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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정릉동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했다.<ref>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310011_001 『광해군일기』 46권, 광해 3년 10월 11일 정축 1번째 기사] </ref> <ref>본래 흥경궁으로 명명하려고 했다가 전대의 궁호이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고쳐 썼다.</ref> 광해군은 경운궁에 길한 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또, 창덕궁은 일찍이 내변을 겪었으므로 창덕궁이 비록 중건되었지만 법궁에 거처하려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이렇게 약 3년 반 동안 경운궁에서 머물다가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4002_001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2일 무인 1번째 기사]</ref> 이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해군은 병조판서 이하에게 경운궁에 가서 감찰하라고 전교한다. 실록에는 “모후를 유폐하여 문을 폐쇄하고 겹겹이 자물쇠를 채워놓고 분병조와 분총부를 이미 두어서 숙직하여 지키는 것을 엄하게 했는데, 또 판서 이하로 하여금 직접 가서 검찰하게 하였다. 이후에 또 헌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고 또 간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여서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번갈아 서로 교대하게 하였다. 〈구금하고 곤궁하게 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으니, 다만 ‘폐한다[廢]’는 한 글자만 아직 가하지 않았을 뿐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4008_001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8일 갑신 1번째 기사]</ref> 라고 적혀있다.<br>
 
광해군은 정릉동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했다.<ref>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310011_001 『광해군일기』 46권, 광해 3년 10월 11일 정축 1번째 기사] </ref> <ref>본래 흥경궁으로 명명하려고 했다가 전대의 궁호이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고쳐 썼다.</ref> 광해군은 경운궁에 길한 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또, 창덕궁은 일찍이 내변을 겪었으므로 창덕궁이 비록 중건되었지만 법궁에 거처하려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이렇게 약 3년 반 동안 경운궁에서 머물다가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4002_001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2일 무인 1번째 기사]</ref> 이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해군은 병조판서 이하에게 경운궁에 가서 감찰하라고 전교한다. 실록에는 “모후를 유폐하여 문을 폐쇄하고 겹겹이 자물쇠를 채워놓고 분병조와 분총부를 이미 두어서 숙직하여 지키는 것을 엄하게 했는데, 또 판서 이하로 하여금 직접 가서 검찰하게 하였다. 이후에 또 헌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고 또 간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여서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번갈아 서로 교대하게 하였다. 〈구금하고 곤궁하게 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으니, 다만 ‘폐한다[廢]’는 한 글자만 아직 가하지 않았을 뿐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4008_001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8일 갑신 1번째 기사]</ref> 라고 적혀있다.<br>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3_001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ref>  후에 인조는 경운궁에 딸린 가옥을 그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게 하였다. “선조가 침전으로 쓰던 두 군데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본주에게 되돌려주라고 하교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7012_003 『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7월 12일 경자 3번째 기사]</ref>  이 후 경운궁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는 1897년까지 조선 역사에서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다. 또한, 실록을 찾아보면 명례궁과 경운궁 두 이름으로 혼용되어 불렸다. 1679년 숙종 때 개수 공사를 했다는 기록 과 1748년 영조가 경운궁에 임어하여 어제를 게판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 대에 경운궁에 대한 기록이 특이하게 많이 있다. 영조 45년<sup>1769</sup>, 영조는 경운궁에 임어하여 양조개어<sup>兩朝皆御</sup>, 계해즉조당<sup>癸亥卽阼堂</sup>이라는 글을 친히 쓰고, 게판하도록 명하였다.  또한 영조 47년<sup>1771</sup> 경운궁에 들러 궁호를 친히 써서 걸도록 하였다.  영조 49년<sup>1773</sup> 영조가 ‘석어당’ 세 글자를 써서 즉조당에 현판을 걸게 하였다.  이렇게 약 1년 반마다 한 번씩 들려 직접 글씨를 써 경운궁에 걸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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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3_001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ref>  후에 인조는 경운궁에 딸린 가옥을 그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게 하였다. “선조가 침전으로 쓰던 두 군데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본주에게 되돌려주라고 하교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7012_003 『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7월 12일 경자 3번째 기사]</ref>  이 후 경운궁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는 1897년까지 조선 역사에서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다. 또한, 실록을 찾아보면 명례궁과 경운궁 두 이름으로 혼용되어 불렸다. 1679년 숙종 때 개수 공사를 했다는 기록<ref>[http://sillok.history.go.kr/id/ksa_10505022_004 『숙종실록』, 8권, 숙종 5년 5월 22일 을묘 4번째 기사]</ref>과 1748년 영조가 경운궁에 임어하여 어제를 게판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 대에 경운궁에 대한 기록이 특이하게 많이 있다. 영조 45년<sup>1769</sup>, 영조는 경운궁에 임어하여 양조개어<sup>兩朝皆御</sup>, 계해즉조당<sup>癸亥卽阼堂</sup>이라는 글을 친히 쓰고, 게판하도록 명하였다.  또한 영조 47년<sup>1771</sup> 경운궁에 들러 궁호를 친히 써서 걸도록 하였다.  영조 49년<sup>1773</sup> 영조가 ‘석어당’ 세 글자를 써서 즉조당에 현판을 걸게 하였다.  이렇게 약 1년 반마다 한 번씩 들려 직접 글씨를 써 경운궁에 걸게 하였다.<br>
 
시간이 흘러, 고종 30년<sup>1893</sup> 10월 4일 고종과 신하들은 경운궁 즉조당에 나아가 선조가 수도에 환궁한 300년이 지난 것에 대해 예를 행하였다.  이후,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태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고, 왕태후와 왕태자비는 경운궁으로 이어하는 사건 이 일어나고, 고종 34년<sup>1897</sup>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 지 1년만에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어하였다.<br><br>
 
시간이 흘러, 고종 30년<sup>1893</sup> 10월 4일 고종과 신하들은 경운궁 즉조당에 나아가 선조가 수도에 환궁한 300년이 지난 것에 대해 예를 행하였다.  이후,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태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고, 왕태후와 왕태자비는 경운궁으로 이어하는 사건 이 일어나고, 고종 34년<sup>1897</sup>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 지 1년만에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어하였다.<br><br>
  

2022년 4월 20일 (수) 13:54 판

덕수궁 소개

덕수궁의 위치와 역할

덕수궁의 역사

정릉동행궁

선조 임금은 1593년선조 26 10월 서울로 돌아왔다. “상이 아침에 벽제역(碧蹄驛)을 출발하여 미륵원(彌勒院)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 정릉동(貞陵洞)[1]의 행궁(行官)으로 들어갔다.”[2] 고 『선조실록』은 10월 1일자 기사로 전한다.(선조수정실록에서 4일로 수정함. [3])
정릉동의 집들을 행궁 터로 선택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왜군들이 주둔했던 곳이라 기거할 만한 집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정릉동의 행궁은 흉악한 적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므로 비린내 나고 더러워서 임금의 처소로 적당하지는 못하였으나, 거처할 곳이 없어서 우선 거처하신 것이다.” [4] 라고 적혀있다. 이때 선조가 행궁으로 삼았던 집은 월산대군의 집으로 “정릉동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옛집을 행궁(行宮)으로 삼았다.”[5] 라고 『연려실기술』은 기술한다. 『선조수정실록』에도 “고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았다.”고 기술되어 있다.[6]
월산대군의 집은 궁궐로 삼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이에 선조는 관서들을 궁 밖으로 이전시키고 순차적으로 궐내로 포함시키게 하였다.[7] 이렇게 주변의 집들을 이용하여 정릉동행궁을 꾸렸지만 임금의 거처로서 짜임새를 갖추기가 어려웠다. 이에 본래의 법궁을 중건하여 이어하려고 했지만 중건 공사가 끝나기 전 1608년 2월 1일 정릉동행궁 정침에서 승하하였다.[8] 선조 승하 다음날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정릉동행궁 서청에서 즉위하였다.[9]

경운궁

광해군은 정릉동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했다.[10] [11] 광해군은 경운궁에 길한 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또, 창덕궁은 일찍이 내변을 겪었으므로 창덕궁이 비록 중건되었지만 법궁에 거처하려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이렇게 약 3년 반 동안 경운궁에서 머물다가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12] 이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해군은 병조판서 이하에게 경운궁에 가서 감찰하라고 전교한다. 실록에는 “모후를 유폐하여 문을 폐쇄하고 겹겹이 자물쇠를 채워놓고 분병조와 분총부를 이미 두어서 숙직하여 지키는 것을 엄하게 했는데, 또 판서 이하로 하여금 직접 가서 검찰하게 하였다. 이후에 또 헌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고 또 간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여서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번갈아 서로 교대하게 하였다. 〈구금하고 곤궁하게 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으니, 다만 ‘폐한다[廢]’는 한 글자만 아직 가하지 않았을 뿐이다.〉”[13] 라고 적혀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게 되었다.[14] 후에 인조는 경운궁에 딸린 가옥을 그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게 하였다. “선조가 침전으로 쓰던 두 군데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본주에게 되돌려주라고 하교하였다.”[15] 이 후 경운궁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는 1897년까지 조선 역사에서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다. 또한, 실록을 찾아보면 명례궁과 경운궁 두 이름으로 혼용되어 불렸다. 1679년 숙종 때 개수 공사를 했다는 기록[16]과 1748년 영조가 경운궁에 임어하여 어제를 게판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 대에 경운궁에 대한 기록이 특이하게 많이 있다. 영조 45년1769, 영조는 경운궁에 임어하여 양조개어兩朝皆御, 계해즉조당癸亥卽阼堂이라는 글을 친히 쓰고, 게판하도록 명하였다. 또한 영조 47년1771 경운궁에 들러 궁호를 친히 써서 걸도록 하였다. 영조 49년1773 영조가 ‘석어당’ 세 글자를 써서 즉조당에 현판을 걸게 하였다. 이렇게 약 1년 반마다 한 번씩 들려 직접 글씨를 써 경운궁에 걸게 하였다.
시간이 흘러, 고종 30년1893 10월 4일 고종과 신하들은 경운궁 즉조당에 나아가 선조가 수도에 환궁한 300년이 지난 것에 대해 예를 행하였다. 이후,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태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고, 왕태후와 왕태자비는 경운궁으로 이어하는 사건 이 일어나고, 고종 34년1897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 지 1년만에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어하였다.

덕수궁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일본의 압박을 받아 퇴위함. 순종은 8월 경운궁 돈덕전에서 즉위함. 11월 창덕궁으로 처소를 옮기면서 고종이 오래 건강히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꿈. 고종은 덕수궁에서 죽음

덕수궁 건물별 소개(주요 전각들)

외전

중화전

내전

함녕전

즉조당

준명당

석어당

덕홍전

서양식 건물

정관헌

석조전

중명전

대한문

중화문

광명문

사라진 건물

덕수궁에서 일어난 사건

아관파천(1896년)

대한제국 선포(1897년)

을사늑약(1905년)

고종황제 강제 퇴위(1907년)

고종황제 승하(1919년)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1946년)

덕수궁 관람 루트 추천

각주

  1. 정릉동이라는 지역 이름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있었기 때문에 붙었다. 태종 연간에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긴 뒤에도 정릉동이라는 지명은 이어져 내려왔다.
  2.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2번째기사
  3.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4.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고사본말
  5.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고사본말
  6.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7.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3일 계미 7번째기사
  8. 『광해군일기(중초본)』 1권 광해 즉위년 2월 1일 무오 15번째 기사
  9. 『광해군일기』 1권 광해 즉위년 2월 2일 기미 9번째기사
  10. 『광해군일기』 46권, 광해 3년 10월 11일 정축 1번째 기사
  11. 본래 흥경궁으로 명명하려고 했다가 전대의 궁호이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고쳐 썼다.
  12.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2일 무인 1번째 기사
  13.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8일 갑신 1번째 기사
  14.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
  15. 『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7월 12일 경자 3번째 기사
  16. 『숙종실록』, 8권, 숙종 5년 5월 22일 을묘 4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