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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전에 장생전(長生殿) 수리를 마쳤으므로 이달 29일에 재궁(榟宮)을 도로 봉안하는 일로 승정원에 들어가 초기(草記)를 올리고 돌아왔다. 오늘은 대궐 안이 조용한 것 같고, 하인들의 소란스러운 일도 없었다. 이는 병조 참지 조관빈(趙觀彬)이 입직하여 아주 삼엄하게 통제하였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다. 진시(辰時)에 의관이 와서 “밤사이 주상의 환후는 그대로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사 이처대(李處大)가 찾아왔다. 사시(巳時)에 의관이 “눅진한 대변 5홉과 소변 2홉을 보셨으나 색깔이 매우 누랬습니다.”라고 하였다. 찰방 손경익(孫景翼)이 다녀갔다. 주서 이중환(李重煥)이 심부름꾼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병이 심하여 그저께 직무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경옥(李景玉) 어른의 편지를 받고 바로 답장을 하였다. 오시(午時)에 데운 수라 반 숟갈을 물에 말아 드시고, 송이 적炙을 드셨다고 한다. 미시(未時)에 시약청(侍藥廳)이 들어가 진찰하니, 여러 가지 증세가 어제와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호서(湖西) 동당시(東堂試) 방목이 왔다. 예천(醴泉) 김규석(金圭錫)이 제천(堤川) 도목(都目)으로 입격하였으니, 기뻐할 만하다. 오전에 대신들이 입시하여 아뢰자, 구전(口傳)으로 차출하기를, 예조 판서에 이관명(李觀命), 예조 참판에 이집(李㙫), 예조 참의에 윤양래(尹陽來), 병조 참판에 유명홍(兪命弘), 병조 참지에 이병상(李秉常), 승지에 조명봉(趙鳴鳳)ㆍ조관빈(趙觀彬), 함경도 관찰사에 홍치중(洪致中)을 임명하고, 그 외 나머지 대간과 옥당은 관원들이 많이 빠졌으나 모두 뽑지 않았다. 신시(申時)에 탕약을 드시고, 대궐 문을 닫은 뒤에 흰죽 1홉을 드셨으며, 소변 2홉을 보았는데 색깔이 누랬다고 하고, 2경 3점에 녹두죽 2홉을 드셨다고 한다. 시약청의 구전계사(口傳啓辭)에 “까라짐이 극심한 증세가 더욱 심하다.”고 답하였다고 한다.<br/><br/>'''朝前以 長生殿修改畢役。今二十九日 榟宮還安事。入 政院呈草記還。今日則 闕內似肅然。無下人喧亂事。盖兵曹參知趙觀彬入直。禁防甚嚴也。可佳。辰時醫官來言。夜間 上候一樣。李進士處大過訪。巳時醫官言。泥便五合小便二合放下。而色甚黃。孫察訪景翼來過。李注書重煥伻問。以病甚再昨脫直還家云。得李景玉丈書。卽復。午時。熟水剌半匙。水澆松茸灸 進御。未時侍藥廳入診。 諸症候與昨一樣。湖西東堂榜皆來。呂泉金圭錫。以堤川都目參榜。可喜。午前大臣入侍稟 達。口傳差出。禮判李觀命參判李㙫參議尹陽來。兵曹參判兪命弘參知李秉常承旨趙鳴鳳趙觀彬咸鏡監司洪致中。其餘臺諫玉堂多闕員而皆不出。申時湯藥 進御。閉門後白粥一合 進御。小便二合放下。色甚黃。二更三点菉豆粥二合 進御。答侍藥廳口傳 啓曰。昏困特甚之候尤甚云。''' | + | '''식전에 장생전(長生殿) 수리를 마쳤으므로 이달 29일에 재궁(榟宮)을 도로 봉안하는 일로 승정원에 들어가 초기(草記)를 올리고 돌아왔다. 오늘은 대궐 안이 조용한 것 같고, 하인들의 소란스러운 일도 없었다. 이는 병조 참지 조관빈(趙觀彬)이 입직하여 아주 삼엄하게 통제하였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다.''' 진시(辰時)에 의관이 와서 “밤사이 주상의 환후는 그대로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사 이처대(李處大)가 찾아왔다. 사시(巳時)에 의관이 “눅진한 대변 5홉과 소변 2홉을 보셨으나 색깔이 매우 누랬습니다.”라고 하였다. 찰방 손경익(孫景翼)이 다녀갔다. 주서 이중환(李重煥)이 심부름꾼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병이 심하여 그저께 직무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경옥(李景玉) 어른의 편지를 받고 바로 답장을 하였다. 오시(午時)에 데운 수라 반 숟갈을 물에 말아 드시고, 송이 적炙을 드셨다고 한다. 미시(未時)에 시약청(侍藥廳)이 들어가 진찰하니, 여러 가지 증세가 어제와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호서(湖西) 동당시(東堂試) 방목이 왔다. 예천(醴泉) 김규석(金圭錫)이 제천(堤川) 도목(都目)으로 입격하였으니, 기뻐할 만하다. 오전에 대신들이 입시하여 아뢰자, 구전(口傳)으로 차출하기를, 예조 판서에 이관명(李觀命), 예조 참판에 이집(李㙫), 예조 참의에 윤양래(尹陽來), 병조 참판에 유명홍(兪命弘), 병조 참지에 이병상(李秉常), 승지에 조명봉(趙鳴鳳)ㆍ조관빈(趙觀彬), 함경도 관찰사에 홍치중(洪致中)을 임명하고, 그 외 나머지 대간과 옥당은 관원들이 많이 빠졌으나 모두 뽑지 않았다. 신시(申時)에 탕약을 드시고, 대궐 문을 닫은 뒤에 흰죽 1홉을 드셨으며, 소변 2홉을 보았는데 색깔이 누랬다고 하고, 2경 3점에 녹두죽 2홉을 드셨다고 한다. 시약청의 구전계사(口傳啓辭)에 “까라짐이 극심한 증세가 더욱 심하다.”고 답하였다고 한다.<br/><br/>'''朝前以 長生殿修改畢役。今二十九日 榟宮還安事。入 政院呈草記還。今日則 闕內似肅然。無下人喧亂事。盖兵曹參知趙觀彬入直。禁防甚嚴也。可佳。辰時醫官來言。夜間 上候一樣。李進士處大過訪。巳時醫官言。泥便五合小便二合放下。而色甚黃。孫察訪景翼來過。李注書重煥伻問。以病甚再昨脫直還家云。得李景玉丈書。卽復。午時。熟水剌半匙。水澆松茸灸 進御。未時侍藥廳入診。 諸症候與昨一樣。湖西東堂榜皆來。呂泉金圭錫。以堤川都目參榜。可喜。午前大臣入侍稟 達。口傳差出。禮判李觀命參判李㙫參議尹陽來。兵曹參判兪命弘參知李秉常承旨趙鳴鳳趙觀彬咸鏡監司洪致中。其餘臺諫玉堂多闕員而皆不出。申時湯藥 進御。閉門後白粥一合 進御。小便二合放下。色甚黃。二更三点菉豆粥二合 進御。答侍藥廳口傳 啓曰。昏困特甚之候尤甚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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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淸臺日記』四 1720년 4월 27일자 일기}} | |출처=『淸臺日記』四 1720년 4월 27일자 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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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조의 업무 기록8: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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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이 지난 뒤에 장생전(長生殿)에 갔다. 아침 문안을 마치고 난 후에 도제조 영의정과 제조 예조 참의가 왔다. 재궁(榟宮) 10부部를 종친부(宗親府)에서 장생전으로 도로 봉안하였다. 이어서 포쇄(曝晒)하여 전각 안에 안치하고, 외재실(外榟室)도 서쪽 하고(下庫)에서 서쪽 정고(正庫)로 도로 봉안하였다. 좌랑 박필준(朴弼俊)과 봉사 홍의인(洪義人)도 함께 왔다.''' 오후 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소격동(昭格洞) 박기령(朴麒齡) 집에 머무는 조카 희喜를 만나 보았다. 묘시(卯時)에 의관이 와서 “밤사이 주상의 환후는 마찬가지입니다. 까라지고 가슴이 답답하여 호흡이 불편하고, 배가 더부룩한 증세가 아주 심합니다.”라고 하였다. 진시(辰時)에 소변 4홉을 보았는데 색깔이 약간 누랬고, 오시(午時)에 데운 수라 반 숟갈을 물에 말아 드시고, 반찬은 전복을 드셨다고 한다. 미시(未時)에 시약청(侍藥廳)이 들어가 진찰해 보니, 여러 증세는 마찬가지이고, 상추 죽 한 홉 반을 드셨다고 한다. 시약청이 들어가 진찰할 때,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와 우의정 이건명(李健命)이 같이 입시하여 삼사(三司) 이외의 긴급하게 채워야 할 결원은 구전(口傳)으로 비망(備望)하여 들이고, 재상 중에 군직(軍職)을 부여해야 할 자들도 한꺼번에 구전으로 임명할 것을 탑전에서 재가받았다. 이는 동궁이 근래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면서 주상의 뜻으로 임시로 낙점을 행사한 것이다. 형조 판서에 유집일(兪集一), 형조 참의에 홍계적(洪啓迪), 행 부사직에 조태구(趙泰耉)ㆍ권성權ㆍ홍만조(洪萬朝)ㆍ황일하(黃一夏)ㆍ김상직(金相稷) 등이 임명되었다. 유시(酉時)에 의관이 들어가 진찰해 보니, 까라짐이 아주 심하고 잠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신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저녁때가 지난 뒤에 생원 허즙(許楫)이 다녀갔다. 그는 전례에 따라 세 당상의 임시 막사에 명함을 전하였다. 대궐 문을 닫은 뒤에 흰죽 한 홉 반을 드시고, 2경 2점에 소변 4홉을 보았는데, 색깔이 매우 누랬으며, 2경 4점에 녹두죽 1홉 남짓 드셨다고 한다.<br/><br/>'''曉後往 長生殿。朝問安後。都提調領相提調禮參來。 榟宮十部。自宗親府。還安 本殿。仍曝晒。奉置 殿內。外榟室亦自西下庫還安西正庫。朴佐郞弼俊洪奉事義人同來。日晩畢事歸。歷見昭格洞朴麒齡家喜姪。卯時醫官來言。夜間 上候一樣。昏困膈間滿悶。呼吸不平。腹部脹滿之候特甚。辰時小便四合放下。而色微黃。午時熟水剌半匙水澆。饍物全卜 進御云。未時侍藥廳入診。諸 症候一樣。萵苣粥一合半 進御云。入診時判府事趙右議政李。同爲入侍。三司外緊急闕員。口傳備望流入。而卿宰應付軍職者。亦一倂口傳事。 榻前定奪。盖 東宮近來晝夜侍側。以 大朝意。權行 落點也。刑判兪集一刑議洪啓廸行副司直趙泰耉權▼(忄+省)洪萬朝黃一夏金相稷。酉時醫官入診。則 昏困特甚。小覺時呻吟未已云矣。夕後許生員楫來過。依例投剌于三堂上依幕。閉門後白粥一合半 進御。二更二点小便四合放下。而色甚黃。四點菉豆粥一合餘 進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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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淸臺日記』四 1720년 4월 29일자 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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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일 (금) 14:27 판
목차
- 1 육조거리와 출퇴근 풍경
- 2 호조 서리 이윤선(李潤善)의 업무와 일상
- 3 예조 낭관 권상일(權相一)의 장생전 수리 일지
- 3.1 예조정랑 제수: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2 청탁의 정황: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 사은숙배: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4 예조정랑 제수 이전 성균관직강 역임: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5 예조정랑 제수 당시 서울 숙소는 창동(倉洞):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6 예조정랑 제수 당시 만나던 영남의 문반들: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7 예조정랑 제수 이전 강진현감 말의(末擬):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8 예조정랑 제수 당시 가난했던 형편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9 예조정랑 제수 당시 가난했던 형편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0 예조의 업무 기록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1 예조의 업무 기록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2 예조의 업무 기록3: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3 예조의 업무 기록4: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4 예조의 업무 기록5: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5 예조의 업무 기록6: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6 예조의 업무 기록7: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7 예조의 업무 기록8: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4 병조에서 이조의 낭관으로, 윤기의 이상과 현실
- 5 육조 당상, 그 빛과 그늘
- 6 봉심(奉審)과 회창(回倉) 그리고 순심(巡審), 출장을 빙자한 외유
- 7 연지(蓮池)와 누정(樓亭), 휴식과 위안의 공간
- 7.1 예조의 건립: 15세기, 성현(成俔)의 글
- 7.2 예조의 낭관청: 17세기, 이정귀(李廷龜)의 시
- 7.3 예조의 풍경: 17~18세기, 홍세태(洪世泰)의 시
- 7.4 예조의 풍경: 18세기, 이시항(李時恒)의 시
- 7.5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 7.6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 7.7 병조의 누정: 16세기, 윤두수(尹斗壽)의 시
- 7.8 병조의 연지: 17세기, 이수광(李睟光)의 시
- 7.9 병조의 연지: 17세기, 김육(金堉)의 시
- 7.10 병조의 연지: 18세기, 정간(鄭榦)의 시
- 7.11 병조의 연지: 19세기, 임천상(任天常)의 시
- 7.12 형조의 연지: 16세기, 신광한(申光漢)의 시
- 7.13 형조의 연지: 17세기, 홍석기(洪錫箕)의 시
- 7.14 형조의 연지: 17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 7.15 호조의 연지: 16세기, 유홍(兪泓)의 시
- 7.16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심정진(沈定鎭)의 시
- 7.17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유숙기(兪肅基)의 글
- 8 주석
육조거리와 출퇴근 풍경
광화문전로: 16세기, 이기(李墍)의 글
왕궁의 법전(法殿)은 남향(南向)을 하는데, 그것은 정사를 듣고 조회를 받는 바른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政府)와 추부(樞府)ㆍ6조(曹) 여러 관청이 모두 광화문 밖에 벌여 있어 동쪽에 있는 것은 서쪽을 향하고 서쪽에 있는 것은 동쪽을 향해 있다. 한갓 관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대부의 사가(私家)나 대청마루도 모두 동향이나 서향으로 되어 있어, 감히 남향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비록 집에 있을 때라도 분수에 넘치게 남쪽을 향해 앉을 수 없어서였다. 도성(都城) 안에, 고가 세족(故家世族)의 집들이 바둑돌같이 벌여 있고 별처럼 흩어져 있으나, 모두 북향하여 있었는데, 중종 이후로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인심이 나날이 사치스러워져, 분수를 어기고 예도를 넘는 일이 끝이 없어 집의 좌향(坐向)이 남인가 북인가는 물을 것도 없었으니, 세도(世道)가 점점 못하여지고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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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窩雜說』 |
묘시 출근과 유시 퇴근: 18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각 관사에 묘시(卯時)[1]에 출사(出仕)하고 유시(酉時)[2]에 퇴근하는 법을 거듭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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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31권, 영조 8년(1732) 5월2일(무오) 기사 |
창덕궁 앞 출근 풍경: 17세기, 유몽인(柳夢寅)의 시
「남소(南所)[3]에서 감회를 쓰다(南所寫懷)」 궁궐에 새벽빛 밝아오니 고관들 조정으로 달려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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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於于集後集』卷二 「南所寫懷」 |
광화문전로의 밤풍경: 16세기, 이기(李墍)의 글
조종조는 육조(六曹)에 숙직하는 낭관들은 달밤에 창기(娼妓)들과 어울려서 광화문 밖에 모여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노래도 불러 밤새도록 마시고 담소하였으니, 이것은 태평 시대의 일이다. 한갓 육조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미원(薇垣 사간원의 별칭)의 관원도 또한 곡회(曲會 이리저리 꾸며대서 모임)를 일삼았고, 입직하는 밤에는 반드시 기생을 끼고 잤다. 새벽녘이면, 일을 맡아보는 아전이 창밖에 서서 뵙기를 청하는데, 이것은 계집을 일찍 내어 보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세상 인심이 점차 박하여지고, 금법(禁法)이 점점 세밀하여져서, 육조에 숙직하는 풍습이 아주 바뀌고 미원에서 밤놀이하던 것도 또한 없어졌다. 그런데 숙직하는 날 밤에 일을 맡아보는 아전이 뵙기를 청하는 고사는 아직도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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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窩雜說』 |
호조 서리 이윤선(李潤善)의 업무와 일상
호조 아전 이창린 등의 옥안 판하: 18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호조의 아전 이창린(李昌麟)과 김처신(金處信)이 대궐에 바칠 것이라고 칭탁하고 수리계(修理契)의 종이를 훔쳐내려고 거짓 보고를 하여 계단(啓單)을 받았다가 일이 들통났다. 옥에다 가두고 끝까지 심문하니, 김처신은 꾀를 내어 시킨 자이고 이창린은 직접 죄를 범하여 거짓으로 전한 자였다. 형조가 이창린을 정범(正犯)으로 삼아 옥안을 갖추어 계문하니, 판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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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51권, 정조 23년(1799) 5월22일(기묘) 기사 |
예조 낭관 권상일(權相一)의 장생전 수리 일지
예조정랑 제수: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청탁의 정황: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한사범(韓士範) 형제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관(譯官)과 의학(醫學) 대여섯 사람이 친구들의 청탁 편지를 들고 찾아왔다. 그들의 취재(取才) 고강(考講)을 예조에서 맡아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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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1월 22일자 일기 |
사은숙배: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이전 성균관직강 역임: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서울 숙소는 창동(倉洞):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만나던 영남의 문반들: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이전 강진현감 말의(末擬):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가난했던 형편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가난했던 형편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3: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4: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5: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6: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7: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8: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병조에서 이조의 낭관으로, 윤기의 이상과 현실
육조 당상, 그 빛과 그늘
봉심(奉審)과 회창(回倉) 그리고 순심(巡審), 출장을 빙자한 외유
동대문 밖 인가의 철거와 풍수설: 16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상이 소대하였다. 시강관 심봉원(沈逢源)이 아뢰었다. 동대문(東大門) 밖에 조종조부터 있었던 오래된 인가(人家)를 이번에 문을 막고 있는 산줄기를 점거하였다고 하여 모두 철거시키라고 하였습니다. 풍수설(風水說)이 성인(聖人)의 경전(經典)에는 있지 않은 것이니, 진실로 성주(聖主)로서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임금이 덕을 닦으면 하늘에다 영명(永命)을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도(道)를 어기고 덕을 손상시키면 스스로 위망(危亡)에 이를 것인데 풍수설이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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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종실록』6권, 명종 2년(1547) 8월13일(신묘) 기사 |
연지(蓮池)와 누정(樓亭), 휴식과 위안의 공간
예조의 건립: 15세기, 성현(成俔)의 글
지금 예조는 바로 예전의 삼군부(三軍府)이다. 정삼봉(鄭三峯)이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을 맡았을 때 의정부의 제도를 보고 말하기를, "정부와 군부는 일체이다." 라고 하고 드디어 그 제도에 의하여 만드니 높다랗게 동서가 상대가 되어 그 청사가 굉장한 것이 다른 관부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뒤에 삼군부를 혁파하고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여 군무를 맡기지 않고, 예조로써 오례(五禮)를 맡아보게 하고 또 다른 나라의 사신을 대접하게 하니, 그 임무가 중대하여 그 부(府)를 예조로 삼고, 중추원은 도리어 예조의 남쪽 곁채에 우거(寓居)하였다. 경복궁 서쪽 가에 수맥(水脈)이 많은데, 경회루의 연못 물은 비록 옛날 중국의 곤명지(昆明池)ㆍ태액지(太液池)라도 이보다 좋지 못할 것이다. 서문 밖에 샘이 있어 넘쳐 흐르니, 얼음과 같이 맑고 차가워 사람들이 모두 쪽[藍]을 물들이기 때문에 쪽샘[藍井]이라 불렀다. 예조의 우물도 또한 맑고 깨끗하고 마르지 않아 흘러서 큰 못을 이루니 비록 몹시 가물어도 한결같았다. 못 남쪽에 조그마한 땅이 중추부로 뻗어서, 수초가 우거지고 더럽더니 금상(今上) 기미년에 중추부에서 아뢰기를, “개 이빨처럼 우리 관아에 들어오니, 마땅히 분할하여 우리 못으로 해야겠습니다.” 하니, 예조가 이르기를, “외국 사람을 대접하는 곳을 좁게 해서는 안 된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임금이 승지와 내관 등에게 물어서 쪼개어 나누어주니, 중추부에서 그 땅을 파서 서지(西池)를 만들고, 대청을 개축하고 대청에 연이어 서헌(西軒)을 만들고, 돌기둥을 물 속에 세우니 아로새겨지는 그림자가 물결 위에 떨어지고, 서쪽은 산봉우리가 높고 집들이 좋고 나무가 빽빽하여 풍경이 서울에서 제일이었다. 그 밑에 있는 사헌부와 옛 병조ㆍ형조ㆍ공조ㆍ장예원(掌隸院)에도 모두 못이 있어 연꽃을 심었고, 동쪽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에는 비록 못이 있으나 서쪽 못보다는 훌륭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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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慵齋叢話』卷十 |
예조의 낭관청: 17세기, 이정귀(李廷龜)의 시
「예부에서 낭관청을 중건하고 풍악을 연주한 후 간소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낭료들과 즉흥적으로 읊다(禮部重建郞官廳 閱樂後仍作小酌 酒席與郞僚口占)」 남궁에서 잔치 풍악 울리며 인청(寅淸)[11]이 모이니, 절후는 삼원(三元)[12]에 가까워서 고운 햇살이 밝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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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月沙先生集』卷十七 「禮部重建郞官廳 閱樂後仍作小酌 酒席與郞僚口占」 |
예조의 풍경: 17~18세기, 홍세태(洪世泰)의 시
「김참봉, 홍진사와 함께 예조 뒷산에 오르다(同金參奉 洪進士。登南宮後岡)」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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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柳下集』卷三 「同金參奉 洪進士。登南宮後岡」 |
예조의 풍경: 18세기, 이시항(李時恒)의 시
「예조 낭관으로 옮겨 임명되어 본사(本司)에서 숙직하다(移拜春曹郞 直宿本司)」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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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和隱集』卷三 「移拜春曹郞 直宿本司」 |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예조에 근무하며 우연히 읊다(直禮曹偶吟)」 광화문 앞이 바로 예조이니, 낭관의 재미는 극히 쓸쓸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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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直禮曹偶吟」 |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예조에 입직한 날, 인왕산을 마주해 한가로이 4수를 짓다(直春曹日 對仁王山 漫成四絶)」 인왕산 솟은 바위 서울을 진무하니, 구름 속 기봉이 그림처럼 산뜻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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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直春曹日 對仁王山 漫成四絶」 |
병조의 누정: 16세기, 윤두수(尹斗壽)의 시
「병조의 작은 누대에서 우연히 시를 짓다(兵曹小樓偶題)」 별을 보고 갔다가 별을 보고 돌아오니, 봄이 다 저물도록 술 한 잔 할 겨를 없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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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梧陰先生遺稿』卷一 「兵曹小樓偶題」 |
병조의 연지: 17세기, 이수광(李睟光)의 시
「병조 청사 뒤쪽 작은 못이 깊고 검푸른데, 거기에 연꽃 몇 송이가 있어(騎曹廳後小池深黑中有種荷數朶)」 누가 섬돌 앞 한 자락 사초를 파헤쳤나, 못 속에 담긴 물이 웅덩이도 못 채우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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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芝峯先生集』卷四 「騎曹廳後小池深黑中有種荷數朶」 |
병조의 연지: 17세기, 김육(金堉)의 시
「달밤에 병조에 입직하다(月夜直騎省)」 백합꽃 피어 있고 파초잎 기다란데, 비 온 뒤라 못가 누각 여름에도 서늘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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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潛谷先生遺稿』卷二 「月夜直騎省」 |
병조의 연지: 18세기, 정간(鄭榦)의 시
「병조 당상대청 뒤에 네모진 못이 있고, 못에는 연꽃이 못가에는 창포가 둑에는 수양버들이 있어, 마침내 ‘淸’자 운으로 읊어 화답을 구하다(騎省正衙後有方塘 塘有芙蕖 渚有菖蒲 堤有垂柳 遂用淸字 詠以求和)」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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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鳴臯先生文集』卷一 「騎省正衙後有方塘 塘有芙蕖 渚有菖蒲 堤有垂柳 遂用淸字 詠以求和」 |
병조의 연지: 19세기, 임천상(任天常)의 시
「비오는 가운데 병조에 입직해 있으면서 장난삼아 ‘무와행’을 짓다(雨中直兵曹 戱爲無蛙行)」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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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窮悟集』卷四 「雨中直兵曹 戱爲無蛙行」 |
형조의 연지: 16세기, 신광한(申光漢)의 시
「형조의 연못에서 즉흥으로 읊어 송 정랑에게 보여주다(秋部官池卽事 示宋正郞)」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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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企齋集』卷六 「秋部官池卽事 示宋正郞」 |
형조의 연지: 17세기, 홍석기(洪錫箕)의 시
「형조의 연못 누각을 이 참판의 부채에 제하다(秋曹池閣 題李侍郞扇)」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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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晩洲遺集』卷二 「秋曹池閣 題李侍郞扇」 |
형조의 연지: 17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형조에 있는 연못 물이 핏빛과 같이 붉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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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1647) 3월24일(을축) 기사 |
호조의 연지: 16세기, 유홍(兪泓)의 시
「호조의 연지를 읊다(詠戶曹蓮池)」 바람이 불자 연꽃 향기 흩어지고, 뜰에 볕이 들어 섬돌 이끼를 데우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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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塘集』卷一 「詠戶曹蓮池」 |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심정진(沈定鎭)의 시
「9월 21일 숙직 중 연못 누정을 마주하고 우연히 읊다(九月念一日 直中對池亭偶吟)」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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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霽軒集』卷一 「九月念一日 直中對池亭偶吟」 |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유숙기(兪肅基)의 글
「불염정기(不染亭記)」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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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兼山集』卷七 「不染亭記」 |
주석
- ↑ 묘시(卯時) : 오전 5시에서 7시까지.
- ↑ 유시(酉時) : 오후 5시에서 7시까지.
- ↑ 남소(南所): 오위(五衛)의 위장(衛將)이 숙위(宿衛)하던 위장소(衛將所)의 하나로, 창덕궁의 금호문(金虎門)과 경희궁의 개양문(開陽門) 안에 있었는데, 궁궐의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남소라 불렸다.
- ↑ 궁궐 호위하는 관소: 원문의 '구진사(句陳司)'. 궁궐을 호위하는 금군(禁軍)을 말한다. '구진(句陳)'은 별자리 이름으로 자미궁(紫微宮)을 호위하는 별이다.
- ↑ 범의 두상: 후한(後漢)의 반초(班超)가 어린 시절 관상가가 “그대는 제비의 턱에 범의 머리로 날아서 고기를 먹는 상이니, 이는 만리후에 봉해질 상이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 ↑ 분서(粉署): 하얗게 벽을 칠한 관청이라는 뜻으로 중국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인데, 우리나라는 의정부 및 중앙 관서를 뜻한다.
- ↑ 동룡문(銅龍門): 창경궁 세자전 옆에 있던 문이다.
- ↑ 금마문(金馬門): 창덕궁 후원에 있던 문이다.
- ↑ 투필(投筆): 붓을 던진다는 말로, 종군(從軍)을 뜻한다. 후한(後漢)의 명장 반초(班超)가 젊었을 때 집이 가난하여 글씨를 써 주는 품팔이 생활을 하다가 붓을 던지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별다른 지략이 없다면 부개자(傅介子)나 장건(張騫)을 본받아 이역에 나아가 공을 세워 봉후가 되어야지, 어찌 오래도록 필연(筆硯) 사이에만 종사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더니, 훗날 서역(西域)에 나아가 공을 세워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 ↑ 정기(正奇): 병법(兵法)의 용어로서, 정면으로 접전을 벌이는 것을 ‘정(正)’이라 하고 매복(埋伏)이나 기습(奇襲) 등의 방법을 쓰는 것을 ‘기(奇)’라고 한다.
- ↑ 인청(寅淸): 『서경』 「순전(舜典)」에서 후대의 예조(禮曹)에 해당하는, 종묘(宗廟) 제관(祭官)의 장(長)인 질종(秩宗)에게 "밤낮으로 공경히 일을 하되 마음이 곧아야 정신이 맑아서 일을 잘할 수 있으리라(夙夜惟寅 直哉惟淸)."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언행이 신중하고 마음가짐이 청정한 사람을 가리킨다.
- ↑ 삼원(三元): 음력 정월 초하루로.
- ↑ 이 작은 관청은 해를 넘겨 이제야 중건되었네: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다시 중건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 ↑ 본디 서산에 상쾌한 기운 많아 늘 바라보매 돌아가고픈 정 없어라: 원문의 '歸情'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고 싶은 마음이다. 곧 인왕산을 늘 가까이 대하고 있으므로 서울 한복판에 있음에도 탈속의 정취가 많기 때문에 굳이 전야로 돌아갈 마음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서산의 상쾌한 기운'은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의 고사이다. 왕휘지는 성품이 본디 잗단 세속 일에 전혀 얽매임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환충(桓沖)의 기병 참군(騎兵參軍)으로 있을 적에 한번은 환충이 그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부(府)에 있은 지 오래되었으니, 요즘에는 의당 사무를 잘 알아서 처리하겠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쳐들고 수판으로 뺨을 괴고는 엉뚱하게도 "서산이 이른 아침에 상쾌한 기운을 불러온다(西山朝來 致有爽氣耳)."라고 했다. 이 고사에서 만들어진 말로, 전하여 세속 일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히 유유자적하는 풍도를 가리킨다. 『晉書』卷80 「王徽之列傳」
- ↑ 연명이 어찌 천고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랴 나 또한 희황 이전의 사람: 도연명이 자엄등에게 주는 글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내 나이 쉰이 넘었는데, 젊어서는 곤궁하였다. 늘 집안 일로 동분서주하였으며, 성미는 강직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세상 사람들과 어긋남이 많았다.……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 누워 시원한 바람이 선들 부는 때를 만나면 스스로 복희 시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吾年過五十 少而窮苦 每以家弊 東西遊走 性剛才拙 與物多忤……五六月中 北窓下臥 遇涼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라고 한 말에 근거를 둔 표현이다. 『陶淵明集』卷7 「與子儼等疏」
- ↑ 멀리 흘러가: 이에 해당하는 원문 ‘조종(朝宗)’은 원래 제후가 천자에게 가서 뵙는 것으로 봄에 뵙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뵙는 것을 종(宗)이라 하는데, 강물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 역시 제후가 천자국에 가는 것과 같다 하여 조종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