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xMinistriesOfJoseon
red
목차
- 1 육조거리와 출퇴근 풍경
- 2 호조 서리 이윤선의 업무와 일상
- 3 예조 낭관 권상일의 장생전 수리 일지
- 4 병조에서 이조의 낭관으로, 윤기의 이상과 현실
- 5 육조 당상, 그 빛과 그늘
- 6 봉심(奉審)과 회창(回倉) 그리고 순심(巡審), 출장을 빙자한 외유
- 7 연지(蓮池)와 누정(樓亭), 휴식과 위안의 공간
- 7.1 예조의 건립: 15세기, 성현(成俔)의 글
- 7.2 예조의 낭관청: 17세기, 이정귀(李廷龜)의 시
- 7.3 예조의 풍경: 17~18세기, 홍세태(洪世泰)의 시
- 7.4 예조의 풍경: 18세기, 이시항(李時恒)의 시
- 7.5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 7.6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 7.7 병조의 누정: 16세기, 윤두수(尹斗壽)의 시
- 7.8 병조의 연지: 17세기, 이수광(李睟光)의 시
- 7.9 병조의 연지: 17세기, 김육(金堉)의 시
- 7.10 병조의 연지: 18세기, 정간(鄭榦)의 시
- 7.11 병조의 연지: 19세기, 임천상(任天常)의 시
- 7.12 형조의 연지: 16세기, 신광한(申光漢)의 시
- 7.13 형조의 연지: 17세기, 홍석기(洪錫箕)의 시
- 7.14 호조의 연지: 16세기, 유홍(兪泓)의 시
- 7.15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심정진(沈定鎭)의 시
- 7.16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유숙기(兪肅基)의 글
- 8 주석
육조거리와 출퇴근 풍경
「남소(南所)[1]에서 감회를 쓰다(南所寫懷)」 궁궐에 새벽빛 밝아오니 고관들 조정으로 달려가네. |
||
출처: 『於于集後集』卷二 「南所寫懷」 |
호조 서리 이윤선의 업무와 일상
예조 낭관 권상일의 장생전 수리 일지
병조에서 이조의 낭관으로, 윤기의 이상과 현실
육조 당상, 그 빛과 그늘
봉심(奉審)과 회창(回倉) 그리고 순심(巡審), 출장을 빙자한 외유
동대문 밖 인가의 철거와 풍수설: 16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동대문(東大門) 밖에 조종조부터 있었던 오래된 인가(人家)를 이번에 문을 막고 있는 산줄기를 점거하였다고 하여 모두 철거시키라고 하였습니다. 풍수설(風水說)이 성인(聖人)의 경전(經典)에는 있지 않은 것이니, 진실로 성주(聖主)로서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임금이 덕을 닦으면 하늘에다 영명(永命)을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도(道)를 어기고 덕을 손상시키면 스스로 위망(危亡)에 이를 것인데 풍수설이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
||
출처: 『명종실록』6권, 명종 2년(1547) 8월13일(신묘) 기사 |
연지(蓮池)와 누정(樓亭), 휴식과 위안의 공간
예조의 건립: 15세기, 성현(成俔)의 글
지금 예조는 바로 예전의 삼군부(三軍府)이다. 정삼봉(鄭三峯)이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을 맡았을 때 의정부의 제도를 보고 말하기를, "정부와 군부는 일체이다." 라고 하고 드디어 그 제도에 의하여 만드니 높다랗게 동서가 상대가 되어 그 청사가 굉장한 것이 다른 관부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뒤에 삼군부를 혁파하고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여 군무를 맡기지 않고, 예조로써 오례(五禮)를 맡아보게 하고 또 다른 나라의 사신을 대접하게 하니, 그 임무가 중대하여 그 부(府)를 예조로 삼고, 중추원은 도리어 예조의 남쪽 곁채에 우거(寓居)하였다. 경복궁 서쪽 가에 수맥(水脈)이 많은데, 경회루의 연못 물은 비록 옛날 중국의 곤명지(昆明池)ㆍ태액지(太液池)라도 이보다 좋지 못할 것이다. 서문 밖에 샘이 있어 넘쳐 흐르니, 얼음과 같이 맑고 차가워 사람들이 모두 쪽[藍]을 물들이기 때문에 쪽샘[藍井]이라 불렀다. 예조의 우물도 또한 맑고 깨끗하고 마르지 않아 흘러서 큰 못을 이루니 비록 몹시 가물어도 한결같았다. 못 남쪽에 조그마한 땅이 중추부로 뻗어서, 수초가 우거지고 더럽더니 금상(今上) 기미년에 중추부에서 아뢰기를, “개 이빨처럼 우리 관아에 들어오니, 마땅히 분할하여 우리 못으로 해야겠습니다.” 하니, 예조가 이르기를, “외국 사람을 대접하는 곳을 좁게 해서는 안 된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임금이 승지와 내관 등에게 물어서 쪼개어 나누어주니, 중추부에서 그 땅을 파서 서지(西池)를 만들고, 대청을 개축하고 대청에 연이어 서헌(西軒)을 만들고, 돌기둥을 물 속에 세우니 아로새겨지는 그림자가 물결 위에 떨어지고, 서쪽은 산봉우리가 높고 집들이 좋고 나무가 빽빽하여 풍경이 서울에서 제일이었다. 그 밑에 있는 사헌부와 옛 병조ㆍ형조ㆍ공조ㆍ장예원(掌隸院)에도 모두 못이 있어 연꽃을 심었고, 동쪽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에는 비록 못이 있으나 서쪽 못보다는 훌륭하지 못하였다. |
||
출처: 『慵齋叢話』卷十 |
예조의 낭관청: 17세기, 이정귀(李廷龜)의 시
「예부에서 낭관청을 중건하고 풍악을 연주한 후 간소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낭료들과 즉흥적으로 읊다(禮部重建郞官廳 閱樂後仍作小酌 酒席與郞僚口占)」 남궁에서 잔치 풍악 울리며 인청(寅淸)[9]이 모이니, 절후는 삼원(三元)[10]에 가까워서 고운 햇살이 밝아라. |
||
출처: 『月沙先生集』卷十七 「禮部重建郞官廳 閱樂後仍作小酌 酒席與郞僚口占」 |
예조의 풍경: 17~18세기, 홍세태(洪世泰)의 시
「김참봉, 홍진사와 함께 예조 뒷산에 오르다(同金參奉 洪進士。登南宮後岡)」 (번역문 미비) |
||
출처: 『柳下集』卷三 「同金參奉 洪進士。登南宮後岡」 |
예조의 풍경: 18세기, 이시항(李時恒)의 시
「예조 낭관으로 옮겨 임명되어 본사(本司)에서 숙직하다(移拜春曹郞 直宿本司)」 (번역문 미비) |
||
출처: 『和隱集』卷三 「移拜春曹郞 直宿本司」 |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예조에 근무하며 우연히 읊다(直禮曹偶吟)」 광화문 앞이 바로 예조이니, 낭관의 재미는 극히 쓸쓸하네. |
||
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直禮曹偶吟」 |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예조에 입직한 날, 인왕산을 마주해 한가로이 4수를 짓다(直春曹日 對仁王山 漫成四絶)」 인왕산 솟은 바위 서울을 진무하니, 구름 속 기봉이 그림처럼 산뜻해라. |
||
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直春曹日 對仁王山 漫成四絶」 |
병조의 누정: 16세기, 윤두수(尹斗壽)의 시
「병조의 작은 누대에서 우연히 시를 짓다(兵曹小樓偶題)」 별을 보고 갔다가 별을 보고 돌아오니, 봄이 다 저물도록 술 한 잔 할 겨를 없네. |
||
출처: 『梧陰先生遺稿』卷一 「兵曹小樓偶題」 |
병조의 연지: 17세기, 이수광(李睟光)의 시
「병조 청사 뒤쪽 작은 못이 깊고 검푸른데, 거기에 연꽃 몇 송이가 있어(騎曹廳後小池深黑中有種荷數朶)」 누가 섬돌 앞 한 자락 사초를 파헤쳤나, 못 속에 담긴 물이 웅덩이도 못 채우네. |
||
출처: 『芝峯先生集』卷四 「騎曹廳後小池深黑中有種荷數朶」 |
병조의 연지: 17세기, 김육(金堉)의 시
「달밤에 병조에 입직하다(月夜直騎省)」 백합꽃 피어 있고 파초잎 기다란데, 비 온 뒤라 못가 누각 여름에도 서늘하네. |
||
출처: 『潛谷先生遺稿』卷二 「月夜直騎省」 |
병조의 연지: 18세기, 정간(鄭榦)의 시
「병조 당상대청 뒤에 네모진 못이 있고, 못에는 연꽃이 못가에는 창포가 둑에는 수양버들이 있어, 마침내 ‘淸’자 운으로 읊어 화답을 구하다(騎省正衙後有方塘 塘有芙蕖 渚有菖蒲 堤有垂柳 遂用淸字 詠以求和)」 (번역문 미비) |
||
출처: 『鳴臯先生文集』卷一 「騎省正衙後有方塘 塘有芙蕖 渚有菖蒲 堤有垂柳 遂用淸字 詠以求和」 |
병조의 연지: 19세기, 임천상(任天常)의 시
「비오는 가운데 병조에 입직해 있으면서 장난삼아 ‘무와행’을 짓다(雨中直兵曹 戱爲無蛙行)」 (번역문 미비) |
||
출처: 『窮悟集』卷四 「雨中直兵曹 戱爲無蛙行」 |
형조의 연지: 16세기, 신광한(申光漢)의 시
「형조의 연못에서 즉흥으로 읊어 송 정랑에게 보여주다(秋部官池卽事 示宋正郞)」 (번역문 미비) |
||
출처: 『企齋集』卷六 「秋部官池卽事 示宋正郞」 |
형조의 연지: 17세기, 홍석기(洪錫箕)의 시
「형조의 연못 누각을 이 참판의 부채에 제하다(秋曹池閣 題李侍郞扇)」 (번역문 미비) |
||
출처: 『晩洲遺集』卷二 「秋曹池閣 題李侍郞扇」 |
호조의 연지: 16세기, 유홍(兪泓)의 시
「호조의 연지를 읊다(詠戶曹蓮池)」 바람이 불자 연꽃 향기 흩어지고, 뜰에 볕이 들어 섬돌 이끼를 데우네. |
||
출처: 『松塘集』卷一 「詠戶曹蓮池」 |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심정진(沈定鎭)의 시
「9월 21일 숙직 중 연못 누정을 마주하고 우연히 읊다(九月念一日 直中對池亭偶吟)」 (번역문 미비) |
||
출처: 『霽軒集』卷一 「九月念一日 直中對池亭偶吟」 |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유숙기(兪肅基)의 글
「불염정기(不染亭記)」 (번역문 미비) |
||
출처: 『兼山集』卷七 「不染亭記」 |
주석
- ↑ 남소(南所): 오위(五衛)의 위장(衛將)이 숙위(宿衛)하던 위장소(衛將所)의 하나로, 창덕궁의 금호문(金虎門)과 경희궁의 개양문(開陽門) 안에 있었는데, 궁궐의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남소라 불렸다.
- ↑ 궁궐 호위하는 관소: 원문의 '구진사(句陳司)'. 궁궐을 호위하는 금군(禁軍)을 말한다. '구진(句陳)'은 별자리 이름으로 자미궁(紫微宮)을 호위하는 별이다.
- ↑ 범의 두상: 후한(後漢)의 반초(班超)가 어린 시절 관상가가 “그대는 제비의 턱에 범의 머리로 날아서 고기를 먹는 상이니, 이는 만리후에 봉해질 상이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 ↑ 분서(粉署): 하얗게 벽을 칠한 관청이라는 뜻으로 중국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인데, 우리나라는 의정부 및 중앙 관서를 뜻한다.
- ↑ 동룡문(銅龍門): 창경궁 세자전 옆에 있던 문이다.
- ↑ 금마문(金馬門): 창덕궁 후원에 있던 문이다.
- ↑ 투필(投筆): 붓을 던진다는 말로, 종군(從軍)을 뜻한다. 후한(後漢)의 명장 반초(班超)가 젊었을 때 집이 가난하여 글씨를 써 주는 품팔이 생활을 하다가 붓을 던지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별다른 지략이 없다면 부개자(傅介子)나 장건(張騫)을 본받아 이역에 나아가 공을 세워 봉후가 되어야지, 어찌 오래도록 필연(筆硯) 사이에만 종사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더니, 훗날 서역(西域)에 나아가 공을 세워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 ↑ 정기(正奇): 병법(兵法)의 용어로서, 정면으로 접전을 벌이는 것을 ‘정(正)’이라 하고 매복(埋伏)이나 기습(奇襲) 등의 방법을 쓰는 것을 ‘기(奇)’라고 한다.
- ↑ 인청(寅淸): 『서경』 「순전(舜典)」에서 후대의 예조(禮曹)에 해당하는, 종묘(宗廟) 제관(祭官)의 장(長)인 질종(秩宗)에게 "밤낮으로 공경히 일을 하되 마음이 곧아야 정신이 맑아서 일을 잘할 수 있으리라(夙夜惟寅 直哉惟淸)."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언행이 신중하고 마음가짐이 청정한 사람을 가리킨다.
- ↑ 삼원(三元): 음력 정월 초하루로.
- ↑ 이 작은 관청은 해를 넘겨 이제야 중건되었네: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다시 중건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 ↑ 본디 서산에 상쾌한 기운 많아 늘 바라보매 돌아가고픈 정 없어라: 원문의 '歸情'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고 싶은 마음이다. 곧 인왕산을 늘 가까이 대하고 있으므로 서울 한복판에 있음에도 탈속의 정취가 많기 때문에 굳이 전야로 돌아갈 마음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서산의 상쾌한 기운'은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의 고사이다. 왕휘지는 성품이 본디 잗단 세속 일에 전혀 얽매임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환충(桓沖)의 기병 참군(騎兵參軍)으로 있을 적에 한번은 환충이 그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부(府)에 있은 지 오래되었으니, 요즘에는 의당 사무를 잘 알아서 처리하겠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쳐들고 수판으로 뺨을 괴고는 엉뚱하게도 "서산이 이른 아침에 상쾌한 기운을 불러온다(西山朝來 致有爽氣耳)."라고 했다. 이 고사에서 만들어진 말로, 전하여 세속 일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히 유유자적하는 풍도를 가리킨다. 『晉書』卷80 「王徽之列傳」
- ↑ 연명이 어찌 천고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랴 나 또한 희황 이전의 사람: 도연명이 자엄등에게 주는 글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내 나이 쉰이 넘었는데, 젊어서는 곤궁하였다. 늘 집안 일로 동분서주하였으며, 성미는 강직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세상 사람들과 어긋남이 많았다.……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 누워 시원한 바람이 선들 부는 때를 만나면 스스로 복희 시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吾年過五十 少而窮苦 每以家弊 東西遊走 性剛才拙 與物多忤……五六月中 北窓下臥 遇涼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라고 한 말에 근거를 둔 표현이다. 『陶淵明集』卷7 「與子儼等疏」
- ↑ 멀리 흘러가: 이에 해당하는 원문 ‘조종(朝宗)’은 원래 제후가 천자에게 가서 뵙는 것으로 봄에 뵙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뵙는 것을 종(宗)이라 하는데, 강물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 역시 제후가 천자국에 가는 것과 같다 하여 조종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