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의 「조용(嘲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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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병술년 병술년 여름철 성자(成子)는 나가지 않고 흑첨(黑甜)을 벗삼아 있자니 꿈 아닌 꿈이라. 정신이 산란만 하고 병 아닌 병이라 되려 진기(眞氣)만 빠진다. 가슴속이 뭉치어 무엇이 든 것만 같아서 이에 무당을 불러들여 귀신에게 빌기를, “오직 너는 신이 있어, 나의 폐부(肺腑)에 잠재하여 나의 동정을 엿보니 나에게 큰 병이 된다. 그 이유를 말할테니 너는 자세히 물어보라. 나는 옛과 지금을 관찰하고 경적(經籍)을 읽어보니, 게으른 자는 이로움이 없고 수고로운 자는 먹을 것이 있으며, 편안한 자는 수확이 없고 부지런한 자는 적취(積聚)가 있다. 우(禹) 임금 같은 명철로도 촌음(寸陰)을 아끼었고, 주문왕 같은 성인으로도 해가 기울도록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 나는 무슨 사람으로 일찍이 그런 생각을 못했는가. 자기 직책을 게을리 하고 그저 노는 것만 일삼았네. 저 농사꾼을 보아도 1년 내내 바쁘기만 하고 저 온갖 공인(工人)을 보아도 각기 제 힘을 다하는데, 지금 나는 무슨 사람으로 일찍이 그와 같이 안했는가. 게으름을 못 견디어 그저 잠자기만 생각했네. 내가 벼슬길을 살펴보니 행여 뒤질까 분주하여 권문세가에 쫓아다니더니, 마침내 큰 자리를 얻었구나. 나는 그와 같이 아니하여, 발이 있어도 나아가지 못하고 괴롭게 작은 벼슬에 얽매여 세 조정을 지나도 못 옮겼네. 내가 몹시 세상 사람을 보니, 나날이 재물 구멍만 찾아서 털끝만한 이익을 다투며 뒷 자손에게 물려주려 하네. 나는 그와 같지 아니하여 주먹을 쥐고 다툴 줄 모르며, 괴롭게도 번화로운 것을 싫어하고 단표(簞瓢) 생활 즐긴다네. 내 젊은이들을 보니, 맑은 노래 묘한 춤에 겨울ㆍ여름 가리지 않고 실컷 취해 날을 보내는데, 나는 비록 초청을 받았지만 가 본 적이 없었으니, 목석(木石) 같은 심장이라서 도리어 남의 비웃음을 입었네. 책을 두고 읽지 않으니 그 뜻이 항상 들뜨고, 거문고를 두고 타지 않으니 취미가 아주 적막하며, 손[客]이 와도 접대를 못하니 손이 가면서 짜증을 내고, 말이 있어도 기르지 못하니 엉덩이 뼈가 솟아 나오며, 병이 있어도 치료하지 않으니 영양이 날로 허해지고, 아들이 있어도 가르치지 못하니 한갓 세월만 허송하네. 활이 있어도 다루지 않고 술이 있어도 거르지 않으며, 손이 있어도 세수하지 않고 머리가 있어도 빗질하지 않으며, 뜰이 너절해도 쓸지를 않고 풀이 있어도 뽑아 버리지 않으며, 게을러서 나무도 아니 심고 게을러서 고기도 아니 낚고, 게을러서 바둑도 아니 두고 게을러서 집도 수리 안 하고, 솥발이 부러져도 게을러서 고치질 않으며 의복이 해어져도 게을러서 꿰매지 않으며 종들이 죄를 지어도 게을러서 묻지를 않고 바깥사람이 시비를 걸어와도 게을러서 분히 여기질 않으며, 내 행동은 날로 성기어 가고 내 마음은 날로 졸해지며, 내 얼굴은 날로 여위고 내 말은 날로 줄어간다. 무릇 나의 허물이란, 모두 네가 들어서 만들어 내니 어찌 다른 사람이 없기에 날만 따라서 방황하는 거냐. 너는 어서 나를 버리고, 저기 저 낙토(樂土)로 가라. 나는 너의 누(累)가 없을 것이요, 너도 네 곳을 얻으리라.”하였더니,
귀신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화를 어찌 입히리요. 운명은 저 하늘에 있으니 허물로 여기지 말라. 굳센 쇠는 부서지고 강한 나무는 부러지며, 깨끗한 것은 더럼 타기 쉽고 우뚝한 것은 꺾이기 쉽다. 굳고 굳은 돌은 고요함으로써 이지러지질 않고, 높고 높은 산은 고요함으로써 꺼지질 않으니, 움직이는 것은 오래 못가고 고요한 것은 수(壽)한다. 지금 그대 형체는 저 풀과 산같이 오래 갈 걸세. 세상 사람의 근로(勤勞)는 화패(禍敗)의 장본이요, 그대의 태일(怠逸)은 복을 받는 근원이야. 세상 사람은 추세를 잘하여 시비가 분분하되, 지금 그대는 물러앉아 아득히 소문이 없고 세상 사람은 물(物)에 팔려 이욕에 날뛰는데, 지금 그대는 걱정 없이 제 정신을 잘 기르니, 그대의 심신(心身)에 어느 것이 흉하고 어느 것이 길한가. 그대의 유지(有知)를 버리고 무지(無知)를 이루며, 그대의 유위(有爲)를 버리고 무위(無爲)의 지경에 도달하며, 그대의 유정(有情)을 버리고 무정으로 지키며, 그대의 유생(有生)을 버리고 무생(無生)을 즐기면, 곡신(谷神)은 죽지 아니하여 하늘과 더불어 짝이 되고, 아득하고 아득하여 원시(元始)에 합할 걸세. 나는 장차 그대를 안보할 텐데, 그대가 도리어 나를 나무라니 사람이 자신을 요량 못한다면 의심스럽지 않은가.” 하므로 성자(成子)는 이에 묵연하여 말을 못하며 그런 잘못을 고칠테니, 그대와 더불어 함께 처하여서 함께 따르자고 하니, 게으름은 드디어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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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현(成俔), 속동문선 제18권 / 잡서(雜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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