 태평관(太平館) 대신 어의동(於義洞) 별궁에서 거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10월 21일자에는 가례 정사(正使)에 좌의정 신경진을, 부사(副使)에 한성판윤 윤휘(尹暉)를 임명했고, 왕비의 최종 간택은 10월 26일에 이루어졌다.

첩정질(牒呈秩)은 주로 예조에서 보낸 것으로 택일(擇日), 습의(習儀) 시행 및 육례(六禮) 관련 의절(儀節) 등에 관한 의주(儀註)가 실려 있다. 끝부분에 육례의 거행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데, 납채(納采)는 11월 4일, 납징(納徵)은 11월 16일, 고기(告期)는 11월 30일, 책비는 12월 2일, 친영(親迎)과 동뢰연(同牢宴)은 12월 3일에 각각 거행되었다. 다음으로 의궤 제작에 관한 사항을 적은 도감사목단자(都監事目單子)가 실려 있다. 구체적으로 도청 인원 관리 및 인신(印信), 도청 처소의 배치, 의궤 제작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12월 13일자에는 가례에 참여한 인원에 대한 논상 내역이 담긴 비망기(備忘記)에 실려 있다. 다음은 각방의궤(各房儀軌)이다. 먼저 일방(一房)에서는 교명(敎命), 의대(衣襨), 포진(鋪陳)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데, 일방의사색, 일방포진색으로 구분했다. 낭청, 감조관(監造官) 등 담당 관원들의 명단이 실려있고, 뒤이어 계사, 감결, 품목(稟目) 등과 금감질(今減秩), 실용질 등의 순서로 실려 있다. 일부 품목은 도설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끝부분에는 공장(工匠)들의 명단을 적은 공장질이 첨부되어 있다. 다음 이방(二房)에서는 각종 들 것과 의장(儀仗) 등을, 삼방(三房)에서는 왕비의 옥책(玉冊), 보(寶)에 필요한 제구(諸具), 기명(器皿) 등을 마련했다. 항목 수록 순서와 형식은 일방의궤와 유사한데, 이방의궤는 이방연색, 의장색으로, 삼방의궤는 삼방옥책색과 삼방기명색으로 세분화된다. 세분화된 항목은 다시 관원 명단, 관련 공문, 공장질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마지막 부분에는 「중궁전자별궁예궐시반차도」가 8면이 있다. 별궁에서 친영례를 치른 왕비가 궁궐로 들어가는 행렬을 그린 것으로 후대에 비해 소규모이다. 행렬의 맨 앞과 뒤에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포살수(砲殺手)가 호위하고 그 뒤에는 교명과 옥책을 앞세운 왕비가 탄 연(輦)이 뒤따른다. 그리고 주변에서 얼굴을 가리고 말을 탄 채 호위하는 상궁(尙宮)과 시녀(侍女)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의궤 맨 마지막은 서압 부분으로, 도제조로부터 낭청에 이르기까지 인원의 관직과 성(姓), 수결(手決)이 실려 있다.

자료적 가치

이 의궤는 후대 의궤에 비해 다소 소략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현존 의궤들 중에서 초기 왕실 가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이 의궤는 어람용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나머지 4건의 분상용 중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춘추관본(〈奎 13061〉)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내용상 큰 차이는 없으나, 반차도에 낭청, 보, 옥련(玉輦) 부분의 인물들의 위치가 어람용과 분상용에 차이가 있으며, 어람용의 인물 형태는 균질한 반면에 분상용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형태

형태상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장정의 경우, 변철로 분상용은 원환으로 박을정(朴乙丁)이 3개인데 비해 어람용은 복화(伏花) 형태인 국화동(菊花童) 무늬로 박을정이 5개이다. 재질의 경우, 분상용은 표지가 홍포이고 본문은 저주지(楮注紙)임에 반해, 어람용은 원표지가 초록여의천도문릉이며 본문은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했다. 판식의 경우, 어람용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의 붉은 인찰선이고 분상용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의 검은 괘선으로 그어져 있다. 점련(粘連) 표기의 경우, 어람용은 없는데 반해, 분상용은 중간 연결 부위에 도장을 찍어 표시했다.[3][1]

주석

  1. "이상식",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해제,online,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