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24번째 줄: |
324번째 줄: |
| <br/><br/> | | <br/><br/> |
| | | |
− | =성북동과 직접 관련은 없는 작품= | + | ='''성북동과 직접 관련이 없는 작품'''= |
| | | |
| <br/><br/> | | <br/><br/> |
| + | |
| ='''주석'''= | | ='''주석'''= |
| <div style="float:center; background:black; width:100%; height:3px; text-align:right; padding:2px 2px 2px;"></div><br/> | | <div style="float:center; background:black; width:100%; height:3px; text-align:right; padding:2px 2px 2px;"></div><br/> |
| <references/> | | <references/> |
2022년 5월 25일 (수) 15:01 판
성북동 소재 작품 목록으로 가기
성북동과 직접 관련된 작품
遊北渚洞記
담당자: 진태현(번역자: 류인태)
遊李氏園未數日, 餘窩睦幼選, 賞花北渚洞歸, 直抵余, 津津說北渚勝不離口, 且曰: “度了明日花且凋, 公若有意乎? 雖日日往, 願從之, 人或謂之狂, 當不恤也.” 余挽以宿, 遲明傡馬出, 李學士公會季受兄弟及敍恭弘選弘遠輩從. 出惠化門, 循北城以折未數里, 洞呀然以開, 卽所謂北渚也.
용산龍山의 이씨李氏 정원
【장소】에서 노닌 지 며칠 안 되어,
여와餘窩 목유선睦幼選【인물】[1]이 북저동北渚洞
【장소】에서 꽃구경을 하고 돌아와 곧장 내게 이르러서는, 북저동
【장소】의 훌륭한 풍광을 흥미진진하게 말함이 입에서 떠나질 않더니, 이윽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내일이 지나면 꽃이 시들테니, 공은 가보실 뜻이 있습니까? 연이어 가는 것이라 하더라도 따라가고자 하니, 남들이 혹 미쳤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그를 만류해 묵게 하고, 날이 밝길 기다려 말을 나란히 해서 문을 나섰는데, 학사學士
이공회李公會【인물】[2]와
이계수李季受【인물】[3] 형제 및 채서공蔡敍恭
【인물】과 채홍선蔡弘選
【인물】,
채홍원蔡弘遠【인물】 등이 뒤따랐다. 혜화문惠化門
【장소】을 나와 북쪽 성을 따라 길을 꺾은지 채 몇 리 되지 않아 동네가 활짝 열리니, 이른바 북저동
【장소】이다.
纔入洞。有壇面南四出陛。繚以短墻。其門彤。四之。每歲春三月祭先蚕云。行可百許步。居人橋其川。橋下衆水所會。水汹汹有聲。橋之南有谷。不知淺深。桃花團作錦障。兩厓通紅。心以爲必有異也。然姑捨之。取直路行無幾。又度橋抵御營屯。庭宇頗寬。屯之外小塘甃以石。制雖略繁。花倒水其影不定。稍迤巖壁窿然。如屛如障。巖之下莎與沙半之。意行意坐俯視之。村家點點分麓。大抵以桃花爲藩籬。隱約露出者。或牕之半。或簷之角也。
동으로 막 들어서면 남쪽을 향하고 사방에 오르내리는 섬돌이 놓인 단이 나오는데, 낮은 담이 두르고 있다. 문은 붉게 사방을 칠했다. 매년 봄 3월에 이곳에서 누에 신 선잠에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100걸음쯤 가면 거주하는 백성이 시내에 설치한 다리가 나온다. 다리 아래는 여러 물줄기가 모이는 곳이라서 물이 소리를 내며 세차게 흐른다. 다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는 깊이를 알 수 없는데, 복숭아꽃 무더기가 비단 장막처럼 둘러 있어 양쪽 시냇가가 온통 붉다. 반드시 기이한 것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러나 우선 놓아둔 채로 곧은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니, 얼마 가지 않은 곳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 어영청 성북둔에 닿았다. 건물과 뜰이 자못 넓었다. 둔 밖에 있는 작은 연못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그 형식은 비록 간략했으나, 만발한 꽃이 물에 비춘 그림자 모양이 일정하지 않았다. 약간 비스듬하게 이어진 바위 벼랑이 불룩하게 솟아 있어 마치 병풍이나 장막처럼 보였다. 바위 아래 절반은 잔디이고 절반은 모래다. 마음 내키는 대로 가다가 앉았다가 하면서 아래를 굽어보니, 촌가가 점을 찍은 듯이 기슭에 벌여 있다. 대체로 복숭아꽃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어 그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창문 반쪽이거나 처마 끝이다.
都人士自達官。至閭巷民庶。遊賞如不及。車馬殷殷轟轟。歌呼迭作。間以笙簫。國家百年昇平之象。盡在是矣。余靜者。不耐閙熱。與諸君還取來路。尋向所稱橋南谷者。谷窈以容。水益淸花益盛。僊僊然兩脚輕擧。不知衰且病也。屢度溪危。及城根而止。有茅茨四五間。蕭灑可愛。主人方釀酒。香聞于外。公會買數盞飮。亟稱曰美哉。已而。餠飯自城中至。鋪席崖松下列坐以食。食訖。日已晡矣。送兒輩還。余與三子者。各賦詩一篇。待山氣向曛。復還倉屯遊人歸。獨素月在空。坐池上。煕煕然忘寢。月以色花以香。目之所寓。鼻之所觸。未知其孰多孰少也。公會興甚。典其袍買酒以飮。又各賦詩一篇。時夜可三四皷。相與歸倉舍以宿。枕席如在衆香國矣。
도성 인사들이 높은 관리에서부터 민가의 서민들까지 뒤처질세라 찾아가서 노닐며 감상하였다. 이에 마과 수레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데다 노래하고 부르는 소리가 번갈아 들려오고 생황과 퉁소 소리도 간간이 섞여서 들려온다. 국가가 백 년 태평한 모습이 전부 여기에 있다. 나는 조용한 사람이라서 소란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제군과 다시 오던 길로 걸음을 돌려, 다리 남쪽에 있다고 했던 골짜기를 찾아갔다. 그 골짜기는 고요하고 넓으면서도 물도 맑고 꽃도 더욱 무성했다. 신선처럼 두 다리가 가벼워져서 늙고 병든 줄도 모를 정도였다. 몇 차례 아슬아슬하게 시내를 건넌 뒤에 성곽 끝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곳 에 네댓 칸의 초가가 있는데, 말쑥하고 깨끗하여 사랑스러웠다. 주인이 한창 술을 빚고 있어 밖으로 향기가 번졌다. 이에 공회(公會)가 술 몇 잔을 사서 마시더니 대번에 맛있다고 칭송하였다. 이윽고 성안에서 떡과 밥을 보내와서 언덕 소나무 아래에 자리를 깔고 줄지어 앉아서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아이들을 돌려보낸 뒤에 나와 세 사람이 함께 저마다 한 수씩 시를 읊으면서 산 기운이 석양에 물들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창둔으로 가보았다. 놀던 사람들은 돌아가고 흰 달만 덩그러니 허공에 떠 있는 것이었다. 연못 가에 앉아서 즐거운 마음에 잠을 잊고 있는데, 달빛이 번지고 꽃향기가 풍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달빛과 코에 풍기는 꽃향기 중에 감흥 정도가 무엇이 더하고 무엇이 덜한지 알지 못하겠다. 공회가 몹시 흥이 나서 두루마기를 저당 잡히고서 술을 사서 마셨다. 그리고 저마다 시 한 수씩을 읊다가 시간이 밤 3, 4경 무렵이 되어서야 함께 창사로 돌아가서 묵었다. 창석이 마치 중향국(衆香國)에 있는 듯이 느껴졌다.
余卧念玆洞。非今有也。我興。非昔無也。以我而尋玆洞。不過費徒御半餉之勞而曾不能一至者。以玆洞之無蟠木之容也。今乃始至焉。徘徊歎賞。有若得見其不可見者然。何其晩也。深區奧壑。懷奇抱勝。有十倍百倍於玆者何可勝道。而若不見知於人。則荒塗古今。埋沒以終焉耳。嗚呼。推是以反。奚獨山與水爲然。旣以是語餘窩。朝起感慨以書。
내가 누워서 생각해보았다. 이 골짜기가 지금에서야 생긴 것이 아니며, 나의 흥이 예전에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이 골짜기를 찾아가려면 말을 몰아 반나절 수고를 들이는 것에 불과할 뿐인데, 이전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이는 마치 반목(蟠木) 뿌리를 다듬어서 쓰이게 해주듯이 이 골짜기의 아름다움을 소개해주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찾아와서 둘러보면서 감탄하기를, 마치 볼 수 없던 곳을 보게 된 듯이 하였다. 어찌 이렇게 늦었단 말인가? 깊은 곳 으슥한 골짜기에 기이하고 빼어난 풍경을 품은 것이 이곳보다 10배나 100배쯤 많은 곳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하면, 예나 지금이나 길이 생기지 않고 황폐한 채로 매몰되고 말뿐이다. 아, 이를 미루어 돌이켜보건대, 어찌 산과 물만 홀로 그렇겠는가? 이미 이런 생각을 여와(餘窩)에게 말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감개가 일어 이를 기록해둔다.
甲辰春 同幼選...(하략)
담당자: 진태현(번역자: ○○○)
背郭斜穿逕。緣崖窈似門。
성곽 북쪽 비스듬히 이어진 길 벼랑에 기대어 있어 문처럼 그윽하네
有花皆覆水。何處可尋源。
꽃이 모두 져서 물에 떠가니 어디서 원류를 찾으려나
地勢深如此。笛聲時一喧。
지형이 이렇게 깊은 곳에 피리 소리 이따금 들리는데
娟娟今夜月。隨我入山村。
아름다운 오늘 밤 달님도 나를 좇아 산 마을로 들어가네
與樊巖公 會游北屯
담당자: 진태현(번역자: ○○○)
衆壑紛殊軆。羣峯共一門。
여러 골짜기 모양은 제각기 달라도 뭇 봉우리는 한 집안 같네
桃花自成塢。藜杖直窮源。
복숭아꽃이 절로 둑을 이루고 여장 짚고서 곧장 근원을 찾아가네
客簟連沙凈。人家有酒喧。
모래 위에 펼친 나그네 대자리 시원하고 인가의 술자리 소란하네
去城無數里。那得此深村。
도성에서 몇 리 안 되는 곳에 어찌 이리 깊은 촌마을이 있는가?
北屯月夜沼上作
담당자: 진태현(번역자: ○○○)
出東小門有述
담당자: 진태현(번역자: ○○○)
瘦馬崚𡾓屢渡川。烏巾白袷意飄然。
여윈말로 거칠고 험준한산을 지나고 여러번 개울을 건너니
오건(=문라건)과 흰옷이 나부끼어 팔랑거린다.
閉門愁髮千莖雪。出郭澄懷萬里天。
문을 닫으니 흰머리, 천갈래 나무가지에 쌓인 눈이요.
성곽을 나서니 마음이 맑아져 아득히 높은 하늘 같구나
東道烟霞期信宿。北屯桃李記前年。
동쪽길에 안개껴서 머물다가라하니
북둔의복숭아와 자두꽃이 지난날을 기억하는구나
主人病起多幽事。藜杖相須菊樹邊。
주인이 병이 있어 한가롭게 지내는 일이 많으니
[4] 지팡이 지니고 같이 국화길을 거닐자
與文初 公會遊北屯
담당자: 진태현(번역자: ○○○)
積雨初霽 爲看瀑布 出惠化門 行至貞陵遇雨 入奉國寺 得三絶
담당자: 유지훈(번역자: ○○○)
携筇東郭出。終日水聲中。
지팡이를 가지고 동곽으로 나오니. 종일 물흐르는 소리 속에
忽然山雨急。送我入琳宮。
돌연 산비가 급히 와, 나를 옥궁(선궁(仙宮)이라고도 번역됨)에 들게 하는구나.
雨過雲吐月。山靜樹橫烟。
비 지나고, 구름이 달을 토하니, 고요한 산, 나무에 안개가 가로비끼네.
寂寂羣囂息。惟聞百丈泉。
조용한 가운데 야단스런 무리(동물들은) 쉬고, 들리는 것은 백장의 시내(소리)라.
今朝東岳色。明日槽溪聲。
오늘 아침엔 동악(삼각산)의 색을 보고 내일은 조계의 소리를 듣겠구나.
九天銀瀑景。先向意中淸。
구천에 쏟아지는 은폭포의 모습이, 벌써 마음을 맑게 하는구나.
廵審都城。登木覓
담당자: 유지훈(번역자: ○○○)
籃輿穿入萬重松。
가마로 들어가보니 소나무 가득하다.
始到終南第一峯。
마침내 남쪽끝 제일봉에 다다랐다.
秋日。與菊軒,一之,趙景瑞 㻐,克卿,族叔求玉 球。出鐘巖。歷訪孫庄
담당자: 유지훈(번역자: ○○○)
畫榭秋風細雨凉。
그림같은 정자에 가을바람불고 가는 비가 차가운데
望中雲物遠含蒼。
보이는 구름과 형상마다 깊은 푸르름을 머금고 있구나
空山賓主休分辨。
빈산의 손님과 주인, ?????
暇日歌諧各短長。
매일틈틈이 맞추어 부르는 노래가락이 각각 장단이 있으니
遶洞幽泉多激石。
골짜기를 둘러싼 깊은 샘이 수없이 돌에 부딪치고
滿山寒葉更迎霜。
산에는 차가운 잎이 가득차 다시 서리를 맞이하는구나
吟詩遲却尋名境。
시를 읊는것도 더뎌 이름난 경치를 찾다보니
北渚洞
담당자: 최진용(번역자: ○○○)
北屯桃花下拈韻 同泠齋諸子
담당자: 정현진(번역자: ○○○)
北屯看桃花
담당자: 김다인(번역자: 김다인, 한국고전종합DB)
城東尺五地。花發萬林齊。
성 동쪽 매우 가까운 곳에, 온 숲 가득 일제히
꽃[5]이 피었네
불승도 곧 깨우칠 것 같고, 선원도 또렷하여 흐릿하지 않으니
서로 교차한 시내에는 ? 이끼가 모여있고, 격산의 검은 눈썹은 나직하구나
마을의 조촐한 띠집은 그림같으니, 장차 땅을 빌려 깃들것이다
日休堂記
담당자: 조성진(번역자: 류인태)
華嶽之下, 多淸邃之境, 城北洞其一. 洞有一小亭, 背巖臨流, 卽蓉庵金相國舊庄別業也. 相國扁之曰:‘日休堂’, 相公早歲立揚, 歷踐內外, 位躋將相, 民憂國計, 一念憧憧, 有可休之日乎?
북한산(華嶽)
【장소】 아래에, 맑고 깊은 경계가 많은데, 성북동城北洞
【장소】이 그중에 하나이다. 동네에 작은 누정樓亭이 하나 있는데, 큰 바위를 등뒤로 하고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니, 바로
용암蓉庵 김金 상국相國【인물】[13]의 옛 전장田庄
[14]의 별업別業
[15]이다. 상국相國께서 편액을 써서 걸기를 ‘일휴당日休堂
【장소】’이라 하였는데, 상공相公
【인물】이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장상將相의 자리까지 올라, 민생에 대한 걱정과 국가를 위한 계책에 있어 일관되게 마음을 놓지 않으셨으니, 이제는 쉬실 때가 된 것인가?
坐於草樹招提之裏, 而私意馳騖則身逸而心勞, 處於牒訴倥傯之中, 而公心周徧則身勞而心逸. 身雖逸而心勞則非所謂休也, 身雖勞而心逸則乃所謂休也. 服食器用, 適可而止, 不役於物, 辭受取予, 隨幾而行, 惟當於理, ‘無入而不自得’, 此心常休.
초수草樹가 초제招提한 속에 앉아 있으면서 사사로운 마음이 분주하게 치달으면, 몸은 편안한데 마음이 수고롭고, 첩소牒訴가 공총倥傯한 중에 처해 있으면서 공변된 마음이 두루 퍼지면, 몸은 수고로운데 마음이 편안하다. 몸은 편안한데 마음이 수고로우면 소위 ‘쉼(休)’이 아니고, 몸은 수고롭다 하더라도 마음이 편안해야 이른바 ‘쉼(休)’이라 할 것이다. 의복과 음식과 그릇과 사용하는 물건(服食器用)은 적당한 정도로 그쳐 외물에 휘둘리지 않으시며,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주는 것(辭受取予)은 기미를 따라 행하여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으시니, ‘어떤 상황에서도 자득하지 않음이 없음(無入而不自得)’
[16], 이런 마음이야말로 늘 쉼이다.
日休堂記2
담당자: 조성진(번역자: 한국고전종합DB, 조성진)
勞思休情也。有莫之然而爲者。有有所爲而爲者。有不可已而爲者。君子勞心。小人勞力。萬物勞於氣。心無休時。力有時而休。氣有休有不休。希有鳥摶扶搖九萬里而以六月息。鳶傅于天而或止於林樊。川之流不舍晝夜。不至海則不止。其在於人也。農休于秋。行旅休于夕。士之學也。俛焉日有孶孶。其仕也鞠躬盡瘁。皆畢其生而後已。然冥行者有鍾漏之譏。勇退者有江湖之憂。是知所休者力。所不能休者心也。
수고로우면 쉴 생각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 군자는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소인은 힘을 수고롭게 하며, 만물은 기를 수고롭게 한다. 마음은 쉬는 때가 없으나, 힘은 쉬는 때가 있고, 기는 쉴 때가 있고 쉬지 않을 때가 있다. 드물지만 새 중에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나 가며 6개월을 가서야 쉬는 것이 있다. 솔개는 하늘로 날아오르지만 때로 숲에서 멈추기도 한다. 시냇물이 흐르는 것은 낮과 밤을 쉬지 아니하며, 바다에 이르지 아니하면 멈추지 않는다. (이런 것은 사람에도 있는데,) 농부는 가을에 쉬고, 나그네는 저녁에 쉬고, 선비는 날마다 부지런히 배움에 힘쓰고, 벼슬할 때에는 마음과 몸을 다하여 나랏일에 이바지하다, 그 생을 다 마친 후에야 그친다. 그러하니, 벼슬길에 나가 어두운 길 가는 자들은 벼슬살이를 한다는 비웃음이 있으며, 용감히 물러난 자에게는 강호의 근심이 있으니, 이에 쉬는 것이 힘이고, 쉬지 못하는 것은 마음임을 알겠다.
丞相蓉庵公枚卜數月。力辭去位。退居于東墅舊築。有泉一絃。有峰數笏。有書一束。怡然有出塵之想。以書命章錫曰吾日日休於此。以是名吾堂。子其記之。
승상 용암공 (金炳始)
【인물】은 몇 달간 매복(枚卜)되어 있었으나, 애써 사양하고 그 자리를 떠나고 물러서서 동쪽의 옛 별장에서 지냈다. 한 줄기 샘이 있고, 몇 개의 홀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있고, 한 묶음의 책이 있었기에, 기쁘게 세속 세계를 벗어난 생각이 있었으니, 이에 편지글을 써서 나
【인물】 [17]에게 명령하시기를, "내가 날마다 이곳에서 쉬고 있으니, 이것으로서 내 집 이름으로 하고자 하네. 자네가 기문을 써 주게." 라 하시었다.
嗚呼。公契合明良。身都將相。憂虞之會。百責埤益。盖未甞一日休也。而亦未甞一日忘退也。今几舃少暇而戀主之心。如川流之赴海。憂世之志。如農夫之望秋。顧安能浩然若行旅之得歸乎。況公之不宜休者有五。年未至矣。時方艱矣。用未究矣。主知隆矣。蒼生之望切矣。將恐謝傅之棊局。未了於東山。而君實之手板。蹶然於中夜。心之勞矣。休於何有。
하아. 공께서는 자신을 알아주시는 어진 임금을 만나서 몸소 장수와 재상을 다 하시어, 근심과 걱정이 모이며 많은 책임이 더해졌으니 대개 일찍이 하루도 쉰 날이 없었지만, 또한 일찍이 하루도 물러날 생각을 잊은 적이 없으셨다. 지금 궤석(정승 벼슬아치가 신는 신발)에서도 잠깐 한가할 때가 있을 때에도 임금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시냇물이 흘러 바다로 향해 가는 것과 같고, 세상에 대해 걱정하는 뜻은 농부가 가을때(추수)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생각컨데 어찌 능히 호연하게 나그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게다가) 공께서 쉬시기가 마땅하지 않은 이유가 다섯이 있다. 나이가 아직 때(물러나야 할 때)에 다다르지 않았고, 시국이 바야흐로 어려우며, 자신의 도를 다 쓰지 못하였으며, 임금님으로부터 대우를 성대하게 받고 계시고, 백성들이 거는 기대가 간절하기 때문이다. 장차 아마도 사부의 바둑이, 동산에서 끝나기도 전에, 군실의 수판이 한밤중에 뛰어 벌떡 일어날 것인데, 마음을 수로곱게 하심에 쉼이 어디 있으시겠는가?
周書曰作德心逸日休。名其在玆乎。公曰否否。公雖不自居。其指有相近者。休之爲美。取義乎安息。心苟安矣。安往而不休。安之如何。物來順應。事去則已。金革百萬。飮水曲肱。隨遇而一致。則是金門黃閣。亦猶綠野平泉。用舍行藏。無所處而不休休矣。用是爲公祝。
주서에 이르시길, "덕을 베풀고 행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나날이 아름다워진다"고 하였으니, 그(이 집의) 이름이 아마도 이 말에서 온 것인가. 공께서는 "아니다, 아니야."라고 하셨다. 공께서 비록 자처하지는 않으시지만, 그 취지가 서로 가까운 점이 있다. 쉰다 (休)라는 글자가 아름답다(美)라는 의미가 되는 것은, 안식(安息)에서 뜻을 취하여서이다. 마음이 참으로 편안하다면, 어디를 간들 쉬지 못하겠는가? 편안한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물이 다가오면 순응하고, 일이 지나가면 곧 그만두어서, 병사 백만을 거느리는 것과 홀로 물을 마시고 팔뚝을 베고 자는 것을 각각 처하게 되는 경우를 따라 하나의 이치로 실천하면, 이는 즉 금문과 황각이 녹야와 평천 같으리니, 용사행장 (벼슬에 나아가 도를 행하거나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함)에 있어 처하는 곳마다 아름답고 평온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日休堂記3
담당자: 조성진(번역자: 류인태, 조성진)
日休堂記3
人之恒言曰:“老則休”. 此以休身而言, 非休其心之謂也. 心之休, 何待乎老, 而苟得其休, 亦可以樂而忘老矣. 傳云:‘仁者壽’, 又云:‘愷悌君子, 求福不回’, 其道未嘗不由於休其心, 而其身之休不休, 固不足論也.
사람들은 늘 말하기를, “늙으면 쉰다”고들 한다. 그것은 몸을 쉬는 것에 대한 말이지 마음을 쉼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쉼이 어찌 늙음을 기다리겠으며, 진실로 그 쉼을 얻으면 또한 즐기면서 늙음을 잊어버릴 수 있다. 전하는 말로, ‘인자한 사람은 오래 산다’고 했고, 또 『시경』에 이르기를 ‘용모와 기상이 화평하고 단아한 군자는, 복을 구하는 것이 간사하지 않다’고 하였으니, 그 도는 일찍이 마음을 쉬게 하는 데서 연유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그 몸의 쉼과 쉬지 않음은 진실로 (도를) 논하기에 부족하다.
蓉庵傅相於東山別墅, 新搆小堂, 顔之以日休. 或疑之曰:“今吾君待公而爲政, 吾民恃公而爲生, 使公而年已至, 尙不可以言休, 况年未至乎? 且以公體國之誠, 處調元之地, 宜其急病讓夷, 以光世篤之業, 而乃反謙退不居, 以休爲志, 甚非朝野所望於公者也.”
재상 용암(蓉庵) 김병시【인물】 는 동쪽 산의 별서에 작은 집【장소】 을 새로 짓고, 그 이름을 ‘일휴(日休)’라고 하였다. 혹자는 의구심이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공을 의지해 정사를 펼치고 계시며, 우리나라 백성들은 공에게 기대어 살아가기에, 공이 연세가 이미 많음에도 오히려 쉰다는 말을 못하게 하였으니, 하물며 연세가 지극하지 않았을 때에라야? 장차 나라를 제 몸처럼 여기는 정성에 공변됨과 국정을 주관하는 재상의 위치에 처함으로, 의당 그 어려운 일을 해소하고 쉬운 일은 남에게 양보하여 대대로 두터운 업적을 빛냈음에도, 곧 도리어 겸손히 물러나 거하지 않고 쉬는 것으로 그 뜻을 삼았으니, 조야(朝野)가 공에게 바라는 바는 절대 아니다.”
昌煕曰:
“否. 今夫晝而作者夕而休, 春而作者冬而休, 作與休相爲循環. 其作也勞, 其休也怠, 而不得其節, 皆凡民也. 賢士大夫亦多不能免焉, 惟公則不然, 其平居無日而不休, 亦無日而不作也. 進思贊襄, 而自守恬靜, 故有至淸不撓之德, 退思調養, 而常存憂愛, 故有至誠無息之功. 凡所以彌綸默運, 匡濟時艱者, 其爲術莫不本之於作與休爲一致也. 是以銓衡絲綸金穀卒乘之泛應曲當, 而未嘗爲勞, 則公雖作焉而其休固自在也. 圖書琴尊園林泉石之隨境取適, 而亦不足爲佚, 則公雖休焉而其作尙未已也. 且公之優閒於此堂, 晩節淸福之所由完也, 可以模楷一世而坐鎭雅俗矣. 公之安慮於此堂, 嘉猷碩畫之所由得也, 可以膏澤斯民而對揚聖化矣. 噫, 子之謂公志已决於釋負而已者, 淺之乎知公之日休也夫。
나(창희)【인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 않다. 지금 대저 낮에 일하는 자는 저녁이 되어 쉬고, 봄에 일하는 자는 겨울이 되어 쉬니, 무언가를 하는 것과 쉬는 것은 서로 순환한다. 일함은 수고로움이고 쉼은 게으름인데, 그 알맞은 정도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 평범한 인민들이다. 현사와 대부 역시 대부분 그것을 면치 못하는데, 오직 공께서는 그렇지 않아서, 그 평소 거처하심에 쉬지 않으시는 날이 없으며, 또한 일하지 않으시는 날이 없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임금을 보좌함에 여념 없으면서도 평온함과 고요함으로 스스로를 지켰기에, 지극히 맑고 흔들리지 않는 덕이 있었으며, 조정에서 물러나서는 자신의 몸을 보살피는 데 여념 없으면서도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늘 품었으므로, 끊임없는 지극한 정성과 쉼 없는 공이 있다. 무릇 미륜(彌綸)하고 묵운(默運)하여 세상의 어려움을 바로잡고 구제하는 것은, 그 방술됨이 일함과 쉼이 일치가 되는 것으로부터 근본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조정에 계시면서) 이조(銓衡)와 승정원(絲綸)과 호조(金穀)와 병조(卒乘)의 업무에 널리 응하고 세세히 잘 대처하시면서도 일찍이 수고롭게 여기지 않으셨으니, 공께서 비록 일을 하시는 와중에도 그 쉼은 참으로 자유자재했던 것이다. (조정에서 나와) 도서(圖書)와 금준(琴尊)과 원림(園林)과 천석(泉石) 사이에서 선경을 따라 유유자적하시면서도 또한 편안히 여기시기에 충분치 않았으니, 공께서 비록 쉬시는 와중에도 그 일함이 오히려 그치지 않으셨던 것이다. 장차 공께서 이 집에서 한가로이 지내심은 만년의 청복이 완연할 연유라, 당세의 모범으로 가만히 앉아서 아속을 진정 시키실만 하다. 공께서 이 집에 편안히 계시면서도 세속을 걱정하심은 훌륭한 계책을 터득하실 연유라, 백성들에게 은택을 내려 성상의 교화를 널리 알리실만 하다. 아! 그대가 공의 뜻이 의정(議政)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이미 결정된 것처럼 이야기한 것은, 공이 의도하신 ‘일휴(日休)’의 뜻을 겉핥기 정도로 아는 것일 뿐이다.”
城北洞泉石亭 幷引
담당자: 조성진(번역자: 류인태, 조성진)
城北洞泉石亭 幷引
城北洞泉石亭, 謁容齋尹議政告退. 相公挽執携筇, 同翫泉石之勝, 指點景槩. 亭之北扁萬松窩, 水閣曰不盈閣. 閣之前, 大石平舖, 可十餘間. 石之南, 詎巖特立, 高數丈, 廣可六七間. 巖之上, 老松二株大可數抱, 長亦數十丈, 枝幹廣達, 全覆石面. 杜鵑躑躅之屬, 雜錯於萬松之間, 閣下溪流, 水通石罅. 鏦錚之韻, 與松籟合奏笙簧琵琶之聲, 眞別洞天也。
성북동(城北洞)【장소】 천석정(泉石亭)【장소】 에서 조정에서 물러난 용재(容齋) 윤 의정(尹議政, 윤용선)【인물】을 배알하였다. 상공은 지팡이를 짚는 것을 만류하고, 전원의 승경을 함께 완상하며 그림 같은 경치를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정자의 북쪽 편액은 만송와(萬松窩)이고, 물가의 누각은 불영각(不盈閣)【장소】이라 이름 하였다. 누각 앞에는 큰 돌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는데, 10여 칸 즈음 된다. 돌 남쪽에는 얼마큼의 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높이는 몇 장이며 넓이는 6~7칸 즈음 된다. 바위 위에는 늙은 소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크기가 몇 아름은 되고 길이도 수십 장은 되며, 가지와 줄기가 넓게 뻗어 돌 표면을 모조리 덮고 있다. 두견과 척촉 따위가 온갖 소나무 사이에 섞여 있고, 누각 아래로는 시내가 흐르며 물은 돌 틈으로 통한다. 잘그랑 잘그랑대는 울림과 함께 소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이 생황과 비파와 합주하는 소리는, 그야말로 별세계 그 자체다.
城闉咫尺闢桃源。丞相菟裘爰處爰。
一道飛泉松底出。千羣啼鳥石頭喧。
桑楡縱趁懸車限。葵藿猶應戀闕恩。
爲賀玆區遭遇盛。偏因卜築世知尊。
성곽의 지척에 무릉도원이 열렸으니, 승상이 은거해 여기 산다네
한 줄기 폭포아래 소나무 돋아났는데, 뭇 모여 우는 새들은 돌머리에 지저귀네
뽕나무와 느릅나무 현거(懸車)의 경계를 좇는데, 해바라기 오히려 연궐(戀闕)의 은덕에 응하네
(*해석: 늙어버린 몸뚱이는 은거하길 바라는데, 임금님 향한 마음은 대궐로 향하도록 하네)
이 터를 만나 성대해질 것을 경하드리니, 여기 집을 지었기에 세상이 높일 줄 알게 되리라.
題三人臺 幷序
담당자: 조성진(번역자:류인태, 조성진)
題三人臺 幷序
臺在城北洞品石山房之後, 壁鐫三人臺三字, 傍有辛亥二字. 傳說正廟時有新進學士三人, 讀書于此, 各欲占宅於此, 末乃以三人名臺而刻之云. 園今爲宜石金尙書別業. 壬戌秋。宜石公邀海藏及冕, 徜徉泉石之間, 冕率題焉.
삼인대(三人臺)【장소】는 성북동【장소】 품석산방【장소】 뒤에 있는데, 벽에 ‘삼인대(三人臺)’ 세 글자를 새기고, 옆에는 ‘신해(辛亥, 1791)’ 두 글자를 새겨 놓았다. 전하는 말로는, 정조 임금 때 새로 벼슬에 오른 학사 세 사람이 여기서 글을 읽다가 각자 이곳에 집을 마련하고 싶어 했는데, 나중에는 세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대(臺)로 삼아 새겼다고 한다. 지금은 의석(宜石) 김 상서(金尙書, 김응근)【인물】의 별업이다. 임술년(1862) 가을, 의석공이 해장(海藏, 신석우)【인물】과 나(조면호)【인물】를 맞이해 이곳 전원에서 노닐었는데, 내가 삼인대로 다음과 같이 글을 지었다.
近廓塵無到, 入山境愈新.
主翁與海叟, 對我成三人.
가까이에 먼지조차 닿지 않는데, 산 속이라 경계가 더욱 새롭구나.
주인옹【인물】과 해장옹【인물】 그리고, 나【인물】까지 마주하니 딱 세 사람이 되었구나.
성북동과 직접 관련이 없는 작품
주석
- ↑ 목만중睦萬中. 幼選은 그의 字.
- ↑ 이정운(李鼎運). 公會는 그의 字.
- ↑ 이익운(李益運). 季受는 그의 字.
- ↑ 정약용의 동명의 시 '幽事'에서는 조용한 일이라 번역했고, 허균 한정록 10권에서는 “한가한 곳에서 혼자 살면서 담박하게 아무것도 구하지 않아도 일상 생활하는 일을 幽事라 정의하였기에 한가롭게 지내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 ↑ 桃花
- ↑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부처의 교법, 부처가 되는 길
- ↑ 도교에서 신이 사는 곳(선산), 도원명이 묘사한 복숭아꽃 정원의 이상적인 모습
- ↑ 눈썹을 그리는 먹, 먹으로 그린 눈썹
- ↑ 서로 격절된 산
- ↑ 나직하다, 낮게 드리우다
- ↑ 화려한 채색 그림, 산수의 뛰어난 경치
- ↑ 마땅히, 장차
- ↑ 김병시(金炳始). 용암蓉庵은 그의 호號.
- ↑ 개인이 가지고 있는 논밭
- ↑ 별장. 사는 집이 아닌, 경치 좋은 곳에다 짓고 때때로 와서 묵고 쉬는 집
- ↑ 『중용장구』 제14장, “군자는 현재 처한 위치에 알맞게 행동할 뿐이요, 그 이외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현재 부귀하면 부귀한 처지에 알맞게 행동하고, 현재 빈천하면 빈천한 처지에 알맞게 행동하며, 현재 이적의 가운데에 있으면 그 상황에 알맞게 처신하고, 현재 환난의 가운데에 있으면 그 상황에 알맞게 처신한다. 따라서 군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
- ↑ 일휴당기2의 저자, 한장석(韓章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