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四十九 後唐紀
莊宗
[ 莊宗]은 재위가 3년이고 壽가 35세이다. [ 莊宗]은 이름이 [ 存勖]이니, 唐나라의 屬籍(왕실의 족보)에 붙여 姓을 李氏라 하였다. 본래 西突厥 종족이니, 姓은 [ 朱邪氏]이다. 아버지[ 李克用]이 唐나라에 공을 세워 [ 晉王]에 봉해졌는데, 뒤에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 唐이라고 칭하였다. |
---|
계미(923) - 岐나라는 唐나라 天祐 20년을 칭하였고, 梁나라 龍德 3년은 10월에 끝나고 4월 이후는 唐나라 [ 莊宗][ 李存勖]의 同光 元年이다. ○ 이해에 梁나라가 망하고 晉나라가 唐나라를 칭하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
---|
夏四月에 晉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唐이라하다 梁主遣段凝【內莊宅使라 凝妹爲梁太祖美人이라 故로 親信之러니 後率精兵五萬하고 降唐하니라 】하야 監大軍於河上하니 敬翔, 李振이 屢請罷之한대 梁主曰 凝未有過하니라 振曰 俟其有過면 則社稷危矣리이다 凝이 乃厚賂趙, 張하야 求爲招討使어늘 翔, 振이 力爭하야 以爲不可라호되 趙, 張主之하야 竟代王彦章【敵號王鐵槍이라 趙, 張等이 惡彦章하야 相與協力傾之하다 段凝이 素疾彦章하고 諂附趙, 張하야 百方沮撓하야 惟恐有功이라 每捷奏至에 趙, 張이 悉歸功於凝하야 竟代彦章하다 已而요 梁亡하니 凝이 率精兵降(后)[唐]하야 奏趙巖, 張漢傑이 竊弄權兵하야 殘害群生하니 請族之하소서 凝賂劉后하야 以求恩寵하니 莊宗賜姓名曰李紹欽이라하고 以爲秦寧節度使하니라 】하야 爲北面招討使하니 於是에 宿將憤怒하고 士卒亦不服하니라 |
---|
여름 4월에 [ 晉王]이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大唐이라 하였다. [ 梁主]가 段凝을 보내어【段凝은 內莊宅使이다. 段凝의 누이가 梁나라 [ 太祖]의 美人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를 친애하고 신임하였는데, 뒤에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唐나라에 항복하였다.】河水 가에서 大軍을 감독하게하니, 敬翔과 李振이 여러 번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 梁主]가 말하기를 “段凝이 아직 잘못한 것이 있지 않다.”라고 하자, 李振이 말하기를 “그가 잘못하기를 기다리면 사직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하였다. 段凝이 마침내 [ 趙巖]과 [ 張漢鼎]에게 많은 뇌물을 보내어招討使가 되기를요구하였다. 敬翔과 李振이 강력히 간쟁하여불가하다고하였으나[ 趙巖]과 [ 張漢鼎]이 이것을 주장해서 끝내 王彦章을 대신하여【적들이 王彦章을 王鐵槍이라고 불렀다. [ 趙巖]과 [ 張漢傑] 등이 王彦章을 미워하여 서로 힘을 합쳐 모함하였다. 段凝이 평소 王彦章을 미워하고 [ 趙巖]과 [ 張漢傑]에게 아첨하여 백방으로 王彦章을 저지해서 王彦章이 행여 공을 세울까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승전보가 이를 때마다 [ 趙巖]과 [ 張漢傑]이 段凝에게 공을 모두 돌려 끝내 段凝으로 하여금 王彦章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윽고 梁나라가 망하니, 段凝이 정예병을 거느리고 唐나라에 항복하여 아뢰기를 “[ 趙巖]과 [ 張漢傑]이 병권을 훔쳐 농간하여 生民들을 잔인하게 해쳤으니, 멸족시키소서.”라고 하였다. 段凝이 [ 劉后]에게 뇌물을 바쳐 은총을 구하니, [ 莊宗]이 李紹欽이라는 姓名을 하사하고 秦寧節度使로 임명하였다.】北面招討使에 임명하니, 이에 老將들이 분노하였고 사졸들 또한 복종하지않았다. |
---|
8월에 梁나라 右先鋒指揮使康延孝가 백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도망해오자, [ 唐主]가 사람을 물리치고康延孝에게 梁나라의 사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梁나라 조정은 영토가 좁지도 않고 병력이 적지도 않으나 그 행하는 일을 살펴보면 끝내 반드시 패망할 것입니다. 근래에 또 듣자하니, 여러 길로 출병하여 10월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唐나라를 進攻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신이 적이 梁나라 군대를 살펴보건대, 한 곳에 모이면 적지 않고 분산하면 많지 않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 용맹을 기르고 힘을 축적하여 그들이 병력을 분산하기를 기다려서 정예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鄆州로부터 곧바로 大梁에 이르러 괴뢰 군주를 사로잡는다면 열흘이나 한 달 사이에 천하가 평정될 것입니다.” 하니, [ 唐主]가 크게 기뻐하였다. |
---|
[ 唐主]는 梁나라 사람들이 크게 군대를 일으켜 여러 길로 들어와 침략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는【[通鑑要解] 唐主聞梁人欲大擧數道入寇:[ 唐主]가 康延孝의 말을 들은 것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회의하니, 郭崇韜가【郭崇韜는 樞密使이다.】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段凝은 본래 장수의 재질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임기응변하여 계책을 결단하지 못하니 두려워할 만한 상대가 못 되며, 梁나라에서 항복해 온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大梁에는 군대가 없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만약 군대를 남겨두어 魏州를 지켜 楊劉를【楊劉는 지명이다.】 굳게 막고, 스스로 정예병을 거느리고 鄆州와 합세하여 계속 몰아쳐서 汴京(大梁)으로 쳐들어간다면 저들의 성안은 이미 텅 비어 있을 것입니다. 저들은 반드시 소문만 듣고도 두려워서 스스로 궤멸될 것이니, 만약 괴뢰 군주가 목을 바친다면 여러 장수들이 스스로 항복할 것입니다.” 이에 [ 唐主]가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나의 뜻과 부합한다. 대장부가 잘되면 왕이 되고 잘못되면 포로가 되는 것이니, 나는 출전하기로 결정했다.” 하였다. 겨울 10월에 [ 唐主]가 大軍을 거느리고黃河를 건너鄆州에 이르러서梁나라 군대를 만나 一戰에 패퇴시키고, 추격하여中都에 이르러서 그 성을 포위하니, 성에 수비가 없었다. 잠시 후에 梁나라 군대가 포위를 뚫고 나오자, 王彦章을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
---|
○ 康延孝請亟取大梁한대 李嗣源【唐遣嗣源하야 取梁鄆州하고 以嗣源爲節度使하니라 】曰 兵貴神速하니 今彦章就擒을 段凝이 必未之知라 此去大梁至近하고 前無山險하니 方陳【陳은 讀曰陣이니 方陣은 竝陣而進也라 】橫行하야 晝夜兼程이면 信宿【再宿曰信宿이라 】可至하리이다 段凝이 未離河上하야 友貞이 已爲吾擒矣리니 延孝之言이 是也니이다 唐主從之하야 令下에 諸軍이 皆踊躍願行이러라 梁主使人促段凝軍이러니 旣辭에 皆亡匿이라 梁主日夜涕泣하고 不知所爲하며 置傳國寶於臥內라가 忽失之하니 已爲左右竊之하야 迎唐軍矣러라 梁主謂皇甫麟【控鶴都指揮使라 】曰 李氏는 吾世讐라 理難降首【降은 平聲이니 言迎降以自首也라 一說에 降은 讀如字하니 低頭爲之下也라하니라 】요 不可俟彼刀鋸라 吾不能自裁하니 卿可斷吾首하라 麟泣하고 遂弑梁主하고 因自殺하다 |
---|
康延孝가 大梁을 속히 점령할 것을 청하자, [ 李嗣源]이【唐나라가 [ 李嗣源]을 보내어 梁나라 鄆州를 점령하고 [ 李嗣源]을 節度使로 임명하였다.】 말하기를 “군대는 신속함을 소중히 여기니, 지금 王彦章이 사로잡힌 것을 段凝은 반드시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곳은 大梁과의 거리가 매우 가깝고 앞에 險阻한 山川이 없으니, 方陣(方形의 陣)을 치고【陳은 陣으로 읽으니, 方陣은 나란히 陣을 치고 전진하는 것이다.】 횡행해서 밤낮으로 행군 속도를 배가한다면 이틀 밤이면【이틀밤을 묵는 것을 信宿이라 한다.】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니, 段凝이 河水 가를 떠나기 전에 [ 朱友貞]은 이미 우리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康延孝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 唐主]가 그의 말을 따라 명령을 내리자, 諸軍들이 모두 기뻐 날뛰며 출전하기를 원하였다. [ 梁主]가 사람을 시켜 段凝에게 군대를 출동할 것을 재촉하였는데, 段凝이 하직하자 군사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 梁主]가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줄을 몰랐으며, 傳國寶를 침실 안에 두었다가 갑자기 잃어버리니, 이미 좌우 사람들이 훔쳐가서唐나라 군대를 맞이하였다. [ 梁主]가 [ 皇甫麟]에게【[ 皇甫麟]은 控鶴都指揮使이다.】 이르기를 “李氏는 우리와 대대로 원수지간이다. 도리상 머리를 숙이고 항복할 수도 없고,【降(항)은 平聲이니, 적을 맞이하여 항복하고 자수하는 것을 말한다. 一說에 降(강)은 본자대로 읽으니, 머리를 숙여 그의 아랫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가만히 앉아서 저들의 칼과 톱(刑具)을 기다릴 수도 없다. 나는 용기가 없어 자결할 수 없으니, 卿이 나의 목을 자르라.” 하였다. 이에 [ 皇甫麟]이 울면서 마침내 [ 梁主]를 시해한 다음 인하여 자살하였다. |
---|
|
---|
[ 梁主]는 사람됨이 온화하고 공손하고 검약하여 酒色에 빠지는 잘못이 없었으나, 다만 [ 趙巖]과 [ 張漢鼎]을 총애하고 신임하여 그들로 하여금 위엄과 복을 멋대로 행사하게 하고 敬翔과 李振 등【敬李는 敬翔과 李振이다.】[ 太祖]의 옛 신하들을 소원히 하고 버려서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아 멸망에 이르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均王]이 [ 朱友珪]를 죽이고 뒤를 이어 즉위하여 의리로써 역적을 토벌하였으니, 성공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다. 그러나 梁나라가 禍를 키운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므로 하늘이 장차 이를 폐하려 한 것이니, 누가 일으킬 수 있겠는가. 더구나 [ 均王]은 부귀한 집안의 子弟로 재주가 보통사람에게도 미치지 못하여 [ 趙巖]과 [ 張漢鼎]을 총애하여 신임하고 敬翔과 李振을 소원하게 대하여 버렸으며, 매관매작을 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져서 정사가 닦여지지 못하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떠나갔다. 그리하여 당나라(後唐) 군대가 한번 지휘함에 종묘사직이 갑자기 멸망당하였으니, 이는 [ 李亞子(李存勖)]가 用兵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요, 梁나라가 스스로 잘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 朱三(朱溫)]이 항복한 역적으로서 일어나 하루아침에 갑자기 藩鎭의 符節을 소유하니, 지고 있어야 할 小人이 君子의 수레를 탐에 욕심을 부림이 끝이 없었다. 그리하여 天子를 포위하여 압박하였으며 朝臣을 살해하고[ 太后]를 죽였으며 여러 왕을 죽이고 두 황제를 시해하여 唐나라의 國統을 빼앗았다. 그의 죄를 살펴보면 南山의 대나무를 다 베어 기록한다 해도 다 쓸 수가 없으니 王莽 이래로 한 사람일 뿐이요, 흉포하고 잔악하고 음란함은 王莽보다도 더 심하였으니, 두 代 만에 망한 것은 불행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
---|
[ 唐主]가 사신을 보내어 梁나라를 멸망시킨 사실을 吳나라와 蜀나라에 알리니, 두 나라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吳나라의 嚴可求가 말하기를 “臣이 들으니, [ 唐主]가 처음 中原을 얻자 뜻과 기운이 교만하고 아랫사람을 다스림에 법도가 없다고 하니,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장차 內變(內亂)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말을 겸손하게 하고 예물을 후하게 하여 국경을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면서 기다릴 뿐입니다.” 하였다. [ 唐主(李存勖)]는 어려서부터 음률을 잘하였다. 그러므로 광대들 중에【伶은 악관이니, 伶倫은 옛날 악사이다. 그러므로 후세에 대부분 악관을 伶官이라고 칭하였다.】 총애 받는 자가 많아서 항상 좌우에서 모시고, [ 唐主]가 때때로 스스로 얼굴에 분과 먹을 바르고 광대들과 뜰에서 희롱하여 劉夫人을 기쁘게 하니, [ 唐主]가 광대로 자처하여 광대 이름을 李天下라 하였다.【唐主가 마침내 광대로 자처하여 스스로 李天下라고 칭하였다.】 여러 광대들이 궁중을 출입하면서 사대부들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니, 여러 신하들이 분노하고 미워하였으나 감히 노여운 기운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
---|
[ 張全義]가【[ 張全義]는 河南尹이니 처음 이름은 [ 言]이다. 唐나라 昭宗이 [ 全義]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梁나라 [ 太祖]가 [ 宗奭]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는데, 唐나라 조정에 들어가서는 다시 [ 全義]라고 이름하였다.】[ 唐主]에게 洛陽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자, 그의 말을 따랐다. |
---|
○ 契丹 〈天贊二年이라〉 |
---|
契丹 - 天贊 2년이다. - |
---|
[甲申]〈後唐同光二年이라 ○ 是歲에 岐降後唐하니 凡四國, 四鎭이라〉 |
---|
갑신(924) - 後唐同光 2년이다. ○ 이해에 岐王이 後唐에 항복하니, 모두 네 나라이고 네 鎭이다.- |
---|
2월에 [ 唐主]가 南郊에 제사 지내고 크게 사면령을 내렸는데, 郭崇韜가 첫 번째로 勞軍錢(군사들을 위로하는 돈)【唐나라가 천하의 재물을 內府와 外府로 나누어 州縣에서 上供한 것은 外府에 넣어 국가의 經費에 충당하고, 方鎭에서 貢物로 바친 것은 內府에 넣어 임금의 宴會와 賞賜에 충당하였다. 이에 外府는 텅 비어 고갈되고 內府는 물건이 산처럼 쌓여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勞軍錢이 부족하자, 郭崇韜가 上에게 아뢰기를 “臣이 이미 소유한 家産을 모두 기울여 郊祀의 큰 禮를 도왔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도 內府의 재물을 내어 有司에게 내리소서.”라고 하였다. [ 唐主]가 묵묵히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晉陽에 따로 저축한 재물이 있으니, 租庸使로 하여금 輦으로 실어와서 경비를 돕게 하겠다.” 하였다.】 10만 緡을 바쳤다. [ 唐主]는 內府의 재물이 산처럼 쌓였으나 군사들에게 내려주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晉陽에 따로 저축한 재물이 있으니, 租庸使로 하여금【租庸使는 실어 나르는 것을 주관한다.】 輦으로 실어와서 경비를 돕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에 차지 못하여 비로소 원망하고 한하여 배반할 마음이 있었다. |
---|
契丹 - [ 肖阿古只]가 唐나라 幽州와 蔚州를 침략하였다. - 唐나라가 [ 李嗣源]을 보내어成德에 주둔하여막게하였다. |
---|
[乙酉]〈後唐同光三年이라 ○ 蜀咸康元年이요 漢白龍元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四鎭이라〉 |
---|
을유(925) - 後唐同光 3년이다. ○ 蜀나라 咸康 元年이고, 漢나라 白龍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네 鎭이다.- |
---|
[ 唐主]는 성품이 굳세고 이기기를 좋아하여 권력이 신하에게 있는 것을 싫어해서 洛陽으로 들어온 뒤에는 광대와 환관들의 참언을 믿고 자못 옛 장수들을 소원히하고의심하였다. [史略 史評][ 胡氏(胡寅)]가 말하였다.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속히 하고자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 하였다. [ 晉王]이 오랑캐로서 李氏姓을 하사받았으니, 어찌 친족의 종실에 비할 수 있겠는가. [ 朱氏]가 멸망하기 전에 편벽되이 一方을 점거하고 大國에 霸者가 되어서 세 변방을 포위하여 차지하였으니, [ 李存勖]이 싸워서 승리하고 공격하여 점령한 재주는 진실로 群雄에게 복종을 받았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돕고 백성을 기른 德은 천하에 알려지지 못하였다. 이에 갑자기 帝位에 올랐으니, 속히 하고자 하고 작은 이익을 본 것이다. 이 때문에 달성하지 못하고 큰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
---|
○ 九月에 唐主與宰相으로 議伐蜀하야 以魏王繼岌【莊宗長子라 初에 唐主遣宦官李從襲等하야 從繼岌하니 雖爲都統이나 軍中制置 皆出崇韜하야 將吏賓客이 趨走盈庭이로되 而都統牙門이 索然하니 從襲等이 恥之하다 崇韜素疾宦官하야 嘗密謂繼岌曰 大王他日에 (騍)[騬]馬도 亦不可乘이어든 況任宦官이리오 宜盡去之하고 專用(土)[士]人하라하니 由是로 宦官이 皆切齒하다 及崇韜不出迎延嗣하야 〈延〉嗣怒하니 從襲曰 郭公專權하고 其子[[(延)[廷]誨]] 日與驍將狎飮하며 指天畫地니이다 近聞自其父請表己以爲蜀帥라하니 一朝有變이면 吾屬이 不知委骨何地니이다 延嗣歸하야 以語(對)[[[劉]后]]하고 后又訴於主하야 請早救繼岌하다 前此에 唐主聞蜀人請崇韜爲帥하고 已不平이러니 至是에 不能無疑라 遣宦官馬彦珪하야 詣成都한대 彦珪見(對)[劉]后하고 曰 蜀中事勢는 憂在朝夕이어늘 安能禀命二千里乎아하니 后復言之라 唐主曰 傳聞之言은 未知虛實이니라 后退하야 自爲敎與繼岌하야 令殺崇韜하다 繼岌將發에 彦珪至하야 以敎示之하니 繼岌曰 彼無釁端이어늘 安可爲此리오 且主上無勅이어늘 獨以皇后敎로 殺招討使可乎아 從襲等泣하고 相與陳利害하니 繼岌從之하다 (騍)[騬]音(果)[繒]이니 犗馬也라 】으로 充西川四面行營都統하고 崇韜로 充東北面行營都招討制置等使하야 軍事를 悉以委之하다 戊申에 大軍이 西行入散關하야 倍道而進하니 王承捷【武興節度使라 】이 以鳳, 興, 文, 扶四州印節로 迎降하고 自餘城鎭은 皆望風款附라 遂進兵逼成都한대 蜀王이 輿櫬銜璧【王氏曰 古者相見之禮에 皆有所執以爲贄하니 公侯伯子男은 執玉이라 賈逵曰 銜璧者는 蓋以手縛于後하야 不能執璧이라 故로 銜之라 】하고 出降하니 大軍이 入成都하다 崇韜禁軍士侵掠하야 市不改肆하니 自出師로 至克蜀히 凡七十日이러라 |
---|
9월에 [ 唐主]가 재상들과 蜀을 정벌할 것을 의논하고서 魏王繼岌을【繼岌은 [ 莊宗]의 長子이다. 처음에 [ 唐主]가 환관[ 李從襲] 등을 보내어 繼岌을 따르게 하였다. 繼岌이 비록 都統이 되었으나 군중의 制置가 모두 郭崇韜에게서 나와, 將吏(軍官)와 빈객들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뜰에 가득하였으나 都統의 아문은 쓸쓸하였으므로 [ 李從襲] 등이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郭崇韜가 평소 환관을 미워하여 일찍이 은밀히 繼岌에게 말하기를 “大王은 후일에 騬馬(거세한 말)도 타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환관에게 맡기신단 말입니까? 마땅히 모두 제거하고 오로지 선비를 등용해야 합니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환관들이 모두 이를 갈며 그를 미워하였다. 郭崇韜가 환관인 [ 向延嗣]를 나와서 맞이하지 않자 [ 向延嗣]가 노여워하니, [ 李從襲]이 말하기를 “郭公이 권력을 독점하고 그 아들 [ 廷誨]가 날마다 용맹한 장수들과 친하여 술을 마시고 기고만장하여 위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래로 땅에 긋곤 합니다. 근래에 들으니, 그의 아비가 表文을 올려 스스로 蜀 지방의 장수가 될 것을 청했다 하니, 하루아침에 변란이 일어나면 우리들은 어디에 뼈를 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 向延嗣]가 돌아가서 이것을 [ 劉后]에게 말하고, [ 劉后]가 또 [ 唐主]에게 참소하여 繼岌을 일찌감치 구원할 것을 청하였다. 戊申日(6월 18일)에 大軍이 서쪽으로 출동하여散關으로 들어가서 행군 속도를 배가하여 전진하니, [ 王承捷]이【[ 王承捷]은 武興節度使이다.】鳳州‧興州‧文州‧扶州 네 州의 印信 및 武興節度使의 印信과 旌節을 가지고 大軍을 맞이하여 항복하였으며, 그 나머지 城鎭도 모두 소문만 듣고 歸附하였다. 마침내 군대를 전진하여 成都를 핍박하였는데, [ 蜀王]이 관을 수레에 싣고 입에 구슬을 물고【王氏가 말하였다. “옛날의 상견례에는 모두 손에 잡고서 禮物로 삼는 것이 있었으니, 公‧侯‧伯‧子‧男은 옥을 잡는다. 賈逵가 말하기를 ‘구슬을 문다는 것은 손을 뒤로 묶어서 구슬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입에 문 것이다.’ 하였다.”】 나와서 항복하니, 大軍이 成都로 들어갔다. 郭崇韜가 군사들에게 침략과 노략질을 금지하여 시장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교역하니, 출병한 뒤로부터 蜀을 점령하기까지 모두 70일이 걸렸다. |
---|
明宗
[ 明宗]은 재위가 8년이고 壽가 67세이다. [ 明宗]은 본래 北狄의 종족이니, [ 莊宗]이 길러 양자로 삼았다. 이름이 [ 嗣源]이니, 뒤에 이름을 [ 亶]으로 고쳤다. 재위할 적에 年事가 여러 번 풍년이 들고 무력을 드물게 사용하니, 五代時代에 비교함에 그런대로 小康이었다. |
---|
병술(926) - 後唐同光 4년 4월은 [ 明宗][ 李嗣源]의 天成 元年이다. ○ 吳越의 寶正 元年이다. ○ 이해에 蜀이 망하고 閩이 나라를 세우니,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
---|
○ 唐趙在禮反【魏博指揮使楊仁晸이 將兵屯貝州하니 時에 天下莫知郭崇韜之罪하고 民間訛言皇后弑帝라하야 人情愈駭라 仁晸部兵皇甫暉作亂하야 劫仁晸曰 主上所以有天下者는 吾魏軍力也어늘 天下已定에 不念舊勞하고 更加猜忌니이다 今聞皇后弑逆하야 京師已亂이라하니 願與公歸면 安知不更爲富貴之資乎잇가 仁晸이 不從한대 暉殺之하고 又劫小校하야 不從한대 又殺之하다 效節指揮使趙在禮 聞亂而走어늘 暉追及하야 示以(一)[二]首하니 在禮懼而從之하니라 】于鄴이어늘 命李嗣源【成德節度使니 是爲明宗이라 】하야 討之하다 三月에 嗣源이 至鄴都하야 下令軍中하야 詰旦【平旦也라 】攻城이러니 是夜에 從馬直【莊宗選驍勇親軍하야 分置四指揮하고 號從馬直이라】軍士張破敗 作亂하야 帥衆大譟하고 殺都將하고 焚營舍하다 詰旦에 亂兵이 逼中軍이어늘 嗣源이 叱而問之曰 爾曹欲何爲오 對曰 將士從主上十年에 百戰以得天下러니 今主上이 棄恩任威하야 云 克城之後에 當盡坑【鄴都亂이어늘 遣歸德節度使李紹榮하야 招撫러니 紹榮이 至鄴한대 皇甫暉拒戰하니 紹榮이 攻之不克이라 以狀聞한대 唐主怒曰 克城之日에 勿遺噍類하라 紹榮이 合諸道兵再攻하고 又遣嗣源하야 將親軍討之호되 不得通이라 嗣源之爲亂兵所逼也에 紹榮이 陳於城南이어늘 嗣源이 相繼召之하야 欲與共討호되 紹榮이 疑之하야 引避不應이라 及嗣源入鄴都에 遂引兵退하야 保衛州하고 奏嗣源已(判)[叛]하야 與賊合이라하니 嗣源이 遣使上章自理호되 不得通하니라 】魏博之軍이라하니 我輩初無叛心이요 但畏死耳라 今衆議欲城中合勢하야 擊退諸道之軍하오니 請主上帝河南하고 令公帝河北하야 爲軍民之主니이다 嗣源이 泣諭之호되 不從이러라 嗣源所奏 皆爲李紹榮所遏하야 不得通하니 嗣源이 由是疑懼라 石敬瑭【尙明宗女永寧公主한대 後爲晉高祖하니라 】曰 夫事는 成於果決而敗於猶豫니이다 康義誠【突騎都指揮使라 】曰 主上無道하야 軍民怨怒하니 公이 從衆則生하고 守節則死니이다 嗣源이 乃令安重誨【中門使也니 後爲樞密使하니라 】로 移檄會兵하니 軍勢大盛이러라 李紹榮이 請唐主幸關東하야 招撫之한대 唐主從之하다 唐主至萬勝鎭하야 聞嗣源已據大梁하고 諸軍離叛하고 神色沮喪하야 登高歎曰 吾不濟【濟는 成也라 】矣로다 卽命旋師하야 歸入洛城하다 四月에 從馬直指揮使郭從謙【伶人이라 】이 作亂하니 近臣宿將이 皆釋甲潛遁이라 俄而요 唐主爲流矢所中하야 須臾遂殂하니라 |
---|
唐나라 [ 趙在禮]가 鄴都에서 배반하자,【魏博指揮使[ 楊仁晸]이 군대를 거느리고 貝州에 주둔하니, 당시에 천하 사람들은 郭崇韜의 죄를 알지 못하였고 민간에서는 황후가 황제를 시해했다고 와전되어 人情이 더욱 놀랐다. [ 楊仁晸]의 부하 병사인 [ 皇甫暉]가 난을 일으켜 [ 楊仁晸]을 위협하기를 “主上께서 천하를 소유하게 된 것은 우리 魏博軍의 힘이었는데, 천하가 이미 평정된 뒤에 옛 공로를 생각하지 않고 다시 의심하십니다. 지금 들으니 황후가 弑逆을 저질러서 京師가 이미 혼란하다고 하니, 바라건대 公과 함께 돌아간다면 어찌 다시 부귀의 밑천이 되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楊仁晸]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자 [ 皇甫暉]가 그를 죽였고, 또 [ 小校]를 위협하였는데 따르지 않자 또다시 [ 小校]를 죽였다. 效節指揮使[ 趙在禮]가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달아나자, [ 皇甫暉]가 쫓아가서 따라잡아 두 사람의 머리를 보이니, [ 趙在禮]가 두려워하여 따랐다.】[ 李嗣源]에게 명하여【[ 李嗣源]은 成德節度使이니, 이가 [ 明宗]이다.】토벌하게하였다. 3월에 [ 李嗣源]이 鄴都에 이르러 軍中에 명령을 내려서 다음날 아침【詰旦은 平旦(동이 틀 때)이다.】 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이날 밤에 [ 從馬直]의【[ 莊宗]이 날래고 용감한 親軍을 선발하여 네 指揮使를 나누어 설치하고 從馬直이라 호칭하였다.】 軍士인 [ 張破敗]가 난을 일으켜 병사들을 거느리고 크게 함성을 지르며 都將을 죽이고 營舍(막사)를 불태웠다. 다음날 아침 난을 일으킨 군사들이 中軍을 핍박하자, [ 李嗣源]이 꾸짖고 묻기를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장병들이 主上을 따른 지가 이미 십 년인데 몸소 수많은 전투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천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상께서 은혜를 버리고 위엄에 맡겨서 성을 점령한 뒤에는 마땅히 魏博鎭의 군대를 다 묻어 죽인다고 하니,【鄴都가 혼란하자 歸德節度使李紹榮을 보내어 招撫하게 하였는데, 李紹榮이 鄴都에 이르자 [ 皇甫暉]가 항거하여 싸우니, 李紹榮이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狀啓로 이 사실을 아뢰자, [ 唐主]가 노하여 말하기를 “성을 점령하는 날에 씨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라.” 하였다. 李紹榮이 諸道의 군대를 규합하여 다시 공격하였으며 또다시 [ 李嗣源]을 보내어 親軍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였으나 소식을 통할 수가 없었다. [ 李嗣源]이 [ 唐主]에게 아뢰는 것을 李紹榮에게 모두 저지당하여 통하지 못하니, [ 李嗣源]이 이로 말미암아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 石敬瑭]이【[ 石敬瑭]은 [ 明宗]의 딸 永寧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뒤에 晉나라 [ 高祖]가 되었다.】 말하기를 “일은 과감하게 결단하는 데서 이루어지고 망설이는 데서 실패합니다.” 하였다. 康義誠이【康義誠은 突騎都指揮使이다.】 말하기를 “주상이 무도하여 군사와 백성들이 원망하고 노여워하니, 公이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면 살고 신하의 절개를 지키면 죽을 것입니다.’ 하였다. [ 李嗣源]이 마침내 安重誨로 하여금【安重誨는 中門使이니, 뒤에 樞密使가 되었다.】 檄文을 돌려 군사를 모으게 하니, 軍勢가 크게 성하였다. 李紹榮이 [ 唐主]에게 청하여 關東 지방에 가서招撫할 것을 청하자, [ 唐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 唐主]가 萬勝鎭에 이르러[ 李嗣源]이 이미 大梁을 점거하고 諸軍들이 이반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神色이 沮喪되어서 높은 곳에 올라가 한탄하기를 “내가 성공하지 못하겠다.” 하고는【濟는 이룸이다.】 즉시 회군할 것을 명하여 돌아와 洛陽城으로 들어갔다. 4월에 從馬直指揮使郭從謙이【郭從謙은 악공이다.】 난을 일으키니, 가까이 모시던 신하와 옛 장수들이 모두 갑옷을 벗고 몰래 도망하였다. 얼마 후에 [ 唐主]가 流矢를 맞아 잠깐 만에 마침내 죽었다. [史略 史評][ 胡氏(胡寅)]가 말하였다. “[ 莊宗]이 처음 즉위했을 적에 夾寨에서 승리를 결정지어 潞州의 포위를 풀었고, 돌아와서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들을 훈련함에 일마다 각각 조리가 있었으니, 가령 [ 朱溫]이 죽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 莊宗]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후 [ 張承業]의 충성스런 계책을 어기고 황제의 尊號를 급히 칭하니, 거조의 잘못이 이미 차츰 드러났다. 그리고 梁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마침내 칭찬할 만한 善行이 한 가지도 없어서 예전과 다른 것이 마치 딴 사람인 것 같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재주와 器局이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天運이라고 한다면 살이 터지고 피땀을 흘리며 객지에서 비바람에 시달려서 모두 15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한 뒤에야 얻었는데, 놀이와 사냥을 좋아하고 부녀자들을 사랑하며 악공을 총애하고 환관을 신임해서 3년이 못 되어 멸망하였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옛날에는 밝다가 지금은 어둡고 처음에는 경계하다가 뒤에는 방자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또한 天運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이 [ 莊宗]에게 어짊을 명할 것인지, 길흉을 명할 것인지, 오랜 역년을 명할 것인지는 모두 스스로 부르는 것이니, 이를 天運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다.” |
---|
이날 [ 李嗣源]이 罌子谷에 이르러[ 唐主]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고, 諸將들에게 이르기를 “主上이 평소 군사들의 마음을 깊이 얻었으나 다만 여러 소인배들에게 가리워지고 미혹되어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 내가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였다. 己丑日(4월 3일)에 [ 李嗣源]이 洛陽으로 들어가니, 백관들이 세 번 牋文을 올려 [ 李嗣源]에게 監國할 것을 청하였다. [ 李嗣源]이 마침내 허락하고 靈柩 앞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
---|
[丁亥]〈後唐天成二年이라 ○ 吳乾貞元年이라 ○ 是歲에 後唐, 漢, 吳, 閩凡四國이요 吳越, 荊南, 湖南凡三鎭이라〉 |
---|
정해(927) - 後唐天成 2년이다. ○ 吳나라 乾貞 元年이다. ○ 이해에 後唐‧漢‧吳‧閩 모두 네 나라이고, 吳越‧荊南‧湖南 모두 세 鎭이다.- |
---|
[戊子]〈後唐天成三年이라 ○ 漢大有元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
---|
무자(928) - 後唐 天成 3년이다. ○ 漢나라 大有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
---|
○ 契丹 〈天顯三年이라〉 |
---|
契丹 - 天顯 3년이다. - |
---|
[己丑]〈唐天成四年이라 ○ 吳大和元年이라 ○ 是歲에 四國, 三鎭이라〉 |
---|
기축(929) - 唐나라 天成 4년이다. ○ 吳나라 大和 元年이다. ○ 이해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
---|
九月에 唐(王)[主]與馮道로 從容語及年穀屢登하고 四方無事한대 道曰 臣常記昔在先皇幕府【謂爲河東掌書記時也라 】하야 奉使中山하야 歷井陘之險할새 臣이 憂馬蹶하야 執轡甚謹하야 幸而無失이러니 逮至平路하야 放轡自逸이라가 俄至顚隕하니 凡爲天下者도 亦猶是也니이다 唐主深以爲然하다 又問道호되 今歲雖豐이나 百姓贍足否아 道曰 農家歲凶則死於流殍하고 歲豐則傷於穀賤하니 豐凶皆病者는 惟農家爲然이니이다 臣記進士聶夷中詩云 二月賣新絲하고 五月糶新穀하니 醫得眼前瘡이나 剜却心頭肉【剜은 烏官切이니 削也라 謂絲穀未熟에 農家艱食일새 先稱貸以自給하고 至於賣絲糶穀하야 僅足以償債耳라 註에 剜은 剔也라하니라 】이라하니 語雖鄙俚나 曲盡田家之情狀이라 農於四人【謂士農工商이라 】之中에 最爲勤苦하니 人主不可不知也니이다 |
---|
9월에 唐主가 馮道와 함께 年事가 여러 번 풍년이 들고 사방이 무사함을 조용히 언급하자, 馮道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기억하건대, 옛날 先皇帝의 幕府에 있으면서【先皇帝의 幕府에 있었다는 것은 河東府 掌書記가 되었을 때를 이른다.】中山으로 사명을 받들고 가느라 井陘의 험한 길을 지날 적에 신이 말이 넘어질까 염려해서 고삐를 꽉 잡고 매우 조심하여 다행히 실수가 없었는데, 평탄한 길에 이르자 고삐를 놓고 스스로 안일하다가 잠시 후 넘어지고 떨어짐에 이르렀으니,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唐主는 그 말을 깊이 옳게 여겼다. 唐主가 또다시 馮道에게 묻기를 “금년에 비록 풍년이 들었으나 백성들이 풍족한가?” 하니, 馮道가 말하기를 “농가는 흉년이 들면 유리하여 굶어죽고 풍년이 들면 곡식값이 싸서 손해를 보니, 풍년이든 흉년이든 모두 폐해를 입는 것은 오직 농가만이 그렇습니다. 신이 기억하건대 進士聶夷中의 詩에 이르기를 ‘이월에 새 고치실을 미리 팔고 오월에 새 곡식을 미리 판다오. 당장 눈앞의 상처는 치료할 수 있으나 심장의 살을 도려내는 것과 같구나.【剜은 烏官切(완)이니, 도려내는 것이다. 生絲가 나오지 않고 곡식이 성숙하기 전에 농가에서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선 빚을 내어 스스로 공급하고, 생사를 팔고 곡식을 팔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빚을 갚을 뿐임을 이른다. 註에 “剜은 도려내는 것이다.” 하였다.】[二月賣新絲 五月糶新穀 醫得眼前瘡 剜却心頭肉]’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비록 비루하나 농가의 실정을 곡진히 다하였습니다. 농부는 四民【四人은 士, 農, 工, 商을 이른다.】 중에 가장 고생하니, 人主가 이를 알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
---|
○ 契丹 〈天顯四年이라〉 |
---|
契丹 - 天顯 4년이다. - |
---|
[庚寅]〈唐長興元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
---|
경인(930) - 唐나라 長興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
---|
唐以前忠武節度使張延朗으로 行工部尙書하고 充三司【鹽鐵戶部度支라 】使하니 三司使之名이 自此始하니라 |
---|
唐나라가 前 忠武節度使張延朗을 行工部尙書로 임명하고三司使를 맡게 하니,【三司는 鹽鐵, 戶部, 度支이다.】三司使라는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
○ 契丹 〈天顯五年이라〉 |
---|
契丹 - 天顯 5년이다. - |
---|
[壬辰]〈唐長興三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
---|
임진(932) - 唐나라 長興 3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
---|
○ 三月에 唐以孟知祥으로 爲東西川節度使蜀王하다 |
---|
○ 契丹 〈天顯八年이라〉 [新增]胡氏曰 明宗은 美善頗多하고 過擧亦不至甚하니 求於漢唐之間하면 蓋亦賢主也라 其尤足稱者는 內無聲色하고 外無遊畋하며 不任宦官하고 廢內藏庫하며 賞廉吏하고 治贓蠹하니 若輔相得賢이면 則其過擧 當又損矣리라 其焚香祝天之言은 發於誠心하니 天旣厭亂하야 遂生聖人이라 用是觀之하면 天人交感之理를 不可誣矣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明宗이 初無黃屋之心이러니 遭時之亂하야 邂逅得國이라 蒞政之初에 斬孔謙而去苛法하고 誅宦寺而委宰相하며 命諸道以均民田하고 廢內藏庫以崇儉約하며 誅贓吏以示蠹民之戒하고 褒孫岳以化淸廉之風하며 遠女色而減後宮之員하고 優民力而免逋負之租하며 絶音樂之好而黜伶官하고 薄口體之奉而省庖廚하며 戒田獵之爲民害하야 而縱鷹犬하고 惡冗官之費하야 而罷有名無益之吏하며 戒橫斂, 斥私獻하야 而抑牧守進奉하며 有年之書 兩見于策이요 且目不知書로되 而所行이 暗合古訓이라 有如是者로되 惜其以戲殺從璨而無父子之恩하고 以誣殺安重誨而無君臣之義하며 年幾七十에 諱言儲嗣라가 卒致從榮稱兵하야 驚亂宮闈하야 父子祖孫이 一日而絶하야 身肉未寒에 家國俱破하니 雖曰輔相非人이나 亦不學之所致也니라 |
---|
契丹 - 天顯 8년이다. - [新增]胡氏(胡寅)가 말하였다. “明宗은 아름다운 善行이 자못 많고 지나친 행동 또한 심함에 이르지 않았으니, 漢나라와 唐나라 사이에서 찾아보면 또한 어진 군주이다. 그 중에 더욱 칭찬할 만한 것은 안으로 음악과 여색에 빠짐이 없고 밖으로 놀이와 사냥에 빠짐이 없었으며, 환관에게 맡기지 않고 內藏庫를 폐지하였으며, 청렴한 관리에게 상 주고 부정하게 뇌물을 받아 백성을 좀먹는 자들을 다스렸으니, 만약 輔相이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지나친 행동이 마땅히 또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향을 사르며 하늘에 축원한 말은 성심에서 나왔으니, 하늘이 이미 혼란함을 싫어해서 마침내 聖人을 탄생시켰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하늘과 인간이 서로 감동하는 이치를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明宗은 애당초 황제가 되려는 마음이 없었는데 혼란한 때를 만나서 우연히 나라를 얻었다. 정사를 다스리는 초기에 孔謙의 목을 베어 가혹한 법을 제거하고 환관을 주벌하여 재상에게 맡겼으며, 여러 道에 명하여 백성들의 토지를 균등하게 하고 內藏庫를 폐지하여 검약을 숭상하였으며, 부패한 관리들을 주벌하여 백성을 좀먹는 것에 경계함을 보이고 [ 孫岳]에게 포상하여 청렴한 기풍을 강화하였으며, 女色을 멀리하여 後宮의 인원수를 줄이고 백성들의 재력을 넉넉하게 하여 체납된 조세를 감면하였으며, 음악의 嗜好를 끊어 伶官(樂工)을 내치고 자신의 입과 몸을 봉양하는 것을 박하게 하여 庖廚를 줄였으며, 田獵이 백성들에게 폐해가 됨을 경계하여 매와 사냥개를 풀어주고 쓸데없는 관원(冗官)이 國祿을 허비하는 것을 미워하여 명칭만 있고 유익함이 없는 관리를 혁파하였으며, 멋대로 세금을 거두는 것을 경계하고 사사로이 진상하는 것을 물리쳐 牧守(지방관)들이 進奉하는 것을 억제하였으며, 풍년이 들었다는 기록이 두 번이나 史策에 보이고, 또 눈으로 글을 읽을 줄 몰랐으나 행동하는 바는 은연중에 옛 교훈과 부합하였다. |
---|
潞王
唐나라 潞王이 이미 조정과 서로 의심하고소원하였다.【猜阻는 시기하고 격조한 것이다.】 이에 이웃 道에 격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朱弘昭 등이 先帝의 병환이 위독한 틈을 타서 長子(李從榮)를 죽이고【長子는 秦王李從榮을 이른다. 明宗은 李從榮이 병력을 보유하고 들어오는 것을 미워하여 궁궐문을 모두 닫자, 李從榮이 마침내 달아나 河南으로 돌아가니, [ 安從益]이 그를 죽였다. 李從榮이 죽은 지 6일 만에 황제(明宗)가 승하하였다.】 少子(李從厚)를 세우고 조정의 권력을 전횡하니, 지금 이 從珂가 장차 조정에 들어가 군주 곁에 있는 악인들을 깨끗이 청소하겠다.”라고 하였다. |
---|
[乙未]〈唐淸泰二年이라 ○ 吳天祚元年이요 閩永和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
---|
을미(935) - 唐나라 淸泰 2년이다. ○ 吳나라 天祚 元年이고, 閩나라 永和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
---|
六月에 唐河東節度使石敬瑭이 旣還鎭에 陰爲自全之計러라 |
---|
6월에 唐나라 河東節度使石敬瑭이 鎭으로 돌아간 뒤에 은밀히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세웠다. |
---|
歷年圖曰 武皇【李克用이라 】이 以沙陀微種으로 奄有河東하고 黃巢之亂에 有大功於唐室이러니 上源之變【上源은 驛名이라 】에 訟於朝廷이나 而不能自直【克用이 還晉陽하야 治兵하고 上表自陳하야 乞討全忠한대 僖宗이 方務姑息하야 優詔和解之하니라 】하야 遂與朱氏로 治兵相攻하야 糾紛不解하야 流血成川하고 僵尸蔽野라 至其晩節하야는 鋒銳益衰하야 窮居一隅하야 僅能自保라 莊宗【存勖이라 】은 以弱齡襲位하니 麾下諸將이 皆白首行陣하야 與武皇으로 竝轡齊驅之人이어늘 乃能以恩信結其心하고 英果折其氣하야 莫不竭力致命하야 頤指如意하야 遂服眞定하고 從山東하며 取漁陽, 兼魏博하며 策馬度(渡)河에 而朱氏失國이라 當是之時하야 天下莫不震動하니 諸侯陸梁【猶强梁也니 逃走貌이요 又跳梁也라 】踞(倨)肆者 皆駭愕相顧하야 莫敢保其土地라 王衍이 恃其險遠하고 辭禮踞(倨)慢이어늘 偏師西指에 而劍閣不守하니 觀其行兵하면 可謂能矣라 惜其志小氣近하야 驕心易生하야 矜功自喜하고 御衆無法하며 便嬖是用하야 纔及三年에 隕身亡族하니 悲夫라 明宗은 無取國之心이러니 而爲衆所附하고 資性寬厚하야 克終天祿이라 淸泰는 於危難之中에 坐受神器之重하야 得之非難이요 失之亦易라 負扆【扆는 於豈切이니 狀如屛風하니 以絳爲質하고 高八尺이며 繡爲斧文이라 天子負扆하야 南面而立이라 】未安하야 家爲煨燼하야 十年之中에 易姓者四【莊宗은 本西突厥種朱邪氏니 附唐屬籍하야 賜姓李氏하고 明宗은 本北狄種이니 莊宗養子라 閔帝는 明宗子也요 [[(路)[潞]王]]은 明宗養子니 本姓王氏라 共三姓이어늘 而云易姓者四는 未詳이라 通要云 國姓三變이라하니라 】니 禍福相尋이 何其速哉아 |
---|
《歷年圖》에 말하였다. “武皇(李克用)은【武皇은 李克用이다.】 미천한 沙陀族으로서 곧바로 河東 지방을 소유하고 黃巢의 난에 唐나라에 큰 공을 세웠는데, 上源驛의 변고가【上源은 驛의 이름이다.】 일어나자 조정에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나 조정에서 바로잡아주지 못하였다.【李克用이 晉陽으로 돌아가 군대를 다스리고 表文을 올려 스스로 아뢰어서 朱全忠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 僖宗]이 우선 당장 눈앞의 편안함을 힘써서 우대하는 조칙을 내려 화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朱氏(朱全忠)와 군대를 동원하여 서로 공격하여 紛糾가 풀리지 않아 흘린 피가 냇물을 이루고 쓰러진 시체가 들을 뒤덮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예봉이 더욱 꺾여 곤궁하게 한 귀퉁이에 거주하면서 겨우 스스로 보존하였다. 莊宗(李存勖)은【莊宗은 李存勖이다.】 어린 나이로 지위를 세습하니, 휘하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行伍(군대) 사이에서 늙어 武皇과 함께 고삐를 잡고 나란히 말을 몬 사람들이었는데, 마침내 은혜와 신의로써 그 마음을 결속시키고 英明함과 과단함으로써 그 기운을 꺾으니, 힘을 다하고 명령을 바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턱과 손가락으로 마음대로 지시하여 마침내 眞定을 복종시키고 山東을 따르게 하였으며 漁陽을 점령하고 魏博을 겸병하였으며, 말을 채찍질하여 黃河를 건너가자 朱氏가 나라를 잃었다. 이때를 당하여 천하에 놀라서 동요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발호하여【陸梁은 强梁(강포함)과 같으니, 달아나는 모습이고 또 발호하는 것이다.】 오만방자한 제후들이 모두 놀라 서로 돌아보며 감히 자기의 토지를 보존하지 못하였다. 西蜀의 王衍이 지형이 험하고 먼 것을 믿고는 말과 禮가 거만하자, 일부의 군대[偏師]를 가지고 서쪽을 향함에 劍閣關이 지켜지지 못하였으니, 그 군대를 운용한 것을 살펴보면 능하다고 이를 만하다. 애석하게도 뜻이 작고 기개가 천근하여 교만한 마음이 쉽게 생겨나서 공을 과시하여 스스로 자만하였으며, 무리를 어거함에 법도가 없었고 총애하는 자들을 등용해서 즉위한 지 겨우 3년에 몸이 죽고 집안이 망하였으니, 슬프다. 明宗은 나라를 취할 마음이 없었는데 무리들에게 추종을 받았고 타고난 천성이 寬厚하여 하늘이 준 녹을 잘 마쳤다. 淸泰(潞王李從珂)는 위태롭고 어려운 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중요한 神器(제왕의 자리)를 받아서 얻은 것이 어렵지 않았고 잃은 것이 또한 쉬웠다. 병풍을 등지고 帝王의 자리에 있는 것이【扆는 於豈切(의)이니 모양이 병풍과 같으니, 붉은 비단으로 바탕을 삼고 높이가 8척이며 도끼 문양을 수놓았다. 천자는 扆를 등지고서 남면하여 선다.】 편안하지 못하여 집안이 잿더미가 되어서 10년 동안에 國姓을 바꾼 것이 네 번이었으니,【莊宗은 본래 西突厥의 종족인 朱邪氏이니 唐나라의 屬籍에 붙여 李氏姓을 하사받았고, 明宗은 본래 北狄의 종족이니 莊宗의 양자이다. 閔帝는 明宗의 아들이고 潞王은 明宗의 양자이니, 본래 姓이 王氏이다. 모두 세 姓인데, 姓을 바꾼 것이 네 번이라고 한 것은 자세하지 않다. 《通鑑要解》에 “國姓이 모두 세 번 바뀌었다.”라고 하였다.】 禍와 福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 어쩌면 이리도 신속하였는가.”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潞王이 明宗의 養子로서 요행히 남의 나라를 빼앗으니, 後唐이 이때에 이르러 國姓이 세 번 바뀌었다. 潞王이 洛陽에 들어올 적에 군사들에게 사람마다 百緡의 돈을 賞으로 줄 것을 허락하였는데, 洛陽에 이르자 府庫가 텅 비어 황금과 비단이 채 3만이 못 되었으므로 마침내 가렴주구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아 군사들에게 賞을 주니, 민심이 근심하고 서글퍼하여 반란을 생각하는 자가 많았다. 처음에는 백성을 해쳐서 나라를 사고 종말에는 백성이 흩어져서 나라가 또한 뒤따라 망하였으니, 오랫동안 나라를 소유하지 못한 것이 당연한데, 더구나 石敬瑭의 節度使 지위를 빼앗고 石敬瑭의 子弟를 죽여서 스스로 그 멸망을 재촉함에 있어서랴.” |
---|
右後唐은 四主에 共一十三年이라 |
---|
이상 後唐은 네 군주에 모두 13년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