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三十三 陳紀
通鑑節要 卷之三十三
南北朝
陳紀
高祖武帝
[己卯]〈陳永定三年이요 周武成元年이요 齊天保十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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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559) - 陳나라 永定 3년이고, 周나라 武成 元年이고, 齊나라 天保 10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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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祖文帝
[甲申]〈陳天嘉五年이요 周保定四年이요 齊河淸三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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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564) - 陳나라 天嘉 5년이고, 周나라 保定 4년이고, 齊나라 河淸 3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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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海王
[戊子]〈陳光大二年이요 周天和三年이요 齊天統四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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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568) - 陳나라 光大 2년이고, 周나라 天和 3년이고, 齊나라 天統 4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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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宣帝
[己丑]〈陳高宗太建元年이요 周天和四年이요 齊天統五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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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569) - 陳나라 高宗의 太建 元年이고, 周나라 天和 4년이고, 齊나라 天統 5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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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陳安成王이 卽位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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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卯]〈陳太建三年이요 齊武平二年이요 周天和六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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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571) - 陳나라 太建 3년이고, 齊나라 武平 2년이고, 周나라 天和 6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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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陳太建四年이요 齊武平三年이요 周建德元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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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572) - 陳나라 太建 4년이고, 齊나라 武平 3년이고, 周나라 建德 元年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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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主가 北齊를 토벌할 것을 도모할 적에 公卿들의 의견이 각각 달랐으나 오직 鎭前將軍【鎭南將軍의 南字는 前字의 잘못이니, ≪資治通鑑≫ 本文에는 ‘前’字로 되어 있다. 註에 이르기를 “梁나라 武帝가 八鎭將軍을 두었으니, 鎭東將軍‧鎭西將軍‧鎭南將軍‧鎭北將軍은 다만 밖의 일을 시행하고, 鎭左將軍‧鎭右將軍‧鎭前將軍‧鎭後將軍은 다만 안의 일을 시행했다.” 하였다.】吳明徹이 계책을 결정하고 출정할 것을 청하였다. 壬午日(3월 16일)에 여러 군사들에게 집결하도록 분부【分字는 분부한다는 뜻이다.】하고 吳明徹을 都督征討諸軍事로 삼아 십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北齊를 토벌하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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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巳]〈陳太建五年이요 齊武平四年이요 周建德二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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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573) - 陳나라 太建 5년이고, 齊나라 武平 4년이고, 周나라 建德 2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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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陳나라 吳明徹이 壽陽城을 공격할 적에 肥水를 막아 壽陽城에 물을 대니, 齊나라 河南行臺右僕射皮景和 등이 壽陽城을 구원하려다가 겁을 먹고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吳明徹이 마침내 몸소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고【擐은 음이 환이니 꿰어 입는다는 뜻이다. ≪春秋左傳≫에 “갑옷을 입고 병기를 잡는 것이다.” 하였다.】 사면에서 포위하고 급히 공격하여 한 번의 공격으로 壽陽城을 함락시키고王琳‧王貴顯‧盧潛 등을 생포하여建康으로 보내니, 皮景和가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齊나라 穆提婆【穆提婆는 尙書左僕射였다.】와 韓長鸞【韓長鸞은 領軍大將軍이었다.】이, 壽陽城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握槊(雙六)【握槊은 북쪽 오랑캐 지역의 놀이이니, 바로 지금의 雙六이다.】 놀이를 중지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壽陽城은 본래 저들 南朝의 땅이었으니, 저들이 가져가도록 내버려 둘 뿐이다.” 하였다. 齊主가 패전했다는 말을 듣고 자못 근심하자, 穆提婆 등이 말하기를 “설사 黃河 이남 지역을 다 잃는다 해도 오히려 한 龜玆國이 될 수 있습니다.” 하니, 齊主가 크게 기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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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二月에 陳定州刺史田龍秋 以江北六州, 七鎭으로 叛하야 入于齊어늘 安州刺史周炅이 擊斬之하고 盡復江北之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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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陳太建七年이요 齊武平六年이요 周建德四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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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575) - 陳나라 太建 7년이고, 齊나라 武平 6년이고, 周나라 建德 4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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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申]〈陳太建八年이요 齊隆化元年이요 周建德五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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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576) - 陳나라 太建 8년이고, 齊나라 隆化 元年이고, 周나라 建德 5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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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月에 周主謂群臣曰 齊朝昏亂하야 政由群小하니 百姓嗷然하야 朝不謀夕이라 天與不取면 恐貽後悔하노라 冬十月에 周主自將伐齊하야 克晉州하다 戊申에 周主至平陽하야 勒諸軍擊齊師하니 齊主北走하고 齊師大潰하야 死者萬餘人이라 遂帥諸將하야 追齊師한대 齊主入晉陽하야 憂懼不知所之하니 齊臣降者相繼러라 齊主還鄴하니 幷州將帥 請安德王延宗【澄之第五子也라 齊主緯 詔延宗爲相國, 幷州剌史하야 總山西兵하야 委以備禦하다 幷州將帥 請於延宗曰 王不爲天子면 諸人은 實不能爲王出死力이라하니 延宗이 不得已卽位하다 是年에 望氣者言 當有革易이라하니라 齊王緯 傳位于太子恒하다】 卽位하다 周軍이 圍晉陽하야 攻東門克之하니 延宗이 戰力屈하야 走至城北이어늘 周人이 擒之하다 癸酉에 周師趣(趨)鄴【趣는 讀曰趨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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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周主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齊나라 조정이 혼란하여 정사가 小人들로부터 나오니, 백성들이 원망하여 아침에도 저녁일을 도모할 수가 없다. 하늘이 우리에게 주는데도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 두렵다.” 하였다. 겨울 10월에 周主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齊나라를 토벌하여晉州를 함락하였다. 戊申日(12월 4일)에 周主가 平陽에 이르러 諸軍을 무장시켜 齊나라 군대를 공격하니, 齊主가 북쪽으로 도망하고齊나라 군대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만여 명에 달하였다. 마침내 諸將을 거느리고 齊나라 군대를 추격하자, 齊主가 晉陽으로 들어가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니, 齊나라 신하 중에 항복하는 자가 서로 이어졌다. 齊主가 鄴城으로 돌아가니, 幷州의 장수들이 安德王高延宗【高延宗은 高澄의 다섯째 아들이다. 齊主 高緯(後主)가 명령을 내려 高延宗을 相國‧幷州剌史로 삼아 山西의 군대를 총괄하게 해서 수비와 방어를 맡겼다. 幷州의 將帥들이 高延宗에게 청하기를 “王이 天子가 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실로 王을 위하여 死力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高延宗이 부득이 즉위하였다. 이해에 雲氣를 관찰하여 일의 조짐을 알아내는 자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王朝가 바뀔 것이다.” 하였다. 齊王 高緯가 太子 高恒(幼主)에게 전위하였다.】에게 즉위할 것을 청하였다. 周나라 군대가 晉陽을 포위하여 東門을 공격하여함락하였다. 高延宗이 싸우다가 힘이 꺾여서 도망하여 성 북쪽에 이르자 周나라 사람이 그를 사로잡았다. 癸酉日(12월 29일)에 周나라 군대가 鄴城으로 향하였다.【趣는 趨로 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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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에 周師至鄴城下하야 圍之하고 燒城西門하니 齊人이 出戰이어늘 周師奮擊하야 大破之하다 齊主從百騎東走어늘 追及하야 擒之【齊王緯 從百騎東走러니 其日에 幼主禪位于大丞相任成王(階)[湝]하니 尊上皇緯爲無上皇하고 幼主爲(宗)[宋]國天王하다 無上皇이 與皇后로 携幼主하고 走靑州어늘 周將尉遲綱이 擒之하다 其後에 周人이 誣緯與宣州刺史穆提婆謀反이라하야 延宗等數十人을 無少長히 賜死하다 (階)[湝]는 歡之(二十人)[第十子]라 】하다 歷年圖曰 神武【高歡이라】以高世之略으로 平爾朱之亂하야 功大勢盛하야 爲魏武【脩라】所疑하야 雖有逐君之慙이나 而能惓惓盡恭하야 以事靜帝【善見이라】하야 沒身不怠하니 此其可稱者也라 文襄【歡子澄이라】은 有俊才而無重德하야 悖慢無禮하야 終隕身於奴隸하고 文宣【洋이니 澄之弟라】은 淫湎【湎은 沈於酒也라】殘暴가 甚於桀紂로되 而能信用賢臣하야 委之以政하야 威加隣敵하고 終其天年하니 蓋亦有以得之矣라 孝昭【演이니 洋之弟라】는 明達愷悌하야 實有齊之令主러니 享國不永하니 惜哉라 武成【湛이니 演之弟라】은 驕淫奢縱하야 齊業始衰하고 後主【緯니 演之長子라】繼之에 昏狂尤甚하야 誅翦忠良【忠良은 太尉趙郡王叡라】하고 信用讒邪【讒邪는 和士開라】하니 十年而亡이 已爲幸矣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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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日(정월 18일)에 周나라 군대가 鄴城 아래에 이르러 포위하고鄴城의 西門을 불태우니齊나라 사람들이 나와서 싸웠는데, 周나라 군대가 맹렬히 공격하여대파하였다. 齊主가 백 명의 騎兵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도망하자 추격하여 사로잡았다.【齊王 高緯가 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도주하였는데, 그날 幼主 高恒이 大丞相인 任成王 高湝에게 讓位하니, 上皇 高緯를 높여서 無上皇이라 하고 幼主를 宋國天王이라 하였다. 無上皇이 皇后와 함께 幼主를 데리고 靑州로 도망하였는데, 周나라 장수 尉遲綱이 사로잡았다. 그 후에 周나라 사람이 高緯가 宣州刺史 穆提婆와 함께 반역을 도모했다고 모함하여 高延宗 등 수십 명을 젊은이와 늙은이 할 것 없이 賜死하였다. 高湝는 高歡의 열 번째 아들이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東魏의 神武帝(高歡)【神武帝는 高歡이다.】는 세상에 뛰어난 지략으로써 爾朱氏의 난리를 평정하여 공이 크고 세력이 성대해지자 北魏의 武帝(元脩)【魏武帝는 元脩이다.】에게 의심을 받아 군주를 축출한 부끄러운 일이 있었으나 惓惓히 공손함을 다하여 靜帝(元善見)【靜帝는 元善見이다.】를 섬겨서 종신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는 칭찬할 만한 것이다. 文襄帝(高澄)【文襄帝는 高歡의 아들 高澄이다.】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나 후중한 德이 없어서 패역하고 오만하고 무례하여 끝내 노예의 손에 죽었고, 北齊의 文宣帝(高洋)【文宣帝는 高洋이니, 高澄의 아우이다.】는 酒色에 빠지며【湎은 술에 빠지는 것이다.】 잔악하고 포악함이 桀‧紂보다 심하였으나 어진 신하를 믿고 등용하여 정사를 맡겨서 이웃하고 있는 적국에게 위엄이 가해지고 天壽를 누렸으니, 또한 정치할 줄을 안 것이다. 孝昭帝(高演)【孝昭帝는 高演이니, 高洋의 아우이다.】는 밝게 통달하고 화락하여 실로 齊나라의 훌륭한 군주였는데 나라를 향유한 것이 길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武成帝(高湛)【武成帝는 高湛이니, 高演의 아우이다.】는 교만하고 음탕하고 사치하고 방종해서 齊나라의 기업이 비로소 쇠하였고, 後主(高緯)【後主는 高緯이니, 高演의 장자이다.】가 계승하자 사리에 어둡고 광포함이 더욱 심해서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죽이며【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는 太尉인 趙郡王 高叡이다.】 참소하고 간사한 자들을 신임하고 등용하였으니,【참소하고 간사한 자는 和士開이다.】 10년 만에 망한 것도 이미 요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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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나라 宣帝(宇文贇)가 太子宇文闡【太子 宇文闡이 바로 靜帝이다.】에게 전위하고,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大象이라 改元하고 스스로 天元皇帝라 칭하니, 교만하고 사치함이 더욱 심하였으며 자신을 높이고 잘난 체하기를 힘써서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었다. 隋公楊堅이 大將軍인 汝南公宇文慶에게 은밀히 이르기를 “天元皇帝가 실로 積德한 것이 없고 그의 相貌를 살펴보니 壽命이 또한 길지 못할 것이요, 또 여러 藩王의 세력이 미약한데 그들로 하여금 각각 封國으로 나아가게 해서 일찍이 근본을 깊고 견고하게 하는 장구한 계책이 없으니, 羽翼이 이미 잘린 것이다. 국가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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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子]〈陳太建十二年이요 周大象二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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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580) - 陳나라 太建 12년이고, 周나라 大象 2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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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나라 天元皇帝(宣帝)는 어둡고 포악함이 더욱더 심하여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절도를 잃었다. 皇后의 부친인 楊堅이 지위와 명망이 높고 중하니, 天元皇帝가 그를 시기하였다. 楊堅이 이미 황제에게 시기를 받아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天元皇帝가 法駕를 갖추고 天興宮에 행차했다가 몸이 불편하여 돌아와서 이날 天元皇帝가 죽으니, 〈劉昉과 鄭譯이 皇帝의 詔書를 사칭하여〉 楊堅에게 中外의 군대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楊堅이 宣帝의 가혹한 政令을 개혁하여 관대한 정사로 바꾸었다. 옛날의 刑律을 삭제하여 줄이고《刑書要制》를 제정하여靜帝에게 아뢰어 시행하고 몸소 근검절약을 실천하니, 中外가 기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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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二月에 周以大丞相堅으로 爲相國하야 摠百揆하고 進爵爲王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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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月에 周主下詔하야 遜位居別宮하고 命奉皇帝璽紱【音弗이니 印組也라】하야 禪位于隋하다 歷年圖曰 文帝【宇文泰라】以關中之衆으로 東迎孝武【魏武帝脩라】하야 收疲散之兵하고 撫貧困之民하며 任賢使能하야 列官布職하며 明部分하고 務農桑하야 以輔魏室하니 雖以高氏【高歡族黨이라】之强으로도 不能陵也라 其所爲典法이 施於後世하니 可不謂賢乎아 武帝【高祖邕이니 文帝第四子라】는 以英傑之資로 受制强臣【宇文護니 專權이라】이러니 恭黙端拱하야 十有餘年에 須其罪盈惡熟하야 爲衆所棄하야 一旦除之【壬辰年에 周主討殺太師護라】를 若撥麷【撥은 治也라 麷은 音豐이니 熬麥也라】振槁하니 可謂知柔知剛하야 知(智)勇兼備者矣라 然後에 親統六師하야 以征東夏하니 齊之嶮(險)阻不守하고 士卒不戰하야 數月之間에 縛其君臣하야 致之鼓下하야 使有周之境으로 東漸于海하고 南傅于江하니 雖魏室全盛之時라도 不能及也라 惜乎라 宣帝【贇이라】恣其淫侈하고 逞其苛譎하야 自絶于天하고 結怨于民하야 不及三年에 而爲異姓所有하니 悲夫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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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에 말하였다. “文帝(宇文泰)【文帝는 宇文泰이다.】가 關中의 병력을 끌고 동쪽으로 가서 孝武帝(元脩)【孝武帝는 北魏 武帝 元脩이다.】를 맞이하여 피폐하고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고 곤궁한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어진 자에게 맡기고 유능한 자를 부려서 관직에 나열하게 하며, 부대를 분명하게 나누고 농사와 養蠶을 힘써서 魏나라 황실을 보필하였으니, 비록 高氏【高氏는 高歡의 族黨이다.】의 강성함으로도 능멸하지 못하였다. 그가 만든 典法이 후세에 시행되었으니, 어질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武帝(宇文邕)【武帝는 高祖 宇文邕이니, 文帝의 넷째 아들이다.】는 영웅호걸의 자질을 지녔으면서 강성한 신하(宇文護)【강성한 신하는 宇文護이니, 권력을 전횡하였다.】에게 제재당하였는데, 공손히 침묵하고 단정히 손을 모으고서 십여 년 동안 그의 罪가 가득 차고 惡이 무르익어서 무리들에게 버림받기를 기다렸다가 하루아침에 제거하여【壬辰年(572)에 周主(宇文邕)가 太師 宇文護를 토벌하여 죽였다.】 볶은 보리【撥은 다스림이다. 麷은 음이 풍이니, 볶은 보리이다.】의 싹을 없애고 낙엽을 흔들어 떨어뜨리듯이 하였으니, 柔해야 할 때에 柔할 줄 알고 剛해야 할 때에 剛할 줄 알아서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 뒤에 직접 六軍을 거느리고 東夏를 정벌하였는데, 齊나라의 험한 요새가 지켜지지 못하고 사졸들이 싸우지 않아서 몇 달 만에 齊나라의 군주와 신하를 포박하여 鼓下(軍中)로 끌어와서 周나라의 국경이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揚子江에 이르게 하였으니, 비록 魏나라의 세력이 가장 강성했을 때라 해도 이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애석하다. 宣帝(宇文贇)【宣帝는 宇文贇이다.】는 음란함과 사치함을 제멋대로 행하고 가혹함과 속임수를 부려서 스스로 天理를 끊고 백성들에게 원한을 맺어 3년이 못 되어 국가가 다른 姓氏의 소유가 되게 하였으니, 슬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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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陳太建十四年이요 隋開皇二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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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582) - 陳나라 太建 14년이고, 隋나라 開皇 2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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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城公
[乙巳]〈陳至德三年이요 隋開皇五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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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585) - 陳나라 至德 3년이고, 隋나라 開皇 5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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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主不喜辭華하야 詔天下하야 公私文翰을 竝宜實錄하다 治書侍御史李諤이 亦以當時屬文이 體尙輕薄이라하야 上書曰 魏之三祖【三祖는 太祖武帝, 高祖文帝, 烈祖明帝라】 崇尙文詞하야 忽君人之大道하고 好雕蟲之小藝하니 下之從上하야 遂成風俗이라 遂江左, 齊, 梁에 其敝彌甚하야 競一韻之奇하고 爭一字之巧하야 連篇累牘이 不出月露之形하고 積案盈箱이 盡是風雲之狀이라 世俗이 以此相高하고 朝廷이 據玆擢士하야 祿利之路旣開에 愛尙之情이 愈篤이라 於是에 閭里童昏과 貴遊總丱【丱은 音慣이니 束髮爲角하야 兩髮相竝이라】이 未窺六甲【黃帝命大撓하야 探五行之情하고 占斗綱所建하야 作甲子하고 以十干十二支相配하야 而成六甲이라】에 先製五言이라 故로 文筆日繁하고 其政日亂하니 良由棄大聖之軌模하고 構無用以爲用也라 今朝廷이 雖有是詔나 如聞外州遠縣이 仍踵敝風하노이다 詔以諤所奏로 頒示四方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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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主는 文辭가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三祖는 魏나라 太祖 武帝(曹操), 高祖 文帝(曹丕), 烈祖 明帝(曹叡)이다.】 천하에 명하여 公私의 文書를 모두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하게 하였다. 治書侍御史李諤 또한 당시 사람들이 문장을 짓는 것이 경박하고 화려한 문체를 숭상한다 하여 상소하기를 “魏나라의 세 황제가 文詞를 숭상하여 군주의 큰 도리를 소홀히 하고 詩文과 詞賦의 작은 기예를 좋아하니,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따라서 마침내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江左(東晉)와 齊나라, 梁나라 때에는 이러한 文風의 폐단이 더욱 심해져서 사람들이 한 韻字의 기이함을 다투고 한 글자의 교묘함을 다투었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글들이 달빛과 이슬을 형용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책상에 가득한 글들이 모두 바람과 구름의 형상을 읊었습니다. 세속에서는 이로써 서로 높이고 조정에서는 이에 근거하여 선비들을 발탁해서 녹봉과 이익의 길이 열리게 되자 사람들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경박한 것을 숭상하는 정이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그리하여 閭里의 어린 童子는 물론이고 王公의 子弟들【丱은 음이 관이니, 總丱은 머리를 땋아 묶어서 뿔 모양으로 만들어 두 갈래의 머리가 서로 나란한 것이다.】에 이르기까지 六甲【黃帝가 大撓에게 명하여 五行의 실정을 탐구하고 북두칠성의 자루가 가리키는 바를 살펴서 甲子를 만들고 十干과 十二支를 서로 배합하여 六十甲子를 완성하였다.】을 엿보기도 전에 먼저 五言詩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文翰이 날로 더욱 많아지고 정사가 날로 더욱 혼란해지니, 이는 진실로 大聖人의 규범을 버리고 쓸데없는 글을 얽어서 쓰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비록 화려한 문장을 금하는 詔令을 내렸으나 신이 듣건대 변방의 먼 州縣에서는 여전히 옛날의 잘못된 풍속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李諤이 아뢴 것을 사방에 반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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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是歲에 陳主於光昭殿前에 起臨春, 結綺, 望仙三閣하니 各高數十丈이요 連延數十間이라 其牕牖【在屋曰牕이요 在墻曰牖라】, 壁帶【壁中橫木이 露出如帶者라】와 懸(縣)楣【楣는 門上橫木이니 所以安戶扉者라】, 欄檻을 皆以沈, 檀【皆香木이라】爲之하야 飾以金玉하고 間以珠翠【珠는 珍珠요 翠는 翡翠毛라】하며 外施珠簾하고 內有寶牀寶帳하니 其服玩瑰麗【瑰는 美也, 盛也라】 近古所未有라 每微風(漸)[暫]至에 香聞數里러라 其下에 積石爲山하고 引水爲池하야 雜植奇花異卉【卉는 百草總名이라】하다 上每飮酒에 使諸妃嬪及女學士로 與狎客共賦詩하야 互相贈答하고 采其尤艶麗者하야 被以新聲하고 選宮女千餘人하야 習而歌之하되 分部迭進이라 其曲에 有玉樹後庭花, 臨春樂【樂은 音洛이니 言臨春閣之樂也라】等하니 大略皆美諸妃嬪之容色이라 君臣酣歌하야 自夕達旦하야 以此爲常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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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에 陳主가 光昭殿 앞에 臨春閣‧結綺閣‧望仙閣 세 누각을 지으니, 각각 높이가 수십 길이고 연달아 이어진 것이 수십 칸이었다. 窓戶【지붕에 있는 것을 牕이라 하고, 담장에 있는 것을 牖라 한다.】와 壁帶(壁에 가로지른 나무)【벽 속의 가로댄 나무가 허리띠처럼 노출된 것이다.】와 縣楣【楣는 문 위에 가로 댄 나무(上引枋)*) 이니, 문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다.】(上引枋)와 난간을 모두 沈香木과 紫檀木【沈香木과 紫檀木은 모두 향나무이다.】으로 만들어서 금과 옥으로 꾸미고 진주와 비취새 깃털【珠는 진주이고 翠는 비취새 깃털이다.】을 섞었으며, 밖에는 珠簾을 달고 안에는 寶牀과 寶帳을 두니, 服飾과 器玩의 화려함【瑰는 아름답고, 성대한 것이다.】이 근고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바였다. 매양 微風이 잠시 불어올 때마다 향기가 몇 리 밖까지 풍겼다. 그 아래에 돌을 쌓아 假山을 만들고 물을 끌어다 못을 만들어서 진귀한 꽃과 풀【卉는 온갖 풀의 총칭이다.】을 섞어 심었다. 上이 매번 술을 마실 때마다 여러 妃嬪과 女學士들로 하여금 狎客과 함께 詩를 지어서 서로 화답하게 하고, 그중에 특히 요염하고 화려한 것을 골라서 새 곡조에 올리고 궁녀 천여 명을 선발하여 이것을 익혀서 노래하게 하되 몇 組로 나누어서 번갈아 연주하게 하였다. 樂曲 중에 玉樹後庭花‧臨春樂【樂은 음이 락이니, 臨春樂은 臨春閣의 즐거움을 말한다.】 등이 있으니, 대체로 여러 妃嬪의 아름다운 용모와 자태를 찬미한 것이었다. 군주와 신하가 마음껏 술을 마시고 노래하여, 밤을 새워 새벽에 이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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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陳禎明元年이요 隋開皇七年이라 ○ 是歲에 梁亡하니 凡二國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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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587) - 陳나라 禎明 元年이고, 隋나라 開皇 7년이다. ○ 이해에 梁나라가 망하니, 모두 두 나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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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陳禎明二年이요 隋開皇八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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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588) - 陳나라 禎明 2년이고, 隋나라 開皇 8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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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主問取陳之策於高熲한대 對曰 江北은 地寒하야 田收差晩하고 江南은 水田早熟하니 量彼收(獲)[穫]之際하야 微徵士馬하야 聲言掩襲이면 彼必屯兵守禦하리니 足得廢其農時요 彼旣聚兵이어든 我便解甲하야 再三若此면 彼以爲常하야 後更集兵이라도 彼必不信하리니 猶豫【猶는 獸名이니 性多疑하야 聞有聲則登木하야 下上不一이라 故로 不決曰猶豫라 又猶는 犬子也니 人將犬行에 犬好豫在人前하야 待人이라가 又來迎候라 故謂不決曰猶豫라】之頃에 我乃濟師하야 登陸而戰이면 兵氣益倍하리이다 又江南은 土薄하야 舍多茅竹하고 所有儲積이 皆非地窖【窖는 地藏也라】니 密遣行人하야 因風縱火하고 待彼修立하야 復更燒之면 不出數年에 自可財力俱盡하리이다 隋主用其策하니 陳人이 始困이라 於是에 楊素, 賀若弼及高勵, 崔仲方【賀若弼은 吳州總管이요, 高勵는 光州刺史요, 崔仲方은 虢州刺史라】等이 爭獻平江南之策【晉州刺史皇甫績이 言陳有三可滅하니 大可呑小 一也요 以有道伐無道 二也요 納反臣蕭巖하야 於我有詞 三也라 陛下若命將出士인댄 臣願展絲髮之效하리이다 隋主勞而遣之也하니라】이어늘 隋主謂高熲【尙書右僕射라】曰 我爲民父母하야 豈可限一衣帶水하야 不拯之乎아 甲子에 隋出師할새 命晉王廣과 秦王俊【皆文帝子니 廣은 卽煬帝라】과 淸河公楊素하야 皆爲行軍元帥하야 與韓擒虎【廬州總管이라】, 賀若弼等으로 率兵五十一萬하니 東接滄海하고 西距巴, 蜀하며 旌旗舟楫이 橫亘【亘은 竟也요 又延袤也라】數千里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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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主가 陳나라를 취할 계책을 高熲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江北은 지역이 추워서 밭에 심어 수확하는 것이 다소 늦고 江南은 논에 심어 수확하는 것이 일찍 성숙하니, 저들이 수확할 시기를 헤아려서 군사와 말을 약간 징집하여 江南을 습격하려 한다고 소문을 내면 저들은 반드시 병력을 주둔시켜 방어할 것이니, 충분히 저들의 추수할 시기를 놓치게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이미 병력을 모으고 난 뒤에 우리가 곧 갑옷을 벗고 군대를 해산하여 이렇게 하기를 두세 번 하면 저들은 이것을 일상적인 일로 여겨서 이후로는 우리가 다시 병력을 모으더라도 저들은 반드시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이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할【猶는 짐승의 이름이니, 성품이 의심이 많아서 소리가 들리면 나무 위로 올라가서 오르락내리락 하기를 여러 번 한다. 그러므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猶豫라 한다. 또 猶는 개의 새끼이니, 사람이 개를 데리고 길을 갈 때에 개가 사람보다 앞서 가서 사람을 기다리다가 또다시 사람 앞으로 와서 맞이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일러 猶豫라 한다.】 때에 우리가 마침내 군대를 渡江시켜 육지에 올라가 싸우게 하면 우리 병사들의 사기가 더욱 倍加될 것입니다. 또 江南은 지대가 低濕해서 띠풀과 대나무로 지은 집이 많고 소유하고 있는 저축을 모두 땅의 움【窖는 땅속의 창고이다.】속에 보관하지 않으니,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저들의 곡식 창고를 불태운 다음 저들이 수리하고 다시 세우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불을 놓아 태운다면 몇 년이 못 되어 저들의 재물과 힘이 모두 고갈될 것입니다.” 하였다. 隋主가 그 계책을 따르니, 陳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곤궁해졌다. 이에 楊素‧賀若弼‧高勵‧崔仲方【[頭註]楊素……崔仲方:賀若弼은 吳州總管이고, 高勵는 光州刺史이고, 崔仲方은 虢州刺史였다.】 등이 다투어 江南을 평정할 계책【晉州刺史 皇甫績이 말하기를 “陳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세 가지 이유가 있으니, 大國으로서 小國을 병탄한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有道함으로써 無道함을 토벌한 것이 두 번째 이유이고, 陳나라가 우리를 배반한 蕭巖을 받아들여 우리에게 군대를 출동할 명분이 있는 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폐하께서 만일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출동시키신다면 臣은 미력이나마 바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隋主가 그를 위로하고 보내었다.】을 올렸다. 隋主가 高熲【高熲은 尙書右僕射이다.】에게 이르기를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어찌 옷의 띠처럼 작은 물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江南의 백성들을 구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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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二月에 隋軍이 臨江하니 高熲이 謂薛道衡【行臺의 吏部郎中이라】曰 今玆大擧에 江東을 必可克乎아 道衡曰 克之니라 常(嘗)聞郭璞【東晉時善卜人이라】有言호되 江東分王三百年에 復與中國合이라하니 今此數將周【晉元帝南渡하야 卽王位於建康하니 歲在丁丑이요 是年이 歲戊申이니 凡二百七十二年이라】하니 一也요 主上은 恭儉勤勞하고 叔寶【陳後主名이라】는 荒淫驕侈하니 二也요 國之安危는 在所寄任이어늘 彼以江(摠)[總]爲相하고 唯事詩酒하니 三也요 我는 有道而大하고 彼는 無德而小하며 量其甲士컨대 不過十萬하니 西自巫峽으로 東至滄海에 分之則勢懸而力弱하고 聚之則守此而失彼니 四也라 席卷之勢 事在不疑니라 熲이 忻然曰 得君言成敗之理하니 令人豁然이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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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에 隋軍이 강가에 임하니 高熲이 薛道衡【薛道衡은 行臺의 吏部郎中이다.】에게 이르기를 “이번에 대거 출병하여 陳나라를 토벌함에 江東을 반드시 이길 수 있겠는가?” 하니, 薛道衡이 대답하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제가 일찍이 들으니 郭璞【郭璞은 東晉 때 점을 잘 쳤던 사람이다.】이 말하기를 ‘江東 지방이 나뉘어 왕 노릇한 지 300년 만에 다시 中原과 통일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300년의 週期가 다 차려 하니【晉나라 元帝가 남쪽으로 揚子江을 건너 建康에서 王에 즉위한 것이 丁丑年(317)이고 이해가 戊申年(588)이니, 모두 272년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主上은 공손하고 검소하고 부지런한데 陳叔寶【叔寶는 陳나라 後主의 이름이다.】는 주색에 빠져 교만하고 사치하니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고, 국가의 安危는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 달려 있는데 저들은 江總을 재상으로 삼아 오직 시 짓고 술 마시는 것을 일삼으니 이것이 세 번째 이유이고, 우리는 道가 있으면서 나라가 크고 저들은 德이 없으면서 나라가 작으며 저들의 甲士를 헤아려 보건대 십만에 불과하여 서쪽으로 巫峽으로부터 동쪽으로 滄海에 이르기까지 만약 군대를 나누어 수비하면 형세가 달리고 힘이 약하며 만약 군대를 집결시켜 수비하면 이곳을 지킬 경우 저곳을 잃을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형세상 우리 隋나라가 席卷할 것이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였다. 高熲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성패의 이치를 분석한 것을 들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환히 깨닫게 한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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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陳後主가 近臣에게 조용히 이르기를 “興旺【王은 去聲이니 흥왕함이다.】하는 기운이 이곳에 있어서 齊나라 군대가 세 번 쳐들어오고 周나라 군대가 두 번 쳐들어 왔으나 꺾이고 실패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저 隋나라 군대는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하니, 孔範【孔範은 都官尙書이다.】이 말하기를 “長江의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참호가 예로부터 남북을 가로막고 있으니, 오늘날 적군이 어찌 長江을 날아서 건너오겠습니까.” 하니, 後主가 웃고 옳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깊이 대비하지 않고 女樂이 進獻하는 歌舞를 즐기며【伎는 女子 樂士이다.】 신하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읊기를 그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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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陳은 五主에 合三十二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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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陳나라는 다섯 군주에 합하여 32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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