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四十九 後晉紀
後晉紀
高祖
○ 初에 唐主欲使敬瑭移鎭鄆州한대 李崧, 呂琦【李崧은 翰林學士요 呂琦는 知制誥라 】等이 皆力諫하야 以爲不可어늘 薛文遇【知制誥라 】曰 河東은 移亦反이요 不移亦反하야 在旦暮耳니 不若先事圖之니이다 唐主大喜曰 卿言이 殊豁吾意하니 成敗에 吾決行之호리라 卽爲除目하야 付學士院하야 使草制하야 以敬瑭으로 爲天平節度使하니 制出에 兩班【文武官을 爲東班西班하니라 】이 相顧失色이러라 敬瑭이 疑懼하야 謀於將佐曰 吾之再來河東也에 主上이 面許終身不除代러니 今忽有是命하니 得非如今年千春節與公主所言乎아 我不興亂이면 朝廷發之하리니 安能束手死於道路乎아 都押衙劉知遠曰 明公이 久將兵하야 得士卒心하고 今據形勝之地하야 士馬精彊하니 若稱兵傳檄이면 帝業을 可成하리니 奈何以一紙制書로 自投虎口乎잇가 掌書記桑維翰曰 契丹主部落이 近在雲, 應하니 公誠能推心하야 屈節【屈折肢節하야 以服事也라 】事之하면 萬一有急에 朝呼夕至하리니 何患無成이릿고 敬瑭이 意遂決하야 表唐主호되 養子【潞王이라 】는 不應承祀하니 請傳位許王【名從益이니 明宗子라 】하노이다 唐主手裂其表하야 抵地하고 制하야 削奪敬瑭官爵하고 以張敬達로 兼太原四面排陳使하야 率諸將討之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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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唐主가 石敬瑭을 鄆州의 鎭으로 옮기고자하니, [ 李崧]과 [ 呂琦]【[ 李崧]은 翰林學士이고, [ 呂琦]는 知制誥이다.】 등이 모두 강력히 간하여 불가하다고 하였다. [ 薛文遇]가【[ 薛文遇]는 知制誥이다.】 말하기를 “河東(石敬瑭)은 鎭을 옮겨도 배반하고 鎭을 옮기지 않아도 배반하여, 반란이 조석간에 있을 것이니, 사전에 미리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唐主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卿의 말이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니, 成敗에 관계없이 내 결행하겠다.” 하였다. 즉시 除目을 만들어 學士院에 맡겨 制書를 草해서 石敬瑭을 天平節度使로 임명하니, 制書가 나오자 文班과 武班이【文官과 武官을 東班과 西班이라 하였다.】 서로 돌아보고 사색이 되었다. 石敬瑭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장수‧막료들과 상의하기를 “내가 다시 河東에 올 때에 主上이 나와 대면하고서 종신토록 딴 곳으로 바꾸어 제수하지 않기로 허락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이러한 명령이 있으니, 금년 千春節에 공주와 말씀한 바와 똑같지 않은가. 내가 난을 일으키지 않으면 조정에서 군대를 일으킬 것이니, 어찌 손을 묶고 도로에서 죽겠는가.” 하였다. 都押衙인 劉知遠이 말하기를 “明公은 오랫동안 군대를 거느려서 사졸들의 마음을 얻었고, 지금 지형이 유리한 곳을 점거하여 군사와 말들이 정예하고 강하니, 만약 군대를 일으키고 격문을 돌린다면 황제의 기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한 장의 制書 때문에 자신을 호랑이의 입에 던진단 말입니까.” 하였다. 掌書記桑維翰이 말하기를 “契丹主의 部落이 가까이 雲州와 應州에 있으니, 公이 진실로 마음을 다 바쳐 복종하여 섬긴다면【사지의 관절을 굽혀 복종하여 섬기는 것이다.】 만에 하나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아침에 부르면 저녁에 올 것이니, 어찌 성공하지 못함을 근심하겠습니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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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敬瑭이 은밀히 間使를 보내어【間은 去聲이니, 사잇길을 따라 은밀히 사신을 보내는 것이다.】契丹에 구원을 요청할 적에 桑維翰으로 하여금 表文을 草하게 하여, 契丹主에게 臣이라 칭하고 또 아버지를 섬기는 예로 섬길 것을 청하였으며, 일이 성공하는 날에 盧龍의 한 道와 鴈門關 이북의 여러 州를 떼어줄 것을 약속하였다. 劉知遠이 간하기를 “신을 칭하는 것은 가하나 아버지를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은 너무 지나치며,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어도 충분히 그 군대를 부를 수 있으니, 굳이 토지를 떼어줄 것을 허락할 필요가 없습니다. 후일에 크게 중국의 후환거리가 되면 후회막급일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石敬瑭이 따르지 않았다. 表文이 契丹에 이르자, 契丹主가 크게 기뻐하여 仲秋(8월)를 기다려 국력을 기울여 달려가 구원할 것을 허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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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契丹主가 5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30만 대군이라 이름하면서 楊武谷으로부터 남진하니, 旌旗가 50여 리에 끊이지 않았다. 晉陽에 이르러서汾水의 북쪽인 虎北口에 주둔하고서唐나라 騎兵將인 高行周와 [ 苻彦卿]과 교전할 적에 石敬瑭이 마침내 劉知遠을 보내 출병하여 돕게하니, 唐軍이 크게 패하였다. 張敬達이 사자를 보내어 唐나라에 패전을 알리자, 唐主가 크게 두려워하여 조서를 내리고 친히 정벌하니, 鳳翔에서 潞王을 황제로 추대한【潞王이 鳳翔節度使로 있다가 즉위하였다.】 이래로 諸軍들이 교만하고 사나워져서 부릴 수가 없었으나 [ 苻彦饒]는【[ 苻彦饒]는 彰聖都指揮使이니, 당시 大軍의 후원이 되었다.】 이들이 반란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군법으로 단속하지 못하였다. 唐主는 河陽에 이르러서 마음속에 북쪽으로 출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다만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슬피 노래하며, 신하들이 혹 북쪽으로 출동할 것을 권하면 말하기를 “경들은 말하지 말라. 石郞이 나로 하여금 억장이 무너지게 한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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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契丹主가 石敬瑭에게 이르기를 “내가 3천 리 밖에서 난리에 달려왔으니,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너의 기풍과 모습, 지식과 도량을 보니, 참으로 중원의 주인이다. 내 너를 세워 천자로 삼고자 한다.” 하였다. 石敬瑭이 서너 차례 사양하였는데, 장수와 관리들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자, 마침내 허락하였다. 契丹主가 책봉하는 글을 만들어 石敬瑭을 大晉皇帝로 임명하니, 石敬瑭이 이날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하여 幽州와 薊州 등 16주를 떼어서 契丹에게 주고 인하여 해마다 비단 30만 필을 바칠 것을 허락하였으며, 制書를 내려 長興[頭註] 長興長興은 明宗의 연호이다. 7년을 고쳐 天福 元年이라고 하였다.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石敬瑭의 죄는 閔帝를 돕지 않은 데에 있다. 만일 閔帝가 나라를 잃었으면 마땅히 許王을 높이 받들었어야 하니, 衛州의 일을 하지 아니하여 나라를 찬탈하고 군주를 시해한 죄를 李從珂에게 돌리고, 의리에 입각하여 군대를 일으켜서 名과 實이 모두 바르게 되었다면 그 德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契丹에게 신하를 칭하고 영토를 떼어주어 契丹의 군주를 아버지로 섬겼는데, 그 이익이 두 代를 가지 못하였고 그 폐해가 마침내 무궁한 후세에 미쳤다. 그러므로 功利로 나라를 도모하고 禮義에 근본하지 않으면 곧바로 禍를 당하지 않는 자가 있지 않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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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나라가 [ 李崧]을 中書侍郞同平章事로 임명하여樞密使를 맡기고, 桑維翰을 兼樞密使로 임명하였다. 이때 晉나라가 새로 천하를 얻으니, 藩鎭들이 대부분 복종하지 않았고, 혹 복종하더라도 反仄하여【反仄은 불안해하는 것이다.】 편안하지 못하였으며, 전란을 겪은 뒤에 조정의 府庫가 고갈되어서 민간이 곤궁하였는데 契丹의 무리한 요구는 만족함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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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夏四月에 晉主至汴州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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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4월에 晉主가 汴州(大梁)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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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吳主가【吳主는 楊溥이다.】 조서를 내려 帝位를 齊王徐知誥에게 禪讓하였다.【齊王徐知誥는 뒤에 本姓인 李氏姓을 회복하였다.】齊王徐知誥가 金陵에서 황제에 즉위하여【[原註] 齊王誥卽皇帝位于金陵:齊王誥는 徐知誥이다.】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昇元으로 개원하고 국호를 唐이라 하였으며,【[頭註] 이것이 南唐이다. 徐知誥는 昇으로 개명하였다. [通鑑要解] 徐知誥는 본래 李氏의 아들이다. 이미 大號(황제의 칭호)를 거행한 뒤에 唐나라의 계통을 잇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국호를 唐으로 고쳤다.】吳主를 높여讓皇이라 하였다. - 宋나라 때에 이르러서 나라가 없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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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晉天福三年이라 ○ 蜀廣政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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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938) - 晉나라 天福 3년이다. ○ 蜀나라 廣政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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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契丹이 改元會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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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이 會同으로 개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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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子]〈晉天福五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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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940) - 晉나라 天福 5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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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倉吏歲終에 獻羨餘萬石이어늘 唐主曰 出納有數하니 苟非掊民【掊는 聚斂也라 】刻軍이면 安得羨餘邪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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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나라의 창고관리가 연말에 남은 곡식 1만 석을 바치자, 唐主가 말하기를 “出納은 일정한 수가 있으니, 만일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고【掊는 聚斂하는 것이다.】 군량을 깎아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남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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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나라 [ 李崧]이 아뢰기를 “여러 州의 창고에 있는 양식이 計帳(회계장부)【計帳은 해마다 그 수를 계산하여 장부를 만들어 三司에 보고하는 것이요, 또 다음 해에 부과할 부역의 큰 수를 갖추어 度支에 보고하는 것이다.】 이외에 남은 것이 자못 많습니다.”라고 하니, 晉主가 말하기를 “법으로 정한 것 이외에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것은 죄가 법을 부정하게 적용하는 것과 같다. 창고관리는 특별히 그 죽음을 용서하니, 각각 통렬히 징계하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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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巢가 長安을 침범한 이래로 천하가 수십 년 동안 혈전을 겪으니, 그런 뒤에 여러 나라가 각각 영토를 소유하여【영토를 모아서 諸侯를 봉하되 封地를 받은 것이 각각 구분이 있는 것이다.】 전쟁이 다소 잠잠해졌는데, [ 唐主]가 즉위하자 江‧淮 지방에 매년 풍년이 들어서 군량이 남아돌았다.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폐하께서 중흥하심에 지금 북방에 어려움이 많으니, 마땅히 출병하여 옛날 소유했던 강토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였다. [ 唐主]가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軍中에서 자라 군대가 백성들의 폐해가 됨이 심함을 직접 보아왔다. 차마 다시는 출병하는 일을 말하지 못하겠다. 가령 저들의 백성들이 편안하면 우리 백성들 또한 편안하니, 또 어찌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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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나라 成德節度使安重榮이 契丹에게 신하 노릇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수천 자의 表文을 올리니, 대저 晉主가 契丹을 아버지로 섬기고 中國의 재정을 고갈시켜 만족함이 없는 오랑캐에게 잘 보이는 것을 배척하였다. 이에 桑維翰이 다음과 같이 은밀하게 상소하였다. “폐하께서 晉陽의 난을 벗어나【晉陽의 난리는 앞의 丙申年(936)에 있었다.】 천하를 소유하신 것은 모두 契丹의 공이니, 이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은 해마다 비단을 바치는 것을 가지고 국가의 재정을 소모한다고 이르고, 몸을 낮추고 겸손한 것을 가지고 굴욕을 겪는다고 이릅니다. 그러나 전쟁이 이어져 그치지 않고 화가 맺혀서 풀리지 않는다면 재력이 점차 고갈될 것이니, 국가의 재정을 소모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무력을 동원하게 되면 武官과 功臣들이 우선 당장의 편안함만 지나치게 바라고 邊方의 藩鎭과 먼 郡들이 교만하고 잘난 체하여 아랫사람은 능멸하고 윗사람은 침체할 것이니, 굴욕을 당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폐하께서 농사를 가르치고 군사들에게 전술을 익히게 하며 군대를 기르고 백성을 쉬게 하여, 나라에 內憂가 없고 백성들에게 남은 힘이 있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 틈을 보아 출동하시면 출동함에 반드시 성공이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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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晉主(石敬瑭)가 죽으니, 馮道가【馮道는 守司徒 兼侍中이다.】景延廣과 함께 의논하기를 “국가에 어려움이 많으니, 마땅히 長君(長子)을 세워야 한다.” 하고 마침내 廣晉尹齊王石重貴를【[原註] 石重貴는 황제(石敬瑭)의 兄(石敬儒)의 아들이다. [頭註] 廣晉은 〈高祖本紀〉에 太原으로 되어 있다.】받들어 후사로 삼으니, 이날 齊王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景延廣은 〈황제를 세운 것이〉자신의 공이라 하여 비로소 권력을 행사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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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主가 처음 즉위할 적에 大臣들이 표문을 받들어 올리고 臣이라 칭하며 契丹에게 喪事를 알릴 것을 의논하였는데, 景延廣은【景延廣은 天平節度使 侍衛馬步都虞侯이다.】 〈표문을 올리지 말고〉편지를 보내되 孫이라 칭하고 臣이라 칭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景延廣의 의논은〉契丹主가 高祖(石敬瑭)로 하여금 兒皇帝라고 칭하게 한 것을 이용하여 家人의 禮를 써서 편지를 보낸 것이다.】契丹이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꾸짖자, 景延廣이 다시 불손한 말로【불손한 말이란 景延廣이 契丹의 사신을 가두었다가 이윽고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돌아가거든 네 임금에게 말하기를 ‘先帝는 北朝(契丹)에서 세웠기 때문에 臣이라고 칭하고 표문을 받들어 올렸지만, 今上은 中國에서 세웠으니 孫이라고 칭하면 충분하다. 할아버지(契丹主)가 노하여 와서 교전한다면 손자는 십만 자루의 잘 연마한 검을 차고 상대할 뿐이다.’라고 하라.” 하였다.】 답하였다. 契丹의 盧龍節度使趙延壽는【趙延壽는 본래 唐나라 사람인데, 晉나라 초기에 契丹에게 사로잡혔다.】晉나라를 대신해서 中國의 황제가 되고자 하여 자주 契丹을 설득해서 晉나라를 공격하게하니, 契丹主가 자못 그 말을 옳게 여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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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契丹 〈太宗會同五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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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 - 太宗會同 5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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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王
[癸卯]〈晉天福八年이라 凡五國, 三鎭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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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943) - 晉나라 天福 8년이다.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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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唐主가 등창이 났는데, 齊王李璟을 불러【李璟은 李昇의 長子이다.】 궁중에 들어와서 병을 간호하게 할 적에 唐主가 李璟에게 이르기를 “내가 金石의 丹藥을 복용한 것은 본래 수명을 연장하고자 해서였는데 도리어 생명을 더 손상시켰으니, 너는 마땅히 경계하라.” 하였다. 이날 밤에 죽으니, 元宗이 즉위하였다. [新增]胡氏(胡寅)가 말하였다. “〈약은〉생명을 더 연장할 수는 없으나 병은 치료할 수 있다. 漢나라 高祖도 오히려 말하기를 ‘사람의 목숨은 마침내 하늘에 달려있으니, 비록 扁鵲인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제 병이 없이 생명을 연장하는 祥瑞를 구하였으니, 그 미혹됨을 굳이 폄하할 것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 걸려들어 죽음을 초래한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이를 경계하는 자가 없는 것은 탐욕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方士는 사람들에게 수명을 연장하여 죽지 않는 방법을 가르치고, [ 釋氏]는 사람들에게 죽어서 證果를 얻을 것을 가르치니, 오직 탐욕스러운 자들이 여기에 빠진다. 그러므로 《孟子》에 이르기를 ‘마음을 기름은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異端과 佛老의 학문은 혹 친애하는 마음을 잘라서 제거하기도 하고 혹 세상만사를 버려 적막한 물가에서 마음이 불꺼진 재와 같고 형체가 마른 나무와 같아서 욕망이 없는 자와 같다. 그러나 道士들은 신선이 되어 가볍게 날아다니기를 바라고 佛者들은 후일의 果報를 바라서 그 욕망이 더 클 수가 없으니, 군자가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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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契丹 〈會同六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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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 - 會同 6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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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晉開運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三鎭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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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944) - 晉나라 開運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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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契丹 〈會同七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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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 - 會同 7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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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晉開運二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殷改稱閩而亡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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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945) - 晉나라 開運 2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殷나라가 閩이라고 개칭하였으나 바로 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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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이 復大擧入寇라가 大敗北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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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이 다시 크게 군대를 일으켜침입하였다가대패하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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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契丹 〈會同八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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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 - 會同 8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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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晉開運三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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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946) - 晉나라 開運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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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契丹主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들어와 침략하자, 晉主가 杜威를 上將으로 임명하였는데,【杜威를 上將으로 임명하였다는 것은 北面行營都招討使로 임명한 것을 이른다.】杜威는 李守貞【李守貞은 天平節度使로서 兵馬都監이 되었다.】, 宋彦筠과【宋彦筠은 前 威勝節度使로서 步軍左廂都指揮使가 되었다.】 함께 契丹에 항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契丹主가 이들을 속여 말하기를 “趙延壽는 위엄과 인망이 본래 부족하여 中國의 황제가 되지 못할까 두렵다. 너희들이 과연 항복한다면 마땅히 너를 황제로 세우겠다.” 하였다. 杜威가 기뻐하여 마침내 항복하고 군사들에게 갑옷을 벗으라고 명하니, 군사들이 모두 통곡하여 통곡하는 소리가 언덕과 들판에 진동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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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契丹 〈會同九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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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 - 會同 9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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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曰 高祖【石敬塘이라 】以地尊勢重으로 迫於猜嫌한대 親執臣子之禮하야 以事戎狄하고 賂之土地하야 籍其兵力하야 以取天下하니 羽翼未成이면 不可以高飛요 國家未治면 不可以應敵이라 齊王은 捨桑維翰之深謀하고 信景延廣之狂策하야 內政不修하고 而外挑彊隣하야 使流民塗野草하고 胡騎汚宮闕하야 生爲降虜하고 死爲羈魄하니 非不幸也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少主信景延廣之狂策하야 內政不修하고 外挑强胡라 自陽城一捷之後로 顧謂國勢無虞라하야 驕奢益甚하야 四方貢獻을 皆歸內府하며 廣置宮室하고 崇飾後庭하며 賞賜伶優에 多寡無算하고 委任馮玉하야 倚勢弄權이라 當旱蝗水潦 國脈如線之時하야 方且今年에 遣使括民穀하고 明年에 遣使括民財하며 迨夫契丹入寇하야 境內皇皇이로되 猶且調鷹苑內하고 排沮人言하야 遂使橫尸蔽野하고 宗廟丘墟하니 跡其人謀하면 豈不幸哉아 夫以晉之立國이 絶滅三綱하고 屛棄五常이라 報叔母爲妻하야 而夫婦亂矣요 尊夷狄爲父하야 而父子亂矣요 爲中國主하야 臣于契丹하야 而君臣亂矣라 三綱旣失에 中國已淪胥爲夷하니 不待契丹主服赭袍坐崇元殿하야 令百官行入閤禮하고 而風聲氣習之來侵이 已非一日矣라 此蓋人道之大變이요 中國之巨禍라 至使斯人으로 與禽獸雜處하야 而又離其害焉하니 此豈容以常理斷哉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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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에 말하였다. “高祖(石敬塘)는【高祖는 石敬塘이다.】 지위가 높고 권세가 중한 이유로 황제의 시기와 혐의에 핍박을 받자, 신하의 예를 친히 행하여 戎狄(거란)을 섬기고 토지를 바쳐 병력을 빌려서 이로써 천하를 차지하였으니, 羽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높이 날 수가 없고 국가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적에 대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齊王(石重貴)은 桑維翰의 깊은 계책을 버리고 景延廣의 미친 계책을 믿고서 內政을 닦지 않고 밖으로 강한 이웃나라에 도전하여, 유리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들풀에 피를 뿌리게 하고 오랑캐 기병으로 하여금 궁궐을 더럽히게 하여, 살아서는 항복한 포로가 되고 죽어서는 떠돌아다니는 혼백이 되었으니, 이는 불행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少主(石重貴)가 景延廣의 미친 계책을 믿고서 안으로 정사를 닦지 않고 밖으로 강한 오랑캐에게 도전하였다. 그리하여 陽城에서 한 번 승리한 뒤로는 도리어 國勢가 근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교만하고 사치함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하여 四方에서 貢物로 바친 것을 모두 內府로 돌리며, 궁실을 널리 건축하고 後庭을 성대하게 꾸미며, 광대들에게 賞을 줄 적에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외척인 馮玉에게 정사를 위임하여 권세를 믿고 농간하게 하였다. 가뭄이 들고 蝗蟲이 발생하며 수해가 들어 국가의 명맥이 실낱 같은 때를 당하여, 도리어 금년에 使者를 보내어 백성들의 곡식을 긁어모으고, 다음해에 使者를 보내어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았으며, 거란이 쳐들어옴에 미쳐서 境內가 위급하였으나 오히려 上林苑 안에서 매를 조련하고 사람들의 간언을 배척하고 막아서 마침내 시신이 들을 뒤덮고 宗廟가 폐허가 되게 하였으니, 사람의 잘못된 계책을 살펴보면 어찌 불행이라 하겠는가. 晉나라가 건국할 때에 三綱을 끊어 없애고 五常(五倫)을 물리쳐 버렸다. 叔母를 간음하고 아내로 삼아 夫婦의 윤리가 문란하였고, 夷狄을 높여 아버지라 칭하여 父子의 윤리가 혼란하였고, 中國의 군주로서 契丹에게 신하 노릇하여 君臣의 도리가 혼란해졌다. 三綱을 잃은 뒤에 中國이 이미 몰락하여 서로 오랑캐가 되었으니, 굳이 契丹의 군주가 붉은 도포를 입고 崇元殿에 앉아서 百官들로 하여금 入閤禮를 행하게 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오랑캐의 風聲(風敎)과 氣習에 침입당한 것이 이미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이는 人道의 큰 변고이고 中國의 큰 禍이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로 하여금 禽獸와 함께 처하게 하여 또다시 그 폐해를 입게 하였으니, 이 어찌 떳떳한 이치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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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後晉은 二主에 共十一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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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後晉은 두 군주에 모두 11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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