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xMinistriesOf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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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1 육조거리와 출퇴근 풍경
- 2 호조 서리 이윤선(李潤善)의 업무와 일상
- 3 예조 낭관 권상일(權相一)의 장생전 수리 일지
- 3.1 예조정랑 임명과 청탁의 정황
- 3.2 예조정랑 임명과 전후의 어려운 경제사정
- 3.3 예조정랑의 장생전 수리 업무
- 3.3.1 예조의 업무 기록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2 예조의 업무 기록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3 예조의 업무 기록3: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4 예조의 업무 기록4: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5 예조의 업무 기록5: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6 예조의 업무 기록6: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7 예조의 업무 기록7: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8 예조의 업무 기록8: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9 예조의 업무 기록9: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10 예조의 업무 기록10: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11 예조의 업무 기록1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12 예조의 업무 기록1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13 예조의 업무 기록13: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14 예조의 업무 기록14: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15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16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17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18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19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20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21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22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23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24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4 병조에서 이조의 낭관으로, 윤기(尹愭)의 이상과 현실
- 5 육조 당상, 그 빛과 그늘
- 6 주석
육조거리와 출퇴근 풍경
광화문전로: 16세기, 이기(李墍)의 글
왕궁의 법전(法殿)은 남향(南向)을 하는데, 그것은 정사를 듣고 조회를 받는 바른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政府)와 추부(樞府)ㆍ6조(曹) 여러 관청이 모두 광화문 밖에 벌여 있어 동쪽에 있는 것은 서쪽을 향하고 서쪽에 있는 것은 동쪽을 향해 있다. 한갓 관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대부의 사가(私家)나 대청마루도 모두 동향이나 서향으로 되어 있어, 감히 남향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비록 집에 있을 때라도 분수에 넘치게 남쪽을 향해 앉을 수 없어서였다. 도성(都城) 안에, 고가 세족(故家世族)의 집들이 바둑돌같이 벌여 있고 별처럼 흩어져 있으나, 모두 북향하여 있었는데, 중종 이후로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인심이 나날이 사치스러워져, 분수를 어기고 예도를 넘는 일이 끝이 없어 집의 좌향(坐向)이 남인가 북인가는 물을 것도 없었으니, 세도(世道)가 점점 못하여지고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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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窩雜說』 |
묘시 출근과 유시 퇴근: 18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각 관사에 묘시(卯時)[1]에 출사(出仕)하고 유시(酉時)[2]에 퇴근하는 법을 거듭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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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31권, 영조 8년(1732) 5월2일(무오) 기사 |
창덕궁 앞 출근 풍경: 17세기, 유몽인(柳夢寅)의 시
「남소(南所)[3]에서 감회를 쓰다(南所寫懷)」 궁궐에 새벽빛 밝아오니 고관들 조정으로 달려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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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於于集後集』卷二 「南所寫懷」 |
광화문전로의 밤풍경: 16세기, 이기(李墍)의 글
조종조는 육조(六曹)에 숙직하는 낭관들은 달밤에 창기(娼妓)들과 어울려서 광화문 밖에 모여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노래도 불러 밤새도록 마시고 담소하였으니, 이것은 태평 시대의 일이다. 한갓 육조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미원(薇垣 사간원의 별칭)의 관원도 또한 곡회(曲會 이리저리 꾸며대서 모임)를 일삼았고, 입직하는 밤에는 반드시 기생을 끼고 잤다. 새벽녘이면, 일을 맡아보는 아전이 창밖에 서서 뵙기를 청하는데, 이것은 계집을 일찍 내어 보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세상 인심이 점차 박하여지고, 금법(禁法)이 점점 세밀하여져서, 육조에 숙직하는 풍습이 아주 바뀌고 미원에서 밤놀이하던 것도 또한 없어졌다. 그런데 숙직하는 날 밤에 일을 맡아보는 아전이 뵙기를 청하는 고사는 아직도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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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窩雜說』 |
예조정랑의 기생 감찰: 15세기, 성현(成俔)의 글
같이 급제한 신생(申生)은 수염이 많으나 누렇고 크기가 작고 등이 굽었다. 그러나 성품이 부지런하고 분명하여 조금도 남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예조 정랑이 되어 기생들을 검찰(檢察)할 때 너무 각박하여 기생들이 모두 노래를 지어 조롱하였다. 또 순채와 송이버섯을 싫어하며 “이것이 무슨 맛이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느냐.” 하였다. 친구가 모두 웃으며 말하기를, “신군은 특이한 사람이다.” 하였다. 또 꾀꼬리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좋도다. 갹조(噱鳥)의 소리여.”하므로, 친구들이, “이는 꾀꼬리인데 어찌 갹조라 하느냐.” 하니, 신생이 말하기를, “그 울음이 갹갹하니 이는 갹조요, 꾀꼬리가 아니다.”하자, 친구들이 모두 그 고지식함을 웃었다. 이때에 어떤 이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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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慵齋叢話』卷八 |
호조 서리 이윤선(李潤善)의 업무와 일상
호조 아전 이창린 등의 옥안 판하: 18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호조의 아전 이창린(李昌麟)과 김처신(金處信)이 대궐에 바칠 것이라고 칭탁하고 수리계(修理契)의 종이를 훔쳐내려고 거짓 보고를 하여 계단(啓單)을 받았다가 일이 들통났다. 옥에다 가두고 끝까지 심문하니, 김처신은 꾀를 내어 시킨 자이고 이창린은 직접 죄를 범하여 거짓으로 전한 자였다. 형조가 이창린을 정범(正犯)으로 삼아 옥안을 갖추어 계문하니, 판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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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51권, 정조 23년(1799) 5월22일(기묘) 기사 |
예조 낭관 권상일(權相一)의 장생전 수리 일지
예조정랑 임명과 청탁의 정황
예조정랑 제수: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사은숙배: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잡과 청탁의 정황: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한사범(韓士範) 형제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관(譯官)과 의학(醫學) 대여섯 사람이 친구들의 청탁 편지를 들고 찾아왔다. 그들의 취재강(取才講)[11]을 예조에서 맡아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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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1월 22일자 일기 |
잡과 청탁의 풍조1: 18세기, 민진후의 시장(諡狀)
「좌참찬 민공 시장(左參贊閔公諡狀)」 인재를 추천하고 군교(軍校)를 선발할 때에는 조금의 사심도 용납하지 않아 용감하고 재주 있는 자들이 공의 이름만 듣고도 반드시 이르니, 막하에 인재를 둠이 여러 군영 중에 으뜸이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인재를 일으키는 것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권장하여 성취시켜 주는 데에 달렸는데, 근래에는 백이면 백 사사로운 뜻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없다. 심지어 사자관(寫字官)ㆍ화원(畫員)의 취재(取才)와 의관(醫官)ㆍ역관(譯官)ㆍ율관(律官)에 응시하는 자까지도 대부분 청탁을 받아 뽑으니, 술업(術業 천문ㆍ지리 등의 기술업)이 형편없어진 것이 이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조와 형조, 승문원ㆍ내의원ㆍ사역원 등의 직임에 있을 때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를 힘껏 다하니 그 소속 관원들이 흥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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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屛山集』卷十二 「左參贊閔公諡狀」 |
잡과 청탁의 풍조2: 17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사헌부가 아뢰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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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해군일기』27권, 광해 2년(1610) 윤3월28일(계유) 기사 |
잡과 청탁의 풍조3: 19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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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1권, 고종 1년(1864) 8월20일(무자) 기사 |
예조 낭관의 게으름: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본조(本曹)의 당상은 좌랑 심전(沈㙉)이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허드렛일을 싫어하고 기피하기 때문에 그를 걸러내는 초기(草記)를 작성하였으나 모두 말려서 올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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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6월 3일자 일기 |
형조 낭관의 게으름 사례: 16세기, 이기(李墍)의 글
예조정랑 임명과 전후의 어려운 경제사정
예조정랑 제수 이전 성균관직강 역임: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서울 숙소는 창동(倉洞):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만나던 영남의 문반들: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이전 강진현감 말의(末擬):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가난했던 형편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가난했던 형편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의 장생전 수리 업무
예조의 업무 기록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3: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4: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5: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6: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7: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8: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9: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10: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1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1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13: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14: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병조에서 이조의 낭관으로, 윤기(尹愭)의 이상과 현실
병조좌랑의 업무와 억울한 파직
병조좌랑의 업무1: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감군에 낙점 받고 감군패를 받아 순청(巡廳)에 이르자, 순청의 벽에 유재(游齋) 이현석(李玄錫)의 시가 적혀 있기에 한가로이 그 운을 따라 짓다(監軍蒙點 受牌至廵廳 廳壁有游齋李玄錫詩 謾步其韻)」 저녁놀이 먼 나무 덮는 걸 앉아서 보노라니, 만사를 경영함이 모두 부질없게 여겨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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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監軍蒙點 受牌至廵廳 廳壁有游齋李玄錫詩 謾步其韻」 |
병조정랑의 임명: 19세기, 정원용의 일기
병조 일군색 정랑에 첫째 후보로 올랐다. 둘째 후보는 김기은, 셋째 후보는 조종진이었다. 병조판서 서영보가 자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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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經山日錄』冊二 1813년 5월 7일자 일기 |
감군의 업무1: 19세기, 정원용의 일기
감군의 업무2: 19세기, 정원용의 일기
감군의 업무3: 19세기, 정원용의 일기
병조좌랑의 업무2: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병조에서 숙직을 하던 중 우연히 장편시를 짓다(兵曹直中 偶成長篇)」 병조는 육조에서도, 직무를 수행하기 가장 어렵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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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兵曹直中 偶成長篇」 |
병조 낭관과 서리의 배종: 18세기, 이긍익(李肯翊)의 글
낭관(郞官)은 각각 서리(書吏)를 대동하여 배종[陪]을 삼았는데, 유독 병조 낭관을 배종하는 자는 이(利)가 가장 많았으므로 이 자리를 원하는 자는 입술을 태우고, 얼굴에 땀을 흘리며, 발꿈치를 접혀 가면서 앞을 다투었다. 전조(銓曹 이조(吏曹)ㆍ병조(兵曹))에서 병조 낭관을 주의(注擬)할 즈음에는 나이도 젊고 얼굴도 예뻐서 배리(陪吏) 되기에 합당한 자가 바지를 걷고 늘어서서 낙점(落點)을 기다리고 있다가 가장 잘 달리는 자가 얻었는데, 만약 일시에 같이 달려오는 경우에는 먼저 관(冠)을 벗어 그 문 안으로 던지는 자가 낙점을 얻었으니, 이는 이서의 한 고사(故事)이다. 옛날 전조에서의 의망에 심우정(沈友正)이 수망(首望)에 참여하고, 민몽룡(閔夢龍)이 부망에 참여하였는데, 심의 집은 남문 밖에 있었고, 민의 집은 태학(太學 성균관)곁에 있었다. 심에게 낙점을 받은 교활한 서리가 큰 소리로 속여 말하기를, “민몽룡이 낙점을 받았다.” 하여, 여러 서리가 모두 태학을 향하여 달렸지만 한 서리는 곧장 남문으로 달려 갔었다. 남대문 다락 위에 한 서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붉은 옷을 입은 자가 송현동(松峴洞)으로부터 엎어지면서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고 드디어 먼저 달려갔다.문에 들어간 지 한참 만에 여러 서리들이 관을 벗고 문에서 앞을 다툰 일이 있었다. 사대부가 벼슬을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았으니, 옛날 이조 판서의 집에 금관자를 붙인 손이 마루에 가득히 찼으나 모두 어물어물하고 감히 먼저 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음관이 맨 나중에 와서 여러 손님들보다 먼저 말하고, 말이 끝난 뒤에 바로 가니, 판서가 크게 기뻐하며 먼저 그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다. 아아, 이도 남문 다락의 서리의 일과 같은 것이 아닌가. 『어우야담』에 언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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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燃藜室記述』別集十 「官職典故」 |
병조좌랑 파직: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궁궐의 야간 순찰이 끝나고 돌아오니 병조의 아전이 말하기를 “승정원의 원례(院隷)가 문틈으로 이조 판서의 소장을 받았는데, 이는 승정원의 승지가 연이어 원례를 재촉했기 때문입니다. 병조의 입직 당상관이 이 꼴을 보고서 초기를 올리자, 승지가 자구 가운데 흠이 있다고 트집 잡아 재차 돌려보내어 고쳐 바치게 하고는, 자신이 먼저 아뢰어 ‘병조의 당상관과 낭관을 벌하소서.’라고 청하여, 상이 파직하라고 명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일이 비록 천만 뜻밖에 어이없이 벌어진 것이기는 하나 매우 황공하여 절구시 한 수를 짓는다. 이조 판서는 심환지(沈煥之)이고, 승지는 정상우(鄭尙愚)이고, 병조의 당상관은 참판 이경일(李敬一)이다(禁中夜巡歸 則吏言政院隷從門隙受吏判疏 盖承宣連促之也 兵曹入直堂上見之呈草記 則承宣以字句之有欠 再次還送 使之改納 而先自啓請 罪兵曹堂郞 上命罷之 余則雖出於夢寐之外 其惶蹙甚矣 因成一絶 吏判沈煥之 承宣鄭尙愚 兵曹堂上參判李敬一也)」 궁궐을 순찰하느라 의관을 정제하였으니, 감문에서 병졸 점검하는 것을 감히 노고라 하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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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禁中夜巡歸 則吏言政院隷從門隙受吏判疏 盖承宣連促之也 兵曹入直堂上見之呈草記 則承宣以字句之有欠 再次還送 使之改納 而先自啓請 罪兵曹堂郞 上命罷之 余則雖出於夢寐之外 其惶蹙甚矣 因成一絶 吏判沈煥之 承宣鄭尙愚 兵曹堂上參判李敬一也」 |
이조좌랑 임명과 관직생활
이조좌랑 임명과 감회: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이조 좌랑에 배수되어 느낌이 있어 짓다(拜吏郞 感而有作)」 병조에서 파직되자 이조에 임명되었으니, 벼슬살이 형편 너무 박하다는 말은 말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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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拜吏郞 感而有作」 |
이조 낭관의 위상1: 17세기, 차천로(車天輅)의 시
「임시로 이조의 낭관이 되어 한 달 넘게 분주하다가 희롱 삼아 짓다(以假吏郞 閱月奔忙 戲題)」 금장 낭관[31] 임시적인 직책이긴 하지만, 이십 년간 출입하니 그 또한 영광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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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五山集』卷二 「以假吏郞 閱月奔忙 戲題」 |
이조 낭관의 위상2: 18세기, 이의현(李宜顯)의 시
「우연히 읊다 을유(1705)(偶吟 乙酉)」 처음 벼슬해 조정에 오른 지 십 년이 지나니, 외로운 모습으로 우두커니 앉아 흰 머리만 자랐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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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陶谷集』卷一 「偶吟 乙酉」 |
이조좌랑 윤기의 관직생활1: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다시 한가함을 시로 읊다(又以詩詠其閑)」 청렴한 관직으론 이조가 최고인데다, 더구나 머릿수만 채우는 잠랑(潛郞)[37]임에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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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又以詩詠其閑」 |
이조좌랑 윤기의 관직생활2: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7월 19일 희정당에서 친정(親政)을 하였다. 내가 이조 낭관으로 정사 자리에 참여하여 즉흥적으로 읊조리다(七月十九日 親政于煕政堂 余以吏郞參政席 口占)」 새벽부터 편전에 달려가 어광을 가까이 뫼셔, 대정(大政)에 친림한 우리 임금 우러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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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七月十九日 親政于煕政堂 余以吏郞參政席 口占」 |
이조좌랑 윤기의 관직생활3: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이조에서 숙직하며 시로 그 직무를 시로 기록하다(吏曹直中 以詩記其職)」 이조의 옛 관아 가는 건 헛일 되었으니, 금호문 앞이 숙직하는 건물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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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吏曹直中 以詩記其職」 |
이조좌랑 윤기의 관직생활4: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또 스스로 조소하다(又自嘲)」 아침에 이조 참의에게 명받아 통금 인경이 치도록 공무를 보니, 검은 관문에 붉은 인장이 종횡으로 그득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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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又自嘲」 |
이조좌랑 윤기의 관직생활5: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이조좌랑으로 명을 받들어 사직 대제를 받드는 제집사가 재숙하는 곳을 적간하러 가는 길에 어린아이의 말을 기록하다(以天郞奉命摘奸於社稷大祭諸執事齋宿處路中記小兒言)」 역말 타고 나가려고 안장을 빌릴 때에, 거리의 아이들 손뼉 치며 이조 낭관 비웃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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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又自嘲」 |
육조 당상, 그 빛과 그늘
낭관과 당상의 사이, 참의(參議)
병조 낭관과 당상을 반복하다: 16세기, 이수광(李睟光)의 시
「기성만영병서(騎省漫詠 幷序)」 내가 경인년(1590) 이후로 누차 병조에서 벼슬을 했는데, 좌랑(佐郞)을 지낸 것이 한 번, 정랑(正郞)이 두 번, 참지(參知)가 네 번, 참의(參議)가 열두 번이다. 어떤 이가 내게 말하기를 “그대는 오로지 문학(文學)에만 전념하였으나 세상에 쓸모가 없고, 군려(軍旅)의 업무는 그대가 능한 것도 아닌데 병조의 관리에 이처럼 오래도록 있으니, 어째서인가? 병법을 논하는 자리에 걸맞은 노련한 계모와 기묘한 책략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한바탕 크게 웃고, 인하여 이 시를 지어 조롱에 해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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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芝峯先生集』卷十五 「騎省漫詠 幷序」 |
형조참의로서의 첫 출근: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병조참의의 입직: 17세기, 유몽인(柳夢寅)의 시
「규오 유인길의 「대궐에서 비를 읊다」에 차운하다(次葵塢禁中詠雨)」 차가운 소리가 밤중에 대나무 끝에 떨어지는데, 섬돌 위에서 분주히 달리며 개미처럼 고생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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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月沙先生集』卷十七 「禮部重建郞官廳 閱樂後仍作小酌 酒席與郞僚口占」 |
예조의 풍경: 17~18세기, 홍세태(洪世泰)의 시
「김참봉, 홍진사와 함께 예조 뒷산에 오르다(同金參奉 洪進士。登南宮後岡)」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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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柳下集』卷三 「同金參奉 洪進士。登南宮後岡」 |
예조의 풍경: 18세기, 이시항(李時恒)의 시
「예조 낭관으로 옮겨 임명되어 본사(本司)에서 숙직하다(移拜春曹郞 直宿本司)」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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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和隱集』卷三 「移拜春曹郞 直宿本司」 |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예조에 근무하며 우연히 읊다(直禮曹偶吟)」 광화문 앞이 바로 예조이니, 낭관의 재미는 극히 쓸쓸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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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直禮曹偶吟」 |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예조에 입직한 날, 인왕산을 마주해 한가로이 4수를 짓다(直春曹日 對仁王山 漫成四絶)」 인왕산 솟은 바위 서울을 진무하니, 구름 속 기봉이 그림처럼 산뜻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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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直春曹日 對仁王山 漫成四絶」 |
병조의 누정과 연지
병조의 누정: 16세기, 윤두수(尹斗壽)의 시
「병조의 작은 누대에서 우연히 시를 짓다(兵曹小樓偶題)」 별을 보고 갔다가 별을 보고 돌아오니, 봄이 다 저물도록 술 한 잔 할 겨를 없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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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梧陰先生遺稿』卷一 「兵曹小樓偶題」 |
병조의 연지: 17세기, 이수광(李睟光)의 시
「병조 청사 뒤쪽 작은 못이 깊고 검푸른데, 거기에 연꽃 몇 송이가 있어(騎曹廳後小池深黑中有種荷數朶)」 누가 섬돌 앞 한 자락 사초를 파헤쳤나, 못 속에 담긴 물이 웅덩이도 못 채우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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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芝峯先生集』卷四 「騎曹廳後小池深黑中有種荷數朶」 |
병조의 연지: 17세기, 김육(金堉)의 시
「달밤에 병조에 입직하다(月夜直騎省)」 백합꽃 피어 있고 파초잎 기다란데, 비 온 뒤라 못가 누각 여름에도 서늘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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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潛谷先生遺稿』卷二 「月夜直騎省」 |
병조의 연지: 18세기, 정간(鄭榦)의 시
「병조 당상대청 뒤에 네모진 못이 있고, 못에는 연꽃이 못가에는 창포가 둑에는 수양버들이 있어, 마침내 ‘淸’자 운으로 읊어 화답을 구하다(騎省正衙後有方塘 塘有芙蕖 渚有菖蒲 堤有垂柳 遂用淸字 詠以求和)」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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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鳴臯先生文集』卷一 「騎省正衙後有方塘 塘有芙蕖 渚有菖蒲 堤有垂柳 遂用淸字 詠以求和」 |
병조의 연지: 19세기, 임천상(任天常)의 시
「비오는 가운데 병조에 입직해 있으면서 장난삼아 ‘무와행’을 짓다(雨中直兵曹 戱爲無蛙行)」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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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窮悟集』卷四 「雨中直兵曹 戱爲無蛙行」 |
형조와 호조의 누정과 연지
형조의 연지: 16세기, 신광한(申光漢)의 시
「형조의 연못에서 즉흥으로 읊어 송 정랑에게 보여주다(秋部官池卽事 示宋正郞)」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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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企齋集』卷六 「秋部官池卽事 示宋正郞」 |
형조의 연지: 17세기, 홍석기(洪錫箕)의 시
「형조의 연못 누각을 이 참판의 부채에 제하다(秋曹池閣 題李侍郞扇)」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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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晩洲遺集』卷二 「秋曹池閣 題李侍郞扇」 |
형조의 연지: 17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형조에 있는 연못 물이 핏빛과 같이 붉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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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1647) 3월24일(을축) 기사 |
호조의 연지: 16세기, 유홍(兪泓)의 시
「호조의 연지를 읊다(詠戶曹蓮池)」 바람이 불자 연꽃 향기 흩어지고, 뜰에 볕이 들어 섬돌 이끼를 데우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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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塘集』卷一 「詠戶曹蓮池」 |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심정진(沈定鎭)의 시
「9월 21일 숙직 중 연못 누정을 마주하고 우연히 읊다(九月念一日 直中對池亭偶吟)」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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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霽軒集』卷一 「九月念一日 直中對池亭偶吟」 |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유숙기(兪肅基)의 글
「불염정기(不染亭記)」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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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兼山集』卷七 「不染亭記」 |
주석
- ↑ 묘시(卯時) : 오전 5시에서 7시까지.
- ↑ 유시(酉時) : 오후 5시에서 7시까지.
- ↑ 남소(南所): 오위(五衛)의 위장(衛將)이 숙위(宿衛)하던 위장소(衛將所)의 하나로, 창덕궁의 금호문(金虎門)과 경희궁의 개양문(開陽門) 안에 있었는데, 궁궐의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남소라 불렸다.
- ↑ 궁궐 호위하는 관소: 원문의 '구진사(句陳司)'. 궁궐을 호위하는 금군(禁軍)을 말한다. '구진(句陳)'은 별자리 이름으로 자미궁(紫微宮)을 호위하는 별이다.
- ↑ 범의 두상: 후한(後漢)의 반초(班超)가 어린 시절 관상가가 “그대는 제비의 턱에 범의 머리로 날아서 고기를 먹는 상이니, 이는 만리후에 봉해질 상이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 ↑ 분서(粉署): 하얗게 벽을 칠한 관청이라는 뜻으로 중국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인데, 우리나라는 의정부 및 중앙 관서를 뜻한다.
- ↑ 동룡문(銅龍門): 창경궁 세자전 옆에 있던 문이다.
- ↑ 금마문(金馬門): 창덕궁 후원에 있던 문이다.
- ↑ 투필(投筆): 붓을 던진다는 말로, 종군(從軍)을 뜻한다. 후한(後漢)의 명장 반초(班超)가 젊었을 때 집이 가난하여 글씨를 써 주는 품팔이 생활을 하다가 붓을 던지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별다른 지략이 없다면 부개자(傅介子)나 장건(張騫)을 본받아 이역에 나아가 공을 세워 봉후가 되어야지, 어찌 오래도록 필연(筆硯) 사이에만 종사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더니, 훗날 서역(西域)에 나아가 공을 세워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 ↑ 정기(正奇): 병법(兵法)의 용어로서, 정면으로 접전을 벌이는 것을 ‘정(正)’이라 하고 매복(埋伏)이나 기습(奇襲) 등의 방법을 쓰는 것을 ‘기(奇)’라고 한다.
- ↑ 취재(取才): 조선시대 하급 관리를 채용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 예조(禮曹)의 취재(取才)는 의학(醫學)·한학(漢學)·몽학(蒙學)·왜학(倭學)·여진학(女眞學)·천문학·지리학·명과학(命課學)·율학(律學)·산학(算學)을 전공한 기술관(技術官) 및 화원(畵員)·도류·악생(樂生)·악공(樂工) 선발 등이 있었다. 예조의 취재는 각 기술학의 전공자인 제학생도(諸學生徒), 잡과 합격자인 권지(權知), 전직 기술관 등을 대상으로 하여 주로 각각의 전공 서적들을 시험하였다. 예조의 취재에 선발된 기술관은 해당 기술아문의 녹관체아직(祿官遞兒職)이나 군직체아직(軍職遞兒職)을 받았으며, 차점자는 외직에 임명되었다.
- ↑ 빈곤한 청포라서 홍포만 속절없이 부럽네: 늘그막에 미관말직에 있는 데다 말도 없이 걸어서 순찰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적은 나이에 고관이 된 사람들이 마냥 부럽다는 뜻이다. 청포는 육품의 하급관리가 입던 푸른색의 관복이다. 두보의 시 「도보귀행(徒步歸行)」에 “청포 입은 조관들 중에 가장 빈곤한 이는, 수레 없이 걸어가는 백발의 습유라네(靑袍朝士最困者 白頭拾遺徒步歸).” 한 데서 온 말이다. 홍포는 3품 이상의 고관이 입던 관복이다.
- ↑ 사강(射講): 활쏘기와 병서 강독(兵書講讀)의 통칭.
- ↑ 성기(省記): 병조에 입직하는 낭관(郞官)이 매일 궁궐을 경비하는 장수에게 교부하는 군호(軍號)와 각 문에 입직하는 장사(將士)의 이름을 나열해 적어서 승정원을 거쳐서 임금에게 올리는 기록이다.
- ↑ 군호(軍號): 군대의 순찰이나 도성의 순라(巡邏)를 돌 때, 미리 약속해두었다가 자기편의 식별이나 비밀의 보장을 위해 쓰는 암호나 신호를 말한다. 매일 저녁 신시(申時)에 입직한 참의(參議) 또는 참지(參知)가 3자 이내의 군호를 만들어 밀봉(密封)해 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은 다음, 병조를 거쳐 경수소(警守所)에 내려 보내 시행하게 하였다.
- ↑ 흑의(黑衣): 왕궁의 숙위 무사(宿衛武士)들이 검은 옷을 입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흔히 숙위를 흑의랑(黑衣郞)이라고 한다.
- ↑ 두 역에선 금륵(金勒)을 살핀다: 금륵(金勒)이란 유사시에 궁중에서 사용할 말과 수레를 가리킨다. 병조의 마색은 청파역(靑坡驛)과 노원역(蘆原驛) 두 곳의 역에 288명의 병졸을 두고 교룡기(蛟龍旗)를 봉지(奉持)하는 말과 승용마(乘用馬), 즉 짐을 싣는 말을 관리한다. 매일 두 역의 말〔馬〕 각 25필이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는 마군영(馬軍營)에서 번을 서며 궁중의 여러 가지 사역에 충당한다. 『萬機要覽』 「兵曹 馬色」
- ↑ 어패(御牌)는 가죽 표식을 차네: 『萬機要覽』에서는 어패에 대해 "본부에 내려주는 패가 둘인데, 하나는 당상관이 좌직(坐直)하는 곳에 영구히 보관하고, 하나는 매일 신시(申時)에 번을 드는 낭관이 당상관으로부터 받아서 밤 순찰 때 차고 다니다가 이튿날 아침에 반납한다."라고 하였다.
- ↑ 뜨락 희끄무레 동이 하마 텄네: 『예기』 「옥조(玉藻)」에, "조회는 변색에 비로소 들어간다〔朝辨色始入〕."라고 한 구절에 대해 이덕무는 "변색(辨色)은 먼동이 트는 매상(昧爽) 이후 일출(日出) 이전이니, 즉 이른 아침으로서 겨우 물건 빛깔을 분별할 수 있을 때이다."라고 하였다.
- ↑ 보의(寶扆): 임금의 자리 뒤에 설치하는 병풍을 말한다.
- ↑ 한 자락 붉은 구름: 황제의 궁궐을 가리킨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시종신이 고니처럼 줄지어 선 통명전, 한 떨기 붉은 구름이 옥황상제를 모셨어라〔侍臣鵠立通明殿 一朶紅雲捧玉皇〕."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卷36 「上元侍飲樓上三首呈同列」
- ↑ 포시(晡時): 오후 3~5시 사이로, 곧 신시(申時)의 다른 말이다.
- ↑ 차마 법 어기고 변명 일삼다 걸리느니: 궤우(詭遇)는 짐승을 사냥하기 위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말을 모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 조간자(趙簡子)가 말을 잘 몰기로 소문난 왕량(王良)으로 하여금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인 해(奚)와 함께 수레를 타고 사냥하게 하였는데, 종일토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그러자 해가 조간자에게 “왕량은 천하에 보잘것없는 말몰이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량이 다시 말을 몰겠다고 청하여 다시 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열 마리의 짐승을 잡았다. 그러자 해가 다시 조간자에게 복명하기를 “왕량은 천하에 더없이 훌륭한 말몰이꾼입니다.” 하였다. 이에 조간자가 왕량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해의 수레를 타고 말을 몰게 하니, 왕량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제가 그를 위하여 말 모는 것을 법도대로 하였더니 종일토록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부정한 방법으로 말을 몰아 짐승을 만나게 해주었더니〔詭遇〕 하루아침에 열 마리의 짐승을 잡았습니다. 저는 소인과 함께 수레 타는 법을 익히지 못하였으니, 사양하겠습니다.”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여기서는 이 고사를 인용하여, 불량한 무뢰배들이 법을 어기고 못 된 짓을 하다가 감군의 탐문을 만나 걸리고는, 다시 그것을 속이려고 이리저리 터무니없는 말로 둘러대는 것을 말하였다.
- ↑ 병조의 관리들이 국정을 관장해 나라를 평안히 하고: 『주례(周禮)』 「하관사마(夏官司馬)」에 "왕이 국가를 세워 방위를 분변ㆍ정립하고, 도성의 규모를 구획하고 교외를 경영하여, 관직을 설립ㆍ배치하여 백성들의 법이 된다. 이에 하관 사마를 세워 그 소속 관리들을 거느리고 국정을 관장하여, 왕을 도와 국가를 평안하게 한다〔惟王建國 辨方正位 體國經野 設官分職 以爲民極 乃立夏官司馬 使帥其屬而掌邦政 以佐王平邦國〕."라고 하였다.
- ↑ 태재(太宰)가 육전(六典)을 세워, 백성들의 법이 되었으며: 『주례(周禮)』 「천관총재(天官冢宰)」에 "왕이 국가를 세워 방위를 분변ㆍ정립하고, 도성의 규모를 구획하고 교외를 경영하여, 관직을 설립ㆍ배치하여 백성들의 법이 된다. 이에 천관 총재를 세워 그 소속 관리들을 거느리고 국가의 다스림을 관장하여, 왕을 도와 국가를 고르게 한다〔惟王建國 辨方正位 體國經野 設官分職 以爲民極 乃立天官冢宰 使帥其屬 而掌邦治 以佐王均邦國〕."라고 하였다.
- ↑ 기보(祈父)가 범법자를 축출하고: 기보는 옛날에 병갑(兵甲)을 관장하던 관명(官名)으로, 즉 후세의 병부(兵部)에 해당한다. 『서경』 「주고(酒誥)」에 "하물며 너의 짝인, 법을 어긴 자를 축출하는 기보와 백성들을 순히 하여 보존하는 농보와 땅을 열어 경계를 정해주는 농보에 있어서랴〔矧惟若疇 祈父薄違 農父若保 宏父定辟〕."라고 하였다.
- ↑ 진운(縉雲)도 사특한 자 제거했네: 염제(炎帝) 때에 병사와 기찰을 맡은 전설상의 인물 진운씨(縉雲氏)를 말한다. 이 때문에 뒤에 하관(夏官) 곧 병조의 별칭이 되었다. 또 황제(黃帝)가 처음 즉위(卽位)할 때 구름의 상서(祥瑞)가 있었으므로 관직명(官職名)에 모두 구름을 붙였으니, 이를테면 춘관(春官)은 청운(靑雲), 하관(夏官)은 진운(縉雲), 추관(秋官)은 백운(白雲), 동관(冬官)은 흑운(黑雲), 중관(中官)은 황운(黃雲)이라 하였다. 『春秋左傳』 「昭公17年 楊伯峻註」
- ↑ 장헌(張憲): 남송의 명장(明將)으로, 젊은 시절 백건적(白巾賊) 적의 수괴를 베었다. 또 악비(岳飛)를 도와 수주(隋州)를 회복하고 금의 침략에 대항한 인물이다. 『宋史』 「列傳 127 張憲列傳」
- ↑ 요숭(姚崇): 650~721. 섬주(陝州) 사람으로 자는 원지(元之)이다. 본명은 원숭(元崇)이었으나 현종(玄宗)의 연호를 피해 요숭으로 바꾸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오른 이래 중종(中宗), 예종(睿宗)과 현종 초기에 걸쳐 여러 번 재상의 직에 올라 국정을 숙정하고 민생의 안정에 힘썼으며, 716년에 은퇴하였다. 송경(宋璟)과 함께 개원(開元)의 명재상으로 숭앙되어 ‘요송(姚宋)’이라 병칭되며 당나라 명상(名相)의 대명사가 되었다.
- ↑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는 병조의 숙직과 수행 업무에 대해, "입직(入直) 당상관과 낭관 각 두 명이 번갈아서 드는데, 당상은 표신(標信)이 내려올 때에 수령하고, 낭관은 날마다 선인문(宣仁門)과 통화문(通化門)을 여닫을 때의 검사와 건양문(建陽門) 이동(以東)의 동쪽으로 있는 번 서는 군병 검사를 전담하여 거행하며, 야간 순찰을 할 때에도 역시 건양문에서 여러 곳의 위장ㆍ부장(部將)들이 시간을 맞추어 순찰하는 것과 각 문에 대하여 검찰하고, 이튿날 아침에 사고가 없다는 상황 보고를 승정원에 제출한다."라고 설명하였다.
- ↑ 금장 낭관(錦帳郞官): 한(漢)나라 제도에 상서랑(尙書郞)이 대중(臺中)에 들어가 숙직하면 비단 이불과 비단 휘장을 제공하였으므로 후세에 금장랑을 낭관의 지칭으로 사용하였다. 『後漢書』卷41 「鍾離意列傳」
- ↑ 통부를 차다가 금장을 대신 찼으니: 통부는 의금부(義禁府)ㆍ병조(兵曹)ㆍ형조(刑曹)ㆍ한성부(漢城府)의 입직관(入直官)이나 포도청의 종사관(從事官)과 군관이 차는 부찰(符札)이고, 금장은 금으로 만든 관인(官印)이다.
- ↑ 생기(省記): 생기는 매일 신시(申時)에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입직 당상관(堂上官)이 대궐 안팎의 각 관사에서 입직하는 인원(人員) 및 군호(軍號)나 각 문의 파수인(把守人)을 적어서 승정원을 거쳐 보고하는 봉서(封書)이다.
- ↑ 금화전(金華殿): 경연(經筵)이나 서연(書筵)을 뜻한다. 원래 한나라 때 미앙궁(未央宮) 안에 있던 궁전의 이름인데, 성제(成帝)가 이곳에서 『상서(尙書)』와 『논어』 등을 강론하였으므로 후세에 경연이나 서연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 영화로운 벼슬 이조 낭관을 어찌 편안히 여기랴: 이의현은 37세 되던 1705년(숙종31) 6월 25일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 ↑ 조정에서 물러나와 밥을 먹으니: 『시경』「소남(召南) 고양(羔羊)」에 “공문(公門)에서 물러나와 밥 먹으니 자득하고 자득하도다(退食自公 委蛇委蛇).” 하였는바, 조정에서 퇴근한 뒤에 집에서 한가로이 지내는 것을 말한다. 공문은 궁궐 문을 가리킨다.
- ↑ 잠랑(潛郞): 재능이 있으면서도 불우하게 오랫동안 낮은 관직에 묻혀있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안사(顔駟)가 문제(文帝) 때 낭관이 되었으나, 경제(景帝)를 거쳐 무제(武帝)에 이르도록 승진하지 못하고 낭서(郞署)에서 늙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文選』 「思玄賦」
- ↑ 풍운제회(風雲際會): 현명한 임금과 충직한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 風從虎).”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는 좋은 인재를 제대로 등용했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 ↑ 양군(兩軍): 어영청(御營廳)과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군졸이다. 주의(朱衣)는 붉은 옷을 입은 하급 아전으로, 길을 인도하거나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 ↑ 허리의 상전은 쌍검 용천의 검광이요: 남아의 드높은 기상이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말이다. ‘상전(霜電)’은 청상(靑霜)과 자전(紫電)이란 뜻으로 보검의 명칭인데, 엄정하고 강렬한 기상을 비유한다. ‘쌍검(雙劍)’은 춘추 시대 간장(干將)과 막야(莫邪)가 제작했다는 ‘용천(龍泉)’과 ‘태아(太阿)’ 두 보검으로, 웅대한 기상이나 충정을 비유한다. 진(晉)나라 때 충신 장화(張華)가 일찍이 두성(斗星)과 우성(牛星) 사이에 자기(紫氣)가 뻗치는 것을 보고, 뇌환(雷煥)을 보내 풍성현(豐城縣)의 옛 옥사(獄舍)에서 용천과 태아라는 한 쌍의 보검을 얻은 고사가 전한다. 『晉書』卷36 「張華列傳」
- ↑ 흉중의 풍운은 육도 표도의 병법이라오: 웅대한 도략이 가슴속에 끓어오른다는 말이다. ‘풍운(風雲)’은 웅대한 도략이나 원대한 심지를 비유한다. ‘육도(六韜)’는 원래 주(周)나라 때 강 태공(姜太公)이 저술했다고 전하는 병서(兵書) 이름으로,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표도(豹韜)」, 「견도(犬韜)」 6권으로 되어 있는데, 후세에는 군대를 운용하는 도략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 이제부터 내 운명을 스스로 확신하니 문성이 장성 높이에 미치지 못하리라: 문관 출신이지만 병조 참의를 맡은 이상, 군무에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다. ‘문성(文星)’은 문운(文運)을 주관한다는 ‘문창성(文昌星)’의 약칭으로 곧 문관을 가리키고, ‘장성(將星)’은 대장(大將)을 상징하는 별로 곧 무관을 가리킨다.
- ↑ 삼원(三元): 음력 정월 초하루로.
- ↑ 이 작은 관청은 해를 넘겨 이제야 중건되었네: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다시 중건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 ↑ 본디 서산에 상쾌한 기운 많아 늘 바라보매 돌아가고픈 정 없어라: 원문의 '歸情'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고 싶은 마음이다. 곧 인왕산을 늘 가까이 대하고 있으므로 서울 한복판에 있음에도 탈속의 정취가 많기 때문에 굳이 전야로 돌아갈 마음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서산의 상쾌한 기운'은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의 고사이다. 왕휘지는 성품이 본디 잗단 세속 일에 전혀 얽매임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환충(桓沖)의 기병 참군(騎兵參軍)으로 있을 적에 한번은 환충이 그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부(府)에 있은 지 오래되었으니, 요즘에는 의당 사무를 잘 알아서 처리하겠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쳐들고 수판으로 뺨을 괴고는 엉뚱하게도 "서산이 이른 아침에 상쾌한 기운을 불러온다(西山朝來 致有爽氣耳)."라고 했다. 이 고사에서 만들어진 말로, 전하여 세속 일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히 유유자적하는 풍도를 가리킨다. 『晉書』卷80 「王徽之列傳」
- ↑ 연명이 어찌 천고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랴 나 또한 희황 이전의 사람: 도연명이 자엄등에게 주는 글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내 나이 쉰이 넘었는데, 젊어서는 곤궁하였다. 늘 집안 일로 동분서주하였으며, 성미는 강직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세상 사람들과 어긋남이 많았다.……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 누워 시원한 바람이 선들 부는 때를 만나면 스스로 복희 시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吾年過五十 少而窮苦 每以家弊 東西遊走 性剛才拙 與物多忤……五六月中 北窓下臥 遇涼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라고 한 말에 근거를 둔 표현이다. 『陶淵明集』卷7 「與子儼等疏」
- ↑ 멀리 흘러가: 이에 해당하는 원문 ‘조종(朝宗)’은 원래 제후가 천자에게 가서 뵙는 것으로 봄에 뵙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뵙는 것을 종(宗)이라 하는데, 강물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 역시 제후가 천자국에 가는 것과 같다 하여 조종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