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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8월 15일 서울 도심에서 거대한 공사판이 또 하나 벌어졌다. | 67년 8월 15일 서울 도심에서 거대한 공사판이 또 하나 벌어졌다. |
2020년 5월 19일 (화) 22:22 기준 최신판
박정희와 조선일보 방일영 사장의 워커힐 유흥 파티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했던 황용주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63년 대선 기간 중인데도 불구하고 '기생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이번에 '기생 파티'의 마당을 제공한 방일영의 증언을 들어보자.
"기녀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며 한 서너 시간 유쾌하게 잘 놀았다. 놀다보니 아주 늦어지고 말았다."
육영수는 이 기생 파티에 격분해서 박정희가 다시는 방일영의 집에 가지 않도록 청와대 비서진에게 단단히 일렀다고 한다.
황용주는 그날 박정희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당이 무르익게 되자 그는 '선거가 끝나면 이런 기회도 없겠지'하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건반에 두들기면서 불러댔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미꾸라지 잡기'리는 일본 민속무를 멋들어지게 추었다. 본인의 주석에 따르면 사관학교(일본 육사) 졸업할 때 은시계를 탈 수 있었던 것도 이 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사(大事)를 앞두고 청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가 스스로 좋아하는 노래와 춤을 추게 된 것은 방 회장이라는 천하에 주도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기생파티'와 '주도'에 관한 한 박정희와 방일영은 아주 죽이 잘 맞은 사이였다. 훗날 '카지노 황제' 전낙원은 방일영을 가리켜 "권번출신 기생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이라고 칭송했다. 그래서 "조선일보의 방일영 사장 집에는 가끔 박정희 자신이 군저 초기에 미행으로 찾아가 사적인 교류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자."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의 파트너가 보통 기생이 아니라 여배우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확언하지 못한 건 위에서 말한 술자리가 방우영이 말하는 말하는 술자리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아닐 수도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
"내가 처음 박 대통령은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 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귀 씨 등을 데리고 방일영 고문과 함께 술자리에서 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의 손을 잡을 붙잡고 밴드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와 깡마른 얼굴에서 반짝이는 눈과 하얀 이빨이 유난히도 돋보여 한 눈에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보였다."
출처: 정지환 <<대한민국 다큐멘타리>> ,2008.
67년 8월 15일 서울 도심에서 거대한 공사판이 또 하나 벌어졌다.
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건설이었다. 69년 3월 22일에 준공하게 되는3.1고가도로는 우선적으로 박정희의 워커힐 내왕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손정목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워커힐 건설 중에도 그 건설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자주 내왕했지만 1963년 4월에 개관하고 난 뒤에는 뻔질나게 그곳을 찾았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갔고 평일에도 밤에 갔으며 빌라에서 술자리도 가졌고 잠자리도 가졌다. 워커힐의 빌라는 경호하기에도 쉬웠고 일체의 잡음이 절연된 공간이었다. 바깥방에서는 수행원들이 주연을 벌이고 안방에서는 여색을 즐겨도 외부 세계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으니 박 대통령이 휴식을 취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박 대통령의 잦은 워커힐 나들이는 1970년대 중반에 청와대 앞 궁정동에 안가라는 이름의 비밀 휴식처가 생길 때까지 계속되었다."
67년 여성단체들은 "정치 지도자에게 보내는 건의문"을 통해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관료들이 요정을 출입하거나 기생파티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건 실현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통령부터 기생파티를 위해 뻔질나게 워커힐을 찾고 그 바람에 심심하면 육박전(육영수-박정희 부부 싸움)을 벌이곤 했는데, 무슨 수로 기생파티를 없앨 수 있겠는가. 박정희는 야당 정치인들에게 정치 보복을 하더라도 여자관계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기생파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한국의 기생파티는 산업적 규모로 성장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면서 외화벌이에 기여하게 된다.
'기생파티 중독증'
박정희와 미국 대통령 존슨의 관계는 너무나 화기애애해 음담패설까지 주고받을 정도였다. 존슨이 외무장관 이동원을 칭찬하자 박정희는 이동원이 "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이 외교는 더욱 능숙"하다고 받았다. 존슨의 눈이 둥그래지자 박정희는 "난 마누라한테 꽉 잡혀 있는데 이 장관은 밤만 되면 무법자지요"라고 한마디 더 거들었다.
결국 이야기는 기생파티로 빠졌다. 붙임성 좋은 이동원이 기생파티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존슨은 그거 좋다고 찬성했다. 그래서 방한 마지막 날 숙소에서 가까운 워커힐 벌채에서 기생파티를 존슨에게 열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날 밤 눈치를 챈 존슨의 아내 버드가 존슨이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바람에 영 여의치 않았다. 몸이 단 존슨이 이동원 핑계를 대고 잠깐 나가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버드는 자신 옆방에 가 있을테니 여기서 이야기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존슨의 기생파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기생파티 중독증'이라고 할까? 박 정권을 존슨을 수행한 백악관 기자들에게도 그 서비스를 베풀다가 큰 망신을 당했다. UPI 통신 기자인 메리엄 스미스가 자기 방에 들어온 여자를 보자 보고 기겁을 해 문명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문명자의 증언이다.
"다음날 홍종철 공보부장관을 찾아 바로 들이댔다. "홍 장관, 왜 이리 나라 망신을 시켜요? 백악관 기자단에게 여자를 붙여요? 홍종철은 '김형욱 부장이 한 일'이라고 쩔쩔맸다. 나는 말했다. '이것 봐요. 신문이나 주간지라면 몰라도 통신사 기자들이 밤에 여자하고 놀 새가 있는 줄 알아요? 밤에라도 대통령이 뭐 할지도 몰고 밤새 타이프 치느라 잠도 못 자는 사람들한테 여자를 들여보내 어쩌겠다는 거요?' 홍 장관은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기자에게 여자를 붙여 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나의 조국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