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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2월 8일 (화) 00:39 판

「學而」, 학이


一章, 01장


원문

Quote-left.png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Quote-right.png


『논어집주(論語集註)』

○學之爲言 效也. 人性皆善이나 而覺有先後하니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라야 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習 鳥數飛也 學之不已 如鳥數飛也.
○說 喜意也 旣學而又時時習之 則所學者熟而中心喜說하여 其進 自不能已矣리라.
○程子曰, "習 重習也 時復思繹하여 浹洽於中이면 則說也니라." 又曰, "學者 將以行之也 時習之 則所學者在我이니라."
○謝氏[1]曰, "時習者 無時而不習이니 坐如尸 坐時習也 立如齊 立時習也니라."[2]

○朋 同類也 自遠方來近者可知니라
○程子曰, "以善及人하여 而信從者衆이라 可樂이니라." 又曰, "說 在心하고 主發散이니 在外니라."

○慍 含怒意. 君子 成德之名이라.
○尹氏[3]曰, "學 在己하고 知不知 在人하니 何慍之有리오."
○程子曰, "雖樂於及人이나 不見是而無悶이라야 乃所謂君子니라. 愚謂 及人而樂者 順而易하고, 不知而不慍者 逆而難이라. 故 惟成德者能之. 然이나 德之所以成 亦由學之正, 習之熟, 說之深而不已焉耳니라."
○程子曰, "樂 由說而後得이니 非樂이면 不足以語君子니라."

『논어정의(論語精義)』 「학이(學而)」 一章


『논어혹문(論語或問)』 「학이(學而)」 一章


『논어고의(論語古義)』

○ 學, 效也, 覺也. 考諸古訓, 驗之見聞, 有所效法而覺悟也. 習, 溫習也. 說, 悅同, 喜也. 言旣學矣, 而時時溫習, 則智開道明, 猶大寐頓覺, 跛者忽起, 而有不堪其悅者矣. 蓋道之浩浩, 唯學得以盡之, 而非習, 則亦不能造其極, 故聖人以學爲貴, 而習爲要也.
○朋, 同類也. 其學足以被乎遠, 則君子善與人同之志得遂, 而足以見我德之不孤, 何樂如之.
○慍, 怒也. 君子, 成德之稱, 言德備於己, 則富貴爵祿, 毁譽得喪, 一切無所動乎其中, 故雖人不知而輕賤之, 毫無所怒, 學之至也. 蓋其道愈大, 則識之者愈少, 是君子之所以不慍也.
○此夫子自言其意中之事, 以勸勉人也. 言適其心則悅, 遂其願則樂, 皆人情之所同然, 而人未知誠悅樂也. 君子者, 人之所仰慕, 而人未知識君子也. 故學而時習, 則所得日熟, 是爲誠悅矣. 有朋自遠方來, 則善與人同, 是爲誠樂矣. 而至於上不怨天, 下不尤人, 無入而不自得焉, 則不啻免爲鄕人, 是爲誠君子矣. 而朋來之樂, 不慍之君子, 皆由學而得焉, 則學之爲功. 不其大乎. 夫子所以爲天地立道, 爲生民建極, 爲萬世開太平者, 亦學之功也. 故論語以學之一字, 爲一部開首, 而門人以此章置諸一書之首, 蓋一部小論語云.

『어맹자의(語孟字義)』

〈學, 凡四條 가운데 一條〉
○學字, 效也, 覺也. 有所效法而覺悟也. 按古學字卽今效字. 故朱子集註曰, "學之爲言, 效也." 白虎通曰, "學, 覺也. 覺悟所不知也." 學字之訓, 兼此二義, 而後其義始全矣.
○所謂效字, 猶學書者初只得臨摹法帖效其筆意點劃. 所謂覺字, 猶學書旣久, 而後自覺悟古人用筆之妙. 非一義之所能盡也.
○集註曰, "後覺者, 必效先覺之所爲." 又含覺字之意在, 學者多不察.


二章, 02장


「爲政」, 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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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謝氏: 사량좌(謝良佐). 1050∼1103. 자(字)는 顯道, 이정(二程)의 문하에서 배웠다. 유초(游酢), 여대림(呂大臨), 양시(楊時)와 함께 정문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일컬어졌으며, 상채학파(上蔡學派)의 비조이며 상채선생(上蔡先生)으로 불렸다.
  2. 坐如尸, 立如齊: 『禮記』「曲禮」
  3. 尹氏: 윤순? 윤돈?(尹焞). 1071-1142년. 북송 하남(河南) 사람. 자는 언명(彦明) 또는 덕충(德充)이고, 호는 화정(和靖)이며, 윤원(尹源)의 손자다. 젊었을 때 정이(程頤)를 사사(師事)했다. 원우(元祐) 4년(1089) 거인(擧人)이 되어 응거(應擧)했는데, 시제(試題)가 원우(元祐)의 제신(諸臣)들을 주륙(誅戮)해야 한다는 것을 보고 포기하고 돌아와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흠종(欽宗) 정강(靖康) 초에 종사도(種師道)가 천거하여 경사(京師)에 와 화정처사(和靖處士)란 호를 하사받았다. 고종(高宗) 소흥(紹興) 초에 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와 예부시랑(禮部侍郞) 겸 시강(侍講), 휘유각대제(徽猷閣待制) 등을 역임했다. 상서하여 금나라와의 화의를 극력 반대하다가 치사(致仕)를 요청했다. 학문적으로는 내성함양(內省涵養)을 중시하고 박람(博覽)을 추구하지 않았다. 저서에 『논어맹자해(論語孟子解)』와 『화정집(和靖集)』, 『문인문답(門人問答)』이 있다. -임종욱, 김해명(2010), 『중국역대인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