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ital Luo Yan"의 두 판 사이의 차이
red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12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3번째 줄: | 3번째 줄: | ||
==='''Who''' <small>'''누가'''</small>=== | ==='''Who''' <small>'''누가'''</small>=== | ||
− | * 제작자 | + | *<big>''' 제작자''' |
− | + | </big><br /> | |
− | * 원본저작자 | + | [https://camlab.fas.harvard.edu/ 하버드 예술과학부 중국 미술 미디어랩 (Harvard FAS Chinese Art Media Lab)] |
− | 양현지(楊衒之)(?~?) | + | <br /><br /> |
+ | *<big>''' 원본저작자''' | ||
+ | </big><br /> | ||
+ | '''양현지(楊衒之)(?~?)''' | ||
− | <div style="text-align:justify;">양현지는 그 성명의 표기가 일정치 않은 것처럼 생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북위·동위·북제(北齊)에 걸쳐 고관(高官)을 지냈던 양휴지(陽休之)의 동생 혹은 종제(從弟)라고도 한다. 생몰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낙양가람기》의 내용을 근거로 대략 동위(534~550)에서 북제 문선제(文宣帝) 천보(天保) 연간(550~559)까지 살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사통(史通)》에는 그의 성이 ‘양(羊)’으로, 《신당서(新唐書)》에는 ‘양(陽)’으로 되어 있고, 《수서(隋書)》와 《구당서(舊唐書)》, 《광홍명집(廣弘明集)》 등에는 ‘양(楊)’으로 되어 있어 대개 ‘양(羊)’과 ‘양(陽)’은 오기(誤記)로 여겨진다. 북위 영안(永安) 연간(528~530) 봉조청(奉朝請)을 지냈고, 이후 기성군수(期城郡守), 무군부사마(撫軍府司馬), 비서감(秘書監) 등을 지냈다고 한다. 해박하고 문장에 능하며 불교경전에 정통하였다. 북위가 업성(鄴城)의 동위와 장안(長安)의 서위(西魏)로 분열된 후, 효정제 무정 5년(547) 북위 때의 수도 낙양에 갔다가 황실과 귀족들에 의해 건축되었던 수많은 불교사원이 폐허가 된 것을 보고 비통해하며 술회를 담은 책이 《낙양가람기》이다. 비서감을 지낼 때 본서를 효정제에게 바쳤다. </div> | + | <div style="text-align:justify;">양현지는 그 성명의 표기가 일정치 않은 것처럼 생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북위·동위·북제(北齊)에 걸쳐 고관(高官)을 지냈던 양휴지(陽休之)의 동생 혹은 종제(從弟)라고도 한다. 생몰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낙양가람기》의 내용을 근거로 대략 동위(534~550)에서 북제 문선제(文宣帝) 천보(天保) 연간(550~559)까지 살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사통(史通)》에는 그의 성이 ‘양(羊)’으로, 《신당서(新唐書)》에는 ‘양(陽)’으로 되어 있고, 《수서(隋書)》와 《구당서(舊唐書)》, 《광홍명집(廣弘明集)》 등에는 ‘양(楊)’으로 되어 있어 대개 ‘양(羊)’과 ‘양(陽)’은 오기(誤記)로 여겨진다. 북위 영안(永安) 연간(528~530) 봉조청(奉朝請)을 지냈고, 이후 기성군수(期城郡守), 무군부사마(撫軍府司馬), 비서감(秘書監) 등을 지냈다고 한다. 해박하고 문장에 능하며 불교경전에 정통하였다. 북위가 업성(鄴城)의 동위와 장안(長安)의 서위(西魏)로 분열된 후, 효정제 무정 5년(547) 북위 때의 수도 낙양에 갔다가 황실과 귀족들에 의해 건축되었던 수많은 불교사원이 폐허가 된 것을 보고 비통해하며 술회를 담은 책이 《낙양가람기》이다. 비서감을 지낼 때 본서를 효정제에게 바쳤다. <ref>[http://db.cyberseodang.or.kr/front/alphaList/BookMain.do?bnCode=jti_5a1001&titleId=C35 동양고전종합DB 낙양가람기]</ref> </div> |
==='''When''' <small>'''언제'''</small>=== | ==='''When''' <small>'''언제'''</small>=== | ||
− | * 사이트 제작일 : 2021년 7월 1일 제작<ref>Whois | + | * '''사이트 제작일''' : 2021년 7월 1일 제작<ref>[[파일:Whois.PNG]]<br/>후이즈 검색결과</ref> |
− | * 배경연도 : 위진남북조시대 북위(494-534) 전성기 무렵으로 추측, 낙양가람기의 제작연도는 무정5년(547년) | + | * '''배경연도''' : 위진남북조시대 북위(494-534) 전성기 무렵으로 추측, 낙양가람기의 제작연도는 무정5년(547년) |
==='''Where''' <small>'''어디서'''</small>=== | ==='''Where''' <small>'''어디서'''</small>=== | ||
− | ArtLab at Harvard | + | * ArtLab at Harvard |
{{#display_map: | {{#display_map: | ||
− | 42. | + | 42.36461253329794, -71.12727416197374~ArtLab at Harvard~ |
− | |service= | + | |width=100% |
+ | |height=360px | ||
+ | |center= | ||
+ | |zoom=15 | ||
+ | |service= | ||
}} | }} | ||
− | 북위 시절 낙양 | + | * 북위 시절 낙양 |
+ | {{#display_map: | ||
+ | 34.652735638053855, 112.38969701682049~낙양~ | ||
+ | |width=100% | ||
+ | |height=360px | ||
+ | |center= | ||
+ | |zoom=15 | ||
+ | |service= | ||
+ | }} | ||
+ | |||
+ | <div style="text-align:justify">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때에 이 곳으로 도읍을 잡아 생활했다는 말이 갑골문에 전해진다. 한나라 시기에 대도시로 발전하고, 황하를 통해 물자가 많이 들어와 경제적으로 발달한 도시로 거듭난다. 그 결과 낙양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상당히 발전한 도시가 된다. | ||
+ | |||
+ | 후한 말 십상시의 난 끝에 정권을 잡은 동탁이 전횡을 휘두르자 반동탁 연합군이 궐기하였다. 상국 동탁은 이를 피해 장안으로 천도하고 낙양에 불을 질러 깡그리 폐허로 만들었다. 이 사건 이후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뤄양 시민들은 동탁에 대해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동(董)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혐오한다. 동탁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다가 왕윤과 여포에게 죽었지만 중앙 정부가 마비되면서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하였다. 그 중 강력했던 군벌인 조조가 황제에게 건의하여 낙양을 재건하는 한편 수도를 임시로 허난성에 있는 허(許)로 옮겼다. 위나라가 세워지고 조조의 아들 문제 조비가 낙양을 다시 정비하였고 . 위를 이은 서진 역시 수도를 낙양에 두었다. | ||
+ | |||
+ | 4세기에 들어 북방의 이민족이 화북에 침입해오기 시작했다. 허난성은 후조(319~351), 전연(334~370), 전진(351~394), 후연(384~407), 후진(384~417) 등이 점령했었다. 439년 북위(386~534)가 북중국을 통일했고, 493년에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 이후 이곳에서 하음의 변이 일어났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B%A4%84%EC%96%91%EC%8B%9C 위키디피아 뤄양시 역사에서 발췌]</ref> </div> | ||
==='''What''' <small>'''무엇을'''</small>=== | ==='''What''' <small>'''무엇을'''</small>=== | ||
29번째 줄: | 50번째 줄: | ||
==='''How''' <small>'''어떻게'''</small>=== | ==='''How''' <small>'''어떻게'''</small>=== | ||
− | *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주요 건축물들의 모습과 낙양거리를 3D 모델링으로 구현 | + | *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주요 건축물들의 모습과 낙양거리를 3D 모델링으로 구현 한 후 낙양가람기에 나온 원 건물에 대한 텍스트를 볼 수 있게 하였다.''' |
− | + | [[파일:Photo1.PNG|800픽셀|낙양 영교의 3D 맵]] | |
− | + | [[파일:Photo2.PNG|800픽셀|낙양가람기에 기록된 지형에 대한 묘사 서술]] | |
− | + | [[파일:Photo3.PNG|800픽셀|다양한 각도로 보는 것이 가능함]] | |
− | + | <br /> | |
+ | <br /> | ||
+ | * '''동영상을 통해, 건축물의 건설되는 과정을 보여줌''' | ||
+ | [[파일:Photo7.PNG|800픽셀|]] | ||
+ | <br /> | ||
+ | <br /> | ||
− | * | + | * '''퍼즐 형식의 미니게임을 제공하여 유저가 그림 맞추기를 통해 당시 건축물이 묘사된 그림에 좀더 집중할 수 있게 장치함''' |
==='''Why''' <small>'''왜'''</small>=== | ==='''Why''' <small>'''왜'''</small>=== | ||
− | Harvard University CAMLab(Chinese Art Media Lab)은 북위 시대(494-534)에 존재했던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Luoyang의 생생하고 예술적으로 대담한 디지털 멀티미디어 경험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big>'''비디오 기술, 디지털 전시, 온라인 게임 및 하버드 커뮤니티를 넘어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교육 기회'''</big>를 활용하는 결과 다중 플랫폼 경험은 <big>'''전 세계의 학생, 학자 및 시민에게 어필'''</big>할 것입니다. 온라인 참가자는 불교 역사의 글로벌 수도로서 오늘날까지 그 중요성이 남아 있는 고대 뤄양의 독특한 건축, 종교 생활 및 문화적 풍요로움을 경험할 것입니다. 오늘날 고대 세계에서 Luoyang이 수행한 중요한 역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명성과 수천 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초기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Luoyang의 역사와 수세기 동안 불교 수도이자 세계 문화의 원천으로 자리 잡은 장소는 예술가, 학자, 불교 신자, 종교 또는 종교 역사 학생, 역사가 및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 대한 호기심. CAMLab의 Digital Luoyang은 이 고대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고 흥미롭고 새로운 방식으로 현대 세계 시민에게 공개할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역사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최고의 예술적, 교육적 가치를 지닌 새로운 이해와 경험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 + | <div style="text-align:justify">Harvard University CAMLab(Chinese Art Media Lab)은 북위 시대(494-534)에 존재했던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Luoyang의 생생하고 예술적으로 대담한 디지털 멀티미디어 경험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big>'''비디오 기술, 디지털 전시, 온라인 게임 및 하버드 커뮤니티를 넘어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교육 기회'''</big>를 활용하는 결과 다중 플랫폼 경험은 <big>'''전 세계의 학생, 학자 및 시민에게 어필'''</big>할 것입니다. 온라인 참가자는 불교 역사의 글로벌 수도로서 오늘날까지 그 중요성이 남아 있는 고대 뤄양의 독특한 건축, 종교 생활 및 문화적 풍요로움을 경험할 것입니다. 오늘날 고대 세계에서 Luoyang이 수행한 중요한 역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명성과 수천 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초기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Luoyang의 역사와 수세기 동안 불교 수도이자 세계 문화의 원천으로 자리 잡은 장소는 예술가, 학자, 불교 신자, 종교 또는 종교 역사 학생, 역사가 및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 대한 호기심. CAMLab의 Digital Luoyang은 이 고대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고 흥미롭고 새로운 방식으로 현대 세계 시민에게 공개할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역사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최고의 예술적, 교육적 가치를 지닌 새로운 이해와 경험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div> |
==='''Comment''' <small>'''논평'''</small>=== | ==='''Comment''' <small>'''논평'''</small>=== | ||
− | + | <div style="text-align:justify"> 제작자들이 밝힌 제작동기에서도 나와 있듯이 과거에 사라진 번창한 낙양의 거리의 모습과 건축물들을 기록을 바탕으로 3D모델로 재구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체험할 기회를 주는 목적으로 제작된 사이트이며 3D 모델링, 게임, 동영상등 다양한 시각적 매체를 이용한 점이 돋보인다. 하지만 일반적인 이용자들이 쉽게 이용하고 체험할 수 있는 반면에 학자를 대상으로 한 컨텐츠는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예를 들면 사이트 제작시 낙양가람기 이외에도 다양한 참고 자료들이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참고자료들을 DB화 하여 보여주는 부분이 있었다면 각계각층이 모두 이용이 가능한 컨텐츠란 목적에 좀 더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div> |
2022년 3월 23일 (수) 15:09 기준 최신판
Who 누가
- 제작자
하버드 예술과학부 중국 미술 미디어랩 (Harvard FAS Chinese Art Media Lab)
- 원본저작자
양현지(楊衒之)(?~?)
양현지는 그 성명의 표기가 일정치 않은 것처럼 생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북위·동위·북제(北齊)에 걸쳐 고관(高官)을 지냈던 양휴지(陽休之)의 동생 혹은 종제(從弟)라고도 한다. 생몰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낙양가람기》의 내용을 근거로 대략 동위(534~550)에서 북제 문선제(文宣帝) 천보(天保) 연간(550~559)까지 살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사통(史通)》에는 그의 성이 ‘양(羊)’으로, 《신당서(新唐書)》에는 ‘양(陽)’으로 되어 있고, 《수서(隋書)》와 《구당서(舊唐書)》, 《광홍명집(廣弘明集)》 등에는 ‘양(楊)’으로 되어 있어 대개 ‘양(羊)’과 ‘양(陽)’은 오기(誤記)로 여겨진다. 북위 영안(永安) 연간(528~530) 봉조청(奉朝請)을 지냈고, 이후 기성군수(期城郡守), 무군부사마(撫軍府司馬), 비서감(秘書監) 등을 지냈다고 한다. 해박하고 문장에 능하며 불교경전에 정통하였다. 북위가 업성(鄴城)의 동위와 장안(長安)의 서위(西魏)로 분열된 후, 효정제 무정 5년(547) 북위 때의 수도 낙양에 갔다가 황실과 귀족들에 의해 건축되었던 수많은 불교사원이 폐허가 된 것을 보고 비통해하며 술회를 담은 책이 《낙양가람기》이다. 비서감을 지낼 때 본서를 효정제에게 바쳤다. [1]
When 언제
- 사이트 제작일 : 2021년 7월 1일 제작[2]
- 배경연도 : 위진남북조시대 북위(494-534) 전성기 무렵으로 추측, 낙양가람기의 제작연도는 무정5년(547년)
Where 어디서
- ArtLab at Harvard
지도를 불러오는 중...
- 북위 시절 낙양
지도를 불러오는 중...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때에 이 곳으로 도읍을 잡아 생활했다는 말이 갑골문에 전해진다. 한나라 시기에 대도시로 발전하고, 황하를 통해 물자가 많이 들어와 경제적으로 발달한 도시로 거듭난다. 그 결과 낙양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상당히 발전한 도시가 된다.
후한 말 십상시의 난 끝에 정권을 잡은 동탁이 전횡을 휘두르자 반동탁 연합군이 궐기하였다. 상국 동탁은 이를 피해 장안으로 천도하고 낙양에 불을 질러 깡그리 폐허로 만들었다. 이 사건 이후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뤄양 시민들은 동탁에 대해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동(董)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혐오한다. 동탁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다가 왕윤과 여포에게 죽었지만 중앙 정부가 마비되면서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하였다. 그 중 강력했던 군벌인 조조가 황제에게 건의하여 낙양을 재건하는 한편 수도를 임시로 허난성에 있는 허(許)로 옮겼다. 위나라가 세워지고 조조의 아들 문제 조비가 낙양을 다시 정비하였고 . 위를 이은 서진 역시 수도를 낙양에 두었다.
4세기에 들어 북방의 이민족이 화북에 침입해오기 시작했다. 허난성은 후조(319~351), 전연(334~370), 전진(351~394), 후연(384~407), 후진(384~417) 등이 점령했었다. 439년 북위(386~534)가 북중국을 통일했고, 493년에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 이후 이곳에서 하음의 변이 일어났다.[3]What 무엇을
낙양가람기를 바탕으로 재현한 낙양의 주요 건축물과 거리를 표현
How 어떻게
-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주요 건축물들의 모습과 낙양거리를 3D 모델링으로 구현 한 후 낙양가람기에 나온 원 건물에 대한 텍스트를 볼 수 있게 하였다.
- 동영상을 통해, 건축물의 건설되는 과정을 보여줌
- 퍼즐 형식의 미니게임을 제공하여 유저가 그림 맞추기를 통해 당시 건축물이 묘사된 그림에 좀더 집중할 수 있게 장치함
Why 왜
Harvard University CAMLab(Chinese Art Media Lab)은 북위 시대(494-534)에 존재했던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Luoyang의 생생하고 예술적으로 대담한 디지털 멀티미디어 경험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비디오 기술, 디지털 전시, 온라인 게임 및 하버드 커뮤니티를 넘어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교육 기회를 활용하는 결과 다중 플랫폼 경험은 전 세계의 학생, 학자 및 시민에게 어필할 것입니다. 온라인 참가자는 불교 역사의 글로벌 수도로서 오늘날까지 그 중요성이 남아 있는 고대 뤄양의 독특한 건축, 종교 생활 및 문화적 풍요로움을 경험할 것입니다. 오늘날 고대 세계에서 Luoyang이 수행한 중요한 역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명성과 수천 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초기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Luoyang의 역사와 수세기 동안 불교 수도이자 세계 문화의 원천으로 자리 잡은 장소는 예술가, 학자, 불교 신자, 종교 또는 종교 역사 학생, 역사가 및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 대한 호기심. CAMLab의 Digital Luoyang은 이 고대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고 흥미롭고 새로운 방식으로 현대 세계 시민에게 공개할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역사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최고의 예술적, 교육적 가치를 지닌 새로운 이해와 경험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Comment 논평
제작자들이 밝힌 제작동기에서도 나와 있듯이 과거에 사라진 번창한 낙양의 거리의 모습과 건축물들을 기록을 바탕으로 3D모델로 재구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체험할 기회를 주는 목적으로 제작된 사이트이며 3D 모델링, 게임, 동영상등 다양한 시각적 매체를 이용한 점이 돋보인다. 하지만 일반적인 이용자들이 쉽게 이용하고 체험할 수 있는 반면에 학자를 대상으로 한 컨텐츠는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예를 들면 사이트 제작시 낙양가람기 이외에도 다양한 참고 자료들이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참고자료들을 DB화 하여 보여주는 부분이 있었다면 각계각층이 모두 이용이 가능한 컨텐츠란 목적에 좀 더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 ↑ 동양고전종합DB 낙양가람기
- ↑
후이즈 검색결과 - ↑ 위키디피아 뤄양시 역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