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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30일 (목) 20:00 판

신대리출토_백자명기
백자에 담긴 삶과 죽음
대표명칭 신대리출토_백자명기
제작시기 조선



상세설명

광주 신대리는 신대동 혹은 새태말이라고 하는데, 새태말은 새터말 즉 새터를 잡아 이전해온 마을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도자기를 생산하는 사옹원 소속 도자기 생산집단이 새로 도요를 개설하기 위해 이전하여 붙여진 명칭일 것이다. 신대리 요지는 15, 17세기의 가마터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출토된 백자의 간지명문과 1677년 지월리로 가마를 이전했다는 <승정원일기> 기사를 통해 1665-1676년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
신대리에는 15*17세기에 운영된 분원 가마터가 29개소 남아 있다. 2008년 도로공사 중 처음 발견된 신대리 29호 가마는 조선 전기 가마의 구조 및 제작기술을 살펴보는 데 있어 자료적 가치가 큰 유적으로 현재 경기도자박물관내로 이전하여 야외전시되고 있다. 출토유물은 연지어문을 흑상감한 대발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회청색의 백자들로, 4~5개의 태토빚음을 받쳐 포개구운 조질 그릇들이다. 기종은 주을 이루는 일상기명과 함께 화형잔, 양이잔, 고족배, 병, 호 등의 특수기종, 그리고 도침, 굽통 등 각종 작업도구가 발견되었다. 1665년경 조선왕실은 과거 15세기에 백자생산 이력이 있는 신대리로 분원을 이전하였다. 신대리 18호 요지는 2008년 발굴조사에서 17세기에 운영되었던 가마로 확인되었다. 유물은 대부분 회청색 백자로 사군자문과 운문, 용문, ‘+’자문 등을 장식한 철화백자, 소량의 명문백자가 수습되었다. 대발, 호, 병, 제기, 벼루 등 특수기종을 비롯한 오목굽의 조질 반상기종이 주생산품으로, 신대리의 조질백자는 동시기의 지방백자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어 상호영향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2]
조선은 ‘효孝’라는 유교적 윤리를 위해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으며 조상을 편히 모시면 자손이 번성한다고 믿었다. 예학의 성장과 함께 16세기 중엽부터 사대부층에 유교적 상장례가 보급되었고 조상의 묘역을 단장하고 명기를 부장하는데 큰 관심을 쏟았다. 유교에서는 멀리 떠나보낸 조상이 마치 살아계신 듯 양지바른 곳에 모시고 평상시 물건을 사용토록 하는 것을 도리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상은 신명神明이라 하여 온전히 살아계신 것처럼 여겨서는 안되기에 정성껏 예를 갖추어 실제 사용할 수 없도록 생활용기를 축소하여 만든 도자 명기明器를 무덤에 묻어 섬김을 다하였다. 또한, 사대부가에서는 집안 내력 뿐 아니라 생전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도자 지석誌石을 특별히 제작하여 후대에 길이 전하였다.효孝를 중시한 조선의 양반가에서는 부모의 갑작스런 변고를 걱정하여 부모가 60세가 되는 해부터 10년 주기로 마련하기 어려운 상례도구를 준비해두는 것을 도리로 여겼다.[3]

네트워크 그래프


주석

  1.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 13책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6
  2.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21책 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21
  3.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백자에 담긴 삶과 죽음 : 2019 경기도자박물관 기획전>, 광주: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