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의생애와주변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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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1]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2]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황순원이 시기별로 만난 주변인물과 그에 따른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였다.
한국 거주(1915~1934)
일본 유학(1934~1939)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하였다.
1934년 6월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동경학생예술좌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모토로 황순원을 비롯해 주영섭, 이진순, 이해랑, 허남실, 김영수, 김동원 등 일본대, 와세다대, 법정대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이었지만 단순하게 아마추어 모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문예부, 연출부, 연기부, 서무부를 두어 기존 연극조직과 같이 실제적이고 학구하는 전문 극단을 지향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신극을 접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깊이 있게 고민하며 실천에 옮겼다. '조선의 신극 수립은 창작극'에서 비롯한 그들의 연극 정신답게 유치진의 <소>, 주영섭의 <나무>를 선보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지주의 횡포를 참지 못해 불 지르는 장면이 계급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어 유치진은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주영섭, 박동근 등을 좌익사상범으로 검거하고 이들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조선동경예술좌의 간부 박동근, 이서향, 주영섭 등이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 시도하였고, 이 때문에 좌익운동을 꾀했다는 죄가 되었다. 그 후로 동경학생예술좌는 1940년 창립 6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
동경학생예술좌 제 1회 공연 입장권
도쿄학생예술좌는 1939년 8월 좌익연극단 사건에 연루되어 주영섭, 박동근 등이 구금당하면서 6년가량의 활동 끝에 해체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술좌의 문예부 소속으로 소설가 황순원과 극작가 김영수가 참가했던 것이다. 황순원은 평양의 장로교회 계통 숭실학교 출신으로 원래 시를 썼다. 황순원의 시집 <방가>(放歌·1934)와 <골동품>(1936)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발행했다. 그는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인 이상도 도쿄학생예술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이상과 황순원은 서울의 ‘삼사문학’과 학생예술좌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특기사항도 있다.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사회주의에 받고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황순원의 “동경학생예술좌” 활동에 주목하면 “동경학생예술좌”가 좌익적 성향을 내포하는 운동단체였다는 점을 들어, 당시 황순원이 좌익적 성향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학가 동맹 가입 이력”,“국민보도연맹”소속 이력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첫 시집 내용과 일본 유학 시절의 “동경학생예술좌”의 이념적 성향을 통해 그의 정치적 사상을 파악하 수 있다.
실제로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은 “동경학생예술좌”를 근거로 해서 유학생 문학청년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측면이 있고 두 번에 걸친 시집의 출간도 모두 이런 연관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중앙일보」에 시를 게재하는 과정,<<삼사문학>>, <<창작>>, <<작품>> 등의 동인이 되는 과정도 동경 유학 시절의 활동이 연장된 것으로 1931년 <<동광>>에 작품을 게재하고 등단한 이후, 황순원이 주목받는 젊은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삼문사”에서 출간한 첫 시집 <방가>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집 <방가>의 출간 때문에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이나 구류되었다는 것은 이 시집의 파장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검열을 피해서 일본에서 시집을 출간했다는 혐의 자체가 황순원의 첫 시집이 놓인 당시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으로 시집 <방가>는 식민지 당국에게 단 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그것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출판의 주체가 동경 학생예술좌 문예부”이고 인쇄소가“삼문사”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월남 후(1946~)
경희대학교(1957~1980)
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
- "소설가로 충분하다."
황순원은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 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세속에 대한 잡다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았던 황순원은 신문 연재소설 청탁을 거절했으며, 어떤 대담 요청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잡문도 쓰지 않았다. 이 시기 황순원은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과 『너와 나만의 시간』, 『탈』,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 제자들에 대한 태도
황순원은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ㆍ조세희ㆍ조해일ㆍ김용성ㆍ한수산ㆍ고원정ㆍ박덕규ㆍ김형경, 시인 박이도ㆍ이성부ㆍ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ㆍ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 제자들과의 교류
1. 작품을 통한 교류
1)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출간(1997.09.05.)
저자 : 황순원, 전상국, 김용성, 조해일, 조세희, 이유범, 고원정, 이연철, 유재주,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황순원과 제자들인 경희대 국문과 출신 작가들이 네가지 테마별 작품을 엮은 소설집이다. 「소리 그림자」, 「잃어버린 사람들」 등 원로문인의 작품과 해설을 싣고 전상국, 조세희,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 작가들의 작품 1편씩과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황순원이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낸다면, 과연 어떤 책이라야 어울릴 것인가? 우리들 만남의 중심에 선생이 계시고, 그리고 문학이 있으니, 양자를 모나지 않게 아우르면서, 우리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도움이 될 그런 책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선생과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라면, 특히 우리 다음의 세대와도 멋지게 연계될 책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
-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中
2) 「소년, 소녀를 만나다」 출간(2016.05.27.)
저자 : 황순원, 구병모, 손보미, 전상국, 서하진, 김형경, 이혜경, 노희준, 조수경, 박덕규
2015년은 1915년에 태어난 작가 황순원의 탄생 100주기였다. 이를 기념해 황순원 오마주 「소나기」 이어쓰기 사업이 열렸다. 양평에 위치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주최한 행사로, 작가 황순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작가 5인의 「소나기」 속편을 『대산문화』(대산문화재단)에 싣는 것으로 시작해, 황순원이 23년 6개월 동안 재직했던 경희대학교 출신 젊은 작가 4인도 「소나기」 속편을 소나기마을 소식지 『소나기마을』에 발표하였다. 6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감동을 고스란히 잇는 아홉 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소나기」의 풋풋하고도 가슴 저리는 첫사랑, 그 후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 뜻깊은 결실을 모아 황순원문학촌 촌장이자 문학평론가 김종회의 책임편집으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3)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출간(2018. 07. 13.)
저자 : 김용성, 김종회, 신봉승, 박이도, 안영, 김형경, 황동규, 정호승, 이혜경, 전상국 외 多
황순원 작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소나기마을 이야기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는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총 7부로 나뉘어져 74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필자는 구효서, 김병익, 김원일, 오정희, 유종호, 윤대녕, 한수산 등 모두 우리 문단에 수려한 이름을 가진 문인들인데, 그중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분들도 있다. 각기의 글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숨은 일화와 또 가슴 속에 숨겼던 생각들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2. 공간을 통한 교류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작가 황순원 선생님의 삶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평군과 경희대학교가 힘을 모아 조성한 테마파크 공간.
건립 배경 : 황순원은 고향이 이북이지만 생애의 3분의2를 남한 땅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으며 한편으로는 23년 6개월 동안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봉직하면서 많은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을 길러내었다. 황순원이 2000년 9월 15일 타계하자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이 선생의 문학을 온 국민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합한 공간을 찾아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황순원의 대표작인 「소나기」에 착안하여 이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소나기」 속의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 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작품의 장소적 배경을 경기도 양평군 관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희대학교는 양평군과 협의하여 2003년 6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소나기마을'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
- 촌장 김용성과 김종회
황순원의 제자 김용성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가 『한국일보』 공모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한 뒤, 황순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1962년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하게 된다. 이후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정년퇴임 후 별세 전까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으로 일하게 된다.
황순원의 제자 김종회는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