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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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화와 사회상.

대동운부군옥

내용 없음

성호사설

원(元) 나라 때에 정개부(鄭介夫)가 정전론(井田論)을 올려 말하기를 또 지원(至元 원 세조(元世祖)의 연호. 1264~1294) 연간에 해적(海賊) 주청(朱淸)과 장선(張瑄)을 불러다 금부(金符)를 주어 운수하도록 해서 능히 1만 3천여 리를 운행하였으니, 경사(京師)에서는 편리할 뿐더러 비용을 절약함도 적지 않다고 하였다.
원 세조(元世祖 홀필렬(忽必烈)을 이름)가 일찍이 말하기를, “중서(中書)는 짐(朕)의 왼손이고, 추밀(樞密)은 짐의 오른손이며, 어사대(御史臺)는 짐의 의원이다.
두 손에 있는 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혈맥이 마비되어 통하지 못하여 몸이 하는 일에 아무 관계도 없게 된다.
” 고 하였다.
원 나라는 부세와 역사를 헐하게 하였는데, 명 나라의 가혹하고 세밀한 것이 이어져서, 치고 싸우기를 쉬지 않아 천하가 괴롭게 여기다가 명 나라가 망한 뒤에 사람들이 다시 한(漢 여기는 명 나라를 이름)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으니, 백천만 년 뒤에는 또 장차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묘정(廟庭)에 종향(從享)된 이들 중에 한(漢)ㆍ진(晉)의 여러 선비는 참여하지 아니하고, 다만 당(唐)의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의 시호)과 송(宋)의 여러 철인(哲人)과 원(元)의 허ㆍ오(許吳 허형(許衡)과 오징(吳澄))가 반열에 참여하였으니, 아마도 문성공이 원 나라 때 사람이므로 혹 원 나라 때의 제도를 따라 그런 것인 듯하다.
원(元) 나라 학사(學士)인 승지(承旨) 기기(巙巙)의 말에, “천하의 일은 재상(宰相)이 말하는 것이나 재상이 못한다면 대간(臺諫)이 말해야 하고, 대간이 못한다면 경연(經筵)에서 말해야 한다.
소위 골고루 배정했다는 것은 절약하여 했다는 말인데, 원(元) 나라 세대가 끝나도록 천하에 징수하는 부세가 모두 가볍게 되어 백성이 편히 살 수 있었으니, 이것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 나라 사람이 중국에 들어가 임금이 되어서는 수자리 사는 부역을 혁파시켰고 꼴을 실어 나르고 곡식을 끌고 다니는 수고를 없애는가 하면 요역(徭役)과 세금을 가볍게 하여 백성을 잘 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오랑캐를 높이고 중국을 천하게 여겨서 외직과 내직에 우두머리 벼슬은 모두 본국인이었고, 중국 사람은 대개 참좌(參佐)에 지나지 않았다.
소위 저들의 오랑캐 관리는 중국말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와 아래가 통정이 되지 않아서 억울한 일이 자주 생겼다.
뒤에 원 나라가 중국에 들어와 황제가 되자 화인(華人)의 상복(常服)을 금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는, 오랑캐 원(元) 나라가 천하를 차지하고도 중국 의관(衣冠)의 옛 제도를 변경시키지 않았다고 하는데 남추강(南秋江 추강은 남효온(南孝溫)의 호)의 시에, 가소롭다 허문경은(可笑許文敬)머리 풀고 그 신하가 되단 말인가(被髮爲其臣) 하였다.
그러나 원 나라의 군신도상(君臣圖像)에, 허문경은 선비의 의관 그대로인데, 《명사》를 살펴보면 홍무(洪武) 원년 11월에 조서를 내려, “오랑캐의 풍속을 금하고 모두 중국 의관의 옛 제도를 회복하라.”고 하였다.
원 세조가 북막(北漠)으로부터 천하를 차지하고 모조리 오랑캐 풍속으로 중국의 제도를 변경시켜 선비나 서민이 모두 머리를 땋아서 상투를 틀고 첨(簷)이 깊숙한 되놈의 모자를 쓰고 의복을 고습(袴褶)ㆍ착수(窄袖)와 판선(瓣線)ㆍ요습(腰褶)을 입었다고 한다.
또한 원 나라에서 의복을 변경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선비나 서민들이 날이 오래 되어 감에 따라 차츰 물들어 스스로 옛 제도를 변경하게 되었거나, 선비와 대부만은 변경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에 한해서도 금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원(元) 나라 호안락전(胡顔樂傳)에 “백성들이 오줌 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준다.
” 하였으니, 이는 필시 가을보리에 주는 것이리라. 

송남잡지

"묘성은 곧 모두성(旄頭星)이다.
본래는 일곱 개의 점인데 몽고가 중원으로 들어와 황제가 되면서부터 그중에 한 점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서 여섯 개의 점이 되더니, 명나라 때에는 다시 나와서 묘성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청나라 들어오게 되어서는 다시 미원성(微垣星)으로 들어왔다" 예를 들면 중국인이 음역한 글자로, 은(銀)을 '몽고(蒙古)'라 하고, 호금(好金)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하며, 장사(壯士)를 '예락하(曳落河)'라고 하는 말이 이것이다.
또 몽고(蒙古)는 그 나라 말로 은(銀)을 의미한다.
청(淸)은 '태청(太淸)'의 의미를 취하니, 원(元)나라가 '건원(建元)'의 의미를 취하고 명(明)나라가 '대명(大明)'의 의미를 취한 것과 같다.
《원사(元史)》에서 '색목인(色目人)'이라고 칭하는 것은 대개 몽고 지역 밖의 오랑캐들이다.
《명사(明史)》에서 "철현(鐵絃)은 본래 몽고의 색목인(色目人)이다"라고 하였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청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와 혼인을 하고자 하니 마치 몽고와 고려의 고사와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궁합이 불길하다고 하여 거절한다고 하니 대개 중국이 궁합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하기(何基)가 죽자 그 제자 김이상(金履祥: 원나라의 학자)은 흰 두건에 머리끈을 묶었으니, 시마복을 입고 가는 모시로 만든 작은 띠를 묶는 것과 같다.
《원사(元史)》에는 금으로 사당의 신주를 주조한 것이 보이니, 바로 북위(北魏)에서 처음 임금이 즉위하면 금으로 동상을 만드는 의의이다.
《원사(元史)》에서 "말을 잡아 제수로 쓴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오랑캐의 풍습이다.
《원사(元史)》에서 "몽고(蒙古)에서 대대로 기련곡(起輦谷)에 장사지냈는데, 봉분(封墳)을 만들지 않고 나무를 심지 않으며 능호도 없다"라고 하였다.
《문헌통고(文獻通考)》(원나라 때 마단림이 편찬한 책 이름)에서 말하였다.
한(漢)나라의 제도 중에 선비를 선발할 때에 간책(簡策)에 질문을 써두면 응시자들이 제비뽑기하여 답하는 것을 '사책(射策)'이라고 한다.
명나라는 자못 송, 원의 기습(氣習)을 변화시켜 스스로 일종의 체격(體格)을 이루었으나, 오직 사륙(四六)은 송나라보다 조금도 뛰어나지 못하다.
원나라 식화법(食貨法)에서는 돈 열 꿰미를 '정(錠)'이라고 하고 열여섯 냥을 한 '근(斤)'이라고 한다.
금나라가 그 법을 따라서 교초(交鈔)를 만들었고 원나라도 중통원보초(中通元寶鈔)를 만들었다.
금나라, 원나라의 초(鈔)는 뽕나무 껍질로 만들고 글자와 문양을 인쇄하였다.
대개 여악은 예부터 있었는데 당송 시대부터 원나라까지가 가장 성하였으며 명나라 초기까지 있었다.
원나라의 세조(世祖)가 황성(皇城)을 짓는데 커다란 구멍에서 대가리가 붉은 벌레가 무려 만여 마리나 나왔다.
또 황극전(皇極殿) 문을 처음에는 '대원문(大元門)'이라고 하였는데 원나라가 들어오자 '대명문(大明門)'으로 바꾸었고, 명나라가 들어오자 '대청문(大淸門)'으로 바꾸었으며, 청나라가 들어오자 청나라는 그대로 둔 채 고치지 않고 몽고(蒙古)의 호칭을 그대로 따르니 몽고(蒙古)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흰 이리의 태생이 돌궐이 되었고 푸른 사슴의 태생이 몽고가 되었다.
「의석」에서 "흉노를 요순 이전에는 '산융', 또는 '훈육'이라고 하였다.
하나라 때에는 '순유'라고 하였고 은나라 때에는 '귀방'이라고 하였고 주나라 때에는 '엄윤'이라고 하였다.
진한 때에는 '흉노'라고 하였고 북위 때에는 '유연'∙'토곡혼'이라고 하였고 수당 때에는 '돌궐'이라고 하였고 오대와 북송 때에는 '거란'이라고 하였다.
남송 때에는 '여진', '몽고'라고 하였고 명나라 때에는 '달단'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원나라의 탈탈이 월준을 정벌한 후 활에 맞아 죽은 사람을 보니 어떤 사람은 꼬리의 길이가 세 치쯤 되었다.
원나라는 의당 진의 윤에 속해야 하고 육조 이후로 정통한 나라는 명일 것이다.
『격치총서(格致叢書)』에서 "몽고에서는 성기[腎]를 복아(卜兒)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