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三十四 隋紀
通鑑節要 卷之三十四
隋紀
高祖文皇帝
[己酉]開皇九年
開皇 9년(기유 589) 陳主가 조서를 내리기를 “오랑캐들이 능멸하고 방종하여 우리 도성 근교에까지 침략하여 독침을 쏘는 벌과 같으니, 마땅히 때를 봐서 소탕하여 평정해야 한다.” 하고, 蕭摩訶‧樊毅‧魯廣達【蕭摩訶는 驃騎將軍이고, 樊毅는 護軍將軍이고, 魯廣達은 中領軍이었다.】을 모두 都督으로 삼았다. 이때에 賀若弼은 北道에서 출발하고 韓擒虎는 南道에서 출발하여 함께 전진하니, 강가에 있던 陳나라의 여러 수비군들이 소문만 듣고도 모두 도망하였다. 任忠【任忠은 陳나라 鎭東大將軍이다.】이 몇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隋나라 군대를 맞이하여항복하고는韓擒虎를 인도하여 곧바로 朱雀門으로 들어오니, 陳主가 두렵고 황급하여 스스로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군사들이 우물을 엿보고는 陳主를 밧줄로 끌어올려서 사로잡아長安으로 보냈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陳나라 武帝【武帝는 陳霸先이다.】는 王僧辯과 함께 梁나라 황실을 섬겨서 侯景을 죽이고는【陳霸先이 侯景을 토벌하여 평정한 것은 32권 壬申年條(552)에 보인다. 侯景은 본래 東魏의 定州刺史였는데, 高澄과 틈이 있어서 東魏를 배반하고 梁나라에 歸附하였다가 마침내 帝位를 찬탈하였다.】 때를 타고 틈을 엿보아 마침내 큰 공을 이루어서 곧바로 江南 지방을 소유하였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다. 文帝【文帝는 陳蒨이니, 武帝의 兄의 아들이다.】는 공손하고 정사에 부지런하여 충분히 훌륭한 군주가 될 만하였고, 孝宣帝【孝宣帝는 陳頊이니, 文帝의 아우이다.】는 齊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영토를 확장하였고 周나라가 일어날 때를 만나 무리를 잃었으니, 어찌 안을 믿지 않고 밖을 믿은 자가 아니겠는가. 구구한 陳나라로서 天下의 5분의 1도 차지하지 못하였으니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위태롭게 여겼어도 社稷을 보존하지 못했을 터인데, 더구나 後主【後主는 陳叔寶이니, 孝宣帝의 아들이다.】가 酒色에 빠져 한도가 없어서 陳나라의 멸망을 재촉【趣은 促으로 읽는다.】하였으니, 마른 우물【[釋義]眢(원)井:[釋義]우물에 물이 없는 것을 眢이라 한다.[頭註]眢은 음이 원이다.】에 몸을 던진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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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十年
開皇 10년(경술 590) 上은 성품이 시기【猜는 의심하는 것이다.】하고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미 지략과 권모술수를 부려 존귀한 지위를 얻고 나자, 인하여 文法(법조문)에 정밀한 것을 스스로 자랑하고 밝게 살핌으로써 아랫사람들을 대하여 항상 좌우 사람들로 하여금 조정의 안팎을 엿보게 해서 과실이 있으면 중한 죄를 가하였고, 또 令史가 뇌물을 받고 법을 어길까【재물(뇌물)을 받는 것을 贓이라 한다.】 근심해서 은밀히 사람을 시켜 돈과 비단을 그들에게 보내게 하여【遺는 주는 것이다.】 범법 행위를 적발하면 당장 목을 베었고, 매양 궁전 뜰에서 사람을 매질하여 하루 동안에도 혹 서너 차례에 이르렀으며, 또 항상 궁전 뜰에서 사람을 죽였다. 兵部侍郞馮基가 굳이 간하였으나 上이 따르지 않고 〈마침내 그를 궁전 뜰에서 죽였다.〉 그러나 또한 오래지 않아 뉘우쳐서 馮基의 家屬들을 위로하고 여러 신하 중에 한 명도 이에 대해 간하지 않았다고 노여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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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江表(江南)는 東晉 이후로 형벌과 법이 엉성하고 느슨하며 世族들이 한미한 가문을 능멸하였는데, 陳나라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다스리는 郡縣의 관원들을 모두 다 바꾸고, 蘇威【蘇威는 右僕射이다.】가 다시 ‘五敎’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외우게 하니, 선비와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민간에 다시 유언비어가 퍼지되 “隋나라가 백성들을 옮겨 다시 關中으로 들어가게 하고자 한다.” 하니, 遠近의 사람들이 놀라서 두려워하였다. 이에 陳나라 옛 境內의 백성들이 대부분 모두 배반하여 말하기를 “다시 우리들【吳 지방 말에 我를 儂이라 하였다.】로 하여금 ‘五敎’를 외게 하고자 하는가.” 하였다. 황제가 명하여 楊素를 行軍總管으로 삼아서 이들을 토벌하니, 江南이 크게 평정되었다. 楊素가 이에 군대를 돌이켜 돌아왔다.【班師는 군대를 돌이켜 돌아옴을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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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十五年
[乙卯]十五年이라 三月에 仁壽宮이 成이어늘 上幸之하야 見制度壯麗하고 大怒曰 楊素殫民力爲離宮하야 爲吾結怨天下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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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皇 15년(을묘 595) 3월에 仁壽宮이 완성되자, 上이 행차하여 궁궐의 규모가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楊素가 백성들의 힘을 다 고갈시켜 離宮을 지어서 나로 하여금 천하 사람들에게 원한을 맺게 했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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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十七年
[丁巳]十七年이라 帝以盜賊繁多라하야 命盜一錢以上은 皆棄市하고 或三人이 共盜一瓜라가 事發卽死하니 於是에 行旅皆晏起早宿하야 天下懍懍이러라 有數人이 劫執事【王氏曰 劫은 持也니 謂威驅勢劫也라 執事는 謂主執其事者라】而謂之曰 吾豈求財者耶아 但爲枉人【被罪之人이라】來耳로니 而【猶言爾汝也니 下而不, 而屬도 竝同이라】爲我奏至尊호되 自古以來로 體國立法에 未有盜一錢而死也라하라 而不爲我以聞이라가 吾更來면 而屬이 無類矣리라 帝聞之하고 爲停此法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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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皇 17년(정사 597) 황제가 도적이 많다 하여 1錢 이상을 훔친 자는 모두 저잣거리에서 참수하고 시체를 길거리에 내버리도록 명령하였으며, 혹 세 사람이 함께 오이 한 개를 훔쳤다가 일이 발각되자 즉시 사형에 처하니, 이에 길 가는 나그네들이 모두 늦게 출발하고 일찍 투숙하여 천하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몇 사람이 일을 執行하는 관원을 위협하여【王氏가 말하였다. “劫은 잡음이니, 위엄으로 몰아붙이고 힘으로 겁박함을 이른다. 執事는 그 일을 주관하여 집행하는 자를 이른다.”】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 재물을 탐하는 자이겠는가. 우리는 다만 억울한 사람【枉人은 죄를 입은 억울한 사람이다.】을 위해서 왔을 뿐이다. 네【而는 爾, 汝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아래의 ‘而不’과 ‘而屬’도 모두 같다.】가 우리를 위하여 至尊(皇上)에게 아뢰되 ‘예로부터 국가를 다스리고 법을 확립할 적에 1錢을 훔치고서 사형에 처해진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라. 네가 우리를 위하여 이 말을 皇上에게 아뢰지 않았다가 우리가 다시 오면 너희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文帝가 이 말을 듣고 이 법을 폐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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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申]二十年
○ 初에 帝之克陳也에 天下皆以爲將太平이라호되 監察御史房彦謙이 私謂所親曰 主上이 忌刻而苛酷하고 太子卑弱하고 諸侯擅權【秦王俊, 晉王廣, 蜀王秀 分據方面也니 皆文帝子라】하니 天下雖安이나 方憂危亂이라하니라 其子玄齡이 亦密言於彦謙曰 主上이 本無功德하고 以詐取天下요 諸子皆驕奢不仁하야 必自相誅夷하리니 今雖承平이나 其亡을 可翹足待【翹는 擧也, 企也라】하리이다 玄齡이 與杜如晦로 皆與(預)選吏部【與吏部選이라】하다 侍郞高孝基 名知人이러니 見玄齡하고 歎曰 僕이 閱人多矣로되 未有如此郞者하니 異日에 必爲偉器로되 恨不見其大成耳라하고 見如晦하고 謂曰 君有應變之才하니 必任棟梁(樑)之重이라하고 俱以子孫託之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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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文帝가 陳나라를 평정했을 때에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이로부터 천하가 장차 태평해질 것이라고 여겼는데, 監察御史房彦謙이 자기와 친한 이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主上은 시기하고 각박하고 까다롭고 혹독하며 太子는 비천하고 나약하며 諸侯들은 각각 한 방면을 맡아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니,【秦王 楊俊, 晉王 楊廣, 蜀王 楊秀가 각각 方面을 나누어 차지하였으니, 모두 文帝(楊堅)의 아들이다.】 天下가 비록 겉으로는 편안하나 나는 위태로움과 혼란이 생길까 걱정이다.” 하였다. 그의 아들房玄齡이 또 은밀하게 房彦謙에게 말하기를 “主上은 본래 功德이 없으면서 속임수로 천하를 취하였고, 여러 아들들은 모두 교만하고 사치하며 不仁하여 반드시 서로 살육할 것이니, 지금은 비록 태평하지만 그 멸망하는 것을 발꿈치를 들고 서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釋義]可翹(교)足待:翹는 드는 것이고, 바라는 것이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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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齊州의 行參軍인 王伽가 李參 등 유배형을 받은 죄수 70여 명을 호송하여 京師로 향할 적에 滎陽에 이르러 죄수들의 고생을 가엾게 여겨 王伽가 마침내 그들의 형틀【枷는 음이 가이니, 죄인의 목에 씌우는 형틀(항쇄)이다.】을 모두 벗겨 주고 이들을 압송하는 병졸을 멈추게 하고서 죄수들과 약속하기를 “아무 날에 너희들은 京師에 도착해야 한다. 만약 약속한 날짜보다 일찍 오거나 늦게 오면【만약 약속한 날짜에 이르되 약속한 날짜보다 혹은 일찍 오거나 혹은 늦게 오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 대신 사형을 당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그들을 놓아주어 떠나게 하였다. 유배형을 받은 죄수들이 감동하고 기뻐하여 기약한 날짜가 되자 京師에 이르러 한 명도 기약을 어기고 도망한 자가 없으니, 上이 듣고서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이에 유배형을 받은 죄수들을 다 불러서 처자식을 데리고 함께 조정에 들어오게 하여 대궐의 뜰에서 잔치를 베풀어 준 다음 그들의 죄를 사면하였다.【[通鑑要解]於是……殿庭而赦之:황제가 명령을 내리기를 “가령 관원이 모두 王伽와 같고 백성들이 모두 李參과 같다면 형벌을 폐지하고 쓰지 않을 날이 어찌 멀겠는가.” 하고, 마침내 王伽를 雍縣의 令으로 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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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亥]仁壽三年
[癸亥]仁壽三年이라 龍門【縣名이라】王通이 詣闕하야 獻太平十二策이러니 上이 不能用하니 罷歸하다 通이 遂敎授於河, 汾之間하니 弟子自遠至者甚衆이라 累徵不起러라 楊素【時爲左僕射라】甚重之하야 勸之仕한대 通曰 通有先人之敝廬하니 足以庇風雨【庇는 音秘니 廕也라 屋宇作庇요 草木作芘라】요 薄田이 足以具餰粥【餰은 通作饘하니 禮記註云 厚曰饘이요 希(稀)曰粥이라】이요 讀書談道면 足以自樂이니 願明公은 正身以治天下하야 使時和年豐이면 通也受賜多矣니 不願仕也하노라 或이 譖通於素曰 彼實慢公이어늘 公何敬焉고 素以問通한대 通曰 使公可慢이면 則僕得矣요 不可慢이면 則僕失矣라 得失在僕하니 公何與焉고하니 素待之如初하니라 弟子賈瓊이 問息謗한대 通曰 無辯하라 問止怨한대 曰 不爭하라 通이 嘗稱無赦之國은 則刑必平하고 重斂之國은 其財必貧이라하고 又曰 聞謗而怒者는 讒之囮【囮는 音訛니 譯也라 韻會註에 譯은 謂傳四夷及鳥獸之語라 囮者는 誘禽鳥之來也니 卽今鳥媒 是也라[頭註]囮는 鳥媒니 繫生鳥以來者也라】也요 見譽而喜者는 佞之媒也니 絶囮去媒라야 讒佞遠矣리라 大業末【大業은 煬帝라】에 卒於家하니 門人이 諡曰文中子라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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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壽 3년(계해 603) 龍門【龍門은 縣의 이름이다.】 사람 王通이 대궐에 이르러서 ‘太平十二策’을 바쳤는데, 上이 쓰지 못하자 그대로 돌아갔다. 王通이 마침내 河水와 汾水 사이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니,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는 제자들이 매우 많았다.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王通이 나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楊素【楊素는 이 당시 左僕射였다.】가 그를 매우 소중히 여겨 그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자, 王通이 대답하기를 “나는 先祖가 물려준 낡은 집이 있으니 이것이면 충분히 비바람을 막을 수 있고,【庇는 음이 비이니, 덮어 주는 것이다. 집의 지붕을 庇라 하고 초목이 우거져 그늘이 덮인 것을 芘라 한다.】 얼마 안 되는 척박한 농지가 있으니 이것이면 충분히 미음과 죽【餰은 통용하여 饘으로 쓰니, ≪禮記≫ 註에 이르기를 “죽이 진한 것을 饘이라 하고, 묽은 것을 粥이라 한다.” 하였다.】을 장만할 수 있으며, 책을 읽고 道를 담론하면 충분히 스스로 즐거울 수 있으니, 바라건대 明公께서 몸을 바르게 하여 천하를 다스려서 四時가 조화롭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면 내가 은혜를 입음이 많을 것이니,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혹자가 楊素에게 王通을 참소하기를 “저 사람이 公을 소홀히 하는데 公은 어째서 그를 공경합니까?” 하였다. 楊素가 이것을 王通에게 묻자, 王通이 말하기를 “만일 公을 소홀히 여길 만하다면 내가 잘한 것이요, 공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면 내가 잘못한 것입니다. 잘잘못이 모두 나에게 있으니, 公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니, 楊素가 그를 처음처럼 대하였다. 弟子인 賈瓊이 비방을 그치게 하는 방법을 묻자, 王通이 대답하기를 “따지지 말라.” 하였다. 원망을 그치게 하는 방법을 묻자, 王通이 대답하기를 “다투지 말라.” 하였다. 王通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면이 없는 나라는 형벌이 반드시 공평하고, 세금을 무겁게 거두는 나라는 재물이 반드시 빈약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비방을 듣고 노여워하는 것은 참소를 부르는 미끼【囮는 음이 와이니, 통역하는 것이다. ≪古今韻會擧要≫의 註에 “譯은 사방 오랑캐와 鳥獸의 말을 전달함을 이른다. 囮는 새를 유혹하여 오게 하는 미끼이니, 바로 지금의 鳥媒가 이것이다.” 하였다.[頭註]囮는 후림새이니, 살아 있는 새를 매어두어 다른 새를 오게 하는 것이다.】이고 칭찬을 듣고 기뻐하는 것은 아첨을 부르는 미끼이니, 이 두 종류의 미끼를 끊고 제거해야 참소와 아첨이 멀어진다.” 하였다. 大業【大業은 煬帝의 연호이다.】 말년에 집에서 죽으니, 門人들이 文中子라 시호하였다.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隋나라 文帝가 23년 동안 재위하였으니, 그렇다면 그의 현명함과 현명하지 못함을 진실로 명철한 선비가 헤아려 자신의 道를 행하거나 숨겨서 道理에 맞게 할 수가 있다. 만일 王通이 이를 알지 못했거나 혹은 알면서도 隋나라 文帝에게 말했다면 이는 모두 지혜롭다고 할 수 없다. 또 王通이 참으로 천하를 태평하게 할 수 있는 계책이 있었다 해도 군주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궁궐에 나아가 스스로 계책을 바쳐서 自處함이 신중하지 못하였음을 헤아리지 않았으니, 또한 어찌 군주의 德을 높이고 道를 즐기는 마음을 길러서 큰 일을 이룩하는 功을 바랄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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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子]四年
[甲子]四年이라 正月에 帝崩於大寶殿【太子廣이 弑帝于大寶殿而自立하야 遂殺故太子勇하니라 勇이 見忤於帝하니 獨孤后數稱廣賢하고 大臣用事者를 廣皆傾心與交하야 無不稱其仁孝하니 遂決意廢立하다 獨孤皇后崩에 帝以陳高祖女로 爲夫人하야 有寵이러니 及帝寢疾에 太子慮有不諱하야 爲書問楊素한대 素條錄事狀以報할새 宮人이 誤送帝하니 帝大恚하니라 陳夫人이 旦出更衣라가 爲太子所逼이러니 拒之得免이라 上怪其神色하야 問故한대 夫人泫然曰 太子無禮하니이다 上恚抵床曰 畜生을 何足付大事리오 獨孤誤我로다 兵部尙書柳述과 黃門侍郞元巖이 侍疾이러니 乃呼之曰 召我兒하라 述等이 將呼太子한대 上曰 勇也니라 述等이 爲勅書한대 楊素聞之하고 以白太子하고 矯詔하야 執述等繫獄하고 追東宮兵士帖하야 上臺宿衛하고 〈門〉禁出入하며 盡遣後宮就別室이러니 俄而上崩하다 陳夫人이 聞變하고 戰慄失色이라 太子封小金合하야 遣賜夫人하니 夫人以爲鴆毒하야 懼甚發之하니 乃同心結也라 夫人이 恚而郤坐하야 不肯致謝한대 宮人이 共逼拜之러니 其夜烝之하다 明日에 乃發喪卽位하고 矯稱高祖之詔하야 賜勇死하고 縊殺之하니라 兵士帖은 軍籍也라 】하다 高祖性嚴重하야 令行禁止하고 勤於政事하야 每旦聽朝하야 日昃忘倦하고 雖嗇於財【嗇은 慳也, 愛也라】나 至於賞賜有功하야는 卽無所愛하고 將士戰沒이면 必加優賞하고 仍遣使者하야 勞問其家하며 愛養百姓하야 勸課農桑하고 輕徭薄賦하며 其自奉養을 務爲儉素하야 乘輿服御物故敝者를 隨令補用하고 自非享宴이면 所食이 不過一肉이요 後宮을 皆服澣濯之衣하니 天下化之하야 開皇, 仁壽之間에 大夫率衣絹布하고 不服羅綺하며 裝帶不過銅鐵骨角이요 無金玉之飾이라 故로 衣食滋殖하고 倉庫盈溢이라 受禪之初에 民戶不滿四百萬이러니 末年에 踰八百九十萬이로되 獨冀州已一百萬戶라 然이나 猜忍苛察하고 信受讒言하야 功臣故舊 無始終保全者요 乃至子弟하야도 皆如仇敵하니 此其所短也러라 [史略 史評]史斷曰 隋文이 以宇文異姓之親으로 受周主托孤之寄하고 乘時幸釁하야 遂竊周鼎이라 及旣平陳에 方得進承正統하야 躬節儉하고 平徭賦하며 每旦視朝하야 日昃忘倦하고 雖嗇貨財나 不吝賞賜하며 乘輿四出하야 路逢上表者면 必止輦親問하고 分遣行人하야 采訪吏治得失과 民間疾苦하야 罔不垂意라 當是時하야 百姓繁庶하고 衣食豊衍하며 突厥室韋와 靺鞨林邑과 高昌女國이 莫不入貢하니 可謂盛矣라 然이나 帝素不學하고 而又濟之以刻薄之資라 是以로 專任小數而不悅詩書하고 廢除學校而禁毁佛像하며 甚者는 以讒言으로 廢太子勇하고 以小過로 殺秦王俊하야 而父子之恩滅하고 爲獨孤所制하야 單騎出走하야 中夜不返하야 而夫婦之道乖하고 囚勇於東宮하고 付阿麽掌之하야 而兄弟之倫亂하고 殺李君才하고 戮虞慶則하야 元勳宿將이 誅黜殆盡하야 而君臣之義 莫有存焉이라 由是로 大禍遽興하야 身亦不保하니 哀哉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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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壽 4년(갑자 604) 정월에 황제가 大寶殿에서 승하하였다.【太子 楊廣(煬帝)이 大寶殿에서 文帝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마침내 옛 太子인 楊勇을 죽였다. 楊勇이 文帝에게 미움을 받자 獨孤皇后가 자주 楊廣의 어짊을 칭찬하였고, 大臣으로서 用事하는 자들을 楊廣이 모두 마음을 기울여 교제해서 그의 인자함과 효성스러움을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文帝가 마침내 楊勇을 폐하고 楊廣을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獨孤皇后가 죽자 文帝가 陳나라 高祖의 딸을 夫人으로 삼아서 총애하였다. 文帝가 병들어 눕자 太子(楊廣)는 황제가 죽었을 경우를 염려하여 편지를 써서 楊素에게 물었다. 楊素가 일의 상황을 조목조목 기록하여 답장할 적에 宮人이 잘못하여 편지를 황제에게 보내니, 황제가 보고 크게 노하였다. 陳夫人이 아침에 나와 옷을 갈아입는 곳에 갔다가 太子에게 겁탈당할 뻔하였는데 항거하여 겁탈을 면할 수 있었다. 上이 陳夫人의 神色을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묻자, 陳夫人이 눈물을 흘리면서 “太子가 무례한 짓을 하였습니다.” 하니, 上이 노하여 책상을 치면서 말하기를 “이런 짐승 같은 놈에게 어찌 국가의 大事를 맡긴단 말인가. 獨孤后가 나를 망쳤도다.” 하였다. 兵部尙書 柳述과 黃門侍郞 元巖이 모시고 병을 간호하였는데, 마침내 이들을 불러 이르기를 “나의 아들을 부르라.” 하였다. 柳述 등이 太子 楊廣을 부르려 하자, 上이 말하기를 “勇을 부르라.” 하니, 柳述 등이 勅書를 만들었다. 楊素가 이 소식을 듣고 太子에게 아뢰고는 詔命을 사칭하여 柳述 등을 체포해서 獄에 가두고 東宮의 兵士帖(軍籍)을 추후에 보내어 臺省에 올라가 宿衛하게 하고 궁문의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後宮을 모두 내보내 別室로 나아가게 하였는데, 얼마 후 上이 죽었다. 陳夫人은 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는 두려워 사색이 되었는데, 太子가 작은 金盒을 봉하여 陳夫人에게 하사하였다. 陳夫人은 鴆毒일 것이라고 여겨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꺼내보니 바로 사랑을 나타내는 同心結이 들어 있었다. 陳夫人이 노하여 등을 돌리고 앉아 致謝하려 하지 않자, 宮人들이 모두 핍박하여 절하게 하였는데 그날 밤에 강제로 간통하였다. 다음 날 마침내 喪을 발표하고 즉위한 다음 高祖의 詔書라고 사칭하여 楊勇에게 사약을 내리고 목을 졸라 죽였다. 兵士帖은 軍籍이다.】高祖(文帝楊堅)는 성품이 엄격하고 신중하여 명령하면 행해지고 금지하면 중지되었으며, 정사에 부지런하여 매양 날이 새면 정사를 다스려서 해가 기울도록 피곤한 줄 몰랐으며, 비록 재물에 인색【嗇은 인색하고 아끼는 것이다.】하였으나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하사할 때에는 곧 아까워하는 바가 없었으며, 장병이 싸우다가 죽으면 반드시 우대하는 상을 내리고 아울러 使者를 보내서 戰死한 자의 집안을 위로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길러서 농사와 養蠶을 권장하고 徭役과 세금을 경감하였다. 자기 몸을 기름에 검소함을 힘써서 乘輿와 의복과 사용하는 물건이 오래 써서 해진 것을 그때마다 기워 쓰게 하였고, 만일 宴享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먹는 것이 한 가지 고기 반찬에 불과하였으며, 후궁들은 모두 세탁한 옷을 입게 하였다. 이에 천하가 교화되어서 開皇과 仁壽 연간에 大夫들이 모두 명주와 삼베로 지은 옷을 입고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지 않았으며, 장식과 띠는 구리와 철과 뼈와 뿔에 불과하였고 금과 옥의 장식이 없었다. 이 때문에 국가의 衣食이 점차 불어나고 창고가 가득 넘쳤다. 文帝가 禪讓 받던 초기에는 民戶가 채 400만 호가 못 되었는데, 仁壽 말년에는 890만 호가 넘었고 冀州 한 州만 해도 이미 100만 호였다. 그러나 文帝는 성품이 시기하고 잔인하고 까다롭게 살피며 아첨하는 말을 믿고 받아들여서 功臣과 故舊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한 자가 없었고 심지어는 子弟들에 대해서도 모두 원수와 적처럼 여겼으니, 이는 모두 그의 단점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隋나라 文帝(楊堅)는 宇文氏의 異姓之親으로서 周나라 군주로부터 어린 군주를 부탁하는 명령을 받고는 기회를 틈타 재앙을 요행으로 여겨서 마침내 周나라의 정권을 도둑질하였다. 그리하여 陳나라를 평정하고 난 뒤에 바야흐로 正統을 이어서, 몸소 근검절약을 행하고 부역과 세금을 공평히 하며, 매일 아침 조정에 나가 정사를 보아 해가 기울도록 피로함을 잊었고, 비록 재물을 아꼈으나 상을 줄 때에는 인색하지 않았으며, 수레를 타고 사방으로 나갔다가 도중에 表文을 올리는 자를 만나면 반드시 輦을 멈추고 직접 물었으며, 使者들을 지방에 나누어 파견하여 지방 관리들의 잘잘못과 民間의 고통을 탐문하여 유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백성들이 많고 衣食이 풍족하였으며, 突厥‧室韋‧靺鞨‧林邑‧高昌‧女國이 모두 조공을 바치니, 강성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그러나 文帝는 평소에 학문을 하지 않았고, 또 각박한 자질로써 일을 이루었다. 이 때문에 오로지 작은 術數에 맡기고 詩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學校를 없애고 佛像을 훼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심지어는 참소하는 말을 듣고 太子楊勇을 폐하고 작은 과실 때문에 秦王楊俊을 죽여서 父子間의 은혜가 끊어지고, 獨孤皇后에게 제재를 받아 單騎로 달려가서 한밤중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夫婦間의 道가 어그러지고, 楊勇을 東宮에 가두고 阿麽(楊廣)에게 맡겨 관장하게 해서 兄弟間의 윤리가 어지러워지고, 李君才를 죽이고虞慶則을 죽여서 큰 공을 세운 옛 장수들이 주륙당하거나 퇴출당하여 거의 다 없어져서 君臣間의 의리가 보존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큰 禍가 대번에 일어나서 자기 몸도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슬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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煬皇帝
名廣이니 文帝第二子라
[乙丑]大業元年
大業 元年(을축 605) 宇文愷【宇文愷는 將作監大匠이다.】와 內史舍人인 封德彛 등에게 명하여 顯仁宮을 營建하게 하니, 남쪽으로는 皁澗에 연접하고 북쪽으로는 洛水 물가를 넘어갔다. 大江 이남과 五嶺 이북의 기이한 재목과 괴이한 돌을 징발하여 洛陽으로 수송해 오고, 또 海內의 아름다운 나무와 특이한 풀과 진기한 새와 짐승을 구하여 園苑에 채웠으며, 長安으로부터 江都에 이르기까지 離宮【離宮은 別宮이다.】을 40여 곳에 설치하였다. 또 黃門侍郞王弘 등을 보내어 江南에 가서 龍舟와 기타 선박 수만 척을 건조할 적에 東京에서 파견 나온 관리들이 부역을 감독하기를 엄하게 하고 급하게 하니, 부역하는 장정 중에 죽은 자가 열에 네다섯이었다. 책임을 맡은 官司에서 죽은 장정을 수레에 실어 동쪽으로는 成皐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河陽에 이르러서 시신을 운반하는 수레가 길에 서로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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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月에 築西苑하니 周二百里요 其內爲海하니 周十餘里라 爲方丈, 蓬萊諸山하니 高出百餘尺이요 臺觀宮殿이 羅絡山上하야 向背如神이라 海北에 有龍(麟)[鱗]渠하야 縈紆注海內라 緣渠作十六院호되 門皆臨渠하고 每院에 以四品夫人으로 主之하니 堂殿樓觀이 窮極華麗라 宮樹秋冬彫落이면 則翦綵爲花葉하야 綴於枝條호되 色渝【渝는 變也라】則易以新者하니 常如陽春하고 沼內에 亦翦綵爲荷芰菱芡【爾雅에 葉如荷而大者라하니라】하고 乘輿遊幸이면 則去冰而布之라 十六院이 競以殽羞精麗相高하야 求市【市는 貿易也라】恩寵이러라 上이 好以月夜에 從宮女數千騎하야 遊西苑하고 作淸夜遊曲하야 於馬上奏之러라 八月에 上이 行幸江都할새 發顯仁宮하야 出洛口하야 御龍舟하니 挽船士八萬餘人이요 舳艫【舳은 船後持舵處요 艫는 船頭刺櫂處라】相接二百里하야 照曜川陸하고 騎兵이 翊兩岸而行하니 旌旗蔽野라 所過州縣五百里內에 皆令獻食하니 多者는 一州至百轝로되 極水陸珍奇하니 後宮厭飫하야 將發之際에 多棄埋之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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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에 西苑을 쌓으니 둘레가 200리이고, 그 안에 바다를 만드니 둘레가 십여 리였다. 바다 가운데에 方丈山과 蓬萊山 등 여러 산을 만드니 높이가 백여 자나 솟았고, 臺觀과 宮殿이 산 위에 줄지어 늘어서 있어서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모두 仙境과 같았다. 바다 북쪽에는 龍鱗渠가 있어서 물줄기가 감고 돌아 바다로 주입되었다. 龍鱗渠를 따라 16院을 짓되 院의 문이 모두 龍鱗渠를 마주 보게 하고 각 院마다 4품의 夫人이 주관하게 하니, 堂殿과 樓觀이 지극히 화려하였다. 궁 안의 나무가 가을과 겨울에 시들어 떨어지면 채색 비단을 오려 꽃과 잎을 만들어서 가지에 연결하되 색깔이 변하면【渝는 변함이다.】 새 것으로 바꾸니 항상 따뜻한 봄과 같았으며, 못 안에도 채색 비단을 오려 연꽃과 마름【菱芡는 ≪爾雅≫에 “잎이 연꽃과 비슷한데 크다.” 하였다.】을 만들고 황제가 놀러 오면 못의 얼음을 치우고 채색 비단을 깔아놓았다. 16院이 다투어 안주와 음식의 정교함과 화려함을 가지고 서로 경쟁해서 황제의 은총을 사려고【市는 물건을 사는 것이다.】 하였다. 上은 달밤에 궁녀 수천 명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서 西苑을 유람하고 淸夜遊曲을 만들어서 馬上에서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8월에 上이 江都에 행차할 적에 顯仁宮을 출발하여 洛口로 나와서 龍舟를 타니, 배를 끄는 군사가 8만여 명이었고 배의 이물과 고물【舳은 배 뒷부분의 키를 잡는 곳이고, 艫는 배 앞부분의 노를 꽂는 곳이다.】이 서로 잇닿은 것이 200리에 달하여 등불이 강과 육지에 빛났으며, 騎兵들이 양쪽 강 언덕을 끼고 가니 깃발이 들판을 뒤덮었다. 지나가는 500리 안의 州縣에서 모두 음식을 바치게 하니 많은 경우에는 한 州에서 100대의 수레로 음식을 나르기도 하였는데, 水陸에서 나오는 珍味를 지극히 바치니, 後宮들이 싫컷 먹어 출발할 즈음에는 다 먹지 못한 음식을 대부분 버리고 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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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寅]二年
[丙寅]二年이라 置洛口倉〈于鞏東南原〉上하고 築倉城하니 周回二十餘里라 穿三千窖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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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業 2년(병인 606) 鞏縣 동남쪽 평원 위에 洛口倉을 설치하고倉城을 쌓으니 둘레가 20여 리였는데, 3천 개의 움을 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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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二月에 置回洛倉於洛陽北七里하니 倉城周回十里라 穿三百窖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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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에 洛陽 북쪽 7리 되는 곳에 回洛倉을 설치하니倉城의 둘레가 10리였는데, 300개의 움을 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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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三年
[丁卯]三年이라 詔發丁男百餘萬하야 築長城할새 西距楡林하야 東至紫河라 尙書左僕射蘇威諫한대 帝不聽하고 築之二旬而畢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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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業 3년(정묘 607) 황제가 명하여 丁男 백여만 명을 징발하여長城을 쌓을 적에 서쪽으로 楡林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紫河에 이르렀다. 尙書左僕射蘇威가 간하였는데 황제가 듣지 않고 城을 쌓은 지 20일 만에 완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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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八月에 車駕發楡林하야 歷雲中하야 泝金河【逆流而上曰泝 】하니 時에 天下承平하야 百物豐實이라 甲士五十餘萬이요 馬十萬匹이요 旌旗輜重【載衣車也라】이 千里不絶이러라 突厥【唐, 虞以上曰山戎이요 亦曰獯鬻이며 夏曰淳維요 殷曰鬼方이요 周曰玁狁이요 秦, 漢曰匈奴요 魏, 隋, 唐皆曰突厥이라 北史突厥傳에 世居金山하야 工於鐵하야 作金山하니 狀如兜鍪라 其俗이 號兜鍪爲突厥일새 因以爲國號하니 兜鍪는 亦曰冑라 〈先〉居西海러니 爲隣國所滅하니라 有一兒年且十歲라 兵人이 見其少하고 不忍殺하야 乃刖足斷臂하야 棄草澤中이러니 有牝狼以肉餌之하다 及長에 與狼交合하야 遂生十男하야 各有一姓하니 阿史那卽其一이라 最賢일새 遂爲君長이라 故牙門建狼頭纛하니 示不忘本也라】啓民可汗이 奉廬帳【漢書所謂穹廬旃帳也라 其形穹隆이라 故로 曰穹廬라】하고 以俟車駕어늘 帝幸其帳하니 啓民이 奉觴上壽【上酒爲稱壽니 詩七月篇에 爲此春酒하야 以介眉壽라하니라】라 帝大悅하야 賦詩曰 呼韓稽顙至하고 屠耆接踵來【呼韓, 屠耆는 皆匈奴單于之號라 呼韓은 日逐王比也요 屠耆는 日逐王簿胥堂也라 屠는 直於切이요 耆는 音祈라 其俗謂賢曰屠耆라 故로 常以太子爲左屠耆王也라】로다 何如漢天子 空上單于臺오하고 賜各有差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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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에 황제의 車駕가 楡林을 출발하여 雲中을 지나 金河를 거슬러 올라가니,【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泝라 한다.】 이때 천하가 태평하여 온갖 물건이 풍성하였다. 甲士가 50여만 명이요, 말이 10만 필이요, 旌旗와 輜重【輜重은 옷을 실은 수레이다.】이 천 리에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突厥【堯‧舜 시대 이전에는 山戎이라고 하고 또한 獯鬻이라고도 하였으며, 夏나라 때는 淳維, 殷나라 때는 鬼方, 周나라 때는 玁狁이라 하였고, 秦‧漢 시대에는 匈奴라 하였고, 魏‧隋‧唐나라 때에는 모두 突厥이라 하였다. ≪北史≫ 〈突厥傳〉에 “대대로 金山에 살면서 쇠를 잘 다루어 金山을 만드니 모양이 兜鍪(투구)와 같았다. 그 지방 풍속에 兜鍪를 이름하여 突厥이라 하였으므로 인하여 이로써 國號를 삼으니, 兜鍪는 冑(투구)라고도 한다. 전에는 西海에 살았는데 이웃 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그리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다〉 나이가 열 살쯤 되는 한 아이가 있었는데, 이웃 나라 병사가 그가 어린 것을 보고 차마 죽이지 못하여 마침내 발을 자르고 팔뚝을 베어 풀이 무성한 늪에 버렸는데, 암컷 이리가 고기를 가져다 먹였다. 장성함에 이르자 이리와 교접하여 마침내 열 명의 아들을 낳아서 각각 한 姓씩 갖게 하니, 阿史那가 바로 그중 하나이다. 阿史那가 가장 어질었기 때문에 마침내 君長이 되었다. 그러므로 牙門에 이리 머리의 纛을 꽂으니, 이는 근본을 잊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 하였다.】啓民可汗이 廬帳【廬帳은 ≪漢書≫의 이른바 ‘穹廬旃帳’이란 것이다. 그 모양이 활처럼 한가운데가 굽었기 때문에 穹廬라 한다.】을 받들고 와서 황제의 車駕를 기다리자 황제가 그 廬帳으로 가니, 啓民可汗이 술잔을 받들어 祝壽를 올렸다.【술잔을 올리는 것을 壽라고 칭하니, ≪詩經≫ 〈七月篇〉에 “이 봄 술을 만들어서 眉壽를 돕는다.[爲此春酒 以介眉壽]” 하였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詩를 지어 읊기를 “呼韓邪單于가 머리를 조아려 오고 左右賢王이 잇따라 오도다.【[頭註]呼韓稽顙(상)至 屠耆接踵來:呼韓과 屠耆는 모두 匈奴 單于의 호칭이다. 呼韓은 日逐王 比이고 屠耆는 日逐王 簿胥堂이다. 屠는 直於切(도)이고 耆는 음이 기이다. 그들의 풍속에 賢者를 일러 屠耆라고 한다. 그러므로 항상 太子를 左屠耆王이라 칭하였다.】漢나라 天子가 부질없이 單于臺에 오른 것과 누가 더 나은가?” 하고는 각각 차등 있게 물건을 하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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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域의 여러 오랑캐들이 張掖郡에 많이 이르러 물건을 교역하였는데, 황제가 吏部侍郞裴矩로 하여금 이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裴矩는 황제가 멀리 경략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오랑캐 지역에서 온 여러 商人들을 유인해서 여러 나라의 山川과 風俗을 탐문하여 《西域圖記》 3권을 지으니, 기록한 것이 모두 44개국이었다. 入朝하였을 때에 이것을 아뢰자, 황제가 이에 秦나라 始皇과 漢나라 武帝의 功業을 慨然【속으로 혼자 뜻이 높아 분격하는 것이다.】히 흠모하고 장차 西域과 개통하는 것을 마음에 달갑게 여겨서 사방의 오랑캐를 경략하는 일을 모두 裴矩에게 맡겼다. 이로부터 西域 오랑캐들의 왕래가 서로 이어져서 이들이 통과하는 郡縣에서 이들을 전송하고 맞이하느라 피폐하니, 소모되는 비용이 萬萬으로 헤아려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중국이 피폐해져 멸망함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裴矩가 창도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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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辰]四年
[戊辰]四年이라 帝無日不治宮室하니 兩京及江都에 苑囿亭殿이 雖多나 久而益厭하야 每遊幸에 左右顧矚호되 無可意者하야 不知所適이라 乃備責【責은 求也라】天下山川之圖하야 躬自歷覽하고 以求勝地可置宮苑者하야 詔於汾州之北, 汾水之源에 營汾陽宮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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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業 4년(무진 608) 황제가 날마다 궁실을 營造하지 않는 날이 없으니, 兩京(洛陽과 長安)과 江都에 苑囿와 정자와 궁전이 많았지만 오래되면 더욱 싫증을 내어 매번 행차할 적마다 좌우로 돌아보아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서 갈 바를 알지 못하였다. 이에 천하 山川의 地圖를 널리 구하여【責은 구하는 것이다.】 몸소 직접 찾아가서 살펴보고 離宮과 동산을 營造할 만한 명승지를 구하여 汾州의 북쪽과 汾水의 근원에 汾陽宮을 경영하도록 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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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五年
[己巳]五年이라 是時에 天下凡有郡一百九十이요 縣一千二百五十五요 戶八百九十萬有奇【凡數之零餘曰奇라】이니 東西九千三百里요 南北이 一萬四千八百一十五里라 隋氏之盛이 極於此矣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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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業 5년(기사 609) 이때 천하에 모든 郡이 190개이고 縣이 1255개이며 戶口가 890여 만【모든 숫자의 나머지를 奇라고 한다.】이니, 동서의 길이가 9천 300리이고 남북의 길이가 1만 4천 815리였다. 隋나라의 강성함이 이때에 지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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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六年
[庚午]六年이라 裴矩說帝曰 高麗는 本箕子所封之地라 漢, 晉이 皆爲郡縣이러니 今乃不臣하니 先帝欲征之久矣로되 但楊諒【文帝子니 漢王也라 煬帝立하니 知有變하고 起兵敗之하다】不肖하야 師出無功하니 當陛下之時하야 安可不取리잇고 壬午에 下詔하야 討高麗할새 勅幽州總管元弘嗣하야 往東萊【前云萊州러니 帝改云東萊也라】海口하야 造船三百艘하니 官吏督役에 晝夜立水中하야 略不敢息이라 自腰以下로 皆生蛆【蛆蟲在肉中也라】하니 死者什에 三四라 先是에 詔總徵天下之兵호되 無問遠近하고 俱會於涿하고 又發江, 淮以南民夫及船하야 運黎陽及洛口諸倉米하야 至涿郡하니 舳艫相次千餘里라 載兵甲及攻取之具하야 往還在道 常數十萬人이요 死者相枕하니 天下騷動이라 於是에 始相聚爲群盜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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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業 6년(경오 610) 裴矩가 황제를 설득하기를 “高麗(高句麗)는 본래 箕子를 봉했던 곳입니다. 漢나라와 晉나라 때에 모두 郡縣으로 삼았는데 이제 마침내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니, 先帝께서 정벌하고자 하신 지가 오래입니다. 다만 楊諒【楊諒은 文帝의 아들이니 漢王이다. 煬帝가 즉위하니, 변고가 있음을 알고 군대를 일으켰으나 패배하였다.】이 불초하여 군대를 출동하였으나 공이 없이 돌아왔으니, 폐하의 때를 당하여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壬午日(2월 26일)에 조서를 내려 高句麗를 토벌할 적에 幽州總管元弘嗣에게 勅命을 내려 東萊【전에는 萊州라고 하였는데, 煬帝가 고쳐서 東萊라고 하였다.】의 海口에 가서 戰艦 3백 척을 건조하게 하니, 관리들이 부역을 감독함에 役夫들이 밤낮으로 물속에 서서 감히 조금도 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허리로부터 아래가 살이 문드러져 모두 구더기가 나오니【구더기가 살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죽는 자가 열에 서너 명이었다. 이보다 앞서서 조서를 내려 천하의 병사들을 모두 징발하되 원근을 따지지 않고 모두 涿郡에 모이게 하였으며, 또 江‧淮 이남 지역의 뱃사람과 선박을 징발해서 黎陽과 洛口의 여러 창고의 쌀을 운반하여 涿郡에 이르게 하니, 배의 이물과 고물이 서로 이어진 것이 천여 리였다. 병기와 갑옷 및 城을 공격하는 도구를 운반하느라 도로에 왕래하는 자가 항상 수십만 명에 달하고 죽은 자가 서로 포개지니, 천하가 이 때문에 소란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서로 모여서 도적떼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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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鄒平縣 백성인 王薄이 무리를 모아 長白山을 점거하고서 齊郡과 濟北郡의 들에서 노략질하고 스스로 知世郞이라고 칭하니 이는 세상일을 환히 알 수 있음을 말한 것이요, 또 無向遼東浪死歌【浪死는 헛되이 죽음을 말한다.】를 지어서 백성들을 감동시키니 征役을 도피하는 자들이 많이 가서 그에게 귀의하였다. 竇建德【竇建德은 漳南 사람이니, 膽力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마침 조정에서 사람들을 모집하여 高句麗를 정벌할 때에 용감함으로 뽑혀서 二百人長이 되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예우하며 士卒들과 동고동락하니, 사람들이 다투어 歸附하였다.】이 漳南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사람들이 다투어 歸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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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八年
[壬申]八年이라 四方兵이 集平壤하니 凡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人이라 車駕【天子乘車니 不敢指斥也라】度遼어늘 高麗諸城이 各堅守不下하니 諸軍이 敗還하다 初에 九軍度(渡)遼【左右에 各作十二軍이로되 度遼者九軍也라】에 凡三十萬五千이러니 及還至遼東城엔 惟二千七百人이요 資儲器械巨萬計러니 失亡蕩盡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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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業 8년(임신 612) 사방의 병력이 平壤에 모이니, 모두 113만 3천 800명이었다. 황제의 車駕【車駕는 天子가 타는 수레이니, 감히 天子를 指斥할 수 없기 때문에 車駕라 한 것이다.】가 遼水을 건너가자高句麗의 여러 城이 각각 견고히 지키고항복하지 않으니, 諸軍이 패하여돌아왔다. 처음에 9軍이 遼河를 건널 때에는【좌우에 각각 12軍을 만들었는데, 遼河를 건넌 것은 9軍이었다.】 모두 30만 5천 명이었는데, 回軍하여 遼東城에 이르렀을 때에는 다만 2천 700명뿐이었으며, 보유한 물자와 무기 장비가 巨萬으로 헤아려졌는데 전부 잃어버려 다 없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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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九年
大業 9년(계유 613) 楊玄感【楊玄感은 楊素의 아들이다.】이 黎陽에서 배반하여李密【[附註]李密은 隋나라 開皇 연간에 아버지 李寬의 작위를 물려받아 蒲山公이 되었다. 젊어서부터 재주와 지략이 있고 재물을 털어 선비 기르기를 좋아해서 左親侍가 되었는데, 煬帝가 그를 보고 宇文述에게 이르기를 “左翊衛 아래에 얼굴빛이 검은 小子의 눈길이 수상하니, 宿衛를 시키지 말라.” 하였다. 宇文述이 이에 李密에게 넌지시 타일러서 병을 칭탁하게 하니, 李密이 마침내 人事를 버리고 독서에 전념하였다. 楊玄感과 刎頸之交를 맺었다. [通鑑要解]李密은 李弼의 曾孫이다.】을 謀主로 삼고는 군대를 이끌고 洛陽으로 향하였다. 황제가 宇文述과 屈突通【[頭註]宇文述 屈突通:宇文述은 左翊衛大將軍이고, 屈突通은 左僕衛將軍이었다.】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니, 楊玄感이 군대가 패하여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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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十年
○ 初에 開皇【文帝라】之末에 國家殷盛【殷은 盛也, 大也라】하니 朝野皆以高麗爲意호되 劉炫【聰敏하고 好讀書記識라 左畵圓, 右畵方, 口誦, 目數, 耳聽 五事同擧나 無所遺失이라 開皇中에 奉勅修國史하야 直門下省이라가 坐罪除名하니 歸家하야 以敎授爲務하니라】이 獨以爲不可라하야 作撫夷論以刺之러니 至是하야 其言이 始驗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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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開皇【開皇은 文帝의 연호이다.】 말년에 국가가 풍족하고 강성【殷은 성하고 큰 것이다.】하니, 朝野에서 모두 高句麗를 정벌하려고 마음먹었으나 오직 劉炫【劉炫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기억을 잘하였다. 그리하여 왼손으로는 원을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네모를 그리며 입으로는 외고 눈으로는 세며 귀로는 듣는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하였으나 빠뜨리는 바가 없었다. 開皇 연간에 勅命을 받들어 國史를 編修하여 門下省에 입직하였다가 죄에 걸려 除名되자, 집으로 돌아와 제자를 가르치는 것을 소임으로 삼았다.】만이 홀로 불가하다 하여 撫夷論을 지어서 풍자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의 말이 비로소 들어맞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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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十一年
大業 11년(을해 615) 8월에 황제가 북쪽 변방을 순행할 적에 突厥의 始畢可汗이 수십만의 騎兵을 거느리고 황제의 乘輿를 습격할 것을 도모하여雁門을 급히 공격하였다. 황제가 천하에 명하여 병력을 모집하게 하니, 守令들이 다투어 달려와서 구원할 적에 李淵의 아들李世民이 16세의 나이로 모집에 응하여 屯衛將軍雲定興에게 예속【隷는 예속되는 것이다.】되었다. 李世民이 雲定興을 설득하기를 “始畢可汗이 감히 군대를 일으켜 天子를 포위한 것은 반드시 우리가 창졸간에 달려와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니, 마땅히 낮에는 旌旗를 늘어놓아서 수십 리에 끊이지 않게 하고 밤에는 징소리와 북소리【鉦은 음이 정이니 징이다. 鍾과 비슷하고, 鈴과 비슷하다.】가 서로 호응하게 한다면 오랑캐들은 구원병이 크게 몰려왔다고 생각하여 소문만 듣고도 도망할 것입니다.” 하였다. 雲定興이 그 말을 따르고 여러 郡에서 구원병이 또한 이르니, 9월에 始畢可汗이 포위를 풀고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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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有二孔雀이 自西苑으로 飛集寶(成)[城]朝堂前이어늘 親衛校尉高德儒見之하고 奏以爲鸞이라하니 時에 孔雀已飛去하야 無可得驗이라 於是에 百官이 稱賀어늘 詔以德儒誠心이 冥會【冥은 暗也라】하야 肇見嘉祥이라하고 拜朝散大夫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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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十二年
○ 10월에 韋城縣의 翟讓이 瓦崗으로 도망하여【[附註]翟讓이 東都(洛陽)의 法曹로 있다가 사건에 걸려 참수당하게 되었는데, 獄吏가 그의 날래고 용맹함을 기특하게 여겨 형틀을 부수고 그를 내보내 주었다. 單雄信과 徐世勣이 모두 날래고 용맹하니, 마침내 함께 노략질하여 물자와 재정이 풍부해졌고 무리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通鑑要解]翟讓이 東都의 法曹로 있다가 사건에 걸려 참수당하게 되었는데, 獄吏 黃君漢이 그의 날래고 용맹함을 기특하게 여겨 밤에 몰래 翟讓에게 이르기를 “翟法司가 天時와 人事를 또한 알 터인데, 어찌하여 獄中에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가?” 하니, 翟讓이 瓦崗으로 도망하였다.】 도둑떼가 되어서 무리를 모아 만여 명에 이르니, 同郡 사람 單雄信과 徐世勣【[頭註]單雄信 徐世勣:單은 음이 선이니, 무릇 姓으로 쓰인 경우에는 모두 같다. 徐世勣은 唐나라 高祖가 李氏姓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太宗(李世民)의 諱를 피하여 이름을 勣이라 하였다.】과 李密 등이 모두 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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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內史侍郞虞世基는 황제가 도적떼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해서 여러 장수들과 郡縣에서 敗戰을 아뢰고 구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으면 虞世基가 그때마다 表文과 狀啓를 억제하고 줄여서 사실대로 아뢰지 않고, 다만 이르기를 “쥐나 개처럼 몰래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이어서 郡縣에서 체포하고 쫒으면 장차 다 없어질 것이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개의치 마소서.” 하였다. 황제가 그 말을 참으로 옳다고 여겨서 혹 妄言을 한다 하여 使者를 매질하니,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천하에 널리 퍼져서 郡縣을 함락하였으나 황제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알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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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帝
名侑니 煬帝孫代王也라
[丁丑]十三年
○ 2월에 馬邑郡 사람 劉武周【劉武周는 날래고 용감하고 호협하였으며 鷹揚府의 校尉였다.】가 太守王仁恭의 목을 베고 병력을 거두어 만여 명을 얻고는 스스로 太守라 칭하고, 사자를 보내어 突厥에 歸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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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密이 翟讓을 설득하기를 “洛口倉에 쌓여 있는 곡식이 많으니, 將軍이 만약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경무장하여 빨리 가서 습격하여 창고의 곡식을 꺼내어서 궁핍한 백성들을 구휼한다면 원근의 백성들이 누군들 歸附하지 않겠습니까. 백만의 무리를 하루아침에 모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정예병 7천 명을 거느리고 興洛倉(洛口倉)을 습격하여격파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곡식을 가져가게 하니, 노약자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끌고서 곡식을 지고 가는 자들이 길에 끊이지 않았다. 翟讓이 이에 李密을 추대하여 군주로 삼고魏公이라 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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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初에 唐公李淵이 生四男하니 建成, 世民, 玄霸, 元吉이라 世民이 聰明勇決하고 識量過人이러니 見隋室方亂하고 陰有安天下之志하야 傾身下士하고 散財結客하야 咸得其歡心이러라 晉陽宮監裴寂이 與劉文靜【晉陽令이라】同宿이라가 見城上烽火하고 寂歎曰 貧賤如此어늘 復逢亂離하니 將何以自存이리오 文靜笑曰 時事를 可知라 吾二人相得이면 何憂貧賤이리오 文靜이 見李世民而異之하야 深自結納하고 謂寂曰 此는 非常人이라 豁達은 類漢高하고 神武는 同魏祖【魏祖는 曹操라】하니 年雖少나 命世才【見二十六卷이라】也라하더라 〈本紀云 世民年四歲에 有書生見하고 異之曰 龍鳳之姿요 天日之表라 其年幾冠에 必能濟世安民이라하니 乃採其語하야 名曰世民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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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唐公李淵이 아들 4형제를 두었으니, 建成‧世民‧玄霸‧元吉이다. 世民은 총명하고 용맹하여 결단력이 있으며 식견과 도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隋나라 황실이 막 혼란해지는 것을 보고는 은밀히 천하를 안정시킬 뜻을 품어서 자기 몸을 낮추어 선비들을 예우하고 재물을 털어 빈객들과 교제를 맺어서 그들의 환심을 모두 얻었다. 晉陽宮監裴寂이 劉文靜【劉文靜은 晉陽令이었다.】과 함께 잠을 자다가 城 위에 봉화불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裴寂이 탄식하기를 “이와 같이 가난하고 천한데 다시 난리까지 만났으니, 장차 어떻게 스스로 생존한단 말인가.” 하니, 劉文靜이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일을 알 만하다.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이 맞으면 어찌 빈천함을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劉文靜이 李世民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그와 깊이 교제를 맺고 裴寂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활달함은 漢나라 高祖(劉邦)와 같고 神武함은 魏나라 太祖(曹操)【魏祖는 曹操이다.】와 같으니, 나이는 비록 적으나 세상에 이름을 드날릴 인재【命世才는 해설이 26권에 보인다.】이다.” 하였다.- 《新唐書》〈太宗本紀〉에 이르기를 “李世民의 나이 네 살 적에 어떤 書生이 그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龍과 鳳凰 같은 뛰어난 자질이요, 하늘의 해처럼 四海에 군림할 儀表이다. 나이가 거의 弱冠에 이르면 반드시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이다.’ 하니, 마침내 그의 말을 따서 이름을 世民이라 했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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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靜이 坐與李密連昏하야 繫太原獄【密反하야 據洛倉故也라 俗昏字與婚同하니 古惟昏字라 禮에 取婦以昏時하니 取陽往陰來之義러니 後人加女作婚하니라】이러니 世民이 就省之한대 文靜曰 天下大亂하니 非高, 光之才【高, 光은 漢高祖與光武라】면 不能定也니라 世民曰 安知其無리오 但人不識耳니이다 我來相省은 非兒女子之情이요 欲與君議大事也니 計將安出이닛고 文靜曰 今主上이 南巡江, 淮에 李密이 圍逼東都하니 群盜殆以萬數라 當此之際하야 有眞主驅駕而用之면 取天下는 如反掌耳니라 太原百姓이 皆避盜入城하고 文靜이 爲令數年에 知其豪傑하니 一旦收集이면 可得十萬人이요 尊公所將之兵이 復且數萬이니 一言出口면 誰敢不從이리오 以此로 乘虛入關하야 號令天下하면 不過半年에 帝業을 成矣리라 世民이 笑曰 君言이 正合我意라하고 乃陰部署賓客하니 淵은 不之知也러라 世民이 乘間屛人하고 說淵曰 今主上無道하야 百姓困窮하고 晉陽城外 皆爲戰場하니 大人이 若守小節이면 下有寇盜하고 上有嚴刑하야 危亡無日이라 不若順民心하야 興義兵하야 轉禍爲福이니 此는 天授之時也니이다 淵이 大驚曰 汝安得爲此言고 明日에 世民이 復說淵曰 今盜賊이 日繁하야 遍於天下하니 大人이 受詔討賊이라도 賊可盡乎잇가 願大人은 勿疑하소서 淵乃歎曰 吾一夕思汝言하니 亦大有理라 今日에 破家亡軀도 亦由汝요 化家爲國도 亦由汝矣라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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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文靜이 李密과 혼인함으로 인하여 죄에 걸려서 太原의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劉文靜이 李密과 혼인함으로 인하여 죄에 걸려서 太原의 감옥에 갇힌 것은 李密이 반란을 일으켜 洛口倉을 점거하였기 때문이다. 時俗에서 昏字는 婚字와 같으니, 옛날에는 昏字뿐이었다. 禮에 아내를 맞이하는 것을 저녁때에 하였으니, 陽이 가고 陰이 오는 뜻을 취한 것인데, 後人들이 昏字에 女字를 붙여 婚으로 썼다.】李世民이 찾아가서 안부를 묻자 劉文靜이 말하기를 “천하가 크게 혼란하니, 高祖와 光武帝【高와 光은 漢나라 高祖 劉邦과 光武帝 劉秀이다.】 같은 재주가 아니면 평정할 수 없다.” 하였다. 李世民이 말하기를 “어찌 그런 인물이 없을 줄 알겠습니까. 다만 사람들이 알지 못할 뿐입니다. 내가 와서 안부를 묻는 것은 아녀자의 情으로서가 아니라 君과 대사를 의논하고자 해서이니, 장차 어떻게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하니, 劉文靜이 말하기를 “지금 主上(煬帝)이 남쪽으로 가서 江‧淮 지방을 순행하는데 李密이 東都를 포위하여 핍박하니, 도둑떼가 거의 만으로 헤아려진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진정한 군주가 이들을 부려서 쓴다면 천하를 취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太原의 백성들이 모두 도적을 피하여 城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현령이 된 지 여러 해여서 그중의 호걸들을 알고 있으니, 하루아침에 이들을 모은다면 10만 명을 얻을 수 있다. 尊公(李淵)께서 거느린 병력이 또 수만 명은 될 것이니, 한 마디만 입에서 내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이 병력을 가지고 빈틈을 타서 關中에 들어가 천하를 호령하면 반년이 지나지 않아 帝王의 업적을 이룰 것이다.” 하였다. 李世民이 웃으며 말하기를 “君의 말씀이 나의 뜻에 부합합니다.” 하고, 마침내 은밀히 빈객들을 부서에 배치하니, 李淵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李世民이 틈을 타서 사람들을 물리치고 李淵을 설득하기를 “지금 主上께서 無道하여 백성들이 곤궁하고 晉陽城 밖은 모두 싸움터가 되었으니, 大人께서 만약 작은 절개를 지키신다면 아래에는 도적떼가 있고 위에는 준엄한 형벌이 있어서 머지않아 大人은 위태롭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民心에 순응하고 義兵을 일으켜서 轉禍爲福의 계기로 삼는 것만 못하니, 이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입니다.” 하니, 李淵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하였다. 다음 날 李世民이 다시 李淵을 설득하기를 “지금 도적들이 날로 많아져서 천하에 퍼져 있으니, 大人께서 詔命을 받아 도적들을 토벌한다 해도 도적들을 다 소탕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大人께서는 의심하지 마소서.” 하니, 李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밤새 너의 말을 생각해 보니, 또한 매우 일리가 있다. 오늘 집안을 망치고 몸을 죽이는 것도 너 때문이요, 大夫의 집안을 변화시켜 새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는 것도 너 때문이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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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先時에 裴寂이 以晉陽宮人으로 侍淵이러니 淵이 從寂飮하야 酒酣에 寂이 從容言曰 二郞【世民은 乃淵之第二子라 故로 云二郞이라】이 陰養士馬하야 欲擧大事하니 正爲寂以宮人侍公이라가 恐事覺幷誅일까하야 爲此急計耳라 衆情이 已協하니 公意如何오 淵曰 吾兒誠有此謀하니 事已如此라 當復奈何오 正須從之耳라하니라 及劉武周據汾陽宮하야는 世民이 言於淵曰 大人이 爲留守어늘 而盜賊이 竊據離宮하니 不早建大計면 禍今至矣리이다 淵이 乃命世民하야 與文靜等으로 各募兵이러니 遠近이 赴集하야 旬日間에 近萬人이라 劉文靜이 勸淵호되 與突厥相結하야 資其士馬하야 以益兵勢하라하니 淵이 從之【高祖自爲手啓호되 卑辭厚禮하야 遺始畢可汗云 欲大擧義兵하야 遠迎主上하야 復與突厥和親를 如開皇之時라하니 始畢이 得啓하고 謂其大臣曰 隋主爲人을 我所知也니 若迎以來하면 必害唐公而擊我無疑矣리라 苟唐公自爲天子인댄 我當不避盛暑하고 以兵馬助之하리라하고 卽命以此意爲復書하니라】하다 范祖禹唐鑑曰 匹夫欲自立於鄕黨에도 猶不可不自重也어든 況欲圖王業, 擧大事에 而可以不正啓之乎아 太宗은 陷父於罪而脅之以起兵하고 高祖는 昵裴寂之邪하야 受其宮女而不辭하고 又稱臣於突厥하야 倚以爲助하니 何以示後世리오 夫創業之君은 其子孫이 則而象之가 如影響之應形聲하니 不可不愼擧也라 是以로 唐世人主無正家之法하고 夷狄多猾夏之亂【猾은 亂也라】하니 蓋高祖以此始之也일새라 古之王者는 行一不義하고 殺一不辜而得天下라도 不爲也라 太宗이 恐高祖之不從하고 懼突厥之爲患이면 終守臣節이 可也니 豈有脅父臣虜하야 以得天下而可爲乎아 〈此而可爲면〉 則亦無所不至矣라 惜乎라 太宗은 有濟世之志, 撥亂之才【撥은 治也라】로되 而不知義也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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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앞서 裴寂이 晉陽의 宮女를 시켜 李淵을 모시게 하였는데, 李淵이 裴寂을 따라 술을 마셔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에 裴寂이 조용히 말하기를 “둘째 아드님(李世民)【李世民이 바로 李淵의 둘째 아들이므로 二郞이라고 한 것이다.】이 은밀히 병사와 말을 길러 大事를 거행하고자 하니, 이는 바로 제가 宮女를 시켜 公을 모시게 했다가 이 일이 탄로나면 함께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서 이처럼 급한 계책을 세운 것입니다. 여러 사람은 이미 마음을 하나로 모았으니, 公의 의향은 어떠하십니까?” 하니, 李淵이 말하기를 “내 아들이 진실로 이러한 모의를 하여 일이 이미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다시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다만 모름지기 따를 뿐이다.” 하였다. 劉武周가 汾陽宮을 점거하자, 李世民이 李淵에게 말하기를 “大人께서 留守로 계신데 도적들이 몰래 離宮을 점거하였으니, 만약 일찍 큰 계책을 세우지 않으시면 이제 禍가 닥칠 것입니다.” 하였다. 李淵이 마침내 李世民에게 명하여 劉文靜 등과 함께 각각 병력을 모집하게 하였는데, 원근의 장정들이 달려와 집결해서 열흘 사이에 만 명 가까이 모였다. 劉文靜이 李淵에게 突厥과 결맹하여 그들의 군사와 말을 이용해서 군대의 명성과 위세를 장대하게 하라고 권하니, 李淵이 그 말을 따랐다.【高祖(李淵)가 손수 啓를 짓되 말을 겸손하게 하고 禮物을 후하게 갖추어 始畢可汗에게 보내고 이르기를 “내 의로운 군대를 크게 일으켜 멀리 가서 主上(煬帝)을 맞이하여 開皇 연간처럼 다시 突厥과 화친하고자 한다.” 하였다. 始畢可汗이 啓를 받고 大臣에게 이르기를 “隋主(煬帝)의 사람됨을 내가 알고 있으니, 만약 그를 맞이하여 돌아오면 반드시 唐公(李淵)을 해치고 나를 공격할 것이 틀림없다. 만일 唐公이 스스로 天子가 된다면 내 마땅히 더위를 무릅쓰고 兵馬를 이끌고 가서 그를 돕겠다.” 하고는 즉시 명령하여 이러한 뜻으로 답장을 쓰게 하였다.】 范祖禹의 《唐鑑》에 말하였다. “匹夫가 향당에서 스스로 立身하고자 할 때에도 오히려 自重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王業을 도모하고 大事를 일으키고자 하면서 올바르지 못한 일로 啓導해서야 되겠는가. 太宗(李世民)은 아버지를 죄에 빠뜨리고서 위협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高祖(李淵)는 간사한 裴寂을 가까이하여 궁녀를 받고 사양하지 않았으며 또 突厥에게 신하를 자청하여 그들에게 의지해서 도움을 구하였으니, 어떻게 후세에 모범을 보여주겠는가. 창업하는 군주는 자손들이 본받고 따라하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는 것과 같으니, 신중히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唐나라 때에 군주가 집안을 바로잡는 法이 없고 오랑캐들이 中國을 어지럽히는【猾은 어지러움이다.】 난리가 많았으니, 高祖가 이로써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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裴寂等이 乃請尊天子【煬帝라】하야 爲太上皇하고 立代王【侑니 卽恭帝라】爲帝하야 以安隋室이라 移檄郡縣하니 西河郡이 不從淵命이어늘 淵이 使世民으로 將兵擊西河하다 郡丞高德儒 閉城拒守어늘 攻拔之하고 執德儒至軍門하야 世民이 數之曰 汝指野鳥爲鸞하야 以欺人主하야 取高官하니 吾興義兵은 正爲誅佞人耳라하고 遂斬之하다 自餘는 不戮一人하고 秋毫無犯하고 各慰撫하야 使復業하니 遠近이 聞之大悅이러라 建成等이 引兵還晉陽하니 往返이 凡九日이라 淵喜曰 以此行兵이면 雖橫行天下라도 可也라하고 遂定入關之計하다 淵이 開倉하야 以賑貧民하니 應募者日益多라 裴寂等이 上淵號爲大將軍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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裴寂 등이 마침내 李淵에게 天子(煬帝)【天子는 煬帝이다.】를 높여서 太上皇으로 삼고 代王楊侑【代王은 楊侑이니, 바로 恭帝이다.】를 세워서 황제로 삼아 隋나라 왕실을 안정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에 郡縣에 檄文을 돌리니, 西河郡이 李淵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李淵이 李世民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西河郡을 공격하게 하니, 西河郡丞인 高德儒가 성문을 닫고 항거하였다. 李世民이 城을 공격하여함락시키고高德儒를 잡아 軍門에 이르러서 李世民이 數罪하기를 “네가 들새를 가리켜 난새라 하여 人主를 속여서 높은 벼슬을 취하였으니, 내가 義兵을 일으킨 것은 바로 너와 같이 아첨하는 사람을 주벌하기 위해서이다.” 하고는 마침내 그의 목을 베었다. 그밖에는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추호도 범함이 없었으며 각각 백성들을 위무하여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게 하니, 원근의 백성들이 이 사실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李建成 등이 군대를 이끌고 晉陽으로 돌아오니, 왕복하는 데 걸린 날짜가 모두 9일이었다. 李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렇게 군대를 운용한다면 비록 천하에 橫行하더라도 가능하겠다.” 하고, 마침내 關中에 들어갈 계책을 정하였다. 李淵이 창고를 열어서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니, 募兵에 응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졌다. 裴寂 등이 李淵에게 大將軍이라는 칭호를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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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7월에 李淵이 아들李元吉을 太原太守로 삼아서晉陽宮에 남아 지키게 하였다. 李淵이 甲士 3만 명을 거느리고 晉陽을 출발하여軍門 앞에 서서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함께 郡縣에 격문을 돌려서 代王을 높여 세운다는 뜻으로 曉諭하니, 西突厥의 阿史那大奈【阿史那는 突厥의 세 글자로 된 姓이고, 大奈는 이름이다.】가 또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수행하였다. 代王楊侑가 宋老生【宋老生은 虎牙郎將이었다.】을 보내어 정예병 2만 명을 거느리고 霍邑에 주둔하고, 屈突通은 날래고 용감한【驍는 용맹함이다.】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河東에 주둔해서李淵을 막게 하였다. 이때 마침 장맛비가 내려서 李淵이 전진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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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淵이 以書招李密하니 密이 自恃兵强하고 欲爲盟主하야 使祖君彦復書曰 所望은 左提右挈하고 戮力同心하야 執子嬰於咸陽【秦二世兄子 公子嬰也니 立爲秦王이라 後에 沛公入咸陽에 子嬰이 降軹道旁이어늘 乃以屬吏하니라[頭註]子嬰은 指代王이라】하고 殪商辛於牧野【殪는 殺死也라 商帝辛을 天下謂之紂라 周武王이 伐之한대 紂距之牧野어늘 武王斬之하니라[頭註]商辛은 指煬帝라】면 豈不盛哉아 且欲使淵으로 以步騎數千으로 自至河內하야 面結盟約이어늘 淵이 得書하고 笑曰 密이 妄自矜大하니 非折簡【卽尺書, 尺牘也라】可致라 吾方有事關中하니 若遽絶之면 乃是更生一敵이니 不如卑辭推獎하야 以驕其志하야 使爲我塞成皐之道【江都使信不通이라】하고 綴東都之兵【不得西應長安이라】이면 我得全意西征하리니 俟關中平定하야 據險養威하고 徐觀蚌鷸之勢하야 以收漁人之功【蚌은 蛤也요 鷸은 知天將雨鳥也라 戰國策에 趙伐燕이어늘 蘇代爲燕하야 謂趙惠文王曰 今者臣來過易水할새 蚌出方曝이어늘 而鷸啄其肉한대 蚌合而拑其喙라 鷸謂蚌曰 今日不雨하고 明日不雨하리니 卽有蚌脯리라 蚌亦謂鷸曰 今日不出하고 明日不出이면 必有死鷸이리라 蚌鷸不肯相舍라가 漁人得而幷擒之하니이다 今趙且伐燕하니 燕, 趙久相支하야 以敝大衆하면 臣恐强秦之爲漁父也하노이다】이 未爲晩也니라 乃使溫大雅【記室參軍이라】復書曰 天生烝民에 必有司牧이니 當今爲牧이 非子而誰오 老夫는 年踰知命【知命은 語에 五十而知天命이라하니라】하니 願不及此라 欣戴大弟하야 攀鱗附翼하노니 唯弟는 早膺圖籙【籙은 籍也니 圖讖云 李氏當王故云이라】하야 以寧兆民하라 宗盟之長이 屬籍【屬은 附也요 籍은 簿籍也니 謂所附宗籍이라[附註]屬籍은 宗屬之籍이니 李密書曰 與兄派流雖異나 根系本同이라 故云然也라 唐公은 隴西成紀人이요 密은 遼東襄平人이니 是異派也라 所謂根系는 但同姓耳라】見容하야 復封於唐이면 斯榮足矣라 殪商辛於牧野는 所不忍言이요 執子嬰於咸陽은 未敢聞命이라 汾, 晉【汾州及晉陽이니 唐公所據라】左右는 尙須安輯이니 盟津之會【盟津은 卽孟津也라[釋義]孟者는 河北也니 各於其地置津하야 謂之孟津이라 一說에 武王伐紂할새 八百諸侯於此盟이라 故曰盟津이니 河內咸陽縣이 是也라】는 未暇卜期로다 密이 得書甚喜하야 以示將佐曰 唐公이 見推하니 天下는 不足定矣로다 自是로 信使往來不絶이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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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淵이 편지로 李密을 부르니, 李密이 자신의 군세가 강함을 믿고 盟主가 되고자 하여, 祖君彦을 시켜 답서를 보내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좌우에서 잡아주고 끌어주며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합쳐서, 咸陽에서 子嬰을 사로잡고【[釋義]秦나라 二世皇帝의 兄의 아들이 公子 嬰이니, 趙高가 세워 秦王이 되었다. 뒤에 沛公이 咸陽에 들어갔을 때에 子嬰이 軹道의 곁에서 항복하자, 마침내 관리에게 맡겼다.[頭註]子嬰은 代王 楊侑를 가리킨다.】牧野에서 商辛을 죽이는 것이니,【[釋義]殪는 죽임이다. 商나라 임금 辛을 천하 사람들이 紂라 하였다. 周나라 武王이 紂를 정벌하자 紂가 牧野에서 막았는데, 武王이 그의 목을 베었다.[頭註]商辛은 煬帝를 가리킨다.】 이렇게 한다면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 하고, 또 李淵으로 하여금 步兵과 騎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스스로 河內에 와서 대면하여 맹약을 맺게 하고자 하였다. 李淵이 편지를 얻어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李密이 망령되이 스스로 자랑하고 잘난 체하니, 한 통의 편지【折簡은 바로 尺書와 尺牘이다.】로 오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현재 關中에 일이 있는데, 만약 그를 대번에 끊어버리면 마침내 또다시 하나의 적을 만드는 것이니, 말을 낮추어 추대하고 장려해서 그의 뜻을 더욱 교만하게 만들어 나를 위해 成皐의 길을 막고【李密이 成皐의 길을 막아서 江都의 使者가 통행하지 못하였다.】東都의 군사를 견제【李密이 東都(洛陽)의 군사를 견제하여 서쪽으로 長安과 호응하지 못하였다.】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이렇게 하면 온전히 내 뜻대로 서쪽을 정벌할 수 있을 것이니, 關中이 평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우리가 험고한 곳을 점거하고 위엄을 길러서, 양측이 조개와 도요새처럼 서로 버티는 형세를 관망하다가 앉아서 漁父之利를 챙겨도【[釋義]觀蚌鷸之勢 以收漁人之功:蚌은 조개이고, 鷸은 날씨가 장차 비가 올 것을 아는 새이다. ≪戰國策≫에 趙나라가 燕나라를 정벌하자, 蘇代가 燕나라를 위하여 趙나라 惠文王에게 이르기를 “지금 臣이 易水를 지나올 적에 조개가 나와서 막 햇볕을 쬐고 있었는데, 새가 조개의 속살을 쪼아 먹으려 하자 조개가 껍질을 꼭 다물어 새의 부리를 물었습니다. 새가 조개에게 이르기를 ‘오늘도 비가 오지 않고 내일도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조개포가 될 것이다.’ 하니, 조개도 새에게 이르기를 ‘오늘도 놓아주지 않고 내일도 놓아주지 않으면 반드시 죽은 새가 될 것이다.’ 하여 조개와 새가 서로 버티고 놓아주지 않다가 어부에게 모두 잡혀갔습니다. 지금 趙나라가 燕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燕나라와 趙나라가 서로 오래 버텨서 많은 병력을 피폐하게 하면 신은 강한 秦나라가 漁父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늦지 않다.” 하고, 溫大雅【溫大雅는 記室參軍이었다.】를 시켜 답장을 보내기를 “하늘이 백성을 냄에 반드시 司牧이 있으니, 당금에 司牧이 될 자는 바로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이 老夫는 나이가 이미 知命之年(50세)【知命은 ≪論語≫〈爲政〉에 “쉰 살이 되어서는 天命을 알았다.” 하였다.】을 넘었으니, 소원이 이에 미칠 수가 없다. 내 기꺼이 아우를 추대하여 용의 비늘을 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고자 하니, 부디 아우는 속히 圖讖에 응하여【籙은 책이니, 圖讖書에 “李氏가 마땅히 왕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억조 만백성을 편안히 하라. 그대가 宗盟의 長이 되어 나를 宗籍(王室의 族譜)에 올려주고【[釋義]屬은 붙이는 것이고 籍은 簿籍이니, 屬籍은 宗籍(王室의 族譜)에 올리는 것을 이른다.[附註]屬籍은 宗屬의 籍이니, 李密의 편지에 “兄과 流派는 다르지만 根系(근본이 되는 혈통)는 본래 같다.”고 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唐公은 隴西 成紀 사람이고 李密은 遼東 襄平 사람이니, 이는 派가 다른 것이다. 이른바 根系라는 것은 다만 同姓일 뿐이다.】 다시 唐에 봉해 준다면 나는 이러한 영광으로 만족한다. 牧野에서 商辛을 죽이는 일은 내가 차마 말할 수 없고, 咸陽에서 子嬰을 사로잡는 일은 내가 감히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다. 汾州와 晉陽【汾과 晉은 汾州와 晉陽이니, 唐公이 점거한 곳이다.】 일대는 아직도 모름지기 按撫하여 다스려야 하니, 盟津의 會盟【[原註]盟津은 바로 孟津이다.[釋義]孟은 河北이니, 각각 그 지역에 나루를 설치하여 이를 孟津이라 이른 것이다. 一說에 “武王이 紂를 정벌했을 때에 8백 명의 제후가 이곳에서 맹약하였기 때문에 盟津이라 한다.” 하였으니, 河內의 咸陽縣이 이곳이다.】은 기일을 정할 겨를이 없다.” 하였다. 李密이 편지를 받고는 매우 기뻐하여 장수와 보좌들에게 편지를 보이며 말하기를 “唐公이 나를 추대해 주니, 천하는 굳이 평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로부터 서신을 전달하는 使者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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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雨久不止하니 淵軍中糧乏하고 劉文靜이 未返【使突厥請兵而未返이라】이라 或傳호되 突厥이 與劉武周로 乘虛襲晉陽이라하야늘 淵이 召將佐하야 謀北還하니 裴寂等이 皆以爲不如還救根本하야 更圖後擧라한대 世民曰 今禾菽被野하니 何憂乏糧이리오 老生【卽宋老生이라】은 輕躁하니 一戰可擒이요 李密은 顧戀倉粟하니 未遑遠略이요 武周는 與突厥로 外雖相附나 內實相猜하니 武周雖遠利太原이나 豈可近忘馬邑【劉武周는 馬邑人이라】이릿고 本興大義는 奮不顧身하야 以救蒼生이니 當先入咸陽하야 號令天下어늘 今遇小敵하야 遽已班師면 恐從義之徒 一朝解體요 還守太原一城之地면 爲賊耳니 何以自全이릿고 淵不聽하고 促令引發한대 世民이 將復入諫이러니 會日暮하야 淵已寢이라 世民이 不得入하고 號哭於外하니 聲聞帳中이라 淵召問之한대 世民曰 今兵以義動에 進戰則克하고 退還則散하리니 衆散於前하고 敵乘於後면 死亡無日하리니 何得不悲리잇고 淵乃悟하다 世民이 乃與建成으로 分道夜追하니 左軍復還【右軍未發하고 左軍去나 亦未遠故로 追之라】하고 太原運糧이 亦至러라 [新增]胡氏曰 武王伐商에 數紂之罪則多矣어늘 煬皆有之하고 而弑父殺兄【見上帝崩於大寶殿註라】은 則紂之所未有니 其當討無疑矣라 李淵이 聲其大逆不道之罪하야 而擧兵討之면 則雖德非成湯이나 亦無愧於自亳之載【載는 始也라 書伊訓에 作哉니 造攻은 自鳴條어늘 朕哉自亳이라하니라】하니 世民이 不必用宮人私侍【裴寂이 以晉陽宮人으로 侍淵이라】以劫父也요 不必詐爲勅書發民以鼓怨也【鼓는 怨也라 是年에 裴寂이 促淵起兵한대 淵乃使劉文靜으로 詐爲勅書하야 發太原, 西河, 雁門, 馬邑民年二十以上爲兵하야 擊高麗하니 由是로 人情恟恟하야 思亂者衆하니라】요 不必稱臣突厥也요 不必尊江都【煬帝在江都러니 請尊爲太上皇也라】而立代王也요 不必推獎李密以驕其志也라 堅守晉陽하야 收召豪傑하고 厚集其衆하야 分擊二京이면 義聲旣震에 群盜自下하리니 乃遣良將하야 總銳師하고 南指楊土면 則不逾旬時하야 罪人斯得하야 天下歸唐하리니 其孰能禦之리오 惜乎라 世民이 有安天下之志하고 才足以撥亂이로되 而無湯, 武反身之學하고 劉文靜은 智謀之士耳요 裴寂은 又出其下라 故로 雖乘時擧事하야 不旋踵成功이나 而用智術하야 違義理者 多矣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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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오랫동안 그치지 않으니, 李淵의 군중에 양식이 떨어지고 〈군대를 요청하러 突厥에 사신 간〉 劉文靜은 돌아오지 않았다.【劉文靜이 군대를 요청하러 突厥에 사신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혹자가 전하기를 “突厥이 劉武周와 함께 빈틈을 노려 晉陽을 습격하려 한다.” 하니, 李淵이 장수와 보좌들을 불러 북쪽으로 돌아갈 것을 상의하였다. 裴寂 등이 모두 말하기를 “돌아가서 根本(晉陽)을 구원하고 다시 후일의 거사를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는데, 李世民이 말하기를 “지금 벼와 콩이 들에 널려 있으니, 어찌 양식이 떨어진 것을 근심하십니까. 宋老生【老生은 바로 宋老生이다.】은 경솔하고 조급하니 一戰이면 사로잡을 수 있고, 李密은 창고의 곡식을 돌아보고 연연해하니 멀리 경략할 겨를이 없을 것이며, 劉武周는 突厥과 겉으로는 친하지만 속으로는 서로 시기하니 劉武周가 비록 멀리 太原(晉陽)을 이롭게 여겨 취하려 한다 해도 어찌 가까운 馬邑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劉武周는 馬邑 사람이다.】 우리가 본래 大義를 일으킨 것은 분발하여 일신을 돌보지 않고 蒼生을 구하고자 해서이니 마땅히 먼저 咸陽(關中)에 들어가 천하를 호령해야 할 터인데, 지금 작은 적을 만나서 급히 回軍한다면 義를 따라 궐기한 무리들이 하루아침에 해체될까 두려우며, 우리가 돌아가서 太原 한 城만을 지킨다면 역적이 될 뿐이니, 어찌 자신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李淵이 듣지 않고 재촉하여 군대를 이끌고 출발하려 하자 李世民이 다시 들어가 간하려 하였는데, 마침 해가 저물어 李淵이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 李世民이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통곡하니, 소리가 장막 안에까지 들렸다. 李淵이 불러서 묻자, 李世民이 말하기를 “지금 군대가 大義로써 출동함에 전진하면 승리하고 후퇴하면 흩어질 것입니다. 무리가 앞에서 흩어지고 적이 뒤에서 틈을 타서 공격하면 사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니,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李淵이 비로소 깨달았다. 李世民이 마침내 李建成과 함께 길을 나누어 밤에 뒤쫓아가니 左軍이 다시 돌아오고,【右軍은 아직 출발하지 않았고 左軍은 떠났으나 또한 아직 멀리 가지 않았기 때문에 추격한 것이다.】太原에서 운반하는 양식이 또한 이르렀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武王이 商나라를 주벌할 때에 紂의 죄를 나열한 것이 많았는데 隋나라 煬帝가 이러한 죄를 모두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를 시해하고 형을 죽인 것【煬帝가 아버지를 시해하고 형을 죽인 것은 앞의 ‘帝崩於大寶殿’ 註에 보인다.】은 紂가 저지른 적이 없었던 것이니 마땅히 토벌해야 함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李淵이 그의 대역무도한 죄를 성토하여 군대를 일으켜 토벌했다면 비록 자신이 成湯과 같은 德이 있는 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亳으로부터 정벌을 시작함【載는 시작함이다. ≪書經≫〈伊訓〉에 ‘哉’字로 되어 있으니, “공격을 시작함은 鳴條로부터 하였는데, 우리(湯王)가 德을 닦은 것은 亳邑으로부터 시작했다.” 하였다.】에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이니, 그렇다면 李世民이 굳이 宮女에게 은밀히 李淵을 모시게 해서【裴寂이 晉陽宮의 궁녀로써 李淵을 모시게 하였다.】 아버지를 위협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굳이 거짓으로 勅書를 만들어 백성들을 징발해서 원망을 살【鼓는 원망함이다. 이해에 裴寂이 李淵을 재촉하여 군대를 일으키게 하자, 李淵이 마침내 劉文靜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칙서를 만들어 太原‧西河‧雁門‧馬邑의 백성 중에 나이가 20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군졸로 삼아 高句麗를 공격하게 하니, 이 때문에 인심이 흉흉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는 자가 많게 되었다.】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굳이 突厥에게 신하를 칭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굳이 江都에 있는 煬帝를 높여 太上皇으로 삼고【煬帝가 江都에 있었는데, 李淵에게 煬帝를 높여서 太上皇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代王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굳이 李密을 추대하고 장려해서 그의 뜻을 교만하게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晉陽城을 굳게 지키면서 호걸들을 거두어 부르고 무리를 많이 모아서 長安과 洛陽 두 都城을 나누어 공격했다면 의로운 명성이 이미 진동함에 도적떼가 스스로 항복하였을 것이다. 이에 어진 장수를 선발하여 정예병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楊州 지방으로 향하게 했다면 열흘이나 한 철이 못 되어 죄인(煬帝)을 잡아서 천하가 唐나라에 돌아갔을 것이니, 그렇다면 그 누가 이것을 막겠는가. 애석하다. 李世民은 천하를 편안히 할 뜻이 있었고 재주가 충분히 난리를 다스릴 만하였으나 湯임금과 武王처럼 자기 몸을 돌이켜 살피는 학문이 없었으며, 劉文靜은 지모 있는 선비였을 뿐이고 裴寂은 다시 그보다 못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기회를 타고 거사하여 곧바로 성공하였으나 지혜와 술수를 써서 의리에 위배됨이 많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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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비가 개자, 李淵이 軍中에 명하여 투구와 무기와 행장을 말리게【曝은 햇볕에 쬐어 말리는 것이다.】 하고 霍邑【[釋義]王氏가 말하였다. “霍邑은 漢나라 彘縣이니, 後漢 때에 永安縣으로 고쳤고 隋나라 때에 霍邑으로 고쳤다. 지금 霍州에 霍邑이 있으니, 平陽에 속한다.”[頭註]이때 隋나라 장수 宋老生이 霍邑에 진을 치고 있었다.】으로 달려갔다. 李建成과 李世民이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城 아래에 이르러 채찍을 들고 지휘하여 마치 城을 포위하려는 것처럼 하고 또 宋老生을 욕하니,【詬는 욕하고 꾸짖는 것이다.】宋老生이 노하여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길을 나누어 출동하였다가 군대가 대패하였다. 宋老生이 말에서 내려 참호로 뛰어들자,【塹은 城 둘레에 파놓은 물이니, ≪廣韻≫에 나온다.】 劉弘基【劉弘基가 大業 연간에 右勳侍로 있다가 亡命해 오니, 李淵이 그로 하여금 군대를 모집하게 하고 統軍을 삼았다.】가 나아가 목을 베고 마침내 霍邑을 점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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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淵이 欲引兵西趣長安호되 猶豫未決이라 裴寂曰 屈突通이 擁大衆하야 憑堅城하니 吾捨之而去라가 若進攻長安不克이면 退爲河東所踵【隋遣屈突通하야 將兵屯河東하니 見上七月이라】하야 腹背受敵하리니 此는 危道也라 不若先克河東然後에 西上이니이다 長安恃通爲援하니 通敗면 長安이 必破矣리이다 世民曰 不然하다 兵貴神速하니 吾席累勝之威하고 撫歸附之衆하야 鼓行【兵以鼓進이라】而西하면 長安之人이 望風震駭하야 智不及謀하고 勇不及斷하리니 取之若振槁葉耳니이다 若淹留自敝於堅城之下면 彼得成謀하야 脩備以待我하리니 坐費日月하야 衆心離沮면 則大事去矣리이다 且關中蜂起之將이 未有所屬하니 不可不早招懷也라 屈突通은 自守虜耳니 不足爲慮니이다 淵이 兩從之하야 留諸將圍河東하고 自引兵而西하니 京兆諸縣이 多遣使請降이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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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淵이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長安으로 달려가고자 하였으나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裴寂이 말하기를 “屈突通이 큰 병력을 보유하고 견고한 성에 의지하고 있으니, 우리가 이들을 버리고 떠나갔다가 만약 長安으로 진격하여 이기지 못하면 후퇴할 때에 河東의 屈突通에게 추격당하여【隋나라가 屈突通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河東에 주둔하게 하였으니, 앞의 7月條에 보인다.】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을 것이니, 이는 위태로운 방법입니다. 먼저 河東을 함락시킨 다음에 서쪽으로 올라가는 것만 못합니다. 長安에서는 屈突通을 구원부대로 믿고 있으니, 屈突通이 패하게 되면 長安은 반드시 격파될 것입니다.” 하니, 李世民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군대는 신속함을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여러 번 싸워 여러 번 승리한 기세를 타고 귀순하는 무리들을 어루만져 북을 울리면서 전진하여【鼓行은 군대가 북을 울리며 전진하는 것이다.】 서쪽으로 가면 長安 사람들이 소문만 듣고도 놀라고 두려워하여 지혜로운 자도 미처 도모하지 못하고 용맹한 자도 미처 결단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長安을 취하는 것은 마치 낙엽을 흔들어 떨어뜨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견고한 성 아래에서 지체하다가 스스로 피폐해진다면 저들은 계책을 이룰 수 있어서 방비를 하고 우리를 상대할 것이니, 우리들이 앉아서 날짜를 허비하여 군사들의 마음이 이반하고 사기가 꺾이면 大事가 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關中에서 봉기한 장수들이 아직 소속된 곳이 없으니, 일찍 이들을 불러 회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屈突通은 자기 소굴을 지키는 오랑캐일 뿐이니, 굳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李淵이 두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여러 장수들을 남겨 河東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니, 京兆의 여러 縣이 使者를 보내 항복을 청하는 자가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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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淵이 帥諸軍濟河하니 關中士民歸之者如市하고 世民所至에 吏民及群盜 歸之如流라 世民이 收其豪俊하야 以備僚屬하다 淵女李氏適柴紹者 亦將精兵萬餘하고 會世民於渭北하야 與柴紹로 各置幕府하고 號를 娘子軍【柴紹之赴太原也에 謂其妻李氏曰 尊公擧兵하니 今偕行則不可요 留此則及禍리니 奈何오 李氏曰 第速行하라 我一婦人이니 易以潛匿이라한대 紹遂行하다 李氏歸鄂縣別墅하야 散家財하야 聚徒衆이라 淵濟河어늘 李氏遣使迎之하니 淵使柴紹로 將數百騎하고 迎李氏한대 將精兵萬餘하고 會世民於渭北하니라】이라하다 隰城尉【漢百官志曰 大郡曰守요 小郡曰尉라】房玄齡이 謁世民於軍門이어늘 世民이 一見如舊識하야 署記室參軍하고 引爲謀主하니 玄齡이 亦自以遇知己라하야 罄竭心力하야 知無不爲러라 世民이 引兵頓于阿城【頓은 次也라】하니 勝兵이 十(二)[三]萬이라 軍令嚴整하야 秋毫不犯이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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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淵이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黃河를 건너가니 關中의 선비와 백성 중에 귀의하는 자들이 시장에 모이는 장꾼처럼 많았고, 李世民이 이르는 곳에는 관리와 백성 및 도둑떼들이 귀의하여 흐르는 물처럼 끊이지 않았다. 李世民이 그중에 호걸과 준걸들을 거두어서 자신의 僚屬으로 삼았다. 柴紹에게 시집간 李淵의 딸 李氏도 정예병 만여 명을 거느리고 李世民과 渭水 북쪽에서 회동하여 柴紹와 함께 각각 幕府를 설치하고 이름을 娘子軍【柴紹가 長安에서 太原으로 달려갈 적에 아내 李氏에게 이르기를 “尊公(李淵)께서 군대를 일으키셨는데, 지금 함께 가자니 不可하고 이곳에 남아 있으면 화가 미칠 것이니,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하니, 李氏가 말하기를 “부디 속히 가십시오. 저는 한낱 부녀자이니 몰래 숨기가 쉽습니다.” 하므로 柴紹가 마침내 길을 떠났다. 李氏는 鄂縣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가서 집안의 재물을 털어 무리를 모았다. 李淵이 黃河를 건너오자 李氏가 사자를 보내어 맞이하니, 李淵이 柴紹로 하여금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李氏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李氏가 정예병 만여 명을 거느리고 李世民과 渭水 북쪽에서 회합하였다.】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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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에 蕭銑【蕭銑은 後梁 宣帝 蕭詧의 曾孫이다. 煬帝는 그가 외척이라 하여 발탁해서 羅川令으로 삼았다. 巴陵尉 董景珍 등이 모의하여 郡을 점거하고 배반하니, 무리들이 董景珍을 함께 추대하여 盟主로 삼았는데, 董景珍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가난하고 천하여 사람들에게 복종받지 못한다. 羅川令 蕭銑은 梁나라 皇室의 후손이요, 너그럽고 인자하고 도량이 크니, 그를 받들어서 衆望을 따를 것을 청한다.” 하였다. 이에 사자를 보내어 蕭銑에게 알리자 蕭銑이 이를 따랐고, 역적을 토벌한다고 크게 말하여 수천 명을 불러 모집하였다.】이 巴陵에서 군대를 일으켜 스스로 梁王이라 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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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曰 文帝【隋高祖楊堅이라】之於周室에 非有元功厚德이 素洽於人이요 直以天元【周宣帝贇이라】暴崩에 嗣君幼弱하고 姦臣矯命하야 徼幸得之라 然이나 明敏儉約하야 勤於政治하며 隨才任官하고 信賞必罰이라 故로 能取江南三百年之國을 易於反掌하야 使天下復爲一統하야 百姓繁庶하고 衣食豐衍하야 突厥, 室韋【見下卷이라】, 靺鞨【北狄別種이니 古肅愼氏之地라】, 林邑【國名이니 在交趾南이라】, 高昌【見下卷이라】, 女國【其國無男하야 照水而孕이라】之屬이 莫不稽顙稱臣하고 奉珍入貢하니 雖兩漢全盛之時라도 不能過也라 向使後嗣僅得中材之主以守之런들 十世之內에 未易亡也리라 煬帝以悖逆詐謀로 坐承富强之業하야 志驕氣溢하야 慨然慕秦皇, 漢武之爲人이라 窮侈極欲하야 兵連四夷하고 政煩賦重하야 盜賊蜂起어늘 而猶巡遊不息하야 以樂滔憂【滔는 左傳作慆하니 悅也라】하고 惡聞直言하야 喜自壅蔽하니 噫라 率是道也면 雖禹湯文武之子孫이라도 未或不亡이어든 況隋無積善之基乎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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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淵이 法駕를 갖추어 代王楊侑를 맞이해서天興殿에서 황제에 즉위하게하니, 이때 황제의 나이가 13세였다. 천하에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改元하였으며 멀리 煬帝를 높여 太上皇으로 삼았다. 황제가 李淵을 임명하여假黃鉞‧都督內外諸軍事로 삼고唐王에 진봉하였다. 己巳日(11월 22일)에 李建成을 唐나라 世子로 삼았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文帝(楊堅)【文帝는 隋나라 高祖楊堅이다.】는 周나라 황실에 있어서 큰 공과 후한 덕을 베풀어 평소에 백성들을 흡족하게 함이 있지 않았고, 다만 天元皇帝【天元은 周나라 宣帝宇文贇이다.】가 갑자기 죽은 뒤에 嗣君이 유약하고 姦臣이 왕명을 사칭하였기 때문에 요행으로 천하를 얻었을 뿐이다. 그러나 명민하고 검약하여 정사에 부지런히 힘썼으며, 재주에 따라 관직을 맡기고 공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내렸다. 그러므로 300년 된 江南의 陳나라를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쉽게 취하여 천하로 하여금 다시 통일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많고 의식이 풍족하여 突厥‧室韋【室韋는 下卷에 보인다.】‧靺鞨【靺鞨은 北狄의 別種이니, 옛날 肅愼氏의 지역이다.】‧林邑【林邑은 국명이니, 交趾의 남쪽에 있다.】‧高昌【高昌은 下卷에 보인다.】‧女國【女國은 나라에 남자가 없어서 물에 비춰보면 잉태한다.】 등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신하라 칭하며 진기한 보물을 받들어 조공을 바치니, 비록 兩漢의 全盛시대라 해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하였다. 그때 만일 後嗣가 겨우 중간 정도의 재주가 있는 자를 얻어 지켰더라면 10代 안에는 쉽게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煬帝는 悖逆과 속임수로 가만히 앉아서 부강한 基業을 계승하여 뜻이 교만하고 기운이 넘쳐서 慨然히 秦始皇과 漢武帝의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그리하여 지극히 사치하고 욕심이 끝이 없어 兵亂이 사방 오랑캐 지역에 이어지고, 政令이 번거롭고 부역이 무거워서 도적들이 봉기하였는데도 오히려 순행하고 유람하기를 그치지 않아서 근심을 잊고【滔는 ≪春秋左傳≫에 慆라고 되어 있으니, 기뻐하는 것이다.】 정직한 말을 듣기 싫어해서 스스로 총명을 막고 가리는 것을 좋아하였으니, 아! 이 방법을 따른다면 비록 禹王‧湯王‧文王‧武王의 자손이라 해도 멸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인데, 더구나 善을 쌓은 기반이 없는 隋나라에 있어서이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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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隋는 四帝에 合稱帝三十年이라 [史略 史評]史斷曰 恭帝爲李淵所立이라 當是時하야 四海土崩하고 群盜蜂起하니 雖欲爲隋나 庸可得乎아 迹其禍亂之原하고 尋其覆亡之兆하면 楊堅得國之初에 不越月間하야 旣弑其君하고 又赤其族하야 使宇文氏로 灰飛煙滅하야 蕩無遺燼하니 近代滅國之禍 未有若是其烈者라 楊廣이 當父病革하야 淫烝父妾하야 行甘鳥獸하고 曾不旋踵에 弑父殺兄하야 禍出不測하고 逾年之後에 一日而殺其猶子者 七人이라 屠戮之慘이 亦略相報稱이러니 晩年에 身死人手하야 至撤床簀以裹尸하니 受禍之烈이 亦前代罕有라 語曰 君以此始면 亦以此終이라하니 隋祚之不長이 未爲不幸也라 隋之創業이 大抵與秦皇略同이요 而其再世亡國이 亦如之라 然이나 秦皇은 焚書하야 而五帝三皇以來六經之學이 遂亡하고 隋皇은 焚讖書하야 而秦漢晉魏以來讖記之學이 遂亡하니 其利害之相反이 亦足有可稱談者焉이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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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隋나라는 네 황제에 황제를 칭한 것까지 합하여 30년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恭帝는 李淵에 의해 옹립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온 천하가 흙이 무너지듯 와해되어 민란이 일어나고 도적떼가 봉기하였으니, 비록 隋나라를 지키고자 하더라도 될 수 있었겠는가. 禍亂의 근원을 살펴보고 멸망의 조짐을 찾아보면 楊堅이 나라를 얻은 초기에 한 달이 못 되어 이미 그 군주를 시해하였고, 또 그 집안을 멸망시켜 宇文氏로 하여금 재처럼 날리고 연기처럼 사라져서 탕진하여 하나도 남은 것이 없게 만들었으니, 近代에 나라를 멸망시킨 禍가 이와 같이 혹독한 적이 있지 않았다. 楊廣은 아버지(楊堅)의 병이 심할 때를 당해 아버지의 妾을 간음하여 짐승 같은 행실을 달갑게 여기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를 시해하고 형을 죽여서 禍가 측량할 수 없었으며, 한 해를 넘긴 뒤에는 하루에 猶子(조카)를 죽인 것이 7명이나 되었다. 屠戮의 참혹함이 또한 대략 相應할 만하였는데, 楊廣은 晩年에 자신 또한 남의 손에 죽어서 床簀을 거두어 시신을 싸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혹하게 禍를 입은 것이 또한 前代에 드물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군주가 이로써 시작하면, 또한 이로써 끝마쳐야 한다.’ 하였으니, 隋나라의 國運이 길지 못함은 不幸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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