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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日,在王河館,是日陰,李翔來謂臣曰:“你國謝恩使,何至今不來乎?”臣曰:“道路遼遠,他行止遲速,我不能料念,惟僕之到此,不係國家事,特蒙大國深恩,生還本國,祇自仰天祝手而已,但逗逼,遷延日月,不得全吾哭枢盧墓之心,所以痛哭耳.”翔曰:“我已詳說你言于禮部,禮部已入奏,近當回還,勿憂也”又有姓名王能者,善曉解我國言語,謂臣曰:“我祖父世居遼東東八贴之地,來往義州,我亦是高麗人也,我年十三,父 沒,隨母而居,退計三十一年間,我與母俱為兀良哈所掠,轉往韃靼之國,竟得生返,仍居于此,若有你國使來,未嘗不來相看也.”即以所將錢換酒,慰臣及從者,又語臣曰:“聞你從者無有亡失,然乎?” 臣曰:“然”能曰:“得非幸乎?盖人口聚而為日多,則雖平居無事,間有患死者,况遭被惡風,過盡大海,一無亡失,千古所稀,想必你於平昔積善所致也.”臣曰:“此是皇恩覆冒,使萬物各得其所,故我等亦幸得保此生也.”
 
十一日,在王河館,是日陰,李翔來謂臣曰:“你國謝恩使,何至今不來乎?”臣曰:“道路遼遠,他行止遲速,我不能料念,惟僕之到此,不係國家事,特蒙大國深恩,生還本國,祇自仰天祝手而已,但逗逼,遷延日月,不得全吾哭枢盧墓之心,所以痛哭耳.”翔曰:“我已詳說你言于禮部,禮部已入奏,近當回還,勿憂也”又有姓名王能者,善曉解我國言語,謂臣曰:“我祖父世居遼東東八贴之地,來往義州,我亦是高麗人也,我年十三,父 沒,隨母而居,退計三十一年間,我與母俱為兀良哈所掠,轉往韃靼之國,竟得生返,仍居于此,若有你國使來,未嘗不來相看也.”即以所將錢換酒,慰臣及從者,又語臣曰:“聞你從者無有亡失,然乎?” 臣曰:“然”能曰:“得非幸乎?盖人口聚而為日多,則雖平居無事,間有患死者,况遭被惡風,過盡大海,一無亡失,千古所稀,想必你於平昔積善所致也.”臣曰:“此是皇恩覆冒,使萬物各得其所,故我等亦幸得保此生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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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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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미 당신의 말을 예부에 상세히 보고했더니 예부에서 벌써 상주하였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반드시 돌아가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미 당신의 말을 예부에 상세히 보고했더니 예부에서 벌써 상주하였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반드시 돌아가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또 왕능(王能)이란 사람은 우리말을 잘 하였는데 신에게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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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red">왕능(王能)이란 사람은 우리말을 잘 하였는데</span>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요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6842 동팔참(東八站)]<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8F%99%ED%8C%94%EC%B0%B8(%E6%9D%B1%E5%85%AB%E7%AB%99)]</ref><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8024_003 성종실록 219권, 성종 19년 8월 24일 을묘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성절사 채수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와 문견 사건을 올리다]</ref><ref>[http://m.blog.daum.net/manjumongol/334?np_nil_b=2 조선과 명의 경계 역시 텐진일대였다]</ref>45 지방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의주(義州)에 왕래하였으며 나 또한 고려 사람입니다. 내 나이 13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따라 살았는데, 되돌아보니 대략 31년간입니다. 나와 어머니는 함께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8%AC%EB%9F%89%ED%95%A9(%E5%85%80%E8%89%AF%E5%93%88) 올량합(元良哈)]에게 약탈되어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8B%AC%EB%8B%AC(%E9%81%94%E9%81%94) 달단(達旦)]의 나라로 갔다가 마침내 살아 돌아와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 나라의 사신이 오면 와서 서로 만나 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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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red">“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요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6842 동팔참(東八站)]<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8F%99%ED%8C%94%EC%B0%B8(%E6%9D%B1%E5%85%AB%E7%AB%99)]</ref><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8024_003 성종실록 219권, 성종 19년 8월 24일 을묘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성절사 채수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와 문견 사건을 올리다]</ref><ref>[http://m.blog.daum.net/manjumongol/334?np_nil_b=2 조선과 명의 경계 역시 텐진일대였다]</ref>45 지방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의주(義州)에 왕래하였으며 나 또한 고려 사람입니다. 내 나이 13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따라 살았는데, 되돌아보니 대략 31년간입니다. 나와 어머니는 함께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8%AC%EB%9F%89%ED%95%A9(%E5%85%80%E8%89%AF%E5%93%88) 올량합(元良哈)]에게 약탈되어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8B%AC%EB%8B%AC(%E9%81%94%E9%81%94) 달단(達旦)]의 나라로 갔다가 마침내 살아 돌아와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 나라의 사신이 오면 와서 서로 만나 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span>
  
 
즉시 가진 돈으로 술을 사서 신과 종자들을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즉시 가진 돈으로 술을 사서 신과 종자들을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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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사람이 많고 시일이 많이 흐르게 되면 비록 평상시에 별 일이 없을 때에도 혹 병환으로 죽는 사람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모진 바람을 만나 큰 바다를 지나왔는데도 한 사람도 죽지 않았으니 천고에 드문 일입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당신이 평소에 '''적선'''을 한 덕택일 것입니다.”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사람이 많고 시일이 많이 흐르게 되면 비록 평상시에 별 일이 없을 때에도 혹 병환으로 죽는 사람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모진 바람을 만나 큰 바다를 지나왔는데도 한 사람도 죽지 않았으니 천고에 드문 일입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당신이 평소에 '''적선'''을 한 덕택일 것입니다.”  
  
“이것은 황제의 은혜가 하늘처럼 덮어 만물로 하여금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한 까닭에, 우리들 또한 다행히 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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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red">“이것은 황제의 은혜가 하늘처럼 덮어 만물로 하여금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한 까닭에, 우리들 또한 다행히 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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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cloudy.
 
11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clo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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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 Hsiang came and said to me, “Why has the Envoy of Thanksgiving from your country not come by now?”
 
Li Hsiang came and said to me, “Why has the Envoy of Thanksgiving from your country not come by now?”
 
I said, “It is a long way; I cannot tell when he is moving and stopping or whether he is going fast or slow. All I think of is that my own coming here has nothing to do with affairs of state and that if only I receive the profound kindness of China and am returned home alive, I shall look up to Heaven and join my hands in prayer. But wasting away, loitering about, delaying for days and months, I shall not satisfy my desire to weep at the coffin and keep watch at the grave. It is that over which I grieve.”
 
I said, “It is a long way; I cannot tell when he is moving and stopping or whether he is going fast or slow. All I think of is that my own coming here has nothing to do with affairs of state and that if only I receive the profound kindness of China and am returned home alive, I shall look up to Heaven and join my hands in prayer. But wasting away, loitering about, delaying for days and months, I shall not satisfy my desire to weep at the coffin and keep watch at the grave. It is that over which I gri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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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 Hsiang said, “I have explained in detail to the Ministry of Rites what you say, and the Ministry has put in its memorial. You will soon be sent back; do not grieve.”
 
Li Hsiang said, “I have explained in detail to the Ministry of Rites what you say, and the Ministry has put in its memorial. You will soon be sent back; do not grieve.”
 
There was a man named Wang Neng who understood our language well. He said to me, “For generations my ancestors lived in Tung-pa-hu, Liao-tung, and they went to and fro between there and Ŭiju. I, too, am a man of Koryð. When I was thirteen, my father died, and I went with my mother and for thirtyone years lived in Liao. I and my mother were captured by Urianghai11 and moved to Tatary. In the end we got back alive and have been living here. Whenever envoys have come from your country, I have always met them.” He bought wine with cash that he had and comforted me and my staff. He said to me, “I have heard that none of your staff died; is that so?”
 
There was a man named Wang Neng who understood our language well. He said to me, “For generations my ancestors lived in Tung-pa-hu, Liao-tung, and they went to and fro between there and Ŭiju. I, too, am a man of Koryð. When I was thirteen, my father died, and I went with my mother and for thirtyone years lived in Liao. I and my mother were captured by Urianghai11 and moved to Tatary. In the end we got back alive and have been living here. Whenever envoys have come from your country, I have always met them.” He bought wine with cash that he had and comforted me and my staff. He said to me, “I have heard that none of your staff died; is that so?”
 
I said, “Yes.”
 
I said, “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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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g Neng said, “Wasn't that fortunate! Even ordinarily, among a large group of people over a period of time occasionally someone dies; how much more likely is that when violent winds are met and a great ocean crossed. Not to have a single death is rare in history. I imagine it must have been brought about by your amassing of virtue in ordinary life.”
 
Wang Neng said, “Wasn't that fortunate! Even ordinarily, among a large group of people over a period of time occasionally someone dies; how much more likely is that when violent winds are met and a great ocean crossed. Not to have a single death is rare in history. I imagine it must have been brought about by your amassing of virtue in ordinary life.”
 
I said, “It is that the mantle of Imperial graciousness causes all things to take their place. We, too, therefore, survived.”
 
I said, “It is that the mantle of Imperial graciousness causes all things to take their place. We, too, therefore, surv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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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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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분묘,여막)
 
*유학(분묘,여막)
  
45. 義州에서 遼東都司가 있는 遼陽까지의 도로에 설치한 8개의 驛館으로 조선의 사신이 留宿하던 곳이었다. 八站은 鎭江城, 湯站堡, 鳳凰城, 鎭東堡, 鎭夷堡, 連山關, 岳水站, 狼子山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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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吾都里, 狄哈 등과 함께 女眞 部族의 일파이다. 조선에서는 오랑캐라 불렀다. 永樂元年(1403) 올량합의 於虛出(阿哈出) 등의 來朝를 계기로 建州衛가 설치되었는데, 建州衛는 이후 女眞을 招撫하는 明의 전초기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후에 올량합은 淸朝 皇室의 조상이 되는 오도리와 함께 建州女眞의 중심세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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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0일 (목) 15:13 판

十一日,在王河館,是日陰,李翔來謂臣曰:“你國謝恩使,何至今不來乎?”臣曰:“道路遼遠,他行止遲速,我不能料念,惟僕之到此,不係國家事,特蒙大國深恩,生還本國,祇自仰天祝手而已,但逗逼,遷延日月,不得全吾哭枢盧墓之心,所以痛哭耳.”翔曰:“我已詳說你言于禮部,禮部已入奏,近當回還,勿憂也”又有姓名王能者,善曉解我國言語,謂臣曰:“我祖父世居遼東東八贴之地,來往義州,我亦是高麗人也,我年十三,父 沒,隨母而居,退計三十一年間,我與母俱為兀良哈所掠,轉往韃靼之國,竟得生返,仍居于此,若有你國使來,未嘗不來相看也.”即以所將錢換酒,慰臣及從者,又語臣曰:“聞你從者無有亡失,然乎?” 臣曰:“然”能曰:“得非幸乎?盖人口聚而為日多,則雖平居無事,間有患死者,况遭被惡風,過盡大海,一無亡失,千古所稀,想必你於平昔積善所致也.”臣曰:“此是皇恩覆冒,使萬物各得其所,故我等亦幸得保此生也.”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이상이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 나라의 사은사(謝恩使)가 어찌하여 지금까지 오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길이 아주 멀어 그들의 거동이 더디고 빠름을 내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국가의 일이 아닌데 특별히 대국의 깊은 은혜를 입어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하늘을 우러러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만 유랑하는 처지에 발이 묶인 몸이 시일만 지체시키면서, 나의 아버지 영구(靈甁) 앞에 곡을 하고 분묘(墳墓) 옆에 여막(廬幕) 살려고 하는 마음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되니 이 때문에 통곡할 뿐입니다.”

“내가 이미 당신의 말을 예부에 상세히 보고했더니 예부에서 벌써 상주하였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반드시 돌아가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능(王能)이란 사람은 우리말을 잘 하였는데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요동 동팔참(東八站)[1][2][3]45 지방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의주(義州)에 왕래하였으며 나 또한 고려 사람입니다. 내 나이 13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따라 살았는데, 되돌아보니 대략 31년간입니다. 나와 어머니는 함께 올량합(元良哈)에게 약탈되어 달단(達旦)의 나라로 갔다가 마침내 살아 돌아와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 나라의 사신이 오면 와서 서로 만나 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즉시 가진 돈으로 술을 사서 신과 종자들을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또 신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당신의 종자(從者) 가운데 죽거나 실종된 사람이 없다고 하니 그렇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사람이 많고 시일이 많이 흐르게 되면 비록 평상시에 별 일이 없을 때에도 혹 병환으로 죽는 사람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모진 바람을 만나 큰 바다를 지나왔는데도 한 사람도 죽지 않았으니 천고에 드문 일입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당신이 평소에 적선을 한 덕택일 것입니다.”

“이것은 황제의 은혜가 하늘처럼 덮어 만물로 하여금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한 까닭에, 우리들 또한 다행히 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cloudy.

Li Hsiang came and said to me, “Why has the Envoy of Thanksgiving from your country not come by now?” I said, “It is a long way; I cannot tell when he is moving and stopping or whether he is going fast or slow. All I think of is that my own coming here has nothing to do with affairs of state and that if only I receive the profound kindness of China and am returned home alive, I shall look up to Heaven and join my hands in prayer. But wasting away, loitering about, delaying for days and months, I shall not satisfy my desire to weep at the coffin and keep watch at the grave. It is that over which I grieve.”

Li Hsiang said, “I have explained in detail to the Ministry of Rites what you say, and the Ministry has put in its memorial. You will soon be sent back; do not grieve.” There was a man named Wang Neng who understood our language well. He said to me, “For generations my ancestors lived in Tung-pa-hu, Liao-tung, and they went to and fro between there and Ŭiju. I, too, am a man of Koryð. When I was thirteen, my father died, and I went with my mother and for thirtyone years lived in Liao. I and my mother were captured by Urianghai11 and moved to Tatary. In the end we got back alive and have been living here. Whenever envoys have come from your country, I have always met them.” He bought wine with cash that he had and comforted me and my staff. He said to me, “I have heard that none of your staff died; is that so?” I said, “Yes.”

Wang Neng said, “Wasn't that fortunate! Even ordinarily, among a large group of people over a period of time occasionally someone dies; how much more likely is that when violent winds are met and a great ocean crossed. Not to have a single death is rare in history. I imagine it must have been brought about by your amassing of virtue in ordinary life.” I said, “It is that the mantle of Imperial graciousness causes all things to take their place. We, too, therefore, survived.”




  • 기후
  • 건축물
  • 인명
  • 제도(외교)
  • 모화
  • 경천-조선
  • 심리(안타까움, 슬픔)
  • 행정
  • 언어(조선어(외국어))
  • 역사
  • 지명
  • 사회
  • 풍습(음식)
  • 심리(다행,대견)-중국
  • 심리(감사,은혜)
  • 유학<--적선[4]
  • 유학(분묘,여막)



  1. [1]
  2. 성종실록 219권, 성종 19년 8월 24일 을묘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성절사 채수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와 문견 사건을 올리다
  3. 조선과 명의 경계 역시 텐진일대였다
  4.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http://www.chungnam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9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