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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0월 2일 (금) 11:41 판 (육조거리와 출퇴근 풍경)

목차

육조거리와 출퇴근 풍경


서울과 광화문전로: 16세기, 이기(李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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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의 법전(法殿)은 남향(南向)을 하는데, 그것은 정사를 듣고 조회를 받는 바른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政府)와 추부(樞府)ㆍ6조(曹) 여러 관청이 모두 광화문 밖에 벌여 있어 동쪽에 있는 것은 서쪽을 향하고 서쪽에 있는 것은 동쪽을 향해 있다. 한갓 관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대부의 사가(私家)나 대청마루도 모두 동향이나 서향으로 되어 있어, 감히 남향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비록 집에 있을 때라도 분수에 넘치게 남쪽을 향해 앉을 수 없어서였다. 도성(都城) 안에, 고가 세족(故家世族)의 집들이 바둑돌같이 벌여 있고 별처럼 흩어져 있으나, 모두 북향하여 있었는데, 중종 이후로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인심이 나날이 사치스러워져, 분수를 어기고 예도를 넘는 일이 끝이 없어 집의 좌향(坐向)이 남인가 북인가는 물을 것도 없었으니, 세도(世道)가 점점 못하여지고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f>에 퇴근하는 법을 거듭 밝혔다.

王宮法殿南向。聽治朝饗之正位。故政府樞府六曹諸省。皆列光化門之外。在東者西其向。在西者東其向。非徒公府然也。士大夫私居之室。其廳事則皆或東或西。而不敢南向者。雖處家之時。不得僭分而面南也。都中故家世族之室。碁布星羅。皆是北向。及中廟朝以後。紀法漸解。人心日奢。犯分踰禮之事無有紀極。則家舍所向之南北。不暇問也。可見世道之漸降而人心之不古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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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窩雜說』


묘시 출근과 유시 퇴근: 18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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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관사에 묘시(卯時)[1]에 출사(出仕)하고 유시(酉時)[2]에 퇴근하는 법을 거듭 밝혔다.

申明各司卯〔坐〕酉罷之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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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31권, 영조 8년(1732) 5월2일(무오) 기사


창덕궁 앞 출근 풍경: 17세기, 유몽인(柳夢寅)의 시
Quote-left.png 「남소(南所)[3]에서 감회를 쓰다(南所寫懷)」


궁궐에 새벽빛 밝아오니 고관들 조정으로 달려가네.
晨光騰紫闕, 峩弁趨彤墀

老卒鉥前塗, 舍我南廂陲
늙은 병졸이 앞길을 인도하여 나를 남쪽 전각 끝에 두었네.

懸盾警夜所, 植鎩句陳司
야간 경계하는 처소에서 방패 들고 궁궐 호위하는 관소[4]에서 창을 세웠네.

列帥盡虎頭, 酣戰眞雄姿
줄지어 선 장수는 모두 범의 두상[5]이요 싸움에 익숙하니 참으로 씩씩한 자태로다.

駑材眷蒭豆, 僚底摧雙眉
노둔한 사람은 말먹이나 돌보며 동료들 밑에서 두 눈썹 내렸네

東瞻騎省峙, 北矖粉署危
동쪽을 바라보면 병조가 우뚝하고 북쪽을 바라보면 분서(粉署)[6]가 높다랗네.

銅龍狀蠖略, 金馬光陸離
동룡문(銅龍門)[7]은 나아갈 듯한 모습이요 금마문(金馬門)[8]은 눈부시게 번쩍거리네.

昔我雲翮矯, 今何金骨緇
나도 예전엔 높이 나는 새처럼 굳셌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승려처럼 나약해졌나.

將星耀華髮, 擁甲如貙貔
대장은 백발이 빛나고 맹수 같은 갑사를 거느리네.

平生嗜文術, 浪讀古人詩
나는 평생 문장 좋아하여 그저 고인의 시만 읽었네.

從此學投筆, 六弢綜正奇
이제부터 투필(投筆)[9]을 배워서 『육도(六韜)』의 정기(正奇)[10]를 다스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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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於于集後集』卷二 「南所寫懷」


호조 서리 이윤선(李潤善)의 업무와 일상


호조 아전 이창린 등의 옥안 판하: 18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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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의 아전 이창린(李昌麟)과 김처신(金處信)이 대궐에 바칠 것이라고 칭탁하고 수리계(修理契)의 종이를 훔쳐내려고 거짓 보고를 하여 계단(啓單)을 받았다가 일이 들통났다. 옥에다 가두고 끝까지 심문하니, 김처신은 꾀를 내어 시킨 자이고 이창린은 직접 죄를 범하여 거짓으로 전한 자였다. 형조가 이창린을 정범(正犯)으로 삼아 옥안을 갖추어 계문하니, 판하하였다.

"법관이 법을 다룰 때에는 털끝만한 것도 다투며, 관청 문서에는 본래 격례가 있는 법이다. 사형죄에 대한 옥안은 법이 매우 중대하여, 글자 하나 낱말 하나를 놓을 때에도 반드시 더할 수도 없고 덜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고 변통할 수도 없게 해야 한다. 그런 뒤라야 범인을 승복시킬 수가 있고 옥사의 체모를 더욱 높일 수가 있는 것이다. 무릇 사형수에 대한 옥안(獄案)을 형조에서 뽑아 적어 아뢸 때에는 죄수의 이름 아래에다 죄목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쓰고 문서의 윗 부분에다 쪽지 글을 적은 누런 종이를 붙이는데, 그 법의 엄하기가 마치 죽은 사람에 대해서 죽은 원인을 조사하여 기록한 시체 검사 대장과 같다. 이것을 가지고 자복을 받고 이것을 가지고 법률을 상고하고 이것을 가지고 옥사를 완결짓고 이것을 가지고 재심을 하는 것이다. 한 글자 한 낱말의 경중과 출입에 따라서 법 적용이 달라지는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런데 지금 이 옥안에 붙인 황지(黃紙)를 보니, ‘죄인 이창린과 김처신이 전지(傳旨)를 거짓 칭탁하여 관청의 재물을 훔친 일’이라고 하였고, 원래의 옥안에 들어 있는, 호조에서 보내온 공문 및 본조에서 받은 각자의 공초와 완결지은 결론을 살펴보니, 혹은 ‘하교(下敎)라고 칭탁하였다.’ 하고 혹은 ‘허위로 전교(傳敎)를 전하였다.’ 하고 혹은 ‘전지(傳旨)를 거짓으로 전하였다.’ 하고 혹은 ‘전지를 속여서 전하였다.’라고 하였다. 위 아래가 서로 뒤바뀌고 앞뒤가 모순되어 황지에 적힌 죄명과 마디마디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비록 원래의 옥안에 적힌 말을 가지고 확정하여 법률을 적용하려고 하더라도 또한 어느 말을 따르고 어느 말을 버려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대개 전지라는 것과 전교라는 것과 하교라는 것은 체모가 각기 다르다. 벼슬을 내리거나 상을 주거나 형벌을 가하거나 사형을 시키는 일을 각 해당 관사에 내릴 때에 교서를 전하여 내보내면 승지가 대략 추려서 적어 내리고 당후 주서(堂后注書)가 자세히 적어서 접는 문서로 만들어 계하받아 내리는 것을 유음 전지(流音傳旨)라고 한다. 주서가 또 베껴 적어 인장을 찍고 승지가 벼슬 이름을 갖추어 적은 다음 해당 관사에 내려 보내는 것을 하음 전지(下音傳旨)라고 한다. 승지가 임금 앞에서 임금이 말로 하유하는 것을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어 승지가 반포하는 것이라든지 사알이 각 담당 승지에게 전하는 것을 담당 승지가 글로 써서 반포하는 것을 전교(傳敎)라고 한다. 경연에 나온 신하들이 직접 임금을 뵙고 들은 것을 물러나와 받들어 행하는 것을 하교(下敎)라고 한다. 또 혹 승전색이 말로 전하는 하교를 받아 내오면 여섯 승지들이 모여 앉아 글로 적어서 전하되 ‘승전색 구전 하교’라고 쓰고 적어서 조지(朝紙)에 반포하는데, 그 체모는 또한 전교와 같다. 왕의 말은 실과 같아서 그 실이 풀려 나오듯이 나오는데 그 말을 사관이 적어서 팔방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한 마디 분부나 한 마디 호령도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궐 안으로 들여오는 물품들을 호조 및 각 관사에서 가져다 쓰는 일은, 전에는 단지 중사(中使)가 전교를 듣고 분부하는 규례만 있었는데, 병신년 이후로는 표지(標紙)로 계하하는 법을 별도로 세웠으므로 각사가 표지가 없으면 거행할 수가 없고 거행한 뒤에는 또 들여온 물품 단자가 있어서 그것으로 빙증을 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표지를 계하하는 일 이외에 또 정원의 담당 승지로 하여금 출납을 감독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대개 안과 밖을 엄하게 구분하고 궁중과 부중을 하나로 보려는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 표지의 법식을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각 관사의 서리들과 각종 공물을 바치는 백성들까지도 이 제도를 모르는 자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하찮은 호조 서리 하나가 감히 표지도 없는 물품으로 궐내로 들여갈 것이라고 거짓 칭탁을 하였는데 해당 조에서 진짜 하교인 줄로 알았다는 것이 어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더구나 견양초주지(見樣草注紙)는 두꺼운 종이로서 바로 수리(修理)하는 데에 쓰는 것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10여 권을 가져다 쓴 적도 없고 또한 한 번도 도배한 일이 없다. 그렇다면 2백 권이나 되는 종이를 장차 어디다 쓴단 말인가. 이와 같이 알기 쉬운 일을 눈을 멀쩡히 뜨고 속임수에 넘어갔으니, 해조의 일은 참으로 너무나 한심스럽다. 그런데도 경의 조에서 올린 계첨에는 ‘전지를 가탁하였다.’는 것으로 두 죄수의 죄목을 삼고 있다. 종이를 궐내로 들여오는 일에 어찌 전지가 있겠는가. 주제를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다. 설령 해조에서 보낸 공문이 처음부터 이와 같이 잘못되어 있었더라도 마땅히 다시 공문을 주고받으며 바로잡았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바로잡기는커녕, 이에 사형죄를 적용하는 옥안에다가 윗부분에는 ‘전지를 가탁하였다.’라고 해놓고는, 완결한 결론 부분에 가서는 문득, 보내온 공문의 공초에도 없는 ‘전교를 허위로 전하였다.’는 말로 경들이 스스로 고쳤다. 또 ‘전교를 허위로 전한 죄는 바로 사형에 해당합니다.’라고 하며 전례대로 결안 취초하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다만 한 때의 불찰로만 논할 수 있겠는가. 이 길이 한번 열리면, 초록하여 아뢰는 죄명이라든지 죄수의 옥안에 붙이는 황지라든지 살인 사건에서 죽은 원인을 조사한 문서 등이 모두가 쓸모없는 빈말이 될 것이고, 한 형관(刑官)의 의견으로 멋대로 원래의 옥안을 뭉개버리고 수시로 바꿀 것이니, 이로부터 생길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짜[假]’라는 것과 ‘허위[僞]’라는 것과 ‘속임수[詐]’라는 것도 글자의 뜻이 다르다. ‘가짜’라고 하는 것은 진짜 문서가 있는데 그것을 빙자하여 거짓 칭탁을 하는 것을 말하고, ‘허위’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런 일이 없는데 헛되이 날조하는 것을 말하고, ‘속임수’라고 하는 것은 속에 간사한 마음을 감추고 사실이 아닌 일로 속이는 것을 말한다. ‘가짜’와 ‘속임수’는 조금 가볍고 ‘허위’는 아주 무거운 죄이다. 그런데도 말을 이리저리 바꾸며 뒤섞어 놓았으니 장차 무엇을 표준으로 삼겠는가. 규례라는 것은 조정이 규범을 지켜 유지해 가는 기준이다. 경들이 높은 벼슬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전지와 전교도 분별하지 못하고 임금에게 글을 아뢰는 규례에 대해 어둡기가 그 모양인가. 하나의 옥안에 대한 잘잘못이야 그래도 하찮은 일인 것이다. 대개 그날의 일은 전교도 아니고 하교도 없었으니, 이것이 과연 표지에 계자를 허위로 찍은 것인가? 해방의 분부를 허위로 전한 것인가? 계하한 표지가 위조한 것이 아닐 것같으면, 과연 승지가 들은 전교를 알린 것이라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해당 죄수들은 단지 정원의 분부를 허위로 전해준 죄만 있는 것인가? 해조도 또한 어찌 계하한 표지를 보지도 않고 다만 담당 아전이 입으로 전하는 말만 듣고서 갑자기 시행할 이치가 있는가? 이 한가지 조항은 처음부터 엄밀하게 조사하여 명백하게 하나로 통일시킨 뒤에야 옥안을 완성할 수가 있고 죄목을 정할 수가 있다. 갇혀 있는 죄수들을 도로 해조로 돌려 보내 다시 끝까지 조사하여 수정한 뒤에 완결짓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단지 해조에서 보낸 공문을 고쳐서 보내게 하여 그 보내온 공문을 가지고 죄수들에게 공초를 받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과연 허위로 전한 일이 단지 구전(口傳)이라고 한다면, 구전을 위조하는 것에 대한 죄목이 법률에 있는가? 두 죄수를 가지고 논하더라도, 처신은 죄가 쌓인 교활한 아전이고 창린은 새로 들어온 간사한 무리이다. 창린은 그래도 두려워할 줄을 알아서 나중에 계단(啓單)을 지웠는데, 처신은 먼저 분수 넘치는 욕심을 품었고 뇌물로 주는 돈을 혼자서 받았다. 그 정상을 따져 보자면 처신이 주모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창린은 추종자가 되어야 하는데, 경의 조에서는 한갓 말재간 있는 처신의 공초만을 인하여 창린을 정범으로 규정하는 옥안을 억지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판결하는 법률의 본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경들은 법 조문에 어두운 법관들이므로 법을 적용하면서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필시 별 어려움 없이 해낼 것이다. 그래서 경들에게 다시 넘겨서 잘 처리할 바탕을 삼도록 하는 바이다. 옥사를 결단하는 요체는, 머물려 둘 수가 없는 것이 불과 같아서 감히 지체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재계하기 전에 수정하여 아뢰도록 하라."

또 아뢰었다.

"어두운 방에서 꾀를 낸 것이 비록 처신이 주장한 일이라고는 하겠으나, 공공연한 자리에서 거짓말로 보고한 것은 창린이 직접 저지른 죄입니다. 그 말이 더없이 중대하고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린은 확정하여 주모자로 삼고 처신은 참작하여 다음 법률을 적용하였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법의 뜻에 합당합니다."

판하하였다.

"영덕(盈德)의 검관(檢官)이 시체를 검사한 대장에 죽은 원인을 찔리고 맞아서 죽었다고 난잡하게 달아 적었기 때문에 엄한 처벌을 받기까지 하였다. 경들이 지금 이창린과 김처신 등의 문안(文案)에 처음에는 ‘전지를 가탁하여 관청의 재물을 훔치려 하였다.’고 달아 적었다가 두 번째에는 ‘하교를 허위로 전하여 관청의 재물을 훔치려고 하였다.’고 고쳐 적은 것이 영덕의 시체 검사 대장에 죽은 원인을 조사하여 적은 것과 어쩌면 이다지도 서로 비슷한가. 가탁하였다거나 허위로 전하였다는 것이 하나의 죄가 되고, 관청의 재물을 훔치려고 하였다는 것이 또 하나의 죄가 된다. 영덕의 사건의 죽은 원인을 조사한 대장에는 맞아죽었다라고 먼저 말해 놓고 겸하여 찔려죽었다라고 하여 참으로 종잡을 수가 없었으나 그 옥안에서는 정범(正犯)이 단지 김득손(金得孫) 한 사람 뿐이었다. 비록 하나의 옥사에 두 사람의 주범이 있더라도 안 될 것은 없겠으나, 이 옥사는 이창린과 김처신이 형과 아우처럼 짝이 되어 저지른 일이라고 할 만하고, 더구나 두 놈이 두 가지 죄에 각각 꾀를 낸 자와 일을 도와준 자라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옥사에 어찌 두 사람의 주범이 있겠는가. 설령 훔치려고 한 죄로는 사형에까지는 이르지 않고 허위로 전한 죄는 죽여도 또한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하여, 훔치려고 한 한 가지 죄안은 지워버리고 단지 허위로 전한 죄안만을 가지고 정범(正犯)을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꾀를 낸 김처신을 추종자로 삼고 말을 전한 이창린을 주모자로 삼았으니, 이와 같이 법률을 적용한 전례가 과연 어떤 형법 서적에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달아 적어서 아뢴 죄명을 바꿀 수 없는 것은 시체를 검사한 대장에 죽은 원인을 조사하여 적은 것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한 번 공문을 보내자 ‘가탁하였다.’는 말이 변하여 ‘허위로 전하였다.’가 되고 ‘전교’가 변하여 ‘하교’가 되었다. 경들이 만약 법이란 털끝만큼이라도 마음대로 올리거나 내릴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면 이치로 보아 당연히 한번 보고는 깜짝 놀라서 관문(關文)을 돌려 보냈어야 하는 것이거늘, 그런데 도리어 개정한 문안으로 추문하여 공초를 받고는 이어서 조율하기를 청하였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와 같은 옥사의 체모는 보지 못하였다. 무릇 죄를 따져 법률을 적용하는 규정에 있어서는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분부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죄율을 거론하는 것이고 사형수에 대해서는 더욱 특별히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결안(結案)을 할 때에는 단지 결안만 받들어야 하고 다시 상복(詳覆)이나 계복(啓覆)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적용할 법률의 명칭을 적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들이 갑자기 《대명률(大明律)》의 사위조(詐僞條)를 끌어다가 이론을 갖춰 죄안을 만든 것은 어찌 참으로 놀랄 일이 아닌가. 가령 경들의 말처럼 이 법률이 합당한 법률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적용할 법률은 곧 중대한 사형죄이다. 어두운 방에서거나 공공연한 자리에서거나를 막론하고 꾀를 낸 자는 당사자가 있으니, 거짓으로 보고한 자는 마땅히 일을 거들어준 자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다만 정리(情理)가 조금 무겁다고 하여, 일을 거들어 준 자를 꾀를 낸 주모자로 삼았으니, 또한 과연 말썽이 날 염려가 없겠는가. 경들이 법을 적용한 글에 ‘조지(詔旨)를 속임수로 전하였다 운운.’ 하는 말이 있는데, 조지라는 것은 입으로 내린 분부가 아니니, 처음 아뢸 때에 사용한 ‘전지를 가탁하였다.’고 한 죄명은 그래도 그럴 수 있겠으나, 구전 하교에다가 견주는 것은 단락이 판이할 뿐만이 아니다. 형조에 어떤 놈의 법률을 농간하는 율관이 있어서 경들을 그와 같이 잘못 가르쳤는가. 이 죄수의 죄가 사형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면 어찌 해조로 다시 보낼 수가 있겠는가. 예전 선왕조 때에 수교(受敎)를 내려, 사형수가 포도청에서 승복을 했다가 형조에서 공초를 바꾸자 다시 포도청으로 이송을 하여 공초를 일치시킨 일에 대한 전례를 게시하도록 하고,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엄히 금단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조정에서도 등골이 오싹하다. 어느 겨를에 경들이 즉시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깊이 책망하겠는가. 이 때문에 경들에 대해서는 모든 일을 조금도 거론하지 않고 불문에 부치되, 단지 법을 농락한 율관에 대해만은 반좌율을 적용하여 처리하고자 한다. 우선 엄히 가두어 두고 재계 후의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라. 시체의 죽은 원인을 검사한 기록을 바꿀 수 없다면 계첨(啓籤)도 또한 고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두 번째 계사의 황지는 불태우도록 하라. 첫 공초에 전지라고 한 것이 진짜 전지인지의 여부에 대해서 다시 해조로 보내어 철저히 조사하여 돌려보내오도록 하고, 돌려보내오기를 기다렸다가, 황지 가운데의 전지라는 두 글자를 고쳐 쓴 연유를 간단히 보고하고, 그런 뒤에 문안을 수정하고 정범을 다시 결정해서 옥안을 작성하여 다듬어 아뢰도록 하라."

또 아뢰었다.

"이창린의 공초에, ‘과연 하교인 양 거짓 보고하였는데, 전지와 하교를 구분하지 못해서 이렇게 잘못 대답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김처신의 공초에, ‘비록 궐내에 들일 것인 양하여 훔쳐 내기로 함께 모의하였으나 거짓으로 보고한 사연은 모두가 창린이 한 짓이고 보면 하교와 전지에 대해서는 참으로 알 길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전지라는 두 글자가 이창린의 첫 번째 공초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이미 사알(司謁)의 구전(口傳)을 들었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전지가 아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혹 위조한 표적이 있었다면 어찌 그 자리에서 잡히지 않았겠습니까. 그가 잘못 대답한 대로 따라가다가 해조와 신의 조가 구별을 못했습니다만, 창린의 공초에 이미 ‘하교인 양 거짓 보고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계첨 황지에 ‘전지를 가탁하였다[假托傳旨]’라고 한 넉 자는 실로 개정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래서 ‘하교를 허위로 전하여 관청의 재물을 훔치려 하였다.’라고 고쳐 썼습니다. 문안은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수정하여 입계하겠습니다."

판하하였다.

"호조의 아전은 궐문을 밀치고 대궐로 들어 올 수 없으니, 이른바 하교라는 것은 반드시 듣고서 전한 내력이 있을 것이다. 어느 방 승지에게서 들은 것처럼 말한다고 하던가? 승지 이외에는, 병신년 이후로는 구전 하교를 승전색 등으로 하여금 전하게 한적이 없다. 이미 확고한 법이 이루어져 호조의 위아래 관원들이 모두 알고 있다. 호조의 아전이 비록 이것을 빙자하려 하더라도 해조 당상 이하가 누가 믿고 들어줄 자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교를 허위로 전한다는 것이 어찌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설령 잘못 전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니, 그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또 응당 하교했을 법한 일을 잘못 전했다거나 허위로 전했다고 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참으로 가죽 없는 털과 같이 허무맹랑한 말이다. 이 한 조항은 속히 조사하여 바로 문안을 작성하고 수정하여 아뢰도록 하라."

戶曹吏李昌麟、金處信, 假稱內入, 謀竊修理契紙物, 瞞告受啓單, 事覺。 繫獄究問, 處信發謀指使, 昌麟身犯僞傳。 刑曹以昌麟爲正犯, 具案啓聞, 判曰: 司寇關石, 錙銖是爭, 公家文書格例自有。 一律之案, 三尺至重, 下一字措一語, 必須加不得減不得, 移易不得, 闊狹不得。 然後犯者, 可使自服, 獄體可以益尊。 凡死囚之案, 刑曹錄啓單, 抄罪目於囚名之下, 貼黃標書於啓牘之上, 其法之嚴, 如屍帳之實因。 以此而納款, 以此而考律, 以此而完決, 以此而詳覆。 卽其一字一語之輕重出入, 而法以之隨焉, 關係顧何如? 則今觀此案所貼之黃紙, 有曰: ‘罪人李昌麟、金處信, 假托傳旨, 謀竊公貨事云云。’ 而及考原案中戶曹文移及本曹所捧各人等供招, 完(結)〔決〕 結(錢)〔語〕 , 則或曰: ‘托稱下敎。’ 或曰: ‘僞傳傳敎。’ 或曰: ‘假傳傳旨。’ 或曰: ‘詐傳傳旨。’ 上下互換, 前後矛盾, 非但與貼黃罪名, 節節相左, 雖欲以原案措語, 執定擬律, 亦未知孰從而孰違。 夫傳旨也傳敎也下敎也, 體段各異。 爵賞刑殺之下各司者, 傳敎書出後, 承旨抄出書下, 堂后注書, 細書摺貼啓下, 謂之流音傳旨。 注書又謄草蹯印, 承旨具銜下該司, 謂之下音傳旨。 承旨於榻前, 以呼寫之口諭, 承書頒布與或以司謁之傳于各該房, 以文字書頒, 謂之傳敎。 登筵諸臣, 面承耳聆, 退而奉行, 謂之下敎。 又或承傳色奉口傳下敎而出, 則六承旨廳坐, 以文傳書, 書以承傳色口傳下敎, 書頒朝紙, 其體段亦與傳敎同。 王言如絲, 其出如綸, 史官書之, 八方傳之。 朝家所以不敢或忽於一辭敎一號令之間者。 至於內入物種之戶曹及各司取用者, 在前只有中使聽傳敎分付之規, 丙申以後, 別立標紙啓下之法, 各司無標紙, 則毋得擧行, 擧行後又有內入單子, 以憑準之。 而啓標之外, 又令政院該房, 句管出納。 蓋出於嚴內外一宮府之苦心。 標紙之式, 行之已久, 各司吏胥各貢之小民, 亦莫不聞知。 則今此幺麿一曹吏, 敢以無標紙之物, 假稱內入, 而該曹之認以眞箇下敎者, 是豈成說? 況見樣草注紙, 乃是品厚紙地, 卽修理所用也。 御極後未(常)〔嘗〕 取用十許卷, 亦無一番塗褙之擧。 則二百卷紙地, 將用於何處乎? 如此易知之事, 公然見瞞, 該曹事, 固已萬萬寒心。 而卿曹啓籤, 乃以假托傳旨四字, 作爲兩囚之罪目。 紙物內入, 豈有傳旨? 可謂外題之外題。 藉使該曹文移, 自初若是錯誤, 事當往復釐正。 而釐正姑勿論, 乃於一律之案, 上段則旣曰假托傳旨, 忽於完決結語, 以文移供招所無之僞傳傳敎, 卿等自改之。 又曰: ‘傳敎僞傳, 乃是極律。’ 仍請依例結案取招者, 豈可但以一時不察論? 此路一開, 則錄啓之罪名, 囚案之貼黃, 殺獄之實因, 皆爲無用之空言, 而將以一刑官意見, 惟意毁畫, 隨時變幻, 其流之弊, 有不可言。 且曰假曰僞曰詐, 字義亦有分屬。 假者, 眞有文跡而憑藉假托之謂也, 僞者, 元無是事而架虛作僞之謂也, 詐者, 隱匿奸情, 詐不以實之謂也。 假與詐稍輕, 而僞爲最重。 則橫竪說去, 混圇無別, 亦將何以準的乎? 格例者, 朝廷之所防範而維持者也。 卿等位躋崇顯, 而淆雜於傳旨傳敎之別, 奏御文字, 昧例乃爾? 一案得失, 猶屬餘事。 大抵伊日事, 旣非傳敎, 又無下敎, 則此果標紙之僞踏啓字乎? 僞傳該房之分付乎? 啓下標紙, 似非僞造, 則果以承旨聽傳敎知委云乎? 然則該囚, 只有僞傳政院分付之罪乎? 該曹亦豈有不見啓下標紙, 只聞該吏口來之傳, 而遽然施行之理乎? 此一款, 從頭嚴査, 明白歸一然後, 案可成而罪可勘。 在囚各人等, 還送該曹, 更爲究覈修正後, 完決爲當乎, 只該曹文移, 使之改送, 以其文移, 捧招於諸囚爲當乎? 果使僞傳之事, 只是口傳云, 則口傳僞造, 於律有之乎? 雖以兩囚論之, 處信, 稔惡之猾吏也, 昌麟, 新入之奸徒也。 昌麟則猶知畏㤼, 追爻啓單, 處信則先萌濫慾, 獨捧賂錢。 究其情節, 則處信當爲造謀, 昌麟當爲隨從, 而卿曹徒因處信粧撰之招, 硬作昌麟正犯之案者, 亦未知果合於判律之本意乎。 卿等卽眛於法文之法官, 操縱低仰, 必當無難。 故付之卿等, 以爲從長處之之地。 斷獄之要, 不留如火, 莫敢遲滯。 期於坐齋前修啓。 又啓言: 暗室造謀, 雖曰處信之主張, 公座瞞告, 實是昌麟之身犯。 語涉莫重, 罪關極律。 故昌麟則定爲首犯, 處信則勘以次律, 允合法意。 判曰: 盈德檢官之屍帳實因, 以被剌打, 雜亂懸錄, 至被嚴勘。 則卿等之今於李昌麟、金處信等文案, 初以 ‘假托傳旨, 謀竊公貨’ 懸錄, 再以 ‘僞傳下敎, 謀竊公貨’ 改錄者, 與盈德屍帳實因, 何相似也? 假托或僞傳, 爲一件罪, 謀竊公貨, 又爲一(律)〔件〕 罪焉。 盈德實因之先言打, 兼言剌, 固甚疑眩, 而該案正犯只是金得孫一人。 雖無一獄兩犯之嫌, 而此獄則昌麟、處信可謂兄弟發動, 且況兩箇漢, 於兩件罪, 各有造謀加功之輕重。 然則一獄寧有兩犯乎? 設以謀竊之罪, 不至於極律, 僞傳之罪, 誅之亦無惜, 刪却謀竊一件罪, 只就僞傳罪單, 定正犯, 造謀之處信爲從, 傳言之昌麟爲首, 似此律例, 果未知在於何許刑書? 錄啓罪名之不得移易, 與屍帳實因同然。 則一番文移, 假托變爲僞傳, 傳敎變爲下敎。 卿等若知金石之不可毫忽低仰, 則理當一見瞠然, 還送關文, 而反以改定之本, 發問取招, 仍請照律, 往古來今, 未見如許獄體。 凡擬律之規, 議處回下之後, 始乃擧論, 一律之囚, 尤有自別。 結案時只捧結案, 至于詳覆啓覆, 然後始書律名。 則卿等之忽提《大明律》詐僞條, 論理措辭者, 豈不萬萬駭然? 借如卿等跋語, 此律爲當律, 其律卽一律也。 卽無論暗室與公座, 造謀者自有其人, 則瞞告者當爲加功。 特以情理之較重, 加功換作造謀, 亦果無開棘之慮乎? 卿等所照律中, 詐傳詔旨云云, 詔旨, 卽非口敎用之, 於初啓, 罪名之假托傳旨, 尙可擬諸, 口傳下敎, 段落不啻判異。 曹中有何物舞弄法文之律官誤訓, 卿等乃爾? 此囚之罪, 早知爲一律, 則何可更送該曹乎? 昔在先朝受敎, 揭令一律囚之, 承款於捕廳, 變招於刑曹, 而更送歸一之例, 嚴加禁斷, 到今思之, 朝家還甚悚然。 何暇深責卿等之不卽提醒乎? 以是卿等則竝與問備而不爲擧論, 而只弄法律官, 欲準反坐律處之。 爲先嚴囚, 以待過齋後處分。 實因不可換錄, 則啓籤亦不可改書。 再啓黃紙則付丙。 初供中傳旨之眞箇傳旨與否, 更送該曹, 使之究覈還送, 待還送黃紙中傳旨二字, 改書緣由草記, 然後修正文案, 更定正犯, 成案修啓。 又啓言: 李昌麟供: ‘果以下敎樣瞞告, 而傳旨與下敎, 未能區別, 致此錯對。’ 金處信供: ‘雖以內入樣, 同謀於偸竊, 而瞞告辭緣, 皆是昌麟所爲, 則下敎與傳旨, 實無知得之路。’ 大抵傳旨二字, 雖出昌麟初供, 而旣聞司謁口傳云, 則其非傳旨無疑。 若使渠, 或有僞造之標跡, 則豈不現捉乎? 隨其錯對, 而該曹與臣曹之不能區別, 而昌麟所供, 旣以爲下敎樣瞞告, 則啓籤黃紙中, 假托傳旨四字, 實合釐正。 故以僞傳下敎, 謀竊公貨改書。 而文案則請待批下修正入啓。 判曰: 曹吏無以排金門入紫闥, 則所謂下敎, 必有聞而傳之來歷。 聞於何房承旨樣爲說云乎? 承旨之外, 丙申後, 未嘗以口傳下敎, 使承傳色等傳之者。 已成金石之典, 曹中上下皆知。 曹吏縱欲憑藉, 該堂以下, 孰有信聽者乎? 然則下敎之僞傳, 豈非外題? 設或錯傳, 係是無於例之事, 當句內不成說。 又不可以應爲下敎, 事之錯傳, 或僞傳論。 可謂皮之不存。 此一款, 斯速究竟, 卽爲成案修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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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51권, 정조 23년(1799) 5월22일(기묘) 기사


예조 낭관 권상일의 장생전 수리 일지

병조에서 이조의 낭관으로, 윤기의 이상과 현실

육조 당상, 그 빛과 그늘

봉심(奉審)과 회창(回倉) 그리고 순심(巡審), 출장을 빙자한 외유


동대문 밖 인가의 철거와 풍수설: 16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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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소대하였다. 시강관 심봉원(沈逢源)이 아뢰었다. 동대문(東大門) 밖에 조종조부터 있었던 오래된 인가(人家)를 이번에 문을 막고 있는 산줄기를 점거하였다고 하여 모두 철거시키라고 하였습니다. 풍수설(風水說)이 성인(聖人)의 경전(經典)에는 있지 않은 것이니, 진실로 성주(聖主)로서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임금이 덕을 닦으면 하늘에다 영명(永命)을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도(道)를 어기고 덕을 손상시키면 스스로 위망(危亡)에 이를 것인데 풍수설이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上召對。 侍講官沈逢源曰: 東大門外, 自祖宗朝久遠人家, 今者以侵占捍門山來脈, 皆令撤毁。 風水之說, 不在於聖經, 固非聖主之所可信也。 人君修德則可以祈天永命, 若不然而反道敗德, 則自至於危亡, 何關於風水之說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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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종실록』6권, 명종 2년(1547) 8월13일(신묘) 기사


연지(蓮池)와 누정(樓亭), 휴식과 위안의 공간


예조의 건립: 15세기, 성현(成俔)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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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예조는 바로 예전의 삼군부(三軍府)이다. 정삼봉(鄭三峯)이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을 맡았을 때 의정부의 제도를 보고 말하기를, "정부와 군부는 일체이다." 라고 하고 드디어 그 제도에 의하여 만드니 높다랗게 동서가 상대가 되어 그 청사가 굉장한 것이 다른 관부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뒤에 삼군부를 혁파하고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여 군무를 맡기지 않고, 예조로써 오례(五禮)를 맡아보게 하고 또 다른 나라의 사신을 대접하게 하니, 그 임무가 중대하여 그 부(府)를 예조로 삼고, 중추원은 도리어 예조의 남쪽 곁채에 우거(寓居)하였다. 경복궁 서쪽 가에 수맥(水脈)이 많은데, 경회루의 연못 물은 비록 옛날 중국의 곤명지(昆明池)ㆍ태액지(太液池)라도 이보다 좋지 못할 것이다. 서문 밖에 샘이 있어 넘쳐 흐르니, 얼음과 같이 맑고 차가워 사람들이 모두 쪽[藍]을 물들이기 때문에 쪽샘[藍井]이라 불렀다. 예조의 우물도 또한 맑고 깨끗하고 마르지 않아 흘러서 큰 못을 이루니 비록 몹시 가물어도 한결같았다. 못 남쪽에 조그마한 땅이 중추부로 뻗어서, 수초가 우거지고 더럽더니 금상(今上) 기미년에 중추부에서 아뢰기를, “개 이빨처럼 우리 관아에 들어오니, 마땅히 분할하여 우리 못으로 해야겠습니다.” 하니, 예조가 이르기를, “외국 사람을 대접하는 곳을 좁게 해서는 안 된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임금이 승지와 내관 등에게 물어서 쪼개어 나누어주니, 중추부에서 그 땅을 파서 서지(西池)를 만들고, 대청을 개축하고 대청에 연이어 서헌(西軒)을 만들고, 돌기둥을 물 속에 세우니 아로새겨지는 그림자가 물결 위에 떨어지고, 서쪽은 산봉우리가 높고 집들이 좋고 나무가 빽빽하여 풍경이 서울에서 제일이었다. 그 밑에 있는 사헌부와 옛 병조ㆍ형조ㆍ공조ㆍ장예원(掌隸院)에도 모두 못이 있어 연꽃을 심었고, 동쪽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에는 비록 못이 있으나 서쪽 못보다는 훌륭하지 못하였다.

今禮曹是古三軍府 鄭三峯 掌軍國重事 見議政府所搆之制 乃曰 政府軍府一體 遂依其制而搆之 屹然東西相對 其棟宇宏壯 非他官府之比 其後革三軍府 而置中樞院 不任軍務 以禮曹掌五禮 且接異國之使 其任重大 以其府爲禮曹 而中樞院反寓曹之南廊 景福宮西邊多水脉 慶會樓池水 雖古之昆明太液不能過也 西門外有泉濫出 淸冷如氷 人皆染藍 故謂之藍井 禮曹之井 亦澄澄不竭 流爲大池 雖盛旱如舊 池南尺地 斗入中樞府 沮洳荒穢 今上己未年樞府啓曰 犬牙入吾司 宜割爲吾池 禮曹曰 外夷接待之處 不可狹隘 相爭不已 上命承旨內豎等審之 割分與之 樞府鑿其池爲西池 改搆大廳 連廳作西軒 樹石柱於水中 彫欄影落波上 西望峯巒崷崒 人家甲第 樹木蔥鬱 風景甲於都中 其下司憲府古兵曹刑曹工曹掌隷院皆有池種蓮 東邊議政府吏曹漢城府戶曹 雖有池 不如西池之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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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慵齋叢話』卷十


예조의 낭관청: 17세기, 이정귀(李廷龜)의 시
Quote-left.png 「예부에서 낭관청을 중건하고 풍악을 연주한 후 간소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낭료들과 즉흥적으로 읊다(禮部重建郞官廳 閱樂後仍作小酌 酒席與郞僚口占)」

남궁에서 잔치 풍악 울리며 인청(寅淸)[11]이 모이니, 절후는 삼원(三元)[12]에 가까워서 고운 햇살이 밝아라.
南宮演樂會寅淸, 節近三元麗景明

이 늙은이는 십 년을 이제 여섯 번 보태었고, 이 작은 관청은 해를 넘겨 이제야 중건되었네.[13]
老子十年今六忝, 小堂經歲始重營

연못과 누대에는 아직도 잡초 자취 남았으니, 북과 피리 소리 도리어 서글픈 감회를 일으키네.
池臺尙帶蓬蒿迹, 鼓篴還挑感念情

공무를 마치고 우연히 모여 한바탕 취하노니, 이 잔치를 이대로 낙성식으로 삼은들 어떠리.
衙罷偶然拚一醉, 不妨仍作落新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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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月沙先生集』卷十七 「禮部重建郞官廳 閱樂後仍作小酌 酒席與郞僚口占」


예조의 풍경: 17~18세기, 홍세태(洪世泰)의 시
Quote-left.png 「김참봉, 홍진사와 함께 예조 뒷산에 오르다(同金參奉 洪進士。登南宮後岡)」

(번역문 미비)
崇岡龍虎抱南宮, 御氣樓臺北極通

(번역문 미비)
暗向池心窺雪水, 高攀樹杪坐春風

(번역문 미비)
孤峰忽在斜陽外, 萬戶平沉沓靄中

(번역문 미비)
采采滿盤新艾綠, 飯香羹滑飽衰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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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柳下集』卷三 「同金參奉 洪進士。登南宮後岡」


예조의 풍경: 18세기, 이시항(李時恒)의 시
Quote-left.png 「예조 낭관으로 옮겨 임명되어 본사(本司)에서 숙직하다(移拜春曹郞 直宿本司)」

(번역문 미비)
十年重入舊南宮, 老吏依俙記是翁

(번역문 미비)
昔者紅顔今白首, 向來員外此郞中

(번역문 미비)
池㙜柳亞微風撼, 庭院苔荒澹月空

(번역문 미비)
持被西廳仍閱案, 卷中名錄弟兄同

(번역문 미비)
-仲汲吾後亦題名。故結句及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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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和隱集』卷三 「移拜春曹郞 直宿本司」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Quote-left.png 「예조에 근무하며 우연히 읊다(直禮曹偶吟)」

광화문 앞이 바로 예조이니, 낭관의 재미는 극히 쓸쓸하네.
光化門前是禮曹, 郞官况味極蕭騷

전교를 받들 때엔 바삐 말을 몰고, 초기를 올릴 때엔 급히 도포 입네.
聽傳敎際忙驅馬, 呈草記時急整袍

봉인이 옆에 있으나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눈앞의 담장은 어찌 그리 높은지.
封印在傍非自用, 築墻當面一何高

단지 북창 아래로 옮겨 앉아, 멀리 맑은 이내 바라보면 흥이 문득 호쾌할 뿐.
只應移席北窓下, 遙看晴嵐興却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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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直禮曹偶吟」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Quote-left.png 「예조에 입직한 날, 인왕산을 마주해 한가로이 4수를 짓다(直春曹日 對仁王山 漫成四絶)」

인왕산 솟은 바위 서울을 진무하니, 구름 속 기봉이 그림처럼 산뜻해라.
仁王矗石鎭王京, 雲裏奇峯畫裏明

본디 서산에 상쾌한 기운 많아, 늘 바라보매 돌아가고픈 정 없어라.[14]
自是西山多爽氣, 長看不必有歸情


깎아지른 봉우리는 하늘을 찌르고, 빙 두른 성곽엔 초목이 우거졌네.
高峯戍削與天參, 粉堞周遭草樹毿

빼어난 기운은 세속에 물들지 않아, 아침마다 저녁마다 남기 절로 맑아라.
秀氣不爲塵土染, 朝朝暮暮自晴嵐


예조에 숙직하는 것이 시름겹지만, 산색이 홀연히 눈길 가득 새롭구나.
南宮鎖直足愁顰, 嶽色忽然滿目新

인왕산 보노라면 산야의 흥취 일어, 이 몸이 홍진에 있는 줄을 잊노라.
對此却生山野思, 不知身在軟紅塵


성근 버들 줄지어 있고 산색은 새로운데, 맑은 바람에 느긋이 누웠노라니 정신이 상쾌해.
疎柳成行山色新, 淸風高卧爽精神

연명이 어찌 천고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랴, 나 또한 희황 이전의 사람[15]이로다
淵明千古寧專美, 我亦羲皇以上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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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直春曹日 對仁王山 漫成四絶」


병조의 누정: 16세기, 윤두수(尹斗壽)의 시
Quote-left.png 「병조의 작은 누대에서 우연히 시를 짓다(兵曹小樓偶題)」

별을 보고 갔다가 별을 보고 돌아오니, 봄이 다 저물도록 술 한 잔 할 겨를 없네.
見星而往見星來, 春暮何曾把一杯

서둘러 작은 누대에 올라 물색을 감상하니, 실버들 늘어진 곳에 녹음이 아른거리네.
急上小樓探物色, 柳絲垂處綠徘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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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梧陰先生遺稿』卷一 「兵曹小樓偶題」


병조의 연지: 17세기, 이수광(李睟光)의 시
Quote-left.png 「병조 청사 뒤쪽 작은 못이 깊고 검푸른데, 거기에 연꽃 몇 송이가 있어(騎曹廳後小池深黑中有種荷數朶)」

누가 섬돌 앞 한 자락 사초를 파헤쳤나, 못 속에 담긴 물이 웅덩이도 못 채우네.
誰破階前一席莎, 池中貯水不盈科

멀리 흘러가[16] 바다로 들어가진 못 해도, 실버들 늘어진 곳에 녹음이 아른거리네.
朝宗縱隔滄溟路, 咫尺潛通太液波

칠흑빛 깊이 고여 옛 거울 잠긴 듯하고, 은빛 물고기 부침하매 여린 연잎 흔들리네.
漆色深泓涵古鏡, 銀鱗瀺灂動新荷

여기에 무한한 강호의 뜻 있을지니, 만 리의 가을바람 저물녘에 세차구나.
此間無限江湖意, 萬里西風日夕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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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芝峯先生集』卷四 「騎曹廳後小池深黑中有種荷數朶」


병조의 연지: 17세기, 김육(金堉)의 시
Quote-left.png 「달밤에 병조에 입직하다(月夜直騎省)」

백합꽃 피어 있고 파초잎 기다란데, 비 온 뒤라 못가 누각 여름에도 서늘하네.
百合花開蕉葉長, 雨餘池閣夏生凉

맑은 밤에 입직하니 일 없어 한가함에, 누운 채로 구름 가고 달빛 토함 바라보네.
淸宵禁直閑無事, 臥看流雲吐月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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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潛谷先生遺稿』卷二 「月夜直騎省」


병조의 연지: 18세기, 정간(鄭榦)의 시
Quote-left.png 「병조 당상대청 뒤에 네모진 못이 있고, 못에는 연꽃이 못가에는 창포가 둑에는 수양버들이 있어, 마침내 ‘淸’자 운으로 읊어 화답을 구하다(騎省正衙後有方塘 塘有芙蕖 渚有菖蒲 堤有垂柳 遂用淸字 詠以求和)」

(번역문 미비)
植物知無數, 憐渠抵死淸

(번역문 미비)
明波爲樂國, 君子錫嘉名

(번역문 미비)
露結珠團淚, 風撞玉散聲

(번역문 미비)
朱花將大發, 吾且製裳行

(번역문 미비)
右蓮


(번역문 미비)
根遇石逾怪, 葉抽泥更淸

(번역문 미비)
周菹稱美味, 軒草擅芳名

(번역문 미비)
廬岳聖賢態, 杏壇琴瑟聲

(번역문 미비)
何當長服餌, 羽化瞥天行

(번역문 미비)
右菖蒲


(번역문 미비)
裊裊池邊柳, 風來面上淸

(번역문 미비)
曾供程叔諫, 更助晉臣名

(번역문 미비)
濃暗夕烟色, 新靑朝雨聲

(번역문 미비)
絲長寧縶馬, 我自不南行

(번역문 미비)
右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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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鳴臯先生文集』卷一 「騎省正衙後有方塘 塘有芙蕖 渚有菖蒲 堤有垂柳 遂用淸字 詠以求和」


병조의 연지: 19세기, 임천상(任天常)의 시
Quote-left.png 「비오는 가운데 병조에 입직해 있으면서 장난삼아 ‘무와행’을 짓다(雨中直兵曹 戱爲無蛙行)」

(번역문 미비)
憲府有池無蛙聲, 暑潦令人耳根淸

(번역문 미비)
世傳昔時姜監察, 投檄戒蛙蛙不鳴

(번역문 미비)
蛙本水産性喜水, 得雨喧聒卽其理

(번역문 미비)
一片坳塘何所無, 兩部鼓吹隨處起

(번역문 미비)
我官兵曹直曹齋, 齋西有池亦無蛙

(번역문 미비)
夜來不眠但聽雨, 雨中無蛙理亦乖

(번역문 미비)
憲府無蛙固有說, 兵曹無蛙孰分別

(번역문 미비)
試看物理本不齊, 種種誠難爭口舌

(번역문 미비)
我姑推類一爲言, 潮鰐河虎感應存

(번역문 미비)
風稜憲府主禁亂, 職責兵曹掌禁喧

(번역문 미비)
禁喧禁亂威素立, 蛙雖蠢虫應有慴

(번역문 미비)
不然陰澇許大池, 安肯呑聲過不入

(번역문 미비)
却歎今人不如渠, 喙喙爭鳴反惱余

(번역문 미비)
爲私爲公何足問, 如蜩如螗莫能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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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窮悟集』卷四 「雨中直兵曹 戱爲無蛙行」


형조의 연지: 16세기, 신광한(申光漢)의 시
Quote-left.png 「형조의 연못에서 즉흥으로 읊어 송 정랑에게 보여주다(秋部官池卽事 示宋正郞)」

(번역문 미비)
渴雨池塘水暴盈, 新荷無數蓋相傾

(번역문 미비)
紅蕖一朶嫣然咲, 似爲郞官媚晩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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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企齋集』卷六 「秋部官池卽事 示宋正郞」


형조의 연지: 17세기, 홍석기(洪錫箕)의 시
Quote-left.png 「형조의 연못 누각을 이 참판의 부채에 제하다(秋曹池閣 題李侍郞扇)」

(번역문 미비)
水面風生纈, 荷心雨瀉珠

(번역문 미비)
携樽池閣晩, 夏熱十分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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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晩洲遺集』卷二 「秋曹池閣 題李侍郞扇」


형조의 연지: 17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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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에 있는 연못 물이 핏빛과 같이 붉었다.

刑曹池水, 色赤如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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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1647) 3월24일(을축) 기사


호조의 연지: 16세기, 유홍(兪泓)의 시
Quote-left.png 「호조의 연지를 읊다(詠戶曹蓮池)」

바람이 불자 연꽃 향기 흩어지고, 뜰에 볕이 들어 섬돌 이끼를 데우네.
風動荷香散, 庭暄砌蘚溫

올해는 못에 비가 충분히 와, 지난해 흔적이 물에 잠겼네.
今年池雨足, 水沒去年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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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塘集』卷一 「詠戶曹蓮池」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심정진(沈定鎭)의 시
Quote-left.png 「9월 21일 숙직 중 연못 누정을 마주하고 우연히 읊다(九月念一日 直中對池亭偶吟)」

(번역문 미비)
沙池徹底動淸光, 疎柳紅亭照夕陽

(번역문 미비)
竚立却生塵外想, 不知身是戶曹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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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霽軒集』卷一 「九月念一日 直中對池亭偶吟」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유숙기(兪肅基)의 글
Quote-left.png 「불염정기(不染亭記)」

(번역문 미비)

君子雖處世應俗 而能不爲世俗所轉移 斯其所以異於衆人也 周先生以蓮之出淤泥而不染 比之君子 觀先生之隱居濂溪 濯纓自樂 則疑若離羣絶俗 果於忘世 而及其居官任職 施於爲政 則又却精密嚴恕 務盡道理 然其光霽氣像 固應隨處自若 不以應接之煩而有損也 然則先生之愛蓮而稱之以不染者 乃所以形容其一般意思也 推是道也 雖至於磨不磷涅不緇可也 其旨豈不深哉 地部有小方塘 種蓮百本 宜於暑月淸賞 而第顧無亭以臨之 歲甲子 尙書道谷趙公 判是曹 與諸郞僚謀焉 營屋數椽於塘之北 不數旬而功告訖 結搆端妙 丹雘璀璨 極幽夐蕭灑之趣 公遂命名以不染 而得李積城宜炳筆 刻板而揭之 屬不佞爲記 余惟不染之義 濂翁之發揮已盡 知己之說 本自高簡 無庸復贅 獨公命名之意 有可得以言者 地部素以腴膩稱 終日所事 不越乎米布錢帛之出納 金銀珠玉之照管 居其任者 一或踈脫 吏胥之奸弊立至 而欲留心鄙瑣 析利毫忽 事事而不放過 則如入鮑魚之肆 浸浸然久而俱化 心隨眼遷 手因物滑 或至朶頤染指 以惹簠簋之誚者 亦不甚難 於是焉登是亭而遠觀 顧厥名而思義 雖所處之近垢 所管之不雅 而能超然自持 澹然無累 如蓮之亭亭凈植 不染淤泥 則其有得於斯亭之助者 顧不大歟 噫 以公處地 黽勉從宦者 豈有他哉 以其心之不爲世所轉者在焉已矣 况公前後判是曹再耳 而月俸騶直 皆籍記而納之官 不以一物自私 亦可謂深體不染之義 而卒又以此名亭者 盖欲推己所得 勉人以君子之道也 夫君子 人中之蓮也 蓮則花中之君子也 以人中之蓮 對花中之君子 物我相得 兩忘其形 則吾不知人爲蓮耶 蓮爲人耶 聖人之不磷不緇 固不敢擬議 而濂溪之居官盡道 不失光霽氣像者 庶乎可以馴致之 斯則不染之盡頭 請以是對公命而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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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兼山集』卷七 「不染亭記」


주석


  1. 묘시(卯時) : 오전 5시에서 7시까지.
  2. 유시(酉時) : 오후 5시에서 7시까지.
  3. 남소(南所): 오위(五衛)의 위장(衛將)이 숙위(宿衛)하던 위장소(衛將所)의 하나로, 창덕궁의 금호문(金虎門)과 경희궁의 개양문(開陽門) 안에 있었는데, 궁궐의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남소라 불렸다.
  4. 궁궐 호위하는 관소: 원문의 '구진사(句陳司)'. 궁궐을 호위하는 금군(禁軍)을 말한다. '구진(句陳)'은 별자리 이름으로 자미궁(紫微宮)을 호위하는 별이다.
  5. 범의 두상: 후한(後漢)의 반초(班超)가 어린 시절 관상가가 “그대는 제비의 턱에 범의 머리로 날아서 고기를 먹는 상이니, 이는 만리후에 봉해질 상이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6. 분서(粉署): 하얗게 벽을 칠한 관청이라는 뜻으로 중국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인데, 우리나라는 의정부 및 중앙 관서를 뜻한다.
  7. 동룡문(銅龍門): 창경궁 세자전 옆에 있던 문이다.
  8. 금마문(金馬門): 창덕궁 후원에 있던 문이다.
  9. 투필(投筆): 붓을 던진다는 말로, 종군(從軍)을 뜻한다. 후한(後漢)의 명장 반초(班超)가 젊었을 때 집이 가난하여 글씨를 써 주는 품팔이 생활을 하다가 붓을 던지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별다른 지략이 없다면 부개자(傅介子)나 장건(張騫)을 본받아 이역에 나아가 공을 세워 봉후가 되어야지, 어찌 오래도록 필연(筆硯) 사이에만 종사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더니, 훗날 서역(西域)에 나아가 공을 세워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10. 정기(正奇): 병법(兵法)의 용어로서, 정면으로 접전을 벌이는 것을 ‘정(正)’이라 하고 매복(埋伏)이나 기습(奇襲) 등의 방법을 쓰는 것을 ‘기(奇)’라고 한다.
  11. 인청(寅淸): 『서경』 「순전(舜典)」에서 후대의 예조(禮曹)에 해당하는, 종묘(宗廟) 제관(祭官)의 장(長)인 질종(秩宗)에게 "밤낮으로 공경히 일을 하되 마음이 곧아야 정신이 맑아서 일을 잘할 수 있으리라(夙夜惟寅 直哉惟淸)."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언행이 신중하고 마음가짐이 청정한 사람을 가리킨다.
  12. 삼원(三元): 음력 정월 초하루로.
  13. 이 작은 관청은 해를 넘겨 이제야 중건되었네: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다시 중건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14. 본디 서산에 상쾌한 기운 많아 늘 바라보매 돌아가고픈 정 없어라: 원문의 '歸情'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고 싶은 마음이다. 곧 인왕산을 늘 가까이 대하고 있으므로 서울 한복판에 있음에도 탈속의 정취가 많기 때문에 굳이 전야로 돌아갈 마음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서산의 상쾌한 기운'은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의 고사이다. 왕휘지는 성품이 본디 잗단 세속 일에 전혀 얽매임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환충(桓沖)의 기병 참군(騎兵參軍)으로 있을 적에 한번은 환충이 그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부(府)에 있은 지 오래되었으니, 요즘에는 의당 사무를 잘 알아서 처리하겠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쳐들고 수판으로 뺨을 괴고는 엉뚱하게도 "서산이 이른 아침에 상쾌한 기운을 불러온다(西山朝來 致有爽氣耳)."라고 했다. 이 고사에서 만들어진 말로, 전하여 세속 일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히 유유자적하는 풍도를 가리킨다. 『晉書』卷80 「王徽之列傳」
  15. 연명이 어찌 천고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랴 나 또한 희황 이전의 사람: 도연명이 자엄등에게 주는 글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내 나이 쉰이 넘었는데, 젊어서는 곤궁하였다. 늘 집안 일로 동분서주하였으며, 성미는 강직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세상 사람들과 어긋남이 많았다.……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 누워 시원한 바람이 선들 부는 때를 만나면 스스로 복희 시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吾年過五十 少而窮苦 每以家弊 東西遊走 性剛才拙 與物多忤……五六月中 北窓下臥 遇涼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라고 한 말에 근거를 둔 표현이다. 『陶淵明集』卷7 「與子儼等疏」
  16. 멀리 흘러가: 이에 해당하는 원문 ‘조종(朝宗)’은 원래 제후가 천자에게 가서 뵙는 것으로 봄에 뵙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뵙는 것을 종(宗)이라 하는데, 강물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 역시 제후가 천자국에 가는 것과 같다 하여 조종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