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권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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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복판에서 6, 7인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적발동부(赤髮銅腐)의 반나체이다. 그들의 혼탁한 안색, 흘린 콧물, 부른 배, 두렁이 벗은 웃통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별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아가 아니면 남아요, 남아가 아니면 여아인 결국에는 귀여운 5, 6세 내지 7, 8세의 「아이들」임에는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여기 길 한복판을 선택하여 유희하고 있다. 돌멩이를 주워 온다. 여기는 사금파리도 벽돌 조각도 없다. 이 빠진 그릇을 여기 사람들은 버리지 않는다. 그러고는 풀을 뜯어 온다. 풀, 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초록빛의 물건이란 어떤 것이고 간에 다시없이 심심한 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곡식을 뜯는 것도 금제니까 풀 밖에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레한 물이 돌에 가 염색된다. 그러면 그 돌과 그 풀은 팽개치고 또 다른 풀과 돌멩이를 가져다가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한 10여분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이 잠자코 이렇게 놀아 본다. 10분 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다. 충동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 겅중겅중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에는 암만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들과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이 찾느라고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바쁘다. 언니 오빠조차 바쁘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하나? 그들에게는 영영 엄두가 나서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듯 불행하다. 그 짓도 5분이다. 더 이상 더 길게 이 짓을 하자면, 그들은 피로할 것이다. 순진한 그들이 무슨 까닭에 피로해야 되나? 그들은 위선 싱거워서 그 짓을 그만 둔다. 그들은 도로 나란히 앉는다. 앉아서 소리가 없다. '''[https://blog.naver.com/mimlove77/221675205614 무엇을 하나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이 권태의 왜소 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 각각 대변을 한 무더기씩 누어 놓았다. 아아 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였다. 그런 그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는 이번 유희의 못난 낙오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다른 아이들 눈에 조소의 빛이 보인다. 아아 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 길 복판에서 6, 7인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적발동부(赤髮銅腐)의 반나체이다. 그들의 혼탁한 안색, 흘린 콧물, 부른 배, 두렁이 벗은 웃통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별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아가 아니면 남아요, 남아가 아니면 여아인 결국에는 귀여운 5, 6세 내지 7, 8세의 「아이들」임에는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여기 길 한복판을 선택하여 유희하고 있다. 돌멩이를 주워 온다. 여기는 사금파리도 벽돌 조각도 없다. 이 빠진 그릇을 여기 사람들은 버리지 않는다. 그러고는 풀을 뜯어 온다. 풀, 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초록빛의 물건이란 어떤 것이고 간에 다시없이 심심한 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곡식을 뜯는 것도 금제니까 풀 밖에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레한 물이 돌에 가 염색된다. 그러면 그 돌과 그 풀은 팽개치고 또 다른 풀과 돌멩이를 가져다가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한 10여분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이 잠자코 이렇게 놀아 본다. 10분 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다. 충동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 겅중겅중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에는 암만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들과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이 찾느라고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바쁘다. 언니 오빠조차 바쁘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하나? 그들에게는 영영 엄두가 나서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듯 불행하다. 그 짓도 5분이다. 더 이상 더 길게 이 짓을 하자면, 그들은 피로할 것이다. 순진한 그들이 무슨 까닭에 피로해야 되나? 그들은 위선 싱거워서 그 짓을 그만 둔다. 그들은 도로 나란히 앉는다. 앉아서 소리가 없다. '''[https://blog.naver.com/mimlove77/221675205614 무엇을 하나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이 권태의 왜소 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 각각 대변을 한 무더기씩 누어 놓았다. 아아 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였다. 그런 그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는 이번 유희의 못난 낙오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다른 아이들 눈에 조소의 빛이 보인다. 아아 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 ||
− | 날이 어두웠다. 해저(海底)와 같은 밤이 오는 것이다. 나는 자못 이상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럼 나는 어째서 배가 고픈가? 무엇을 했다고 배가 고픈가? 자기 부패작용이나 하고 있는 웅덩이 속을 실로 송사리떼가 쏘다니고 있더라. 그럼 내 장부속으로도 나로서 자각할 수 없는 송사리떼가 준동하고 있나보다. 아무렇든 나는 밥을 아니 먹을 수는 없다. 밥상에는 마늘장아찌와 날된장과 풋고추조림이 관성의 법칙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이 음식이 내 입에, 내 혀에 다르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상(詩想)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 권태의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彼岸)이다. 별조차가 이렇게 싱겁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면, 집집에서는 모깃불의 연기가 한창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잔다. 별을 쳐다 보면서 잔다. 그러나 그들은 별을 보지 않는다. 그 증거로는 그들은 멍석에 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눈을 감자마자 쿨쿨 잠이 든다. 별은 그들과 관계없다. 나는 소화를 촉진시키느라고 길을 왔다 갔다 한다. 돌칠 적마다 멍석 위에 누운 사람의 수가 늘어간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나는 이런 실례로운 생각을 정지해야만 되겠다. 그리고 나도 가서 자야겠다. 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 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된 지금의 내 생활──자살의 단서조차를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흉맹한 형리처럼──나는 그 형리를 피할 수 없다. 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 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 해야 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 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또 한 판 두지. 웅덩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 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http://cafe.naver.com/anf000/5264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 들 불이 있느냐? 없다. '''[http://blog.naver.com/mimlove77/221675504031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방 좁은 것이나 우주에 꼭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https://youtu.be/f2CazUU0cfw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 + | 날이 어두웠다. 해저(海底)와 같은 밤이 오는 것이다. 나는 자못 이상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럼 나는 어째서 배가 고픈가? 무엇을 했다고 배가 고픈가? 자기 부패작용이나 하고 있는 웅덩이 속을 실로 송사리떼가 쏘다니고 있더라. 그럼 내 장부속으로도 나로서 자각할 수 없는 송사리떼가 준동하고 있나보다. 아무렇든 나는 밥을 아니 먹을 수는 없다. 밥상에는 마늘장아찌와 날된장과 풋고추조림이 관성의 법칙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이 음식이 내 입에, 내 혀에 다르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상(詩想)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 권태의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彼岸)이다. 별조차가 이렇게 싱겁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면, 집집에서는 모깃불의 연기가 한창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잔다. 별을 쳐다 보면서 잔다. 그러나 그들은 별을 보지 않는다. 그 증거로는 그들은 멍석에 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눈을 감자마자 쿨쿨 잠이 든다. 별은 그들과 관계없다. 나는 소화를 촉진시키느라고 길을 왔다 갔다 한다. 돌칠 적마다 멍석 위에 누운 사람의 수가 늘어간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나는 이런 실례로운 생각을 정지해야만 되겠다. 그리고 나도 가서 자야겠다. 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 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된 지금의 내 생활──자살의 단서조차를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흉맹한 형리처럼──나는 그 형리를 피할 수 없다. 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 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 해야 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 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또 한 판 두지. 웅덩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 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http://cafe.naver.com/anf000/5264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 들 불이 있느냐? 없다. '''[http://blog.naver.com/mimlove77/221675504031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방 좁은 것이나 우주에 꼭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https://youtu.be/f2CazUU0cfw?t=230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
|출처= 이상, 『권태』(1937). | |출처= 이상, 『권태』(1937). |
2019년 10월 14일 (월) 14:3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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