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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시(辰時)에 의관이 와서 “주상의 환후는 마찬가지입니다. 수습하기 어려운 증세와 훈열(熏熱)로 괴롭게 뒤척이시고, 침수가 더욱 편치 못하시며, 화수(火嗽) 등과 같은 증세는 그대로입니다. 가래침 뱉는 것은 어제와 비교하여 조금 낫고, 연일 송이 죽을 한 홉 반씩 드십니다.”라고 하였다. 오후에 영남우도의 방목이 비로소 왔다. 막내 작은아버지는 종장(終場)에서 2등 제6인으로 입격하였고, 상주(尙州)에서 무려 18인이 입격하였다. 우리 면은 고사건(高師健)ㆍ채윤후(蔡允垕)ㆍ홍서귀(洪瑞龜)ㆍ홍한조(洪漢朝)ㆍ고계서(高啓瑞), 조국룡(曺國龍) 숙질(叔侄), 신사선(申思選) 등이 입격하였으니, 장하다고 할 만하다. 대승사(大乘寺) 종이 장수 편에 고향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전적 김정귀(金正龜)가 다녀갔다. 장생전(長生殿) 수리를 마쳤다. 임진년 전쟁으로 인한 화재 이후 계사년(1593)에 대가(大駕)가 의주(義州)에서 도성에 돌아오니 종묘에는 신위를 봉안할 곳이 없어서 급작스럽게 민간 가옥의 재목을 모아다가 이 전각 모두 14칸을 지어서 임시로 신주를 봉안하였다. 그 뒤 무신년(1608)에 종묘를 건립하여 옮겨 봉안하여 마침내 이 전각에는 재궁(梓宮)을 봉안하였는데, 지금 백 여 년이 지났다. 당초 처음 창건할 때 규모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데다, 지금 또 세월이 오래되어 단청이 벗겨지고 서까래와 벽이 썩고 허물어져서 여름철을 맞아 빗물이 새는 곳이 많았다. 지난여름에 새로 수리하자는 논의가 있어서, 호조와 선공감에서 같이 와서 살펴보고 필요한 목재와 기와 등의 물자를 호조의 산원(算員)이 모두 계산하고 계획하여 아뢰었다. 종부시(宗簿寺)가 막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찬수하여 간행할 일이 있었는데, 전각 뒤 처마가 종부시와 가까워서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우선 수리를 정지하였다가, 올 봄에 신 정랑(辛正郞)이 제조에게 여쭈고 제조가 들어가 아뢰어 비로소 일을 시작하여 지금 달포 남짓 되어 공사를 마쳤다. 감역 신태동(辛泰東)이 처음에 파견되어 일을 살핀 지 20여일 만에 병으로 면직되고, 홍의인(洪義人)이 후임으로 차출되었다. 전각 앞부분의 문미에는 옛날에 ‘내재궁봉안소(內梓宮奉安所)’라는 여섯 글자를 써서 걸고, 대문에는 ‘장생전(長生殿)’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걸었는데, 이번에는 전각 문미에 장생전이라 써서 걸고, 대문에는 동원문(東園門)이라 써서 걸었으며, 동쪽과 서쪽의 정고(正庫)와 서쪽 하고(下庫)에도 모두 현판을 걸었다. 도사 김제겸(金濟謙)이 팔분체(八分體)로 썼는데, 이 모든 것을 제조가 정하고, 또 그의 아들을 시켜 쓰게 하였다고 한다. 좌측 좌기청(坐起廳)의 방들은 모두 아직 수리를 마치지 못하였다. 주서 이중환(李重煥)이 편지로 안부를 묻고, 박사 박성의(朴性毅)가 보러 왔다. 들으니, 참의 최창대(崔昌大)가 어제 세상을 버렸다고 한다. 이 사람은 평소에 문장으로 이름이 나서 피차를 막론하고 모두 문형(文衡)의 솜씨로 기대하였는데, 소론(少論)의 영수가 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작년에 양사(兩司)가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기를 청하며 연이어 여러 달에 걸쳐 아뢰어서 끝내 문형인(文衡人)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또한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였다. 신주백(申周伯)이 가장 친하게 왕래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이 애석하다. 또 임호당(林湖堂) 중덕(衆德)도 작년에 죽었으니, 소론의 문운(文運)이 막힘이 심하다. 유시(酉時)에 주상의 환후는 까라져서 신음이 더해졌다고 한다. 송주관(宋周觀)이 보러 왔다. 그는 하동(河東) 사람으로, 옛날 하동 부사 조동양(趙東陽)의 치적을 굉장히 칭송하였는데, 읍민들이 동비(銅碑)를 세웠다고 한다.<br/><br/>'''辰時。醫官來言。 上候一樣。若難收拾之候。熏熱煩轉。寢睡益不寧。火嗽一樣。痰涎之唾。比昨少愈。連日服松茸粥一合半。午後嶺右榜始來。季父參終場二等六人。尙州凡十八人。吾面。則高師健蔡允垕洪瑞龜洪漢朝高啓瑞曺國龍叔侄申思選。可謂壯哉。因大乘紙商便。付庭書。金典籍正龜來過。長生殿畢役。壬辰兵火後。癸巳大駕自義州還都。 宗廟無可奉安處。倉卒鳩聚村間屋材。成此殿凡十四間。權安 神主。其後戊申歲。建宗廟移奉。遂以此 殿奉 梓宮。今經百餘年。當初草創不成規模。今又年久。丹靑剝落。椽壁腐頹。逢夏雨漏甚多。前夏有改修之議。戶曹及繕工齊來奉審。所入材瓦物力。算員皆算摘磨鍊。因 入達矣。以宗簿寺方有璿源譜略修刊之役。 殿後簷樓。近宗簿有妨碍事。故不得已姑停。今春辛正郞。稟提調 入達。始役今過一月餘訖工。辛監役泰東。初分差看役二十餘日後。以病免。洪義人代出矣。 殿前楣舊揭內梓宮奉安所六字。大門揭長生殿三字。今番 殿楣揭長生殿。大門揭東園門。東西正庫及西下庫。皆揭額。都事金濟謙。皆以八分書之。此皆都提調所定。且使厥子書之云。左邊坐起廳。房舍皆改修。尙未畢矣。李注書重煥札問。朴博士性毅來見。聞崔參議昌大昨日捐世。此人素以詞章名。無論彼此皆以文衡手期之。爲少論領袖。故見嫉於時。昨年兩司請削去仕版。連 啓者累月。終不與文衡人。且恬潔。周伯最親往來。故詳得其爲人。其死可惜。且林湖堂衆德昨年亦死。少黨文運之否極矣。酉時 上候昏困。呻吟有加。宋周觀來見。宋河東人。盛稱舊倅趙東陽令政績。邑民建銅碑云。''' | + | 진시(辰時)에 의관이 와서 “주상의 환후는 마찬가지입니다. 수습하기 어려운 증세와 훈열(熏熱)로 괴롭게 뒤척이시고, 침수가 더욱 편치 못하시며, 화수(火嗽) 등과 같은 증세는 그대로입니다. 가래침 뱉는 것은 어제와 비교하여 조금 낫고, 연일 송이 죽을 한 홉 반씩 드십니다.”라고 하였다. 오후에 영남우도의 방목이 비로소 왔다. 막내 작은아버지는 종장(終場)에서 2등 제6인으로 입격하였고, 상주(尙州)에서 무려 18인이 입격하였다. 우리 면은 고사건(高師健)ㆍ채윤후(蔡允垕)ㆍ홍서귀(洪瑞龜)ㆍ홍한조(洪漢朝)ㆍ고계서(高啓瑞), 조국룡(曺國龍) 숙질(叔侄), 신사선(申思選) 등이 입격하였으니, 장하다고 할 만하다. 대승사(大乘寺) 종이 장수 편에 고향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전적 김정귀(金正龜)가 다녀갔다. '''장생전(長生殿) 수리를 마쳤다. 임진년 전쟁으로 인한 화재 이후 계사년(1593)에 대가(大駕)가 의주(義州)에서 도성에 돌아오니 종묘에는 신위를 봉안할 곳이 없어서 급작스럽게 민간 가옥의 재목을 모아다가 이 전각 모두 14칸을 지어서 임시로 신주를 봉안하였다. 그 뒤 무신년(1608)에 종묘를 건립하여 옮겨 봉안하여 마침내 이 전각에는 재궁(梓宮)을 봉안하였는데, 지금 백 여 년이 지났다. 당초 처음 창건할 때 규모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데다, 지금 또 세월이 오래되어 단청이 벗겨지고 서까래와 벽이 썩고 허물어져서 여름철을 맞아 빗물이 새는 곳이 많았다. 지난여름에 새로 수리하자는 논의가 있어서, 호조와 선공감에서 같이 와서 살펴보고 필요한 목재와 기와 등의 물자를 호조의 산원(算員)이 모두 계산하고 계획하여 아뢰었다. 종부시(宗簿寺)가 막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찬수하여 간행할 일이 있었는데, 전각 뒤 처마가 종부시와 가까워서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우선 수리를 정지하였다가, 올 봄에 신 정랑(辛正郞)이 제조에게 여쭈고 제조가 들어가 아뢰어 비로소 일을 시작하여 지금 달포 남짓 되어 공사를 마쳤다. 감역 신태동(辛泰東)이 처음에 파견되어 일을 살핀 지 20여일 만에 병으로 면직되고, 홍의인(洪義人)이 후임으로 차출되었다. 전각 앞부분의 문미에는 옛날에 ‘내재궁봉안소(內梓宮奉安所)’라는 여섯 글자를 써서 걸고, 대문에는 ‘장생전(長生殿)’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걸었는데, 이번에는 전각 문미에 장생전이라 써서 걸고, 대문에는 동원문(東園門)이라 써서 걸었으며, 동쪽과 서쪽의 정고(正庫)와 서쪽 하고(下庫)에도 모두 현판을 걸었다. 도사 김제겸(金濟謙)이 팔분체(八分體)로 썼는데, 이 모든 것을 제조가 정하고, 또 그의 아들을 시켜 쓰게 하였다고 한다. 좌측 좌기청(坐起廳)의 방들은 모두 아직 수리를 마치지 못하였다.''' 주서 이중환(李重煥)이 편지로 안부를 묻고, 박사 박성의(朴性毅)가 보러 왔다. 들으니, 참의 최창대(崔昌大)가 어제 세상을 버렸다고 한다. 이 사람은 평소에 문장으로 이름이 나서 피차를 막론하고 모두 문형(文衡)의 솜씨로 기대하였는데, 소론(少論)의 영수가 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작년에 양사(兩司)가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기를 청하며 연이어 여러 달에 걸쳐 아뢰어서 끝내 문형인(文衡人)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또한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였다. 신주백(申周伯)이 가장 친하게 왕래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이 애석하다. 또 임호당(林湖堂) 중덕(衆德)도 작년에 죽었으니, 소론의 문운(文運)이 막힘이 심하다. 유시(酉時)에 주상의 환후는 까라져서 신음이 더해졌다고 한다. 송주관(宋周觀)이 보러 왔다. 그는 하동(河東) 사람으로, 옛날 하동 부사 조동양(趙東陽)의 치적을 굉장히 칭송하였는데, 읍민들이 동비(銅碑)를 세웠다고 한다.<br/><br/>'''辰時。醫官來言。 上候一樣。若難收拾之候。熏熱煩轉。寢睡益不寧。火嗽一樣。痰涎之唾。比昨少愈。連日服松茸粥一合半。午後嶺右榜始來。季父參終場二等六人。尙州凡十八人。吾面。則高師健蔡允垕洪瑞龜洪漢朝高啓瑞曺國龍叔侄申思選。可謂壯哉。因大乘紙商便。付庭書。金典籍正龜來過。長生殿畢役。壬辰兵火後。癸巳大駕自義州還都。 宗廟無可奉安處。倉卒鳩聚村間屋材。成此殿凡十四間。權安 神主。其後戊申歲。建宗廟移奉。遂以此 殿奉 梓宮。今經百餘年。當初草創不成規模。今又年久。丹靑剝落。椽壁腐頹。逢夏雨漏甚多。前夏有改修之議。戶曹及繕工齊來奉審。所入材瓦物力。算員皆算摘磨鍊。因 入達矣。以宗簿寺方有璿源譜略修刊之役。 殿後簷樓。近宗簿有妨碍事。故不得已姑停。今春辛正郞。稟提調 入達。始役今過一月餘訖工。辛監役泰東。初分差看役二十餘日後。以病免。洪義人代出矣。 殿前楣舊揭內梓宮奉安所六字。大門揭長生殿三字。今番 殿楣揭長生殿。大門揭東園門。東西正庫及西下庫。皆揭額。都事金濟謙。皆以八分書之。此皆都提調所定。且使厥子書之云。左邊坐起廳。房舍皆改修。尙未畢矣。李注書重煥札問。朴博士性毅來見。聞崔參議昌大昨日捐世。此人素以詞章名。無論彼此皆以文衡手期之。爲少論領袖。故見嫉於時。昨年兩司請削去仕版。連 啓者累月。終不與文衡人。且恬潔。周伯最親往來。故詳得其爲人。其死可惜。且林湖堂衆德昨年亦死。少黨文運之否極矣。酉時 上候昏困。呻吟有加。宋周觀來見。宋河東人。盛稱舊倅趙東陽令政績。邑民建銅碑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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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淸臺日記』四 1720년 4월 23일자 일기}} | |출처=『淸臺日記』四 1720년 4월 23일자 일기}} |
2020년 10월 2일 (금) 14:22 판
목차
- 1 육조거리와 출퇴근 풍경
- 2 호조 서리 이윤선(李潤善)의 업무와 일상
- 3 예조 낭관 권상일(權相一)의 장생전 수리 일지
- 3.1 예조정랑 제수: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2 청탁의 정황: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3 사은숙배: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4 예조정랑 제수 이전 성균관직강 역임: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5 예조정랑 제수 당시 서울 숙소는 창동(倉洞):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6 예조정랑 제수 당시 만나던 영남의 문반들: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7 예조정랑 제수 이전 강진현감 말의(末擬):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8 예조정랑 제수 당시 가난했던 형편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9 예조정랑 제수 당시 가난했던 형편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0 예조의 업무 기록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1 예조의 업무 기록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2 예조의 업무 기록3: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3 예조의 업무 기록4: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4 예조의 업무 기록5: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3.15 예조의 업무 기록5: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 4 병조에서 이조의 낭관으로, 윤기의 이상과 현실
- 5 육조 당상, 그 빛과 그늘
- 6 봉심(奉審)과 회창(回倉) 그리고 순심(巡審), 출장을 빙자한 외유
- 7 연지(蓮池)와 누정(樓亭), 휴식과 위안의 공간
- 7.1 예조의 건립: 15세기, 성현(成俔)의 글
- 7.2 예조의 낭관청: 17세기, 이정귀(李廷龜)의 시
- 7.3 예조의 풍경: 17~18세기, 홍세태(洪世泰)의 시
- 7.4 예조의 풍경: 18세기, 이시항(李時恒)의 시
- 7.5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 7.6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 7.7 병조의 누정: 16세기, 윤두수(尹斗壽)의 시
- 7.8 병조의 연지: 17세기, 이수광(李睟光)의 시
- 7.9 병조의 연지: 17세기, 김육(金堉)의 시
- 7.10 병조의 연지: 18세기, 정간(鄭榦)의 시
- 7.11 병조의 연지: 19세기, 임천상(任天常)의 시
- 7.12 형조의 연지: 16세기, 신광한(申光漢)의 시
- 7.13 형조의 연지: 17세기, 홍석기(洪錫箕)의 시
- 7.14 형조의 연지: 17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 7.15 호조의 연지: 16세기, 유홍(兪泓)의 시
- 7.16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심정진(沈定鎭)의 시
- 7.17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유숙기(兪肅基)의 글
- 8 주석
육조거리와 출퇴근 풍경
광화문전로: 16세기, 이기(李墍)의 글
왕궁의 법전(法殿)은 남향(南向)을 하는데, 그것은 정사를 듣고 조회를 받는 바른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政府)와 추부(樞府)ㆍ6조(曹) 여러 관청이 모두 광화문 밖에 벌여 있어 동쪽에 있는 것은 서쪽을 향하고 서쪽에 있는 것은 동쪽을 향해 있다. 한갓 관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대부의 사가(私家)나 대청마루도 모두 동향이나 서향으로 되어 있어, 감히 남향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비록 집에 있을 때라도 분수에 넘치게 남쪽을 향해 앉을 수 없어서였다. 도성(都城) 안에, 고가 세족(故家世族)의 집들이 바둑돌같이 벌여 있고 별처럼 흩어져 있으나, 모두 북향하여 있었는데, 중종 이후로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인심이 나날이 사치스러워져, 분수를 어기고 예도를 넘는 일이 끝이 없어 집의 좌향(坐向)이 남인가 북인가는 물을 것도 없었으니, 세도(世道)가 점점 못하여지고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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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窩雜說』 |
묘시 출근과 유시 퇴근: 18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각 관사에 묘시(卯時)[1]에 출사(出仕)하고 유시(酉時)[2]에 퇴근하는 법을 거듭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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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31권, 영조 8년(1732) 5월2일(무오) 기사 |
창덕궁 앞 출근 풍경: 17세기, 유몽인(柳夢寅)의 시
「남소(南所)[3]에서 감회를 쓰다(南所寫懷)」 궁궐에 새벽빛 밝아오니 고관들 조정으로 달려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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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於于集後集』卷二 「南所寫懷」 |
광화문전로의 밤풍경: 16세기, 이기(李墍)의 글
조종조는 육조(六曹)에 숙직하는 낭관들은 달밤에 창기(娼妓)들과 어울려서 광화문 밖에 모여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노래도 불러 밤새도록 마시고 담소하였으니, 이것은 태평 시대의 일이다. 한갓 육조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미원(薇垣 사간원의 별칭)의 관원도 또한 곡회(曲會 이리저리 꾸며대서 모임)를 일삼았고, 입직하는 밤에는 반드시 기생을 끼고 잤다. 새벽녘이면, 일을 맡아보는 아전이 창밖에 서서 뵙기를 청하는데, 이것은 계집을 일찍 내어 보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세상 인심이 점차 박하여지고, 금법(禁法)이 점점 세밀하여져서, 육조에 숙직하는 풍습이 아주 바뀌고 미원에서 밤놀이하던 것도 또한 없어졌다. 그런데 숙직하는 날 밤에 일을 맡아보는 아전이 뵙기를 청하는 고사는 아직도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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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窩雜說』 |
호조 서리 이윤선(李潤善)의 업무와 일상
호조 아전 이창린 등의 옥안 판하: 18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호조의 아전 이창린(李昌麟)과 김처신(金處信)이 대궐에 바칠 것이라고 칭탁하고 수리계(修理契)의 종이를 훔쳐내려고 거짓 보고를 하여 계단(啓單)을 받았다가 일이 들통났다. 옥에다 가두고 끝까지 심문하니, 김처신은 꾀를 내어 시킨 자이고 이창린은 직접 죄를 범하여 거짓으로 전한 자였다. 형조가 이창린을 정범(正犯)으로 삼아 옥안을 갖추어 계문하니, 판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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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51권, 정조 23년(1799) 5월22일(기묘) 기사 |
예조 낭관 권상일(權相一)의 장생전 수리 일지
예조정랑 제수: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청탁의 정황: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한사범(韓士範) 형제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관(譯官)과 의학(醫學) 대여섯 사람이 친구들의 청탁 편지를 들고 찾아왔다. 그들의 취재(取才) 고강(考講)을 예조에서 맡아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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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1월 22일자 일기 |
사은숙배: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이전 성균관직강 역임: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서울 숙소는 창동(倉洞):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만나던 영남의 문반들: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이전 강진현감 말의(末擬):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가난했던 형편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가난했던 형편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3: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4: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5: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5: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병조에서 이조의 낭관으로, 윤기의 이상과 현실
육조 당상, 그 빛과 그늘
봉심(奉審)과 회창(回倉) 그리고 순심(巡審), 출장을 빙자한 외유
동대문 밖 인가의 철거와 풍수설: 16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상이 소대하였다. 시강관 심봉원(沈逢源)이 아뢰었다. 동대문(東大門) 밖에 조종조부터 있었던 오래된 인가(人家)를 이번에 문을 막고 있는 산줄기를 점거하였다고 하여 모두 철거시키라고 하였습니다. 풍수설(風水說)이 성인(聖人)의 경전(經典)에는 있지 않은 것이니, 진실로 성주(聖主)로서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임금이 덕을 닦으면 하늘에다 영명(永命)을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도(道)를 어기고 덕을 손상시키면 스스로 위망(危亡)에 이를 것인데 풍수설이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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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종실록』6권, 명종 2년(1547) 8월13일(신묘) 기사 |
연지(蓮池)와 누정(樓亭), 휴식과 위안의 공간
예조의 건립: 15세기, 성현(成俔)의 글
지금 예조는 바로 예전의 삼군부(三軍府)이다. 정삼봉(鄭三峯)이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을 맡았을 때 의정부의 제도를 보고 말하기를, "정부와 군부는 일체이다." 라고 하고 드디어 그 제도에 의하여 만드니 높다랗게 동서가 상대가 되어 그 청사가 굉장한 것이 다른 관부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뒤에 삼군부를 혁파하고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여 군무를 맡기지 않고, 예조로써 오례(五禮)를 맡아보게 하고 또 다른 나라의 사신을 대접하게 하니, 그 임무가 중대하여 그 부(府)를 예조로 삼고, 중추원은 도리어 예조의 남쪽 곁채에 우거(寓居)하였다. 경복궁 서쪽 가에 수맥(水脈)이 많은데, 경회루의 연못 물은 비록 옛날 중국의 곤명지(昆明池)ㆍ태액지(太液池)라도 이보다 좋지 못할 것이다. 서문 밖에 샘이 있어 넘쳐 흐르니, 얼음과 같이 맑고 차가워 사람들이 모두 쪽[藍]을 물들이기 때문에 쪽샘[藍井]이라 불렀다. 예조의 우물도 또한 맑고 깨끗하고 마르지 않아 흘러서 큰 못을 이루니 비록 몹시 가물어도 한결같았다. 못 남쪽에 조그마한 땅이 중추부로 뻗어서, 수초가 우거지고 더럽더니 금상(今上) 기미년에 중추부에서 아뢰기를, “개 이빨처럼 우리 관아에 들어오니, 마땅히 분할하여 우리 못으로 해야겠습니다.” 하니, 예조가 이르기를, “외국 사람을 대접하는 곳을 좁게 해서는 안 된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임금이 승지와 내관 등에게 물어서 쪼개어 나누어주니, 중추부에서 그 땅을 파서 서지(西池)를 만들고, 대청을 개축하고 대청에 연이어 서헌(西軒)을 만들고, 돌기둥을 물 속에 세우니 아로새겨지는 그림자가 물결 위에 떨어지고, 서쪽은 산봉우리가 높고 집들이 좋고 나무가 빽빽하여 풍경이 서울에서 제일이었다. 그 밑에 있는 사헌부와 옛 병조ㆍ형조ㆍ공조ㆍ장예원(掌隸院)에도 모두 못이 있어 연꽃을 심었고, 동쪽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에는 비록 못이 있으나 서쪽 못보다는 훌륭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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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慵齋叢話』卷十 |
예조의 낭관청: 17세기, 이정귀(李廷龜)의 시
「예부에서 낭관청을 중건하고 풍악을 연주한 후 간소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낭료들과 즉흥적으로 읊다(禮部重建郞官廳 閱樂後仍作小酌 酒席與郞僚口占)」 남궁에서 잔치 풍악 울리며 인청(寅淸)[11]이 모이니, 절후는 삼원(三元)[12]에 가까워서 고운 햇살이 밝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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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月沙先生集』卷十七 「禮部重建郞官廳 閱樂後仍作小酌 酒席與郞僚口占」 |
예조의 풍경: 17~18세기, 홍세태(洪世泰)의 시
「김참봉, 홍진사와 함께 예조 뒷산에 오르다(同金參奉 洪進士。登南宮後岡)」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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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柳下集』卷三 「同金參奉 洪進士。登南宮後岡」 |
예조의 풍경: 18세기, 이시항(李時恒)의 시
「예조 낭관으로 옮겨 임명되어 본사(本司)에서 숙직하다(移拜春曹郞 直宿本司)」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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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和隱集』卷三 「移拜春曹郞 直宿本司」 |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예조에 근무하며 우연히 읊다(直禮曹偶吟)」 광화문 앞이 바로 예조이니, 낭관의 재미는 극히 쓸쓸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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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直禮曹偶吟」 |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예조에 입직한 날, 인왕산을 마주해 한가로이 4수를 짓다(直春曹日 對仁王山 漫成四絶)」 인왕산 솟은 바위 서울을 진무하니, 구름 속 기봉이 그림처럼 산뜻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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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直春曹日 對仁王山 漫成四絶」 |
병조의 누정: 16세기, 윤두수(尹斗壽)의 시
「병조의 작은 누대에서 우연히 시를 짓다(兵曹小樓偶題)」 별을 보고 갔다가 별을 보고 돌아오니, 봄이 다 저물도록 술 한 잔 할 겨를 없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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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梧陰先生遺稿』卷一 「兵曹小樓偶題」 |
병조의 연지: 17세기, 이수광(李睟光)의 시
「병조 청사 뒤쪽 작은 못이 깊고 검푸른데, 거기에 연꽃 몇 송이가 있어(騎曹廳後小池深黑中有種荷數朶)」 누가 섬돌 앞 한 자락 사초를 파헤쳤나, 못 속에 담긴 물이 웅덩이도 못 채우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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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芝峯先生集』卷四 「騎曹廳後小池深黑中有種荷數朶」 |
병조의 연지: 17세기, 김육(金堉)의 시
「달밤에 병조에 입직하다(月夜直騎省)」 백합꽃 피어 있고 파초잎 기다란데, 비 온 뒤라 못가 누각 여름에도 서늘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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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潛谷先生遺稿』卷二 「月夜直騎省」 |
병조의 연지: 18세기, 정간(鄭榦)의 시
「병조 당상대청 뒤에 네모진 못이 있고, 못에는 연꽃이 못가에는 창포가 둑에는 수양버들이 있어, 마침내 ‘淸’자 운으로 읊어 화답을 구하다(騎省正衙後有方塘 塘有芙蕖 渚有菖蒲 堤有垂柳 遂用淸字 詠以求和)」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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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鳴臯先生文集』卷一 「騎省正衙後有方塘 塘有芙蕖 渚有菖蒲 堤有垂柳 遂用淸字 詠以求和」 |
병조의 연지: 19세기, 임천상(任天常)의 시
「비오는 가운데 병조에 입직해 있으면서 장난삼아 ‘무와행’을 짓다(雨中直兵曹 戱爲無蛙行)」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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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窮悟集』卷四 「雨中直兵曹 戱爲無蛙行」 |
형조의 연지: 16세기, 신광한(申光漢)의 시
「형조의 연못에서 즉흥으로 읊어 송 정랑에게 보여주다(秋部官池卽事 示宋正郞)」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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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企齋集』卷六 「秋部官池卽事 示宋正郞」 |
형조의 연지: 17세기, 홍석기(洪錫箕)의 시
「형조의 연못 누각을 이 참판의 부채에 제하다(秋曹池閣 題李侍郞扇)」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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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晩洲遺集』卷二 「秋曹池閣 題李侍郞扇」 |
형조의 연지: 17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형조에 있는 연못 물이 핏빛과 같이 붉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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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1647) 3월24일(을축) 기사 |
호조의 연지: 16세기, 유홍(兪泓)의 시
「호조의 연지를 읊다(詠戶曹蓮池)」 바람이 불자 연꽃 향기 흩어지고, 뜰에 볕이 들어 섬돌 이끼를 데우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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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塘集』卷一 「詠戶曹蓮池」 |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심정진(沈定鎭)의 시
「9월 21일 숙직 중 연못 누정을 마주하고 우연히 읊다(九月念一日 直中對池亭偶吟)」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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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霽軒集』卷一 「九月念一日 直中對池亭偶吟」 |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유숙기(兪肅基)의 글
「불염정기(不染亭記)」 (번역문 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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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兼山集』卷七 「不染亭記」 |
주석
- ↑ 묘시(卯時) : 오전 5시에서 7시까지.
- ↑ 유시(酉時) : 오후 5시에서 7시까지.
- ↑ 남소(南所): 오위(五衛)의 위장(衛將)이 숙위(宿衛)하던 위장소(衛將所)의 하나로, 창덕궁의 금호문(金虎門)과 경희궁의 개양문(開陽門) 안에 있었는데, 궁궐의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남소라 불렸다.
- ↑ 궁궐 호위하는 관소: 원문의 '구진사(句陳司)'. 궁궐을 호위하는 금군(禁軍)을 말한다. '구진(句陳)'은 별자리 이름으로 자미궁(紫微宮)을 호위하는 별이다.
- ↑ 범의 두상: 후한(後漢)의 반초(班超)가 어린 시절 관상가가 “그대는 제비의 턱에 범의 머리로 날아서 고기를 먹는 상이니, 이는 만리후에 봉해질 상이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 ↑ 분서(粉署): 하얗게 벽을 칠한 관청이라는 뜻으로 중국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인데, 우리나라는 의정부 및 중앙 관서를 뜻한다.
- ↑ 동룡문(銅龍門): 창경궁 세자전 옆에 있던 문이다.
- ↑ 금마문(金馬門): 창덕궁 후원에 있던 문이다.
- ↑ 투필(投筆): 붓을 던진다는 말로, 종군(從軍)을 뜻한다. 후한(後漢)의 명장 반초(班超)가 젊었을 때 집이 가난하여 글씨를 써 주는 품팔이 생활을 하다가 붓을 던지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별다른 지략이 없다면 부개자(傅介子)나 장건(張騫)을 본받아 이역에 나아가 공을 세워 봉후가 되어야지, 어찌 오래도록 필연(筆硯) 사이에만 종사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더니, 훗날 서역(西域)에 나아가 공을 세워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 ↑ 정기(正奇): 병법(兵法)의 용어로서, 정면으로 접전을 벌이는 것을 ‘정(正)’이라 하고 매복(埋伏)이나 기습(奇襲) 등의 방법을 쓰는 것을 ‘기(奇)’라고 한다.
- ↑ 인청(寅淸): 『서경』 「순전(舜典)」에서 후대의 예조(禮曹)에 해당하는, 종묘(宗廟) 제관(祭官)의 장(長)인 질종(秩宗)에게 "밤낮으로 공경히 일을 하되 마음이 곧아야 정신이 맑아서 일을 잘할 수 있으리라(夙夜惟寅 直哉惟淸)."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언행이 신중하고 마음가짐이 청정한 사람을 가리킨다.
- ↑ 삼원(三元): 음력 정월 초하루로.
- ↑ 이 작은 관청은 해를 넘겨 이제야 중건되었네: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다시 중건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 ↑ 본디 서산에 상쾌한 기운 많아 늘 바라보매 돌아가고픈 정 없어라: 원문의 '歸情'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고 싶은 마음이다. 곧 인왕산을 늘 가까이 대하고 있으므로 서울 한복판에 있음에도 탈속의 정취가 많기 때문에 굳이 전야로 돌아갈 마음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서산의 상쾌한 기운'은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의 고사이다. 왕휘지는 성품이 본디 잗단 세속 일에 전혀 얽매임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환충(桓沖)의 기병 참군(騎兵參軍)으로 있을 적에 한번은 환충이 그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부(府)에 있은 지 오래되었으니, 요즘에는 의당 사무를 잘 알아서 처리하겠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쳐들고 수판으로 뺨을 괴고는 엉뚱하게도 "서산이 이른 아침에 상쾌한 기운을 불러온다(西山朝來 致有爽氣耳)."라고 했다. 이 고사에서 만들어진 말로, 전하여 세속 일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히 유유자적하는 풍도를 가리킨다. 『晉書』卷80 「王徽之列傳」
- ↑ 연명이 어찌 천고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랴 나 또한 희황 이전의 사람: 도연명이 자엄등에게 주는 글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내 나이 쉰이 넘었는데, 젊어서는 곤궁하였다. 늘 집안 일로 동분서주하였으며, 성미는 강직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세상 사람들과 어긋남이 많았다.……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 누워 시원한 바람이 선들 부는 때를 만나면 스스로 복희 시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吾年過五十 少而窮苦 每以家弊 東西遊走 性剛才拙 與物多忤……五六月中 北窓下臥 遇涼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라고 한 말에 근거를 둔 표현이다. 『陶淵明集』卷7 「與子儼等疏」
- ↑ 멀리 흘러가: 이에 해당하는 원문 ‘조종(朝宗)’은 원래 제후가 천자에게 가서 뵙는 것으로 봄에 뵙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뵙는 것을 종(宗)이라 하는데, 강물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 역시 제후가 천자국에 가는 것과 같다 하여 조종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