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정약용의 「수오재기(守吾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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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주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9월 17일 (화) 10:13 판 (본문)

본문

Quote-left.png 수오재(守吾齋)라는 것은 큰 형님이 그 집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에 의심하며 말하기를,

“사물이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는 나[吾]보다 절실한 것이 없으니, 비록 지키지 않은들 어디로 갈 것인가. 이상한 이름이다.”

하였다.

내가 장기(長鬐)로 귀양온 이후 홀로 지내면서 정밀하게 생각해 보았더니, 하루는 갑자기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다음과 같이 스스로 말하였다.

“대체로 천하의 만물이란 모두 지킬 것이 없고, 오직 나[吾]만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내 밭을 지고 도망갈 자가 있는가. 밭은 지킬 것이 없다. 내 집을 지고 달아날 자가 있는가. 집은 지킬 것이 없다. 나의 정원의 꽃나무ㆍ과실나무 등 여러 나무들을 뽑아갈 자가 있는가. 그 뿌리는 땅에 깊이 박혔다. 나의 책을 훔쳐 없애버릴 자가 있는가.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이 세상에 퍼져 물과 불처럼 흔한데 누가 능히 없앨 수 있겠는가. 나의 옷과 식량을 도둑질하여 나를 군색하게 하겠는가. 천하의 실이 모두 내가 입을 옷이며, 천하의 곡식은 모두 내가 먹을 양식이다. 도둑이 비록 훔쳐간다 하더라도 한두 개에 불과할 것이니 천하의 모든 옷과 곡식을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런즉 천하의 만물은 모두 지킬 것이 없다. 유독 이른바 나[吾]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여 드나듦에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으나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유도하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화가 겁을 주어도 떠나가며, 심금을 울리는 고운 음악 소리만 들어도 떠나가고, 새까만 눈썹에 흰 이빨을 한 미인의 요염한 모습만 보아도 떠나간다. 그런데, 한 번 가면 돌아올 줄을 몰라 붙잡아 만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나[吾] 같은 것이 없다. 어찌 실과 끈으로 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잘못 간직했다가 나를 잃은 자이다. 어렸을 때, 과거(科擧)가 좋게 보여서 과거에 빠져 들어간 것이 10년이었다. 마침내 처지가 바뀌어 조정에 나아가 검은 사모[烏帽]에 비단 도포를 입고 미친 듯이 대낮에 큰길을 뛰어다녔는데, 이와 같이 12년을 하였다. 또 처지가 바뀌어 한강을 건너고 조령을 넘어, 친척과 분묘(墳墓)를 버리고 곧바로 아득한 바닷가의 대나무 숲에 달려와서야 멈추게 되었다. 이때에는 나[吾]도 땀이 흐르고 두려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나의 발뒤꿈치를 따라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나는 나[吾]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가? 여우나 도깨비에게 홀려서 끌려온 것인가? 아니면 해신(海神)이 부른 것인가? 자네의 가정과 고향이 모두 초천(苕川)에 있는데, 어찌 그 본고장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했다. 끝끝내 나[吾]라는 것은 멍한 채로 움직이지 않으며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 얼굴빛을 보니 마치 얽매인 곳이 있어서 돌아가고자 하나 돌아가지 못하는 듯하였다. 마침내 붙잡아서 함께 이곳에 머물렀다. 이때 나의 둘째 형님 좌랑공(佐郞公)께서도 그의 나[吾]를 잃고 나를 쫓아 남해(南海) 지방으로 왔는데, 역시 나[吾]를 붙잡아서 함께 그곳에 머물렀다. 유독 나의 큰 형님만이 그의 나[吾]를 잃지 않고 편안히 단정하게 수오재(守吾齋)에 앉아 계시니, 어찌 본디부터 지키는 것이 있어 나[吾]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큰형님께서 그의 거실에 이름붙인 까닭일 것이다. 큰 형님께서는 항상 말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에게 태현(太玄)이라고 자(字)를 지어 주셔서, 나는 오로지 나의 태현을 지키려고 하여, 이것으로써 나의 거실에 이름을 붙였다.”

고 하시지만, 이것은 핑계대는 말씀이다. 맹자가,

“지킴은 무엇이 큰가? 몸을 지키는 것이 크다.”

고 하였으니, 그 말씀이 진실하다.

드디어 내 스스로 말한 것을 써서 큰 형님께 보이고 수오재(守吾齋)의 기(記)로 삼는다.

Quote-right.png
출처: 정약용, 『다산시문집』(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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