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二十八 晉紀
通鑑節要 卷之二十八
晉紀
康皇帝
康皇帝 名岳이요 字世同이니 成帝母弟也라
[癸卯]建元元年
[癸卯]建元元年이라 〈趙建武九年이라〉 庾翼【亮之弟니 亮卒에 翼代之라】이 薦桓溫於成帝曰 桓溫이 有英雄之才하니 願陛下勿以常人遇之, 常壻畜之【桓彛之子也니 尙明帝女南康公主하니라】하시고 宜委以方面【本文則方邵(召)하니 方叔, 召虎라 周宣王이 用之하야 以中興也라】之任이면 必有弘濟艱難之勳하리이다 時에 杜乂, 殷浩 才名冠世호되 翼獨弗之重也하고 曰 此輩는 宜束之高閣하야 俟天下太平然後에 徐議其任耳라하니라 浩累辭徵辟하고 屛居墓所하야 幾將十年하니 時人이 擬之管, 葛【管은 謂夷吾요 葛은 謂孔明이라】이라 江夏相謝尙【相은 漢志에 每國置相一人하니 主治民하야 如令, 長하고 不臣也라하니라 謝尙은 鯤之子라】과 長山令王濛이 常伺其出處하야 以卜江左興亡하고 常(嘗)相與省之러니 知浩有確然【守志堅固하야 不移也라】之志하고 旣返에 相謂曰 深源【殷浩字也라】不起하니 當如蒼生何오 翼이 請浩爲司馬【請於國하니 詔除爲侍中, 安平軍司馬也라】한대 浩不應이어늘 翼이 遺浩書曰 王夷甫立名非眞【非眞은 不實也니 翼意言浩不可如王衍이라 夷甫는 衍字라】하니 雖云談道나 實長華競이라 明德君子 遇會處際【遇風雲之會하고 處功名之際라】에 寧可然乎아호되 浩猶不起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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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元 元年(계묘 343) - 趙나라(後趙) 建武 9년이다. - 庾翼【庾翼은 庾亮의 아우이니, 庾亮이 죽자 庾翼이 대신하였다.】이 桓溫을 成帝에게 천거하기를 “桓溫은 영웅의 재주가 있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그를 보통 사람으로 대우하시거나 보통의 사위로 기르지 마시고【桓溫은 桓彛의 아들이니, 明帝의 딸인 南康公主에게 장가들었다.】 方面【≪資治通鑑≫ 本文에는 ‘方面’이 ‘方邵’로 되어 있으니, 方邵는 方叔과 召虎이다. 周나라 宣王이 이들을 등용하여 中興하였다.】의 임무를 맡긴다면 반드시 어려움을 크게 구제하는 功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杜乂와 殷浩가 재주 있다는 명성이 세상에 으뜸이었으나 庾翼만은 홀로 이들을 중시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런 무리들은 〈亂世에는 쓸데가 없으니〉 높은 다락에 묶어 두었다가 천하가 태평해지기를 기다린 뒤에 천천히 그 임무를 의논해야 한다.” 하였다. 殷浩가 여러 번 나라의 부름을 사양하고 물러나 묘소에 은거하여 거의 10년에 이르니, 당시 사람들이 管仲과 諸葛孔明【管은 管夷吾(管仲)를 이르고, 葛은 諸葛孔明을 이른다.】에게 견주었다. 江夏相謝尙【相은 ≪後漢書≫ 〈百官志〉에 “각 諸侯國마다 相 한 명을 두니,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을 주관하여 縣令이나 縣長과 같고, 제후왕에게 신하 노릇 하지 않는다.” 하였다. 謝尙은 謝鯤의 아들이다.】과 長山令王濛은 항상 그의 出處를 살펴 江左(江東)의 흥망을 점쳤다. 한번은 함께 殷浩를 문안하였는데, 殷浩에게 확고한【確然은 뜻을 지킴이 견고하여 변치 않는 것이다.】 뜻이 있음을 알고서 돌아온 뒤에 서로 말하기를 “深源【深源은 殷浩의 字이다.】이 나오지 않으니, 이 蒼生들을 어찌한단 말인가?” 하였다. 庾翼이 殷浩를 司馬로 삼을 것을 청하자,【庾翼이 殷浩를 司馬로 삼을 것을 국가에 청하자, 황제가 명하여 殷浩에게 侍中‧安平軍司馬를 제수한 것이다.】 〈황제가 명하여 司馬로 삼았는데〉 殷浩가 응하지 않으니, 庾翼이 殷浩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王夷甫(王衍)가 명성을 세운 것은 진짜가 아니니,【진짜가 아니라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것이니, 庾翼의 뜻은 殷浩가 王衍과 같아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夷甫는 王衍의 字이다.】 비록 道를 말했다고 하나 실로 浮華함을 다투는 氣風을 助長하였다. 재주와 德을 겸비한 君子가 좋은 때를 당하여 만남【風雲의 기회를 만나고, 功名의 즈음에 처한 것이다.】에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殷浩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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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二年
孝宗穆皇帝
孝宗穆皇帝 名聃이 字彭祖니 康帝太子也라 在位十七年이요 壽十九라
[乙巳]永和元年
[丙午]二年
○ 安西將軍桓溫이 漢나라를 정벌【[原註]李氏가 蜀을 점거하고 漢이라고 칭하였다.[頭註]무술년(338)에 成나라 李壽가 그 군주 李期를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서서 國號를 成에서 漢으로 고쳤다. 李壽는 李特의 아우인 李驤의 아들이다.】할 때에 表文을 올리고는 즉시 출발하였다.【表文을 올리고는 미처 詔命을 듣기도 전에 곧바로 길을 떠남을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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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三年
[丁未]三年이라 〈趙建武十三年이라 ○ 是歲에 漢亡하니 大一, 小三이니 凡四僭國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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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和 3년(정미 347) - 趙나라 建武13년이다. ○ 이해에 漢나라가 망하였다.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셋이니, 僭國이 모두 넷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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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桓溫이 직접 보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成都로 향하자, 漢主李勢【永和 漢主 李勢는 李壽의 長子이다.】가 병력을 총동원하여 나와서 싸웠다. 桓溫이 승승장구하여 成都에 이르러서 불을 놓아 城門을 태우니, 漢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싸울 마음이 없었다. 李勢가 항복문을 桓溫에게 보내고 얼마 뒤에 관을 수레에 싣고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묶고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앞으로 쳐들고 軍門에 나오자, 桓溫이 포박을 풀어 주고 관을 불태웠으며 李勢와 宗室 10여 명을 建康으로 보내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 선한 사람을 표창하니, 蜀 지방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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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四年
永和 4년(무신 348) - 趙나라 建武14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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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五年
[己酉]五年이라 〈趙太寧元年이라〉 正月에 趙王虎卽皇帝位【虎荒耽酒色하고 喜怒無常이라 窮奢極侈하야 聚斂無極하고 悉發前代陵墓하야 取其金寶라 作大武宮於襄國하고 東西宮於鄴都할새 皆甃以文石하고 以漆灌瓦하며 金(鐺)[璫]銀楹하고 珠簾玉壁하야 窮極工巧라 選士民之女하야 服珠玉하고 被綺縠이 萬餘人이요 以女騎千人으로 爲鹵簿하야 皆著紫綸巾, 熟錦袴하고 執羽鳴鼓吹以游宴이라 投石於河하야 以作飛橋하니 功費數千萬億이요 又作臺觀四十餘所하고 又營長安, 洛陽(一)[二]宮하니 作者四十餘萬人이라 又發男女十六萬하야 築華林苑及長墻于鄴北할새 燃燭夜作하니 死者太半이라 濟南平陵城北에 石虎一夕에 自移城東南하니 狼狐千餘隨之成蹊어늘 虎喜曰 石虎者는 朕也니 天欲使朕平蕩江南也라하고 於是에 制征士五人에 出車一乘, 牛二頭, 米十斛, 絹十匹호되 不辦者斬하니 民鬻子以供이로되 猶不能給하야 自經於道者相望이라 命太子遊獵하니 太子宣이 乘大輅하고 羽葆華蓋하고 建天子旌旗하고 戍卒十八萬이라 虎望之하고 笑曰 我家父子如是하니 自非天崩地陷이면 復何愁리오하다 復命秦公韜繼遊한대 亦如是하니 宣이 怒其與己敵하야 使刺客殺韜하고 又謀不軌라가 事覺伏誅하다】라가 旣而病卒하니 太子世卽位하다 彭城王遵이 廢世爲譙王이라가 尋殺之하고 遵卽位【虎之子也라 遵이 與丞相燕王斌과 大將軍張豺로 竝受遺詔輔政이러니 劉后恐斌不利於太子하야 矯詔免歸第한대 張豺矯詔殺斌하다 虎卒에 世卽位하고 劉氏臨朝한대 征虜將軍石閔이 說遵曰 殿下長且賢하시니 先帝亦意以爲嗣러니 末年에 爲張豺所誤라 今若聲豺之惡하야 鼓而討之면 其誰不從이리오 遵從之하야 遂趣鄴하니 耆舊士民이 皆迎之하다 豺惶怖하야 亦出迎이어늘 遵命執豺하야 斬于市하다 假劉氏令하야 以遵嗣位하니 封世爲譙王하고 廢劉氏라가 皆殺之하다 於是에 鄴中暴風拔樹하고 震雷雨雹하야 大如盂斗요 太武暉華殿災하고 及諸門觀閣이 蕩然無餘하고 金石皆盡이라 火月餘乃滅하니라】하야 以武興公閔【虎之養子라】으로 爲都督中外諸軍事하다 閔言於遵曰 蒲洪【苻堅之祖니 略陽臨渭氐人이라】은 人傑也라 今以洪鎭關中이면 臣恐秦, 雍之地가 非復國家之有라한대 遵從之하야 罷洪都督하니 洪이 怒하야 歸枋頭【曹操於淇水(江)[口]에 下大枋木以成堰하야 遏其水하야 東入白溝하야 以通漕運하고 因號其處曰枋頭라하니라】하야 遣使來降【秦雍流民이 立洪爲主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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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和 5년(기유 349) - 趙나라 太寧 元年이다. - 정월에 趙王石虎가 황제에 즉위하였다가【石虎는 酒色에 빠지고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일정함이 없었다. 극도로 사치하여 세금을 거둠이 끝이 없었으며, 前代 帝王의 陵墓를 모두 발굴하여 금은보화를 취하였다. 襄國에 太武宮을 짓고 鄴都에 東宮과 西宮을 지을 적에 모두 무늬 있는 돌로 섬돌을 만들고 기와 틈에 옻칠을 부었으며, 金으로 서까래를 만들고 銀으로 기둥을 장식하며, 진주 주렴에 玉으로 벽을 만들어서 공교함을 지극히 하였다. 士民의 딸을 뽑아 珠玉으로 꾸미고 얇은 비단옷을 입힌 것이 만여 명이요, 여자 騎兵 천 명을 鹵簿(儀仗隊)로 삼았는데, 모두 자주색 綸巾을 씌우고 精製한 비단으로 만든 바지를 입힌 다음, 깃털로 장식한 깃발을 잡고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뒤따르게 하여 놀고 잔치하였다. 돌을 黃河에 쏟아 부어서 飛橋를 만드니, 공력과 비용이 수천만억이었다. 또 樓觀을 40여 곳에 만들고 長安과 洛陽에 두 궁궐을 만드니 일하는 자가 40여만 명이었다. 또 남녀 16만 명을 징발하여 華林苑과 長墻을 鄴都 북쪽에 쌓을 적에 횃불을 밝히고 밤에도 일하니,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濟南의 平陵城 북쪽에 돌로 만든 호랑이[石虎]가 하룻밤 사이에 저절로 城의 동남쪽으로 옮겨 가니, 이리와 여우 천여 마리가 뒤를 따라가서 길이 이루어지자, 石虎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돌로 만든 호랑이는 바로 朕이다. 하늘이 아마도 나로 하여금 江南 지방을 평정하게 하려는가 보다.” 하였다. 이에 명을 내려 출정하는 군사 5명마다 兵車 1대와 소 2頭, 쌀 10斛, 비단 10필을 내게 하되 마련하지 못하는 자는 목을 베니,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비용을 대었으나 오히려 충분하지 못하여 길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자가 서로 이어졌다. 太子에게 명하여 나가서 사냥하게 하니, 太子 石宣이 황제가 타는 大輅를 타고 華蓋를 새의 깃털로 장식하며 天子의 깃발을 꽂았으며, 병졸이 18만 명이었다. 石虎가 이것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우리 집 父子가 이와 같으니, 만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지 않는다면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다시 秦公 石韜에게 명하여 자신이 놀러 나갈 때 뒤를 따르도록 하였는데 그가 또한 이와 똑같이 하니, 石宣은 그가 자신과 대등하게 맞선 것에 노하여 자객을 시켜 石韜를 죽이고 또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다.】 얼마 후 병들어죽으니, 太子石世가 즉위하였다. 彭城王石遵이 石世를 폐위하여譙王으로 삼았다가 얼마 뒤 시해하고 자신이 즉위하여【石遵은 石虎의 아들이다. 石遵이 丞相인 燕王 石斌, 大將軍 張豺와 함께 石虎의 遺詔를 받아 정사를 보필하였는데, 劉后는 石斌이 정사를 보필하면 太子에게 불리할까 염려해서 조서를 위조하여 면직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니, 張豺가 조서를 위조하여 石斌을 죽였다. 石虎가 죽자 石世가 즉위하고 劉氏가 조정에 임어하였는데, 征虜將軍 石閔이 石遵을 설득하기를 “전하가 나이가 많고 또 어지시니, 先帝께서 또한 意中에 후사를 삼으려 하였는데, 말년에 張豺 때문에 잘못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張豺의 惡行을 성토하여 북을 울리고 진군하여 토벌한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石遵이 그의 말을 따라 마침내 鄴都로 달려가니, 耆老들과 士民들이 모두 환영하였다. 張豺가 두려워하여 또한 나와서 맞이하자, 石遵이 명하여 張豺를 잡아서 시장에서 목 베게 하였다. 劉氏의 명령을 가탁하여 石遵으로 황제의 지위를 잇게 하니, 石遵이 石世를 봉하여 譙王을 삼고 劉氏를 폐위하였다가 모두 죽였다. 이때 鄴中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천둥 벼락이 치며 크기가 사발과 말[斗]만한 우박이 내렸다. 太武暉華殿에 불이 나고 여러 문과 觀閣이 다 불타 버려 남은 것이 없었으며 금은보화도 모두 없어졌다. 화재가 한 달이 넘어서야 비로소 꺼졌다.】武興公 石閔【武興公 石閔은 石虎의 養子이다.】을 都督中外諸軍事로 삼았다. 石閔이 石遵에게 말하기를 “蒲洪(前秦을 세움)【蒲洪은 苻堅의 조부이니, 略陽郡 臨渭縣 사람으로 氐族이다.】은 인걸입니다. 이제 蒲洪으로 하여금 關中을 鎭撫하게 하면 신은 秦州와 雍州 지역이 다시는 우리나라의 소유가 못 될까 두렵습니다.” 하자, 石遵이 그의 말을 따라 蒲洪을 都督에서 파면하였다. 蒲洪이 노하여 枋頭로 돌아가【曹操가 淇水 어귀에서 큰 통나무를 내려 보내어 제방을 만들어 물길을 막아서 동쪽으로 白溝로 들어가게 하여 漕運을 통하게 하고 인하여 그곳을 이름하기를 枋頭라고 하였다.】使者를 보내어 晉나라에 와서 항복하였다.【秦州와 雍州 지역의 流民들이 蒲洪을 세워 군주로 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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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六月에 桓溫이 聞趙亂하고 出屯安陸하고 遣諸將하야 經營北方할새 趙揚州刺史王浹이 擧壽春降이어늘 征北大將軍褚裒 上表請伐趙하고 卽日戒嚴하야 直指泗口하다 徑赴彭城하니 北方士民降附者 日以千計러라 朝野皆以爲中原을 指期可復이라호되 蔡謨獨謂所親曰 胡滅이 誠爲大慶이나 然恐更貽朝廷之憂로라 其人曰 何謂也오 謨曰 夫能順天乘時하야 濟群生於艱難者는 非上聖與英雄이면 不能爲也니 自餘則莫若度德量力이라 觀今日之事컨대 殆非時賢所及이라 必將經營分表【分은 劑요 表는 外라[頭註]分은 量也요 表는 外也니 言經營過於分量之外라】하야 疲民以逞하리니 旣而材略疎短하야 不能副心하고 財殫力竭하야 智勇俱困이면 安得不憂及朝廷乎아 魯郡民五百餘家 相與起兵附晉하고 求援於褚裒라 裒遣(步)[部]將王龕, 李邁하야 將銳卒三千迎之하니 趙李農이 帥騎二萬하고 與龕等으로 戰於代陂러니 龕等이 大敗하야 皆沒於趙하다 八月에 裒退屯廣陵이러니 詔命裒하야 還鎭京口하다 時에 河北大亂하야 遺民二十餘萬口가 渡河〈欲〉來歸러니 會에 裒已還하니 威勢不接하야 不能自拔하고 死亡略盡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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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에 桓溫이 趙나라가 혼란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安陸에 주둔하고 諸將을 보내어 北方을 경영하였다. 이때 趙나라 揚州刺史王浹이 壽春을 가지고 항복하자, 征北大將軍褚裒가 表文을 올려 趙나라를 칠 것을 청하고 그날로 삼엄하게 경계하여 곧바로 泗口로 향하였다. 지름길을 따라 彭城으로 달려가니, 北方의 士民 중에 항복하고 따르는 자가 하루에 천 명으로 헤아려졌다. 朝野에서 모두 머지않아 中原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하였으나 蔡謨만은 홀로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오랑캐가 멸망하는 것은 진실로 크게 경하할 일이나 다시 조정에 근심을 끼칠까 두렵노라.”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蔡謨가 말하기를 “하늘에 순응하고 기회를 타서 生民들을 어려움에서 구제하는 것은 至聖과 英雄豪傑이 아니면 하지 못하니, 그 밖의 사람은 德을 헤아리고 힘을 헤아리는 것만 못하다. 일을 살펴보건대 자못 지금의 현자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틀림없이 제 분수 이상으로【[釋義]分은 劑(분량)요, 表는 벗어남이다.[頭註]分은 분량이고 表는 벗어남이니, 經營함이 分量의 밖에 넘침을 이른다.】 경영해서 백성들을 피곤하게 하여 욕심을 부릴 것이니, 이윽고 재주와 지략이 엉성하고 부족하여 마음에 부응하지 못하고 재물이 다하고 힘이 고갈되어 지혜와 용맹이 모두 궁해지면 어찌 우환이 조정에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魯郡의 백성 5백여 가호가 서로 군대를 일으켜 晉나라에 붙고 褚裒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褚裒가 部將王龕과 李邁를 보내어 정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맞이하게 하니, 趙나라 李農이 騎兵 2만 명을 거느리고 王龕 등과 代陂에서 싸웠는데, 王龕 등이 대패하여 모두 趙나라에서 죽었다. 8월에 褚裒가 후퇴하여 廣陵에 주둔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褚裒에게 명해서 돌아와 京口에 鎭駐하게 하였다. 이때 河北 지방이 크게 혼란하여 遺民 20여만 명이 黃河를 건너와 歸附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褚裒가 돌아오자 위엄과 기세가 이어지지 못해서 遺民들이 스스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거의 다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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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一月에 趙武興公閔이 執趙主遵하야 殺之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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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六年
[庚戌]六年이라 〈趙主石祗永寧元年이라 ○ 魏主冉閔永興元年이라 ○ 舊大國一이요 涼, 代, 燕小國三이요 新大國一이니 凡五僭國이라〉 正月에 趙大將軍閔이 卽皇帝位하고 改國號魏라하고 復姓冉氏【閔은 本姓冉氏이니 魏郡內黃人이라 石勒이 獲之하고 命石虎하야 養以爲子라】【八年에 爲燕所滅하니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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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姚弋仲【姚弋仲은 石虎 때에 여러 번 승진하여 冠軍大將軍에 이르렀다.】과 蒲洪이 각각 關西 지방을 점령할 뜻이 있었다. 姚弋仲이 아들姚襄을 보내어 5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蒲洪을 공격하자, 蒲洪이 맞아 싸워 격파하였다. 蒲洪이 大都督‧三秦王이라 자칭하고 姓을 苻氏로 고쳤다.【≪晉書≫ 〈苻洪載記〉에 이르기를 “집의 연못에서 부들[蒲]이 자랐는데 길이가 5丈 5尺이며 마디가 대나무 모양과 같으니 당시에 모두 蒲家라고 일렀으므로 인하여 姓氏로 삼았다.” 하였다. 또 隴右에 큰비가 내렸는데, 동요에 이르기를 “비가 만약 그치지 않으면 홍수가 반드시 일어난다.” 하니 인하여 이름을 洪이라 하였다. 뒤에 圖讖書에 “艸付가 응당 왕 노릇 할 것이다.” 하였고, 또 손자인 苻堅의 등에 艸付라는 글자가 있다 하여 마침내 성을 苻氏로 고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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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七年
[辛亥]七年이라 〈趙永寧二요 魏永興二年이라 ○ 秦主苻健皇始元年이라 ○是歲에 趙亡하니 舊大國一이요 涼, 代, 燕小國三이요 新大國一이니 凡五僭國이라〉 正月에 苻健이 卽天王位하야 國號를 大秦이라하고 凡趙之苛政不便於民者를 皆除之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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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初에 桓溫이 聞石氏亂하고 上疏請出師하야 經略中原호되 事久不報라 溫이 知朝廷仗殷浩하야 以抗己하고 甚忿之나 然이나 素知浩之爲人하야 亦不之憚也라 以國無他釁이라하야 遂得相持彌年【久也라】하니 雖有君臣之跡이나 覊縻而已요 八州【溫이 都督荊, 司, 雍, 益, 梁, 寧, 交, 廣八州하니라】士衆資調【謂資財調賦라】 殆不爲國家用이러라 屢求北伐호되 詔書不聽하다 十二月에 溫이 拜表輒行할새 帥衆四五萬하고 順流而下하야 軍于武昌하니 朝廷이 大懼라 司馬高崧이 言於會稽王昱曰 王宜致書하야 諭以禍福이면 自當返旆요 如其不爾면 便六軍整駕하리니 逆順이 於玆判矣리이다하고 乃於坐에 爲昱草書【書曰 寇難宜平이요 時會宜接이니 此實爲國遠圖요 經略大算이라 能弘斯會는 非足下而誰리오 然이나 異常之擧는 衆之所駭니 苟或望風振擾하야 一時竝散이면 則望實竝喪하고 社稷之事去矣云云하니 溫見書하고 卽上疏하야 謝之也라】하니 溫卽上疏하야 惶恐謝罪하고 回軍還鎭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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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桓溫이 石氏가 혼란하다는 말을 듣고 上疏하여 출병해서中原을 經略할 것을 청하였으나 朝廷에서는 이 일에 대해 오랫동안 답을 내리지 않았다. 桓溫은 조정이 殷浩에게 기대어 자신에게 항거함을 알고 매우 분해 하였지만 평소 殷浩의 사람됨을 알았으므로 또한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라에 별다른 일이 없다 하여 마침내 1년이 되도록【彌年은 오램이다.】 서로 대치만 하니, 비록 겉으로는 君臣間의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매여 있기만 할 뿐이었고, 〈桓溫이 관할하는〉 8州【桓溫이 荊州‧司州‧雍州‧益州‧梁州‧寧州‧交州‧廣州의 8州를 도독하였다.】의 군사와 재물과 貢物【資調는 資財(資産)와 調賦(해마다 바치는 공물)를 이른다.】이 거의 국가를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桓溫이 여러 번 北伐을 청하였으나 윤허하는 詔書가 내려지지 않았다. 12월에 桓溫이 表文을 올리고 곧바로 떠날 적에 병력 4, 5만 명을 거느리고 물길을 따라 내려와서 武昌에 군대를 주둔하니, 朝廷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司馬인 高崧이 會稽王司馬昱에게 말하기를 “왕이 桓溫에게 글을 보내어 禍福(出兵의 利害)으로 타이른다면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갈 것이요,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곧바로 六軍을 정돈하여 토벌해야 할 것이니, 반역과 순종함이 여기에서 판명이 날 것입니다.” 하고, 마침내 그 자리에서 司馬昱을 위해 편지를 초하니,【高崧이 초한 편지에 이르기를 “적의 禍難은 평정해야 하고 좋은 기회는 꼭 잡아야 하니, 이는 실로 국가를 다스리는 원대한 계책이요 천하를 經略하는 중대한 계획이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넓힐 수 있는 것은 足下가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이번의 이상한 행동은 사람들이 놀라는 바이니, 만일 혹 소문을 듣고 소요를 일으켜 足下의 군대가 일시에 모두 흩어져 버린다면 足下의 명성과 실제는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國家의 大事는 글러 버릴 것이다.……” 하니, 桓溫이 편지를 보고 즉시 상소하여 사죄하였다.】桓溫이 〈편지를 받고는〉 즉시 上疏하여 황공해하며 사죄하고 군대를 돌려 鎭으로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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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八年
○ 殷浩가 上疏하여 許昌과 洛陽【許, 洛은 許昌과 洛陽이니, 모두 河南에 있다.】으로 출병할 것을 청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殷浩가 北伐할 때에 王羲之가 편지를 보내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는데, 이윽고 功이 없었다. 다시 재차 거병할 것을 도모하자, 王羲之가 殷浩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이제 구구한 江東 지방을 가지고 천하가 두려워한【寒心은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람이 추위가 심하면 마음이 떨리고 두려움을 느껴도 떨리므로 두려움을 추위에 견주어 떨린다고 말한 것이다.】 지가 진실로 이미 오래되었다. 武功을 다투기를 힘쓰는 것은 그대가 응당 해야 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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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九年
[甲寅]十年
正月에 張祚自稱涼王【張祚는 涼州牧이라 軌子寔, 寔弟茂, 寔子駿, 駿子重華, 重華子曜靈이니 涼人이 廢之하고 立祚하니 祚는 重華之庶兄이라】하다 揚州刺史殷浩 連年北伐할새 師徒屢敗하야 糧械都盡이라 桓溫이 因朝野之怨하야 上疏數浩之罪하고 請廢之하니 朝廷이 不得已免浩爲庶人【浩恒書空作咄咄怪事字하다 久之에 溫將以浩爲尙書令한대 浩欣然將答書할새 慮有誤하야 開閉十數라가 竟達空函하니 溫大怒하야 遂絶하니라 [通鑑要解]浩少與溫齊名하니 而心競不相下하야 溫常輕之라 浩旣被黜에 雖愁怨不形辭色이나 常書空作咄咄怪事字라 久之에 溫以浩爲尙書令하야 書告之러니 竟達空函이라 故로 遂絶之하니 卒於徙所하니라】하다 自此로 內外大權이 一歸於溫矣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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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에 張祚가 涼王이라 자칭하였다.【張祚는 涼州牧이다. 張軌의 아들이 張寔이고, 張寔의 아우가 張茂이고, 張寔의 아들이 張駿이고, 張駿의 아들이 張重華이고, 張重華의 아들이 張曜靈이다. 涼州 사람들이 張曜靈을 폐하고 張祚를 세웠으니, 張祚는 張重華의 庶兄이다.】揚州刺史殷浩가 여러 해를 계속하여 북벌할 때에 군사들이 여러 번 패하여 군량과 병기가 모두 떨어졌다. 桓溫이 朝野가 원망하는 틈을 타서 上疏하여 殷浩의 죄를 열거하고 폐출할 것을 청하니, 조정이 부득이 殷浩를 면직하여 庶人으로 삼았다.【[附註]殷浩를 면직하여 庶人으로 삼으니, 殷浩가 항상 허공에 咄咄怪事라는 글자를 쓰곤 하였다. 오랜 뒤에 桓溫이 장차 殷浩를 尙書令으로 삼으려 하자, 殷浩가 기뻐하여 장차 답서를 보내려 할 적에 오류가 있을까 우려하여 뜯어보고 봉함하기를 십수 번 하다가 끝내 빈 봉투를 보내니, 桓溫이 크게 노하여 마침내 殷浩와 절교하였다. [通鑑要解]殷浩가 젊었을 적에 桓溫과 명성이 똑같으니, 桓溫은 마음속으로 다투고 서로 낮추지 아니하여 항상 殷浩를 경시하였다. 殷浩는 축출당한 뒤에 비록 근심과 원망을 말과 안색에 드러내지 않았으나 항상 허공에 咄咄怪事라는 글자를 썼다. 오랜 뒤에 桓溫이 장차 殷浩를 尙書令으로 삼고자 하여 이를 편지로 알렸는데, 〈殷浩가 답서를 보낼 적에〉 마침내 빈 봉투를 보냈으므로 크게 노하여 끝내 절교하니, 殷浩는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로부터 내외의 큰 권력이 모두 桓溫에게로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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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海王猛이 少好學하고 倜儻【不羈貌요 高遠貌라】有大志하야 不屑細務하니 人皆輕之호되 猛은 悠然自得하야 隱居華陰이러니 聞桓溫入關하고 披褐【披는 通作被라 平聲이니 (褐)[裮]被衣帶也라 〈褐은〉 以毛毳織之라】詣之하야 捫蝨而談當世之務호되 旁若無人이라 溫異之하야 問曰 吾奉天子之命하야 將銳兵十萬하고 爲百姓除殘賊이어늘 而三秦豪傑이 未有至者는 何也오 猛曰 公이 不遠數千里하고 深入敵境하야 今長安咫尺이어늘 而不度(渡)霸水하니 百姓이 未知公心【桓溫이 破秦入關而不渡者는 恐官軍知難而退也라 又史註云 疑溫有異志也라하니라】하야 所以不至니이다 溫이 嘿然無以應하고 徐曰 江東엔 無卿比也라하고 乃署【署는 除也니 謂除官이라】猛軍謀祭酒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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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海의 王猛이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의기가 드높아【倜儻은 매이지 않는 모양이요, 高遠한 모양이다.】 큰 뜻이 있어서 소소한 일을 좋아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경시하였으나 王猛은 悠然히 自得하여 華陰에 은거하였는데, 桓溫이 關中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짧은 갈옷을 입고【披는 被와 통용된다. 平聲(헤치다)이니, 옷에 띠를 매지 않은 것이다. 갈옷은 털로 짜서 만든다.】 찾아가서 이를 잡으며 당세의 일을 말하되 옆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桓溫이 기이하게 여겨 묻기를 “내가 天子의 命을 받들어 정예병 10만 명을 거느리고 백성을 위해 잔당들을 제거하는데, 三秦의 호걸 중에 찾아오는 자가 없음은 어째서인가?” 하니, 王猛이 말하기를 “公이 수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적의 국경에 깊숙이 들어와서 이제 長安이 지척에 있는데도 霸水를 건너가지 않으니, 백성들이 公의 마음을 알지 못하여【[通鑑要解]不度霸水……未知公心:桓溫이 秦나라를 격파하고 關中에 들어갔는데도 霸水를 건너가지 않은 것은 官軍이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후퇴할까 해서였다. 또 史註에 이르기를 “桓溫이 딴 뜻이 있다고 의심한 것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桓溫이 묵묵히 대답이 없다가 천천히 말하기를 “江東 지방에는 卿에게 비교할 사람이 없다.” 하고, 마침내 王猛을 軍謀祭酒로 서용하였다.【署는 제수함이니, 관직을 제수하는 것을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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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十一年
[丙辰]十二年
[丙辰]十二年이라 〈秦壽光二年이요 燕元璽五年이라〉 桓溫이 自江陵北伐할새 與寮屬으로 登平乘樓하야 望中原하고 歎曰 遂使神州陸沈【神州는 中國也니 註見懷帝永嘉五年하니라 陸은 高平地요 沈은 溺也라 神州陸沈은 謂中原淪沒也니 猶王道陵夷之義라 [通鑑要解]中國名曰 赤縣神州라 內有九州하니 禹之序九州 是也라 陸沈은 謂無水而沈이라】하야 百年丘墟는 王夷甫諸人이 不得不任其責【謂王衍等이 尙淸談하고 而不恤王事하야 以致夷狄亂華也라】이라하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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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和12년(병진 356) - 秦나라 壽光 2년이고, 燕나라 元璽 5년이다. - 桓溫이 江陵에서 北伐할 적에 동료들과 함께 큰 배 위의 누각에 올라가서 中原을 바라보고 한탄하기를 “마침내 中原을 매몰시켜【[釋義]神州는 中國이니, 註가 懷帝 永嘉 5年條(311)에 보인다. 陸은 높고 평평한 곳이요 沈은 빠짐이다. 神州가 陸沈했다는 것은 中原이 쇠퇴함을 이르니, 王道가 陵夷(쇠퇴)하였다는 뜻과 같다. [通鑑要解]中國을 이름하기를 赤縣神州라 한다. 중국 안에 九州가 있으니, 禹王이 九州를 차서한 것이 이것이다. 陸沈은 물이 없이 육지가 가라앉은 것과 같음을 이른다.】 百年의 基業이 폐허가 되게 한 것은 王夷甫(王衍) 등 여러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王衍 등이 淸談을 숭상하고 國事를 돌보지 않아서 夷狄들이 中華를 어지럽히게 만들었음을 이른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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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에 桓溫이 伊水에 이르니, 姚襄이 洛陽의 포위를 풀고 와서 桓溫을 막았다. 桓溫이 陣을 치고 전진하여 직접 갑옷을 입고 싸움을 독려하니, 姚襄의 무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수천 명이었다. 姚襄이 휘하의 騎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洛陽의 北山으로 달아나니, 周成이 무리를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桓溫이 옛 太極殿 앞에 주둔하였는데, 이윽고 金墉城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여러 陵에 배알하였고 허물어져 파괴된 곳이 있으면 수리하여 복구하였으며, 2천 명을 洛陽에 주둔시켜 山陵을 호위하게 하고 周成을 사로잡아 돌아오니, 姚襄【姚襄은 姓名이니, 姚弋仲의 아들이다.】이 平陽으로 달아났다.【姚襄이 뒤에 關中을 도모하고자 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秦나라를 정벌했다가 군대가 패하여 秦나라에게 죽임을 당하니, 아우 姚萇이 군대를 거느리고 秦나라에 항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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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月에 燕大司馬恪이 圍段龕【龕은 音堪이라 初에 鮮卑段蘭이 領其衆하고 徙廣固러니 辛亥年에 來降하니 以爲鎭北將軍하고 封齊公이라】於廣固하니 十一月에 龕이 面縛出降이어늘 恪이 撫安新民하고 悉定齊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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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升平元年
秦主苻生이 밤낮없이 술을 마셔서 술김에 살육을 많이 자행하니, 群臣들이 하루 동안 목숨을 보전하는 것을 십 년처럼 여겼다. 東海王苻堅【東海王 苻堅은 蒲洪의 손자이고 苻雄의 아들이다.】이 평소에 당시 사람들의 칭찬이 있어서 薛讚‧權翼【薛讚과 權翼은 옛날에 姚襄의 參軍이었다.】과 친하였는데, 薛讚과 權翼이 은밀히 苻堅을 설득하기를 “주상이 잔인하고 포학무도하여 中外의 마음이 떠났으니, 현재 秦나라의 제사를 주관해야 할 자는 전하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일찍 계책을 세워서 他姓으로 하여금 나라를 얻게 하지 마소서.” 하였다. 苻堅이 尙書呂婆樓에게 묻자, 呂婆樓가 말하기를 “저희 마을에 사는 사람 중에 王猛이라는 자가 있어 그 사람의 모략이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만큼 뛰어나니, 전하께서는 그를 초청하여 자문하소서.” 하였다. 苻堅이 呂婆樓를 통하여 王猛을 초대해서 한 번 만나 보고는 오래된 친구처럼 여겼으며, 당세의 일을 언급하자 苻堅이 크게 기뻐하여 스스로 劉玄德이 諸葛孔明을 만난 것과 같다고 여겼다. [新增]養心吳氏가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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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平老【梁平老는 御史中丞이다.】 등이 苻堅에게 이르기를 “주상이 德을 잃어 上下가 원망하여 사람들이 딴 마음을 품고 있으니, 燕나라와 晉나라 두 방면이 틈을 엿보아 출동하면 禍亂이 일어났을 때에 집안과 나라가 함께 망할까 두렵습니다. 이는 전하의 일이니, 빨리 도모하셔야 합니다.” 하니, 苻堅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苻堅이 呂婆樓와 함께 휘하 300명을 거느리고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니, 궁궐을 宿衛【宿은 지킴이다.】하던 장병들이 모두 병장기【仗은 다섯 가지 병기의 총칭이니, 다섯 가지 병기는 矛‧戟‧弓‧劍‧戈를 이른다.】를 버리고 苻堅에게 歸附하였는데, 苻生은 오히려 취하여 자고 있었다. 苻堅의 군사들이 苻生을 끌어다가 別室에 유치하고 폐출하여越王으로 삼았다가 오래지 않아 그를 죽였다. 苻堅이 마침내 皇帝의 칭호를 없애고大秦天王이라고 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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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二年
[戊午]二年이라 〈秦永興二年이요 燕光壽二年이라〉 九月에 秦大旱이어늘 堅이 減膳徹樂하고 命后妃以下하야 悉去羅紈하고 開山澤之利하야 公私共之하고 息兵養民하니 旱不爲災라 王猛이 日親幸用事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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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申]四年
[辛酉]五年
○ 范寗이 好儒學하고 性質直이라 常(嘗)謂王弼, 何晏【魏人이니 見二十五卷己巳年이요 晏은 又見二十六卷丁巳年이라】之罪가 深於桀, 紂【諡法에 賊人多殺曰桀이요 殘義損善曰紂라】라 或以爲貶之太過라한대 寗曰 王, 何가 蔑棄典文하고 幽沈仁義하야 游辭浮說로 波蕩後生하야 使搢紳【搢은 揷也요 紳은 大帶也니 謂揷笏於紳也라 周禮註에 搢은 讀作薦이니 謂揷之於紳帶之間也라】之徒로 翻然改轍하야 以至禮壞樂崩하고 中原傾覆하니 遺風餘俗이 至今爲患이라 桀, 紂는 縱暴一時나 適足以喪身覆國하야 爲後世戒하니 豈能迴百姓之視聽哉리오 故로 吾以爲一世之禍는 輕하고 歷代之患은 重하며 自喪之惡은 小하고 迷衆之罪는 大也라하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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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范寗은 儒學을 좋아하며 성질이 질박하고 정직하였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王弼과 何晏【王弼과 何晏은 魏나라 사람이니, 25권 己巳年條(249)에 보인다. 何晏은 또 26권 丁巳年條(297)에 보인다.】의 죄가 桀‧紂【諡法에 “사람을 해치고 많이 죽이는 것을 桀이라 하고, 의로운 사람을 해치고 선한 사람을 손상시키는 것을 紂라 한다.” 하였다.】보다도 심하다.”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폄하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한다.” 하자, 范寗이 말하기를 “王弼과 何晏은 經典과 文獻을 멸시하며 仁義를 인멸시켜 근거 없는 말과 부화한 말로 후생들을 미혹시켰다. 그리하여 士大夫【搢은 꽂음이고 紳은 큰 띠이니, 搢紳은 笏을 큰 띠에 꽂는 것을 이른다. ≪周禮≫ 註에 “搢은 천(진)으로 읽으니, 紳帶의 사이에 꽂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들로 하여금 번연히 발자취를 고치게 하여 禮樂이 붕괴되고 中原이 전복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남은 풍속이 지금까지도 폐해가 되고 있다. 桀‧紂는 비록 한 때에 방종하고 포학하였으나 다만 자기 몸을 죽이고 나라를 전복시켜서 후세의 경계가 될 뿐이니, 어찌 백성들의 보고 들음을 바꿀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생각건대 한 대의 禍患은 가볍고 역대의 禍患은 중하며, 자기 몸을 망치는 죄악은 작고 무리를 미혹시키는 죄악은 크다고 여긴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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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에 秦王苻堅이 牧‧伯‧守‧宰에게 명하여 각각 孝悌와 廉直과 文學과 政事 등의 科目으로 인재를 천거하게 하되 천거된 사람을 살펴서 적임자인 경우에는 천거한 사람에게 상을 내리고 적임자가 아닌 경우에는 죄를 주니,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감히 망령되이 천거하지 못하고 청탁이 행해지지 않았다. 이때를 당하여 內外의 관직이 모두 잘 수행되어 田野가 닦여지고 개간되니, 창고가 충실하고 도적들이 숨을 죽였다.【屛은 가리는 것이요 息은 코로 숨을 쉬는 것이다. 숨을 죽였다는 것은 두려움이 심함을 말한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康帝는 수명이 길지 못하였으니 칭찬할 만한 점이 없고, 穆帝는 포대기에 싸인 어린 아이로 母后가 稱制하여 나라 안팎이 무사한 것이 십여 년이었다. 이때에 石虎가 죽어 오랑캐가 크게 어지러웠는데, 조정에서 殷浩를 등용하여 關河(요해처)를 완전히 평정하였다. 그러나 인재를 잘못 등용하여 끝내 山桑의 패배를 불러 왔으니, 晉나라의 위세와 권력이 이로부터 한결같이 桓溫에게로 돌아갔다. 桓溫과 殷浩는 젊어서부터 명성이 대등하였으니, 晉나라에서 殷浩를 등용한 것은 본래 桓溫에게 대적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殷浩가 패배하자 桓溫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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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皇帝
哀皇帝 名丕요 字千齡이니 成帝長子라 在位四年이요 壽二十五라
[壬戌]隆和元年
[壬戌]隆和元年이라 〈秦甘露四年이요 燕建熙三年이라〉 正月에 桓溫이 上疏하야 請遷都洛陽하고 自永嘉之亂【懷帝爲劉聰所執이라】으로 播流江表【播流는 播越流離也요 江表는 中原以江南爲江表라】者를 請一切北徙하야 以實河南한대 朝廷이 畏溫하야 不敢爲異나 而北土蕭條하야 人情이 疑懼하니 雖竝知不可나 莫敢先諫이러라 散騎常侍孫綽이 上疏曰 昔에 中宗【元帝廟號라】龍飛에 非惟信順【易大傳曰 天之所助者順也요 人之所助者信也라】協於天人이요 實賴萬里長江하야 畫而守之耳러니 今自喪亂已來로 六十餘年【自賈后之廢하고 趙王倫之誅로 繼而諸王交兵하고 胡羯乘之而起하야 天下大亂이 至是六十餘年이라】에 河, 洛丘墟하고 函夏【函은 謂函谷關이니 關之東爲中夏也라 故曰函夏也라 又函은 容也요 夏는 大也니 言中原之地 所函容者大也라】蕭條하야 士民이 播流江表하야 已經數世라 存者는 老子長孫하고 亡者는 丘隴成行하니 雖北風之思【詩北風篇曰 北風其喈하니 雨雪其霏로다 惠而好我로 携手同歸라하니라[頭註]胡馬는 每北風則翹首北望이라】가 感其素心이나 目前之憂 實爲交切이라 植根江外【中原以江南爲江外라】 數十年矣어늘 一朝에 頓欲拔之하야 驅踧於空荒之地【頓은 遽也라 踧은 音祝이니 至也요 又行謹敬也라】하니 提挈萬里에 踰險浮深하야 離墳墓, 棄生業이면 田宅을 不可復售【售는 賣物去手라】요 舟車를 無從而得이라 捨安樂之國하고 適習亂之鄕은 國家之所宜深慮也니이다 王述曰 溫이 欲以虛聲威朝廷耳요 非實事也니 但從之면 自無所至리이다 事果不行하다 溫이 又議移洛陽鍾虡【虡는 音巨니 鍾鼓之跗에 以猛獸爲飾이라 又作鐻하니 樂器所懸이니 橫曰筍이요 植曰虡라】어늘 述曰 永嘉不競【競은 疆也라 懷帝永嘉五年에 爲劉聰所獲이라 故云永嘉不競也라니라】하야 暫都江左하니 方當蕩平區宇하고 旋軫舊京이요 若其不爾면 宜改遷園陵이니 不應先事鍾虡니라 溫이 乃止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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隆和 元年(임술 362) - 秦나라 甘露 4년이고, 燕나라 建熙 3년이다. - 정월에 桓溫이 上疏하여 洛陽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고, 永嘉의 난리【永嘉의 亂은 晉 懷帝가 漢나라(前趙)의 劉聰에게 사로잡힌 일을 가리킨다.】로부터 江外(江南)로 옮겨 온【播流는 피난하여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것이요, 江表는 中原에서 揚子江 남쪽 지역을 江表라 하였다.】 자들을 일체 북쪽으로 옮겨서 河南을 충실히 할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桓溫을 두려워하여 감히 異見을 말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북쪽 지방이 황량하여 민심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니 비록 모두들 옮기는 것이 불가함을 알았으나 감히 먼저 간하지 못하였다. 散騎常侍孫綽이 상소하기를 “옛날 中宗(元帝)【中宗은 元帝의 廟號이다.】이 즉위하자 誠信과 和順함【≪周易≫ 〈繫辭傳〉에 이르기를 “하늘이 돕는 것은 順함이요(하늘은 이치를 순히 따르는 자를 도와주고), 사람이 돕는 것은 誠信이다.(사람은 성실한 자를 도와준다)” 하였다.】이 天意와 民心에 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로 萬里의 長江에 의지해서 경계로 삼아 지켰습니다. 이제 국가에 난리가 있은 이래로 60여 년인데,【[頭註]今自喪亂已來 六十餘年:賈后가 폐출되고 趙王 司馬倫이 죽임을 당함으로부터 계속하여 諸王이 서로 交戰하고 胡와 羯이 이 틈을 타고 일어나 천하가 크게 어지러웠는데, 이때에 이르러 60여 년이 되었다.】黃河와 洛陽 일대가 빈 터가 되고 函夏(中原 지역)【函은 函谷關을 이르니, 함곡관의 동쪽이 中夏이므로 函夏라고 이른 것이다. 또 函은 용납하는 것이고 夏는 큼이니, 中原 지역은 포용하는 것이 큼을 말한 것이다.】가 쓸쓸하여 관리와 백성들이 江外로 옮겨 온 지 이미 몇 대가 지났습니다. 그리하여 생존한 자는 자식이 이미 늙고 손자가 장성했으며 죽은 자는 무덤이 행렬을 이루고 있으니, 비록 北方에 대한 그리움【[釋義]≪詩經≫ 〈北風篇〉에 이르기를 “北風이 차갑게 부니 함박눈이 펄펄 내리도다.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이와 손을 잡고 함께 돌아가리라.” 하였다.[頭註]胡馬는 매양 北風이 불면 머리를 들고 북쪽을 바라본다.】이 평소 그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만 目前의 우환이 실로 더욱 절박합니다. 江外【江外는 中原에서 揚子江 남쪽 지역을 江外라고 한다.】에 뿌리를 내린 지가 수십 년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뽑아다가 텅 비고 황량한 땅에 내몰고자 하니,【[頭註]頓欲拔之 驅踧於空荒之地:頓은 갑자기이다. 踧은 音이 축이니 이르는 것이요, 또 행실을 삼가고 공경하는 것이다.】 가솔들을 이끌고 만 리를 감에 험한 산을 넘고 깊은 물을 건너서 先塋을 떠나고 生業을 버리게 되면 田地와 집을 다시 살【售는 물건을 팔아서 手中을 떠난 것이다.】 수가 없고 배와 수레를 얻을 길이 없습니다. 안락한 나라를 버리고 오랫동안 전란을 겪었던 고향으로 가는 것은 국가가 깊이 염려해야 할 바입니다.” 하였다. 王述이 말하기를 “桓溫이 큰소리쳐서 조정을 위협하고자 한 것일 뿐이지 실제의 일이 아니니, 다만 그대로 따르면 저절로 이르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일이 과연 행해지지 않았다. 桓溫이 또 洛陽의 종과 종틀【虡는 音이 거이니 종과 북의 받침에 猛獸를 붙여서 장식한 것이다. 또 鐻로도 쓰니 樂器를 매다는 것이다. 가로로 된 것을 筍이라 하고 세로로 된 것을 虡라 한다.】을 옮겨 올 것을 의논하자, 王述이 말하기를 “永嘉年間에 강성하지 못하여【競은 강함이다. 懷帝 永嘉 5년(311)에 劉聰에게 사로잡혔으므로 ‘永嘉 年間에 강성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잠시 江左(江南)에 도읍하고 있으니, 바야흐로 區宇(온 천하)를 평정하고 곧바로 옛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이요,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先帝의 陵墓를 옮겨 와야 할 것이니, 먼저 종과 종틀을 옮겨 오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桓溫이 이에 중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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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亥]興寧元年
興寧 元年(계해 363) - 秦나라 甘露 5년이고, 燕나라 建熙 4년이다. - 5월에 桓溫에게 侍中‧大司馬‧都督中外諸軍‧錄尙書事【錄은 총괄함이다.】를 가하였다. 桓溫이 王坦之를 長史로 삼으니 王坦之는 王述의 아들이다. 또 郗超를 參軍으로 삼고 王珣을 主簿로 삼아서 매사를 반드시 두 사람과 상의하니, 府中 사람들이 말하기를 “수염이 긴 參軍과 키가 작은 主簿【[頭註]髥參軍 短主簿:수염이 긴 參軍과 키가 작은 主簿라고 한 것은 郗超는 수염이 많고 王珣은 체구가 왜소하였기 때문이다.】가 令公(桓溫)을 기쁘게도 하고 令公을 노여워하게도 한다.” 하였다. 王珣과 謝玄이 모두 桓溫의 掾屬이 되었는데, 桓溫이 모두 소중히 여겨 말하기를 “謝掾은 나이 40에 반드시 깃발을 끼고 節을 잡을 것이요【[頭註]旄와 節은 3권의 庚辰年條(B.C.221) 아래의 旌旄節旗 注에 보인다. [通鑑要解]깃발을 끼고 節을 잡는다는 것은 方面을 담당할 것임을 말한다.】王掾은 마땅히 黑頭 相公이 될 것이니, 모두 쉽게 얻을 수 있는 인재가 아니다.【쉽지 않다는 것은 얻기 어려움을 말한다.】” 하였다. 謝玄은 謝奕의 아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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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子]二年
정월에 揚州刺史王述을 尙書令으로 삼았다. 王述이 벼슬에 제수될 때마다 겉으로만 사양하는 체하지 않고, 사양할 때는 반드시 받지 않을 경우에만 사양하였다. 王述이 尙書令이 되자 아들王坦之가 王述에게 아뢰기를 “故事에 비춰 보건대 마땅히 사양하여야 합니다.” 하니, 王述이 말하기를 “너는 내가 이 벼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였다. 王坦之가 말하기를 “아닙니다. 다만 사양하는 것이 본래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니, 王述이 말하기를 “이미 감당할 수 있으니 어찌 다시 사양하겠느냐. 사람들은 네가 나보다 낫다고 말하나 너는 참으로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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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에 帝崩【帝信方士하야 斷穀餌藥이러니 藥發하야 崩하다】하고 琅琊王奕이 卽皇帝位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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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奕
帝奕 字延齡이니 成帝次子也라
[丁卯]太和二年
太和 2년(정묘 367) - 秦나라 建元 3년이고, 燕나라 建熙 8년이다. - 燕나라 太原王 慕容恪【太原王 慕容恪은 慕容皝의 넷째 아들이다.】이 병이 심해지자, 慕容暐【慕容暐는 慕容皝의 둘째 아들인 慕容雋의 아들이다.】가 친히 가서 병을 살펴보고 그가 죽은 뒤의 일을 물었는데, 慕容恪이 말하기를 “吳王이 文武를 겸비하여 管仲과 蕭何에 버금가니, 폐하께서 만약 그에게 큰 정사를 맡기신다면 국가가 평안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秦나라와 晉나라가 반드시 틈【窬는 音이 유이니, 문 옆의 작은 구멍이다.】을 엿보아 동하려는 계책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慕容恪이 말을 마치고 죽었다. 秦王苻堅이 慕容恪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은밀히 燕나라를 도모할 계책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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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四年
[己巳]四年이라 〈秦建元五年이요 燕建熙十年이라〉 四月에 大司馬桓溫이 帥步騎五萬하고 伐燕할새 時에 恪已死하니 諸將이 不能抗이라 燕王暐 乃求救于秦이어늘 王猛이 密言於堅曰 燕雖彊大나 慕容評은 非溫敵也니 若溫擧山東하야 進屯洛邑하고 收幽, 冀之兵하고 引幷, 豫之粟하야 觀兵【觀은 音貫이라 觀은 示요 兵은 威也니 謂陳兵䝱之也라】崤, 澠【崤는 山名이요 澠은 水名이니 {澠池縣}皆在弘農하니라】이면 則陛下大事去矣리이다 今不如與燕合兵以退溫이니 溫退면 燕亦病矣라 然後에 我承其敝而取之면 不亦善乎잇가 堅從之하야 遣洛州刺史鄧羌하야 帥步騎二萬하야 以救燕하다 溫이 數戰不利【數은 不一也라】하고 糧儲復竭이라 又聞秦兵將至하고 乃焚舟棄輜重鎧仗【鎧는 甲也요 仗은 刀戟總名이라】하고 自陸道奔還이어늘 吳王垂 自帥八千騎하고 追之하야 及溫於襄邑하야 大破之하고 斬首三萬級하다 秦將苟池 邀擊溫於譙하야 又破之하니 死者復以萬計라 溫收散卒하야 屯于山陽【山陽은 揚州域이니 晉分廣陵하야 置山陽郡하고 隋置楚州하고 宋爲淮安軍하니라 括地志에 楚州山陽縣은 本漢射陽縣也니 射는 食夜反이라】하다 溫이 深恥喪敗하야 乃歸罪於袁眞하야 奏免眞爲庶人【袁眞은 豫州刺史也라 溫이 使眞攻譙, 梁할새 開石門하야 以通水運이러니 不克하니 乃歸罪하야 奏免爲庶人이라 眞이 不伏하고 表溫罪狀이어늘 朝廷不報하니 遂據壽春하고 叛降于燕하니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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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和 4년(기사 369) - 秦나라 建元 5년이고, 燕나라 建熙 10년이다. - 4월에 大司馬桓溫이 步兵과 騎兵 5만 명을 거느리고 燕나라를 정벌하였다. 이때 慕容恪이 이미 죽으니 여러 장수들이 항거하지 못하였다. 燕王慕容暐가 마침내 秦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니, 王猛이 은밀히 苻堅에게 말하기를 “燕나라가 비록 강대하나 慕容評은 桓溫의 적수가 아니니, 만약 桓溫이 山東을 점령한 다음 進軍하여 洛邑에 주둔하고 幽州와 冀州의 군사를 거두고 幷州와 豫州의 곡식을 징발해서 崤山과 澠池【崤는 산 이름이고 澠은 물 이름이니, 모두 弘農郡에 있다.】에서 군대를 열병【觀은 音이 관이다. 觀은 보이는 것이고 兵은 威勢이니, 觀兵은 군대를 정렬하여 위협함을 이른다.】한다면 폐하의 대사가 틀어질 것입니다. 이제 燕나라와 병력을 규합하여 桓溫을 물리치는 것만 못하니, 桓溫이 후퇴하면 燕나라도 병들 것입니다. 그런 뒤에 우리가 그 피폐한 틈을 타서 취한다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苻堅이 그의 말을 따라 洛州刺史鄧羌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燕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桓溫이 여러 번【數은 한 번 만이 아닌 것이다.】 싸워 승리하지 못하고 비축했던 양식이 다시 고갈되었는데, 또 秦나라 군대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마침내 배를 불태우고 輜重과 갑옷과 병기【鎧는 갑옷이고, 仗은 칼과 창의 총칭이다.】를 버리고 육로를 따라서 달아나 돌아왔다. 吳王慕容垂가 스스로 8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이들을 추격하여 襄邑에서 桓溫을 따라잡아 크게 격파하고3만 명의 首級을 베었다. 秦나라 장수 苟池가 桓溫을 譙에서 맞아 싸워서 또다시 격파하니, 죽은 자가 다시 만 명으로 헤아려졌다. 桓溫이 흩어진 병졸을 수습하여 山陽【山陽은 揚州 지역이니, 晉나라가 廣陵을 분할하여 山陽郡을 두었고, 隋나라는 楚州를 두었고, 宋나라는 淮安軍을 만들었다. ≪括地志≫에 “楚州의 山陽縣은 본래 漢나라 射陽縣이니, 射는 食夜反(사)이다.” 하였다.】에 주둔하였다. 桓溫이 패망한 것을 깊이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袁眞에게 죄를 씌워서 袁眞을 면직시킬 것을 아뢰어 庶人으로 삼았다.【袁眞은 豫州刺史였다. 桓溫이 袁眞으로 하여금 譙와 梁을 공격하게 할 적에 石門을 열어 水運을 통하게 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자 마침내 죄를 씌워 袁眞을 면직시킬 것을 아뢰어 庶人으로 삼았다. 袁眞이 복종하지 않고 表文을 올려 桓溫의 죄상을 아뢰었으나 조정에서 회답하지 않자, 마침내 壽春을 점거하고 배반하여 燕나라에 항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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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나라 吳王慕容垂가 鄴으로 돌아오니, 위엄과 명망이 더욱 떨쳐졌다. 太傅慕容評이 그를 시기하자慕容垂가 아들, 아우, 조카들과 함께 秦나라로 달아났다. 처음에 秦王苻堅은 太宰慕容恪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燕나라를 도모할 마음이 있었으나 慕容垂의 위엄과 명성을 두려워하여 감히 군대를 일으키지 못하였는데, 慕容垂가 왔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교외로 나가 맞이하고 손을 잡고 말하기를 “하늘이 어진 영걸을 냄은 반드시 서로 더불어 큰 공을 이루게 하려고 해서이니, 이는 자연의 운수이다. 요컨대 卿과 함께 천하를 평정할 것이니, 그런 뒤에 卿을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서 대대로 幽州에 봉해 주는 것이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였다. 王猛이 苻堅에게 말하기를 “慕容垂 父子는 비유하면 용과 범 같아서 길들일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만약 바람과 구름을 빌려 주면 장차 다시는 제재할 수 없을 것이니 일찍 제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苻堅이 말하기를 “내가 막 영웅들을 거두어 모아서 四海를 깨끗이 하려 하니, 어찌 죽이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慕容垂를 冠軍將軍으로 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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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司馬溫이 發徐, 兗州民하야 築廣陵城하고 徙鎭之하니 時에 征役旣頻하고 加之疫癘【癘鬼爲災曰疫이요 四時不和之疾曰癘라】하야 死者什四五라 百姓이 嗟怨이러라 秘書監孫盛이 作晉春秋할새 直書時事하니 大司馬溫이 見之하고 怒하야 謂盛子曰 枋頭는 誠爲失利【穆帝永和五年에 時桓溫及燕人으로 戰于枋頭하야 不利而還하니라[附註]史略에 帝奕時에 溫及燕人戰於枋頭하야 不利而還이라하고 其下曰 吳王垂 旣破晉軍에 威名大振이라하니 枋頭失利는 似指上己巳之戰이어늘 而釋義與此相背하니 未詳이라】어니와 何至乃如尊君【晉人은 於人子前에 稱其父爲尊君尊公이라】所言이리오 若此史遂行이면 自是關君門戶事【言欲滅其門也라】니라 其子遽拜謝【遽는 急也, 疾也니 戰慄也라】하고 請改之하다 時에 盛이 年老家居할새 性이 方嚴有軌度하니 子孫이 雖班(斑)白이나 待之愈峻이러니 至是하야 諸子乃共號泣稽顙하고 請爲百口計호되 盛이 大怒不許하니 諸子遂私改之【盛이 先已寫別本하야 傳之外國이라 及孝武帝購求異書할새 得之於遼東人한대 與見本不同하니 遂兩存焉하니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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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司馬桓溫이 徐州와 兗州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廣陵城을 쌓고 옮겨서 鎭駐하니, 이때에 부역이 이미 빈번하고 역병【癘鬼(역병을 일으키는 귀신)가 재앙을 만든 것을 疫이라 하고, 四時가 순조롭지 못하여 병이 생긴 것을 癘라 한다.】까지 겹쳐서 죽는 자가 10에 4, 5나 되므로 백성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秘書監孫盛이 《晉春秋》를 지을 적에 당시의 일을 隱諱하지 않고 곧바로 쓰니, 大司馬桓溫이 이것을 보고 노하여 孫盛의 아들에게 이르기를 “枋頭에서는 내가 참으로 불리하였지만【[釋義]穆帝 永和 5년(349)에 당시 桓溫이 燕나라 사람과 枋頭에서 싸워서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附註]≪史略≫에 “廢帝 司馬奕의 때에 桓溫이 燕나라 사람과 枋頭에서 싸워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고, 그 아래에 이르기를 “吳王 慕容垂가 이미 晉나라 군대를 격파하자, 위엄과 명망이 크게 떨쳐졌다.” 하였으니, ‘枋頭에서 불리하였다’는 것은 앞의 기사년(369)의 전투를 가리킨 듯한데 釋義의 내용은 이와 서로 배치되니, 자세하지 않다.】 어찌 마침내 尊君(부친)【晉人은 아들 앞에서 아버지를 칭하여 尊君, 尊公이라 하였다.】이 말한 것 같은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만약 이 역사책이 마침내 세상에 행해진다면 이는 자연 그대 가문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그대 가문의 存亡에 관계된다는 것은 孫盛의 가문을 멸망시키고자 함을 말한다.】일 것이다.” 하였다. 孫盛의 아들이 급히【遽는 급함이고 빠름이니, 두려워서 떠는 것이다.】 이마를 조아리며 절하여 사죄하고 내용을 고칠 것을 청하였다. 이때 孫盛이 연로하여 집에 거처할 때에 성품이 방정하고 엄격하여 법도가 있으니, 자손들이 비록 斑白이 되었으나 孫盛은 그들을 대함에 더욱 준엄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여러 아들들이 마침내 함께 울부짖으며 이마를 조아리고 많은 식구의 목숨을 위하여 고려할 것을 청하였으나 孫盛이 크게 노하고 허락하지 않으니, 여러 아들들이 마침내 몰래 고쳤다.【孫盛이 먼저 이미 별도로 한 본을 베껴서 外國에 전하였다. 東晉의 孝武帝(司馬曜)가 진귀한 책을 찾아 구할 때에 遼東 사람에게서 이 別本을 얻었는데, 현재의 本과 같지 않으니 마침내 두 가지 본이 있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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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五年
[庚午]五年이라 〈秦建元六年이라 ○ 燕建熙十一年이라 ○是歲에 燕亡하니 大一, 小二니 凡三僭國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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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和 5년(경오 370) - 秦나라 建元 6년이다. ○ 燕나라 建熙 11년이다. ○ 이해에 燕나라가 망하였다.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셋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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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燕荊州刺史武威王筑이 以洛陽降秦하다 六月에 秦王堅이 復遣王猛하야 督鎭南將軍楊安等하야 將步騎六萬하고 以伐燕하다 八月에 燕主暐 命太傅上庸王評하야 將中外精兵三十萬하고 以拒秦하다 猛이 克壺關하니 所過郡縣이 皆望風降附라 燕人이 大震이러라 黃門侍郞封孚 問司徒長史申胤曰 事將何如오 胤歎曰 鄴必亡矣니 吾屬이 今玆將爲秦虜로다 然이나 越得歲而吳伐之하야 卒受其禍【左傳昭三十二年에 吳伐越한대 史墨曰 不及四十年하야 越其有吳乎인저 越得歲而吳伐之하니 必受其凶이라하니라 杜預註曰 此年에 歲在星紀하니 星紀는 吳, 越之分也라 歲星所在에 其國有福이어늘 吳先用兵故로 反受其殃이라하더니 哀二十二年에 越果滅吳하니라 索隱曰 天官占云 歲星은 一曰應星이요 一曰經星이요 一曰紀星이라 歲星은 東方木之精이니 蒼帝之象也라 所在之國은 不可伐이요 可以伐人이라하니라】하니 今福德이 在燕【福德은 一曰德星이니 出於有道之國이라 索隱曰 德星은 卽歲星이니 歲星所在에 其國有福이니라】하니 秦雖得志나 而燕之復建이 不過一紀耳라하더라 九月에 秦王猛이 進兵潞川하니 太傅評이 以猛縣(懸)軍【縣은 與懸同이니 孤軍遠征하야 其勢懸絶하야 不能相及故로 懸軍也라】深入이라하야 欲以持久制之어늘 猛이 陳於渭源而誓之하니 衆皆踊躍하야 破釜棄糧하고 大呼競進이라 燕兵이 大敗하야 俘斬五萬餘人하고 乘勝追擊하니 所殺及降者 又十萬餘人이라 評이 單騎走還鄴하니 秦兵이 長驅而東하야 丁卯에 圍鄴하다 十一月에 秦王堅이 自帥精銳十萬하고 赴鄴하다 戊寅에 燕散騎侍郞餘蔚이 夜開鄴北門하고 納秦兵하니 燕主暐 與上庸王評等으로 奔龍城이어늘 秦王堅이 使遊擊將軍郭慶으로 追及於高陽하야 執以詣秦王堅하다 堅이 哀而釋之하고 令還宮하니 帥文武出降하고 諸州牧守及六夷【胡, 羯, 鮮卑, 氐, 羌, 巴蠻也니 或曰 烏桓이요 非巴蠻也라】渠帥 盡降於秦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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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秦王苻堅이 다시 王猛을 보내어 鎭南將軍楊安 등을 독려해서 보병과 기병 6만 명을 거느리고 燕나라를 치게 하였다. 8월에 燕主慕容暐가 太傅上庸王慕容評에게 명하여 中外의 정예병 30만 명을 거느리고 秦나라를 맞아 싸우게 하였다. 王猛이 壺關을 함락시키니, 지나는 곳의 郡縣들이 모두 기세만 보고도 항복하여 붙었으므로 燕나라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黃門侍郞封孚가 司徒長史申胤에게 묻기를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하니, 申胤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鄴都가 반드시 망할 것이니, 우리들은 이제 秦나라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越나라가 歲星을 얻었는데 吳나라가 정벌하여 끝내 그 禍를 받았다.【≪春秋左傳≫ 昭公 32年條에 吳나라가 越나라를 정벌하자, 史墨이 말하기를 “40년이 못 되어 越나라가 吳나라를 소유할 것이다. 越나라가 歲星을 얻었는데 吳나라가 정벌하니, 반드시 禍를 받을 것이다.” 하였다. 杜預의 註에 이르기를 “이해에 歲星이 星紀에 있으니, 星紀는 吳‧越의 분야이다. 歲星이 있는 곳에는 그 나라에 福이 있는데, 吳나라가 먼저 군대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도리어 그 殃禍를 받은 것이다.” 하였는데, 哀公 22年條에 越나라가 과연 吳나라를 멸망시켰다. ≪史記索隱≫에 말하였다. “≪天官占≫에 이르기를 ‘歲星은 일명 應星이요, 일명 經星이요, 일명 紀星이다. 歲星은 東方 木의 精氣이니, 蒼帝의 象이다. 이 별이 있는 나라는 정벌할 수 없고, 이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벌할 수는 있다.’ 하였다.”】 지금 福德星이 燕나라에 있으니,【福德星은 일명 德星이니, 道가 있는 나라에 출현한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福德星은 곧 歲星이니, 歲星이 있는 곳에는 그 나라에 福이 있다.” 하였다.】秦나라가 비록 뜻을 얻더라도 燕나라의 重建은 1紀(12년)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9월에 秦나라 王猛이 潞川으로 진군하자, 太傅慕容評은 王猛이 懸軍(외로운 군대)【縣은 懸과 같으니, 고립된 군대가 멀리 싸우러 가서 그 형세가 현격하여 서로 미칠 수가 없으므로 懸軍이라 한 것이다.】을 이끌고 적지에 깊이 들어왔다 하여 지구전으로 제압하고자 하였는데, 王猛이 渭源에서 군대를 진열하고 맹세하니, 군사들이 모두 기뻐서 날뛰며 결사의 각오로 가마솥을 부수고 양식을 버리고서 크게 고함치며 함께 진격했다. 燕나라 군대를 대패시켜 5만여 명을 포로로 사로잡고 목을 베었으며 승세를 타고 추격하니, 죽인 자와 항복받은 자가 또 10만여 명이었다. 慕容評이 單騎로 달아나鄴都로 돌아오니, 秦나라 군대가 승승장구하여 동쪽으로 와서 정묘일(10월 26일)에 鄴都를 포위하였다. 11월에 秦王苻堅이 스스로 정예병 10만 명을 거느리고 鄴城으로 달려갔다. 무인일(11월 7일)에 燕나라 散騎侍郞餘蔚이 밤중에 鄴城의 北門을 열고 秦나라 병사를 받아들이니, 燕主慕容暐가 上庸王慕容評 등과 함께 龍城으로 달아났다. 秦王苻堅이 遊擊將軍郭慶으로 하여금 추격하게 하여 郭慶이 高陽에서 이들을 사로잡아 秦王苻堅에게 보냈다. 苻堅이 가엾게 여겨 이들을 놓아주고 궁으로 돌아가게 하니 文武官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였고, 여러 州의 牧守와 여섯 오랑캐족【六夷는 胡‧羯‧鮮卑‧氐‧羌‧巴蠻이니, 혹자가 이르기를 “烏桓이고 巴蠻이 아니다.”라고 한다.】의 渠帥(추장)들이 모두 秦나라에 항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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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二月에 秦王堅이 遷慕容暐及王公百官과 幷鮮卑四萬餘戶于長安한대 燕故太史黃泓이 歎曰 燕必中興이니 其在吳王【吳王은 慕容垂라】乎인저 恨吾老하야 不及見耳라하더라 汲郡趙秋曰 天道在燕이어늘 而秦滅之하니 不及十五年하야 必復爲燕有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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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簡文皇帝
[辛未]咸安元年
○ 10월에 大司馬桓溫은 자신의 재주와 지략과 지위와 명망【位望은 지위와 명망이다.】을 믿고 은밀히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고서 일찍이 베개를 어루만지며 탄식하기를 “남자가 아름다운 명성을 百代에 남길 수 없으면 또한 더러운 이름이라도 만년토록 남겨야 한다.” 하였다. 桓溫이 먼저 河朔(河北) 지방에서 공을 세워 당대의 명망을 거두고 돌아와 九錫을 받고자 하였는데, 枋頭에서 패하자 위엄과 명성이 크게 꺾였다. 壽春을 점령한 뒤에 參軍郗超에게 이르기를 “枋頭의 치욕을 씻을 수 있겠는가?” 하니, 郗超가 대답하기를 “안 됩니다.” 하였다. 얼마 후 郗超가 桓溫을 찾아가 함께 잠을 잤는데, 한밤중에 桓溫에게 이르기를 “明公이 천하의 重任을 담당하여 이제 60의 나이로 크게 군대를 동원하여 출정함에 실패하였으니,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큰 공업을 세우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바람을 진정시키고 복종【愜은 복종함이다.】시킬 수 없습니다.” 하였다. 桓溫이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하니, 郗超가 말하기를 “明公이 伊尹과 霍光의 일【郗超가 桓溫의 속마음을 알고 영합한 것이다.】을 하지 않는다면 큰 위엄과 권력을 세워서 四海를 진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桓溫이 평소 배반할 마음이 있었는데, 이 말을 깊이 옳게 여겨서 마침내 郗超와 더불어 의논을 결정하였다. [史略 史評]鄱陽石氏가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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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에 桓溫이 廣陵으로부터 建康에 나가서 太后의 명령을 선포하여 황제를 폐위시켜東海王으로 삼고, 會稽王司馬昱으로 皇極의 대통을 이어서 황제에 즉위하게 하니, 桓溫의 위엄과 권세가 대단히 혁혁【翕은 성대함이다.】하였다. 侍中謝安이 桓溫을 보고 멀리서 절하자, 桓溫이 놀라며 말하기를 “安石(謝安의 字)아! 卿이 무슨 일로 이와 같이 하는가?” 하니, 謝安이 말하기를 “군주가 앞에서 절하고 신하가 뒤에서 읍하는 경우는 있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桓溫을 丞相‧大司馬로 승진시켜京師에 머물면서 정사를 보필하게 하니, 桓溫이 한사코 사양하고 그대로 돌아가 姑孰에 鎭駐할 것을 청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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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二年
[壬申]二年이라 〈秦建元八年이라〉 七月에 帝崩【遺詔에 溫依周公居攝故事하라하고 又曰 少子可輔어든 輔之하고 如爲不可어든 君可自取하라하니 侍中王坦之 持詔入하야 於帝前에 毁之라 帝曰 天下儻來之運이어늘 卿何所嫌고하니 云云하다 】하고 太子卽皇帝位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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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安 2년(임신 372) - 秦나라 建元 8년이다. - 7월에 황제가 崩하고,【簡文帝가 崩할 때 遺詔에 “桓溫은 周公이 居攝한 故事를 따르라.” 하고, 또 말하기를 “少子가 보좌할 만하거든 보좌하고 만약 보좌할 수 없으면 그대가 스스로 취해도 된다.” 하니, 侍中 王坦之가 詔書를 가지고 대궐에 들어가 황제의 앞에서 이것을 찢어 버렸다. 황제가 말하기를 “天下를 뜻하지 않게 갑자기 얻었는데, 卿은 어찌하여 의혹하는가?” 하니, 王坦之가 云云하였다.】太子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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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에 秦나라가 王猛을 丞相으로 삼았다. 王猛이 丞相이 되자, 苻堅은 위에서 몸을 단정히 하고 손을 모아 無爲로써 다스리고【端은 바름이고 拱은 拱手하는 것이니, 端拱은 無爲(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를 말한다.】 백관들은 아래에서 자신의 직책을 총괄하니, 軍國 안팎의 정사가 王猛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王猛은 굳세고 밝고【욕심에 굴복당하지 않는 것을 剛이라 하고, 외물에 미혹되지 않는 것을 明이라 한다.】 깨끗하고 엄숙하여 善惡이 분명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녹만 받아먹는 자들【尸素는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祿만 받아먹는 것을 이른다.】을 추방하여 내쫓고 숨어서 세상에 나오지 않는 자들을 드러내어 발탁하며,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고 군대【軍旅는 1권의 ‘一旅’ 注에 보인다.】를 훈련시키며, 관직은 반드시 재주에 걸맞게 하고 형벌은 반드시 죄에 마땅하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나라가 부유하고 군대가 강성해져서 싸우면 승리하지 않음이 없었다. 秦國이 크게 다스려졌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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