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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 승(升)[1]
1승은 10홉 분량이다. 《한서》 <율력지>에 “검은 기장알 중간 크기의 낱알 1,200개를 약(龠)에 채우고 우물물을 넣어 평평하게 깎는다. 2약이 1홉이 되고 10홉이 1승이 된다.”[2]라 했다.《왕정농서》[3]

2) 두(斗)[4]
1두는 10승 분량이다. 《한서》 <율력지>에 “10승이 1두가 된다. 두는 승을 모은 분량이다.” 5라 했다.《왕정농서》[5]

서광계는 “옛날과 지금의 용량 단위는 아주 다르다.”라 했고, 또 “《주례(周禮)》에 ‘고기 1두(豆)를 먹고, 술 1두를 마시는 것이 보통 사람의 식사량이다.’[6]라 했다. 제갈량(諸葛亮)[7]이 매 끼니마다 먹는 양이 몇 승을 넘지 못하자, 사마의(司馬懿)[8]가 ‘먹는 양은 적고 하는 일은 많다.’ 라 했으니,[9]만약 지금의 두와 같은 분량이라면 보통 사람이 어찌 전부 먹을 수 있을 것이며,【안《춘추좌전(春秋左傳)》에 “4승이 1두(豆)가 된다.”[10]라 했으니, 《주례》에서 말한 1두는, 곧 4승의 분량일 뿐이고 1두(斗)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4승의 고기와 술이라 해도 역시 보통 사람이 끼니마다 전부 먹을 수 있는 음식물은 아니다.】 제갈량의 몇 승이 이미 그 자체로 적은 양이 아닌데 염파(廉頗)가 먹었다는 5두(斗)[11]는 너무 많은 양이 아니겠는가?”[12]라 했는데, 그 말이 믿을 만하다. 《농상집요(農桑輯要)》[13]는 곧 원나라 지원(至元) 연간[14]에 편찬한 책인데, 《제민요술》의 “1묘(畝)에서 10석을 거둔다[畝收十石].”[15]라는 문장을 주석으로 첨부하며, “1석은 지금의 2.7두(斗)이니, 10석은 지금의 27두이다.”[16]라 했다. 이와 같다면 원나라 시기의 용량 단위의 제도는 후위(後魏)의 그것에 비해 3배가 되고도 남는다. 여기에서 또한 옛날과 지금의 용량 단위의 제도가 나란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서》 <율력지>에서 “1약(龠)은 1,200알의 기장을 담는다. 2약이 1홉이 되고, 10홉이 1승이 된다.”라 했으니, 1승에 채워지는 낱알은 꼭 기장 24,000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예전에 중간 크기의 검은 기장을 가져다 지금 사람들이 보통 쓰는 10홉들이 승에 담아 세어 보니 2만 2,330알이었다. 옛날의 승과 비교하면 오히려 1,660여 알 정도만 모자랐다.【인가에서 쓰는 두와 승도 크기가 같지 않지만 헤아려 보면 그다지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만약 조금 큰 승을 가져다 기장을 담으면 당연히 2만 4,000알 전후가 담길 것이다. 관청에서 쓰는 승 같은 경우는 이에 비하여 더욱 작다.】 이것으로 우리나라 승과 두의 제도가 오히려 옛 제도에 가까우며 중국의 후대의 용량 단위가 지나치게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금화경독기》[17]

승과 두(斗)는 굳이 옛 제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지금 제도는 단지 보통 사람이 한 끼에 먹는 음식량을 헤아려 맞춘 분량이다. 지금 민간에서 날마다 쓰는 승이 표준에 가장 알맞은 제도이니, 이 제도에 따라 만들어야 할 것이다.【안승과 두는 모두 느릅나무로 만들고 철엽(鐵葉)으로 아가리를 따라 장식했다. 두의 모양은 윗부분은 좁게 만들고 아랫부분은 넓게 만드는데, 귀퉁이 4개가 합쳐지는 곳에는 모두 철엽으로 장식했다. 양 옆면에는 쇠고리를 박아 손으로 잡고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했다.】《금화경독기》[18]

3) 곡(斛)
곡(斛)은 10두의 분량이다. 《한서》 <율력지>에 “10두가 1곡이다. 곡은 각이 진 두(斗)로, 양을 재는 되[量][19]이다.”[20]라 했다. 《광아(廣雅)》에 “곡은 고(鼓)라 하고 네모난 곡은 각(角)이라 한다.”[21]라 했다. 《주례》에는 “율씨(栗氏)가 되를 만들 때 구리와 주석을 거듭 달구면 더 이상 줄어들지 않는데, 총량이 줄어들지 않게 된 뒤에 저울로 재고, 저울로 잰 뒤에 같은 크기로 두드리고, 같은 크기로 두드린 뒤에 측량한다.[22] 그 명(銘)에는 ‘이에 문덕(文德) 있는 임금이 생각하고 찾아 참으로 그 표준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되가 이미 만들어져서 사방의 나라에 드러났다. 길이 그 뒤를 열어 이 물건만을 법칙으로 삼으라 했다.’”【‘문덕 있는 임금이 생각하고 찾았다[時文思索]’는 것은, 바로 이 깊은 덕을 지닌 임금이 생각하고 구하여 백성들을 위해 법도를 세우고 되를 만들었다는 말이다.】라 했다.[23]
《한서》에서 “5가지 되를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사방 1척짜리 구리를 사용하여 그 겉면을 둥글게 하는데, 그 옆에 조(庣)【‘庣’는 지(止)와 조(彫)의 반절이다.】가 있다.【안사고(顏師古)는 “조(庣)는 가득 차지 않은 곳이다.”라 했다.】 이 용기의 윗부분은 곡(斛)이 되고 아랫부분은 두(斗)가 되며,【윗부분은 하늘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곡이 되고, 아랫부분은 곡을 엎어 놓은 모양의 바닥이 되는데, 여기에 1두를 담는다.】 왼쪽 귀에 달린 되는 승(升)이 되고 오른쪽 귀에 달린 되는 홉(合)과 약(龠)이 된다. 무릇 되는 약(龠)에서 뛰고, 홉(合)에서 합하고, 승(升)에서 오르며, 두(斗)에서 모이고, 곡(斛)에서 모난다. 이 용기의 역할은 태창(太倉)[24]에서 곡식을 되는 데 있고, 대사농(大司農)[25]이 이를 담당한다.”[26]라 했다.
지금 농가에서 수확한 곡식은, 일반적으로 관청에 수납하거나 시장에 팔거나 가정에 쌓아둘 때에 양이 많으면 곡, 양이 적으면 두, 양이 그보다 적으면 승으로 재고, 다시 반드시 평미레로 평평하게 되니, 가난하건 부유하건 모두 빠뜨릴 수 없는 도구이다.《왕정농서》 [27]

옛날에는 두(豆)·우(區)·【‘區’는 오(烏)와 후(候)의 반절이다.】부(釜)·종(鍾)·유(庾)·병(秉)이라는 되가 있었다. 《춘추좌전》에 “4승이 1두이고, 4두가 1우이고, 4우가 1부이며, 10부가 1종이다.27 또 2.5부가 1유이고, 16곡이 1병이다.”라 했으니, 모두 옛 되의 이름이다. 지금은 오직 승(升)·두(斗)·곡(斛)을 기준으로 삼는데, 명칭이 가장 간단하고 요긴하여 대개 출납하는 일을 계산하기 쉽기 때문이다.《왕정농서》[28]

옛날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모두 10두를 1곡【곡은 곧 석(石)이다.】으로 삼았지만, 우리나라는 15두를 1곡으로 삼으니, 이는 잘못된 기준을 답습하고 미봉책에 의지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수량을 세는 기준을 잃으면 길이와 부피의 쓰임이 어그러지니, 그 단위를 바로 고쳐 10두를 1곡으로 삼아야 한다.
【더러는 우리나라에서 쓰는 두가 작아서 우리의 15두가 중국의 10두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도 옳지 않다. 정말로 두를 작게 만들었다면 두와 승을 고쳐 참다운 크기를 구해야 할 것이니, 그 근본을 바로잡지 않고 말단만 가지런히 해서는 안 된다. 천지(天地)의 수(數)는 1에서 나오고 10에서 완성되니, 10은 수의 기준이다. 이 때문에 작(勺)이 쌓여 홉(合)이 되고, 홉이 쌓여 승(升)이 되며, 승이 쌓여 두(斗)가 되고, 두(斗)가 쌓여 곡(斛)이 되니, 모두 10을 기준으로 했다. 이 때문에 옛날 두의 크기가 작더라도 10두가 1곡이었고, 지금 중국 두의 크기가 크더라도 10두가 1곡이다. 10두가 1곡인 점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은 제도인 것이다. 만약 바꾸어서는 안 되는데도 바꾼다면 만물이 그 법칙을 잃어 그 용도가 실제로 맞추면 일에서 어그러진다. 무릇 이와 같으므로 지금의 곡이 15라는 수에 맞추면 그 기준을 잃는 것이고, 되를 헤아리는 법칙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 도수(度數)를 어기는 것이다. 지금의 곡으로 계산하면 수량이 십진법으로 똑 떨어지지 않아 쓰기 어렵고, 나귀에 짐을 실으면 너무 무거워 운반하기 어렵다. 이 어찌 잘못된 점을 그대로 구차하게 답습하여 끝내 고치지 않을 일이겠는가?
또 우리나라의 두가 작더라도 꼭 잘못된 것은 아니고, 중국의 두가 크더라도 꼭 옳은 것은 아니다. 옛날 두의 크기를 비록 밝힐 수 없지만 위(魏)나라 이회(李悝)[29]의 말을 살펴보면, “100묘의 농지에서 평년에는 조 150석을 거두고, 큰 풍년이면 4배로 600석을 거두며, 작은 풍년이면 2배로 300석을 거둔다. 1인당 1개월에 1.5석을 먹는다.”[30]라 했으니, 조 1.5석은 좁쌀 7두이다. 또 한나라 제갈량이 하루에 먹는 양이 몇 승을 넘지 못하자 사마의는 그에 대해 먹는 양은 적고 하는 일은 많다고 여겼다. 이런 여러 주장으로 미루어보면 우리나라의 두와 승이 옛 제도에서 멀지 않고, 오히려 지금 중국의 두와 승의 규모가 너무 큰 데서 잘못된 것이다. 지금 중국의 두 중에 우리나라의 두보다 2배가 넘는 것을 ‘당두(唐斗)’라 하고, 또 작은 두로서 당두에 비해 겨우 절반 크기인 두를 ‘주두(周斗)’라 한다고 한다. 대체로 되의 크기는, 율관(律管)[31]의 크기를 정해 소리와 기(氣)의 호응을 구한 뒤에야 그 올바름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10두를 1곡으로 하는 일의 경우는 바꿀 수 없는 제도이다.
[안] 지금 민간의 두와 곡의 제도는 껍질을 깨끗이 대낀 곡식 15두를 1석으로 삼고 껍질을 대끼지 않은 곡식은 20두를 1석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제는 유형원의 주장대로 나무로 10두들이 곡을 만들어 미곡을 출납하고, 쌀은 따로 작은 둥구미를 만들어 둥구미 1개마다 10두씩 담아야 한다. 껍질을 대끼지 않은 곡식은 예전대로 큰 둥구미를 쓰되 둥구미 1개에 2곡씩 담는다. 나무로 만든 곡은 윗부분은 좁게 만들고 아랫부분은 넓게 만드는데, 네 모서리와 아가리를 모두 철엽으로 감싸서 못질하고 양 옆면에는 쇠고리 한 쌍을 박은다음 길이 5~6척인 팔뚝만 한 나무를 끼워 들기 편하게 한다.】《반계수록》[32]

4) 평미레
곡과 두를 평평하게 되는 도구이다. 《설문해자》에 “평미레는 두와 곡을 평평하게 한다. 목(木)의 뜻을 따르고 기(旣)로 소리 낸다. 골(杚)은【‘杚’은 고(古)와 몰(沒)의 반절이다.】 평평하게 한다는 뜻이다.”[33]라 했다.
【안 지금 제도에서 곡을 평평하게 되는 평미레는 모양이 농가에서 곡식을 거둬들일 때 쓰는 고무래와 같다.[34] 한 사람이 평미레의 자루를 잡고 곡의 머리맡에 서서, 곡식을 잴 때마다 가득 차서 넘치면 평미레로 곡의 윗면을 밀어 평평하게 한다.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실린 그림은 자루가 없고 꼭지가 달렸으며 상당히 짧고 작으니,[35] 대개 두로 양을 될 때 쓰는 평미레이다.】《왕정농서》[36]

5) 밀승[37]
놋쇠로 만든다. 모양은 지금의 밥그릇과 같지만 자루가 달려 있다. 지금 민간에서 쓰는 밀승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니, 적절한 크기를 헤아려서 집 안에 1개씩을 두어야 할 것이다.《금화경독기》[38]

6) 유승[39]
놋쇠로 만든다. 자루와 귀때가 달려 있다. 크기는 밀승을 가늠해서 그에 맞춘다. 지금 시장에서 파는 유승은 상당히 작아 겨우 밀승의 절반 크기이다.《금화경독기》[40]

7) 2가지 두를 쓰지 마라.
지금 민간의 두와 곡은 집집마다 제도가 다르다. 게다가 한 집 안에도 반드시 크고 작은 2가지 두를 두어 받을 때는 큰 두를 쓰고 내줄 때는 작은 두를 쓴다. 이러한 방법으로 자잘한 이익을 이롭게 여기면서도 그것이 속임수를 키워 풍속을 무너뜨리는 일임을 스스로도 알지 못하니, 얻는 이익은 작지만 잃어버리는 신뢰는 크다. 일반적으로 원야(園野)에 땅을 골라 집을 짓고 일족이 모여 살거나,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모임의 규약을 맺을 때는, 먼저 승과 두의 제도를 바로잡아 집집마다 서로 기준을 정하고 출납할 때는 되를 같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장재(張載)[41]가 한 고을의 땅을 얻어 정전(井田)을 통해 실현하려는 뜻을 계획했던 일이다.《금화경독기》[42][43]

각주

  1. 승(升):승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승(국립민속박물관).png
  2. 검은……된다:《漢書》 卷21上 <律曆志> 第1上, 967쪽.
  3. 《王禎農書》 卷16 <農器圖譜> 10 “倉廪門” ‘升’, 297쪽;《農政全書》 卷23 <農器> “圖譜”3 ‘升’(《農政全書校注》, 579쪽).
  4. 두(斗):두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두(국립민속박물관).png
  5. 10승이……분량이다:《漢書》 卷21上 <律曆志> 第1上, 967~968쪽.
  6. 1두(豆)를……식사량이다:《周禮註疏》 卷42 <冬官考工記> 下 “梓人”(《十三經注疏整理本》 9, 1335쪽).
  7. 제갈량(諸葛亮):181~234. 촉한(蜀漢)의 정치가. 공명은 그의 자(字)이다. 유비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했고 승상이 되었다.
  8. 사마의(司馬懿):179~251. 조위(曹魏)의 정치가 및 장수. 중달은 그의 자이다. 제갈량의 공격을 방어하여 군공을 세웠으며 위제왕(魏齊王) 조방(曹芳) 때 승상이 되었다.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찬탈한 뒤 진(晉) 선제(宣帝)로 추존되었다.
  9. 공명이……했으니:《資治通鑑》 卷72 <魏紀> 4 “靑龍二年”, 484쪽.
  10. 《春秋左傳正義》 卷42 “昭二年”(《十三經注疏整理本》18, 1359쪽).
  11. 염파(廉頗)가……5두:염파는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장수로 나이가 들어서도 5두의 밥을 먹고 활의 가장 센 단계인 강궁(强弓)을 당겼다고 한다.
  12. 옛날과……아니겠는가:《農政全書》 卷5 <田制> “農桑訣田制篇”(《農政全書校注》, 112쪽).
  13. 농상집요(農桑輯要):중국 최초의 관찬(官撰) 농서이다. 중국 원나라 때 사농사(司農司)에서 창사문(暢師文), 맹기(孟祺), 묘호겸(苗好謙) 등이 1273년에 집성했고 1286년에 간행했다. 고려시대 이암(李嵒, 1297~1364)이 이 책을 수입했다.
  14. 지원(至元) 연간:원 세조(世祖) 때의 연호(1260~1294년).
  15. 1묘(畝)에서……거둔다:《齊民要術》 卷1 <耕田> (《齊民要術校釋》, 38쪽).
  16. 1석은……27두이다:《農桑輯要》 卷2 <耕墾> “耕地”(《農桑輯要校注》, 31쪽).
  17. 출전 확인 안 됨.
  18. 출전 확인 안 됨.
  19. 되[量]:분량을 헤아리는데 쓰는 그릇.
  20. 10두가……되[量]이다:《漢書》 卷21上 <律曆志> 第1上, 967~968쪽. 十斗爲斛……斛者,角斗平多少之量也. 모양은 그림과 같다.
    곡(《사고전서》).png
  21. 곡은……한다:《廣雅》 卷8.
  22. 율(栗)씨가……양을 측정한다:《주례주소》를 참조하여 옮겼다.
  23. 율씨가……라 했다:《周禮註疏》 卷40 <冬官考工記> 第6 “栗氏”(《十三經注疏整理本》 9, 1295~1298쪽).
  24. 태창(太倉):중국 고대 수도에 설치된 곡식창고.
  25. 대사농(大司農):한나라 때의 관직으로 국가재정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치속내사(治粟内史)라고 했다가 경제(景帝) 때 대농령(大農令), 무제(武帝) 때 대사농으로 변경되었다. 재정을 담당하는 관직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호조판서(戶曹判書)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했다.
  26. 《漢書》 卷21上 <律曆志> 第1上, 967~968쪽.
  27. 《王禎農書》 卷16 <農器圖譜> 10 “倉廪門” ‘斛’, 299쪽;《農政全書》 卷23 <農器> “圖譜”3 ‘斛’(《農政全書校注》, 579~580쪽).
  28. 《王禎農書》 卷16 <農器圖譜> 10 “倉廪門”, 298~299쪽;《農政全書》 卷23 <農器> “圖譜”3 (《農政全書校注》, 580쪽).
  29. 이회(李悝):BC 455~395. 전국시대의 정치가. 위(魏)나라 문후(文侯)를 섬겼다. 변법(變法)을 주장하고 지력(地力)을 다 활용할 것을 주장하여, 농민들에게 밭을 깊게 갈게 하여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위나라가 이로 인해 부강해져 전국시대 초기의 강대국의 하나가 되었다.
  30. 100묘의……먹는다:《文獻通考》 卷8 <錢幣考一> “歴代錢幣之制”.
  31. 율관(律管):대나무를 잘라 만든, 음정을 정하는 도구. 대나무 관(管)의 길이로 음계를 확정한다. 저음부터 계산하여 율(律)로 불리는 6개의 홀수 관과 여(呂)로 불리는 6개의 짝수 관을 정하는데, 이를 합쳐서 ‘12율(律)’이라 한다.
  32. 《磻溪隧錄》 卷25 <續篇> “度量衡”.
  33. 말과……것이다:《說文解字》 卷6上.
  34. 지금……같다:고무래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본리지》 권10 <그림으로 보는 농사 연장> 상 “갈이 연장과 삶이 연장” ‘고무래’ 참조.
    고무래(《본리지》).png
  35. 《삼재도회》에 실린 모양의 평미레 유물은 다음과 같다.
    평미래(국립민속박물관).png
  36. 《王禎農書》 卷16 <農器圖譜> 10 “倉廪門” ‘槪’, 298쪽;《農政全書》 卷23 <農器> “圖譜”3 ‘槪’(《農政全書校注》, 580쪽).
  37. 밀승:꿀의 용량을 잴 때 쓰는 도구.
  38. 출전 확인 안 됨.
  39. 유승:기름의 용량을 잴 때 쓰는 도구.
  40. 출전 확인 안 됨.
  41. 장재(張載):1020~1077. 북송대의 학자로, 횡거(橫渠)는 그의 호이다.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외숙부이며 성리학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여 주돈이(周敦頤), 소옹(邵雍), 정호, 정이와 함께 북송오자(北宋五子)로 꼽힌다.
  42. 출전 확인 안 됨.
  43. 《임원경제지 섬용지(林園經濟志 贍用志)》3, 풍석 서유구 지음, 추담 서우보 교정, 임원경제연구소 옮김 (풍석문화재단, 2017), 178~1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