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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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 터
(弘濟院)
2019년 4월 촬영
표석명칭 홍제원 터
한자표기 弘濟院
설치연도 1987년
주소 통일로 440-1(홍제동 161-1 도)


표석 문안

Quote-left.png 여기서 약 50m 골목 안 홍제동 138번지 일원은 홍제원(1394~1895)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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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조사 및 분석

편년자료 및 고전번역서

『조선왕조실록』에는 명(明)으로 떠나는 사신을 홍제원에서 전송한 일 및 중국 사신이 모화관에 당도하기 전 홍제원에서 옷을 갈아입은 일, 혹은 이곳에서 쉬어가거나 묵은 일에 대한 기록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홍제원은 돈의문(서대문) 밖의 첫 번째 원(院)으로서 서북(西北) 제1로로 통하는 곳이므로, 서북쪽 외방과 도성 사이의 주요한 연결 지점이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의 홍제원 기사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명으로 보내는 사신을 이곳에서 전송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Quote-left.png 홍제원에 거둥하여 명나라 서울에 가는 우정승 김사형을 전송하다

幸弘濟院, 餞右政丞金士衡。士衡如京師賀登極, 政堂河崙行陳慰弔祭禮。

홍제원(弘濟院)에 거둥하여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을 전송하였다. 김사형은 명나라 서울에 가서 등극(登極)을 하례하고, 정당(政堂) 하윤(河崙)은 진위 조제례(陳慰弔祭禮)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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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종실록』권1 > 정종 1년(1399) > 1월 2일(계유)


아래는 중국 사신을 홍제원에서 접대한 기록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Quote-left.png 명나라 사신이 하직하니 홍제원에서 전송할 것을 명하다

明使別宣慰使都承旨韓明澮辭, 命判內侍府事田昀齎酒饌, 餞于洪濟院, 幷賜內女樂, 命臨瀛大君璆、桂陽君璔、義昌君玒、密城君琛往參。

명(明)나라 사신(使臣)이 선위사(宣慰使)인 도승지(都承旨) 한명회(韓明澮)에게 작별(作別)하면서 하직하니, 임금이 판내시부사(判內侍府士) 전균(田畇)에게 명하여 술과 음식을 가지고 가서 홍제원(洪濟院)에서 전송하게 하고, 아울러 내여악(內女樂)을 내려 주었는데,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창군(義昌君) 이공(李玒)·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에게 명하여 가서 참석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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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권7 > 세조 3년(1457) > 4월 4일(정유)


한편 홍제원은 홍제원 건물을 포함한 그 일대의 터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넓고 평평한 땅이었기 때문에 여러 용도로 활용되었다. 세종 대에는 보제원(普濟院)과 이태원(利泰院) 외에 홍제원에도 진제장(賑濟場)을 추가로 설치하여 백성들을 구휼하게끔 하였다. 홍제원 터에 흙집을 지어 진제장으로 사용한 것이다. 세조, 성종, 중종, 현종, 숙종, 정조 대에도 홍제원 진제장을 확대하여 기민을 구휼한 일이 나온다. 서울 서북권의 교통의 요지로서 백성들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으로서 진휼소를 운영하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아래는 세종 대의 홍제원 원사 확대에 관한 기사이다.

Quote-left.png 의정부에서 보제원과 홍제원의 원사를 늘릴 것을 건의하다

議政府據漢城府呈啓: "已於普濟院、洪濟院, 設東西飢民賑濟場, 各置土宇二間。 今飢民日多, 不能容接, 且或有病者, 雜置一處, 互相傳染, 致死可畏。 令繕工監修葺院舍以處之, 每場增置醫員各一人治療。 其無衣者, 令濟用監依舊例製衣以給。" 從之。

의정부에서 한성부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이미 보제원(普濟院)과 홍제원(洪濟院)에 동서 기민 진제장(飢民賑濟場)을 설치하여 각각 흙집[土宇] 2간씩 두었으나, 요새 기민이 날로 많아져서 능히 다 수용할 수 없삽고, 혹시 병든 자가 있게 되면 한곳에 섞여 있어서 서로 전염(傳染)되어 죽게 될까 두렵사오니,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원사(院舍)를 늘리게 하여 거처시키고 각 진제장마다 의원(醫員) 각 한 사람씩을 더 두어서 치료하게 하며 옷이 없는 자는 제용감(濟用監)으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옷을 지어서 주게 하사이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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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권107 > 세종 27년(1445) > 1월 21일(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