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지:각 절기의 구경거리와 즐거운 놀이:절일의 세부 내용:대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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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5) 대보름의 다리밟기
대보름[上元] 다리밟기 놀이는 고려시대에 처음 시작했으며, 태평할 때에는 매우 성대하여 남녀가 짝을 지어 다리를 가득 메우고 밤이 되도록 놀기를 그치지 않아,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이 놀이를 금지하고 잡아들이기에 이르렀다. 지금의 풍속에는 부녀들이 다시 다리밟기 놀이를 하는 일이 없다. 《지봉유설(芝峯類說)[1][2]

달이 뜬 뒤에 도성의 사람들이 모두 운종가(雲從街)[3]로 나와 종각의 종소리를 듣고 흩어져 여러 다리들을 밟으며 “다리병을 그쳐라!”라 했다. 대광통교(大廣通橋)[4]와 소광통교[5] 및 수표교(水標橋)[6]가 매우 성황을 이루는데, 이날 밤에는 관례상 야간 통금을 풀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젓대소리와북소리가 시끌벅적하다.
육계굉(陸啓浤)[7]의 《북경세화기(北京歲華記)[8]》를 살펴보니, “정월 대보름 밤에는 부녀자들이 모두 문을 나와 다리를 거닌다.”[9]라 했다. 우혁정(于奕正)[10]의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11]》에는 “대보름 저녁[元夕]에는 부녀자들이 서로 무리를 지으며 밤길을 거닐어 질병을 없애니, 이것을 ‘주백병(走百病)’[12]이라 한다.[13]”라 했다. 심방(沈榜)[14]의 《완서잡기(宛署雜記)[15]》에는 “16일 밤에 부녀자들이 무리를 지으며 노닐다가 다리가 있는 곳에서는 모두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건너가니, 이것을 ‘도액(度厄)’[16]이라 한다.[17]”라 했다. 이는 우리나라 다리밟기 풍속의 연원이다. 《한양세시기(漢陽歲時記)[18][19]

대보름 밤에 등을 태우는 풍속은 유래가 양한(兩漢, 전한과 후한)으로부터 시작하여 당(唐)·송(宋)에 이르러 더욱 흥성했으며, ‘등석(燈夕)’이라 불렀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등석은 4월 초파일로 옮겨서 마침내 대보름 밤이 적막해지고, 오직 약밥[紅飯][20]을 먹고 거리와 다리를 거니는 두 가지 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시골 들판에는 거닐 만한 큰 거리나 넓은 다리가 없으니, 다만 황혼 무렵에 횃불을 밝히고 언덕에 오르는데, 이것을 ‘달맞이’라 한다. 이때 달무리를 보고서 한 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친다. 또는 강이나 나루, 연못이나 습지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썰매[凌床]를 타거나 얼음을 건너며 다리밟기를 대신한다. 《금화경독기》[21][22]

각주

  1. 지봉유설(芝峯類說):조선 중기의 문인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9)이 1614년(광해군 6)에 편찬한 백과사전적 저서. 각종 문헌에서 발췌한 천문·지리·역사·초목·곤충 등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2. 《芝峯類說》 卷1 〈時令部〉 “節序”.
  3. 운종가(雲從街):조선시대 한양 도성에 있었던 거리 이름. 지금의 광화문 우체국부터 종로3가 입구까지로, 이곳에 육의전(六矣廛)이 있었으며 사람이 구름처럼 모인다고 하여 ‘운종가’로 불렸다.
  4. 대광통교(大廣通橋):광교(廣橋).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남대문으로 향하는 청계천 위에 걸려 있던 조선시대 다리. ‘광통방(廣通坊)에 있는 큰 다리’라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초기 한양은 산허리와 계곡으로 이루어 졌으므로 도로를 내어 사람과 말이 다니기 위해서는 많은 다리를 놓아야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다리였다. 1958년 청계천 일대를 도로로 만들기 위해 복개공사를 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5. 소광통교:조선시대 서울 청계천의 광통교 남쪽에 있던 다리. 대광통교보다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소광통교라 했다. 남대문로1가 23번지 남쪽에 있었으나 도로를 만들면서 사라졌다.
  6. 수표교(水標橋):조선 세종 때 청계천에 가설한 돌다리. 서울 유형문화재 제18호. 6모로 된 큰 다리 기둥에 길게 모진 도리를 얹고 그 사이에 판석(板石)을 깔아 만들었다. 청계천에 흐르는 수량을 측정하는 다리로 다리 돌기둥에 경(庚)·진(辰)·지(地)·평(平)이란 표시를 해서 물의 깊이를 재었다. 영조 때는 다리 동쪽에 준천사(濬川司)란 관청를 두어 수량의 변화를 한성판윤에게 보고하게 했다. 원래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이전했으며, 다리 옆에 서 있던 수표는 다리를 이곳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가 1973년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7. 육계굉(陸啓浤):?~?. 중국 명말 청초에 활동한 문인. 자는 숙도(叔度). 절강성(浙江省) 평호(平湖) 출신으로, 《북경세화기(北京歲華記)》를 저술했다.
  8. 북경세화기(北京歲華記):육계굉이 저술한 북경의 세시기. 북경 지역에서 예전부터 전래되어 온 각종 민속행사를 기록했다.
  9. 정월……거닌다:《欽定日下舊聞考》 卷147 〈風俗〉2(《文淵閣四庫全書》499, 280쪽).
  10. 우혁정(于奕正):?~?. 중국 명나라 말기의 문인. 자는 사직(司直). 저서에 《천하금석지(天下金石志)》·《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조어태기(釣魚台記)》등이 있다.
  11.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우혁정의 저서로, 북경 일대의 지리와 풍속 등에 대한 자료를 수록하고 있다.
  12. 주백병(走百病):모든 질병을 쫓는다는 뜻. 주(走)는 여기서 물리친다는 뜻이다.
  13. 대보름……한다:《欽定日下舊聞考》 卷147 〈風俗〉2(《文淵閣四庫全書》499, 280쪽).
  14. 심방(沈榜):1540~1597. 중국 명나라 말기의 관료. 자는 이산(二山). 저서에 《완서잡기(宛署雜記)》가 있다.
  15. 완서잡기(宛署雜記):심방의 저서로 명나라 각 지역의 지리 및 풍속, 역사 등에 대한 자료를 수록하고 있다.
  16. 도액(度厄):액운을 건넌다는 뜻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액막이’라고 한다.
  17. 16일……한다:《欽定日下舊聞考》 卷147 〈風俗〉2(《文淵閣四庫全書》499, 280~281쪽).
  18. 한양세시기(漢陽歲時記):한양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내의 〈세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경도잡지》는 서울의 풍습에 대해 상권에는 의복·음식·주택·시화(詩畫) 등 풍속을 19항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하권에서는 서울 지방의 세시를 19항으로 분류하여 기록했다.
  19. 《京都雜志》 卷2 〈歲時〉 “上元”(《조선대세시기》3, 75~81쪽).
  20. 약밥[紅飯]:《정조지(鼎俎志)》 卷2 〈취류지류(炊餾之類)〉 “병이(餠餌)” ‘인절병방(引切餠方)’에서 서유구는 “홍반은 민간에서 약밥이라 부른다.(紅飯俗呼藥飯)”라 했다. 또 《정조지(鼎俎志)》 권7 〈온배지류(節食之類)〉 “상원절식(上元節食)” ‘잡과반방(雜果飯方)’에서는 약밥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21. 출전 확인 안 됨.
  22. 《임원경제지 이운지(林園經濟志 怡雲志)》4, 풍석 서유구 지음, 추담 서우보 교정, 임원경제연구소 옮김 (풍석문화재단, 2019), 521~5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