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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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소개

덕수궁의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주변 지하철

1호선 시청역
2호선 시청역, 을지로입구역
5호선 광화문역

덕수궁의 역할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삼으면서 부터이다.[1] 왕이 머물던 곳이라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렀고 행궁은 왕들이 임시로 머무는 궁을 말한다. 이후 선조에 이어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경운궁은 러시아 공사관과 멀지 않고, 주변에 외국 여러 나라의 공사관이 있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위치였다.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이후 나라의 이름을 대한 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황제국 다운 국가 체제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황제가 머무는 궁궐에 맞게 경운궁도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했다.[2]


덕수궁의 역사

정릉동행궁

선조 임금은 1593년선조 26 10월 서울로 돌아왔다. “상이 아침에 벽제역(碧蹄驛)을 출발하여 미륵원(彌勒院)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 정릉동(貞陵洞)[5]의 행궁(行官)으로 들어갔다.”[6] 고 『선조실록』은 10월 1일자 기사로 전한다.(선조수정실록에서 4일로 수정함. [7])
정릉동의 집들을 행궁 터로 선택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왜군들이 주둔했던 곳이라 기거할 만한 집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정릉동의 행궁은 흉악한 적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므로 비린내 나고 더러워서 임금의 처소로 적당하지는 못하였으나, 거처할 곳이 없어서 우선 거처하신 것이다.” [8] 라고 적혀있다. 이때 선조가 행궁으로 삼았던 집은 월산대군의 집으로 “정릉동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옛집을 행궁(行宮)으로 삼았다.”[9] 라고 『연려실기술』은 기술한다. 『선조수정실록』에도 “고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았다.”고 기술되어 있다.[10]
월산대군의 집은 궁궐로 삼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이에 선조는 관서들을 궁 밖으로 이전시키고 순차적으로 궐내로 포함시키게 하였다.[11] 이렇게 주변의 집들을 이용하여 정릉동행궁을 꾸렸지만 임금의 거처로서 짜임새를 갖추기가 어려웠다. 이에 본래의 법궁을 중건하여 이어하려고 했지만 중건 공사가 끝나기 전 1608년 2월 1일 정릉동행궁 정침에서 승하하였다.[12] 선조 승하 다음날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정릉동행궁 서청에서 즉위하였다.[13]

경운궁

광해군은 정릉동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했다.[14] [15] 광해군은 경운궁에 길한 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또, 창덕궁은 일찍이 내변을 겪었으므로 창덕궁이 비록 중건되었지만 법궁에 거처하려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이렇게 약 3년 반 동안 경운궁에서 머물다가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16] 이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해군은 병조판서 이하에게 경운궁에 가서 감찰하라고 전교한다. 실록에는 “모후를 유폐하여 문을 폐쇄하고 겹겹이 자물쇠를 채워놓고 분병조와 분총부를 이미 두어서 숙직하여 지키는 것을 엄하게 했는데, 또 판서 이하로 하여금 직접 가서 검찰하게 하였다. 이후에 또 헌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고 또 간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여서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번갈아 서로 교대하게 하였다. 〈구금하고 곤궁하게 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으니, 다만 ‘폐한다[廢]’는 한 글자만 아직 가하지 않았을 뿐이다.〉”[17] 라고 적혀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게 되었다.[18] 후에 인조는 경운궁에 딸린 가옥을 그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게 하였다. “선조가 침전으로 쓰던 두 군데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본주에게 되돌려주라고 하교하였다.”[19] 이 후 경운궁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는 1897년까지 조선 역사에서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다. 또한, 실록을 찾아보면 명례궁과 경운궁 두 이름으로 혼용되어 불렸다. 1679년 숙종 때 개수 공사를 했다는 기록[20]과 1748년 영조가 경운궁에 임어하여 어제를 게판했다는 기록이 있다[21]. 영조 대에 경운궁에 대한 기록이 특이하게 많이 있다. 영조 45년1769, 영조는 경운궁에 임어하여 양조개어兩朝皆御, 계해즉조당癸亥卽阼堂이라는 글을 친히 쓰고, 게판하도록 명하였다[22]. 또한 영조 47년1771 경운궁에 들러 궁호를 친히 써서 걸도록 하였다. 영조 49년1773 영조가 ‘석어당’ 세 글자를 써서 즉조당에 현판을 걸게 하였다[23]. 이렇게 약 1년 반마다 한 번씩 들려 직접 글씨를 써 경운궁에 걸게 하였다.
시간이 흘러, 고종 30년1893 10월 4일 고종과 신하들은 경운궁 즉조당에 나아가 선조가 수도에 환궁한 300년이 지난 것에 대해 예를 행하였다.[24] 이후,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태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고, 왕태후와 왕태자비는 경운궁으로 이어하는 사건 이 일어나고[25], 고종 34년1897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 지 1년만에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어하였다.[26]

덕수궁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일본의 압박을 받아 퇴위하게 되었다..[27] 이후, 순종은 고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궁호를 고종이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덕수'로 칭하게 하였다.[28] 순종 즉위년1907 11월,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29] 경운궁은 자연스럽게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순종 12년1919,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이 승하하였다.[30]

덕수궁 건물별 소개(주요 전각들)

이름의 유래와 쓰임[31]

외전

중화전

中和 :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 후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다 새로운 정전으로 지음.

중화전 일제강점기.jpg

내전

함녕전

咸寧 : 모두가 평안하다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된 곳이자 고종이 승하한 곳. 1904년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 소실되었다가 1905년 8월에 중건함.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자형이며 익공(첨자(삼포 이상의 집에 있는 꾸밈새. 초제공, 이제공 따위의 가운데에 어긋나게 맞추어 짠다.) 위에 소로와 함께 얹는, 짧게 아로새긴 나무)으로 결구된 건물
함녕전 1931.jpg 함녕전 1987년 이전.jpg

즉조당

卽阼 : 즉위(卽位)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 경운궁 환궁 직후 정전으로 사용. 고종의 후비 순헌황귀비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생활하던 공간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
준명당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기둥을 세우고 창호를 설치하여 실내공간을 확장한 구조물)를 덧달아 내놓아 평면을 확장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정면을 기준으로 평면 구성을 보면,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된 맨 오른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구성된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이며, 오른쪽 두칸을 방과 방에 부속된 퇴 본채의 앞뒤나 좌우에 딸린 반 칸 너비의 칸살이고, 그 옆은 대청과 개방된 현관, 맨 왼쪽 한 칸은 방이다.
즉조당 일제강점기.jpg 즉조당 1983이전.jpg

준명당

浚明 : 다스려 밝힌다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 덕혜옹주 교육을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97년에 새로 지은 내전의 하나.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음.
준명당 일제강점기.jpg 준명당 1996.jpg

석어당

昔御 : 옛날에 임어(臨御)하였다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에서 환도한 후 거처한 곳,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시켰던 곳,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 궁전에 지어진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이층집. 정면 8칸, 측면 3칸,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1칸인 굴도리집 (접시받침두공, 첨차, 한대, 제공, 장여, 화반 따위를 받치는 네모진 나무과 굴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둥근 모양의 나무를 써서 지은집) 우진각지붕.
석어당 일제강점기.jpg

덕홍전

德弘 : 덕이 넓고 크다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이익공 촛가지가 둘로 된 익공 팔작지붕. 기단은 장대석(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어 만든 돌)을 3단으로 돌려 쌓고, 기둥에 간결한 익공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함.
용마루에는 양쪽으로 회반죽을 바르고 귀마루(용마루가운데 모서리에 있는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얹음. 지붕은 측면에 합각 지붕 위 양옆에 박공(八자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으로 '∧'자꼴을 이룬 각부를 가짐.
덕홍전 일제강점기.jpg

서양식 건물

정관헌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한 곳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 그러나 1930년 이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에 의하며 현재의 개방형 기둥구조가 아니라 사방이 벽돌벽으로 둘러싸인 구조였음.
덕수궁 정관헌 시오타니.JPG 정관헌 1996.jpg

석조전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곳. 해방 전까지 현대미술품을 진열, 1946년~1947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 1948년~1950년에는 유엔 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활용한 석조건물.
정면 54m, 너비 31m의 3층 석조건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
그리스 건축을 조형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이른바 콜로니얼 스타일(식민지의 주민이 모국의 건축을 본떠 세운 건축양식으로 풍토, 재료, 기술수준, 생활수준의 차이에서 모국의 양식과는 다른 독특한 특색이나 내용을 나타내 보임) 건물.
덕수궁 석조전 시오타니.JPG

중명전

重眀 :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음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의 황실 도서관,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
중명전 옛.jpg

대한문

大漢 : 한양이 창대해진다
정문이자 동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 기둥머리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 짜 올린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식 우진각지붕 (처마가 사면으로 내려간 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하다.
단층이며, 지금은 기단 건축물의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과 계단이 묻혀 있고, 소맷돌(돌계단의 난간 부분)을 별도로 노출해 놓았다.
대한문 일제강점기.jpg

중화문

中和 :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
중화전의 정문
중화전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짐. 다포계 팔작지붕 위 절반은 박공지붕(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으로 되어있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지붕. 본래 좌우로 행각이 있었음.
중화문 일제강점기.jpg

광명문

光明 : 밝음을 맞다
함녕전의 남쪽 대문

광명문 일제강점기.jpg

사라진 건물

덕수궁에서 일어난 사건

아관파천(1896년)

1895년 10월 8일에 고종은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명성왕후를 시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4개월 후인 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기 2년 4개월 전쯤인 1893년 10월 4일에 경운궁을 찾은 적이 있었다.[32]임란으로 파천했던 선조가 수도로 돌아왔던 300주년이 되는 해였기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고종은 명성황후, 세자와 세자빈까지 대동하고 경운궁의 즉조당에 참배하면서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부흥시키려던 선조의 의지를 기렸다.[33]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각종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정지 작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이때 펼친 각종 도시, 건축 사업은 근대 국가 건설의 초석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는 서울 도시 구조의 근간이 되었다.[34] 고종은 파천 초에 조칙을 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경운궁이 수리 중이라는 이유로 환궁 시기를 늦출 뿐만 아니라 경운궁 부근에 있는 구미 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였다. 고종은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35]

대한제국 선포(1897년)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돌아온[36] 고종은 경운궁 내에 마땅한 법전이 없어 즉조당을 경운궁의 법전으로 삼고 이름을 태극전으로 개명하여 사용한다. 1897년(광무 1) 10월 12일에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반포하고,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후 민씨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산호만세 등을 창하였다.[37] 다음날, 고종은 태극전(현 즉조당)에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는 황제 즉위 조서를 반포[38]하였다.
조선大韓이라는 국호는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명칭이지만, 고종은 그 시작이 기자 조선箕子朝鮮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큰 '한韓'이라는 의미로서 대한大韓을 국호로 선택하였다. 또한, 고종은 '건양建陽'의 연호를 대신해 부국강병에 대한 의지를 담은 광무光武로 정하였다.[39]

을사늑약(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 해 8월 22일에 제1차한일협약(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을 체결,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우리의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러일전쟁이 일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은 국제관계를 주시하며 한국을 보호국가로 삼으려는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40]1905년 11월 17일 경운궁 중명전에서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며 제 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을 불법적으로 체결[41]하였으며, 1906년 2월 1일에는 일본 통감부를 개설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서 첫 통감으로 부임하였다.[42]

고종황제 강제 퇴위(1907년)

1905년 덕수궁의 중명전에서는 아주 중요한 외교적 행위가 이루어졌다. 고종은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에 대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담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하여 회담 장소에 입장하지 못하였고, 일제는 이를 계기로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적으로 퇴위시킨다.[43]

고종황제 승하(1919년)

1919년 1월 12일 고종 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함녕전은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하던 공간으로, 1897년(광무 1)에 건축되어 1904년(광무 8) 화재로 소실[44]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중건되었다.[45]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고 결국 그해 3.1 운동으로 이어졌다. 고종의 죽음은 한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46]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1946년)

미·소 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 독립정부의 수립과정으로서 임시 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설립된 공동위원회이다. 1946년 1월 16일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한 예비회담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이뤄졌다.[47]

참고 영상

각주

  1. 『덕수궁 소개』, 국가문화유산포털
  2. 「대한 제국 황실의 궁궐이었던 덕수궁」, 국사편찬위원회
  3. 『사진으로 보는 덕수궁』, 문화재청 덕수궁
  4. 오다 쇼고, 『덕수궁사』, 李王職, 1938, 95쪽
  5. 정릉동이라는 지역 이름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있었기 때문에 붙었다. 태종 연간에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긴 뒤에도 정릉동이라는 지명은 이어져 내려왔다.
  6.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2번째기사
  7.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8.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고사본말
  9.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고사본말
  10.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11.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3일 계미 7번째기사
  12. 『광해군일기(중초본)』 1권 광해 즉위년 2월 1일 무오 15번째 기사
  13. 『광해군일기』 1권 광해 즉위년 2월 2일 기미 9번째기사
  14. 『광해군일기』 46권, 광해 3년 10월 11일 정축 1번째 기사
  15. 본래 흥경궁으로 명명하려고 했다가 전대의 궁호이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고쳐 썼다.
  16.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2일 무인 1번째 기사
  17.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8일 갑신 1번째 기사
  18.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
  19. 『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7월 12일 경자 3번째 기사
  20. 『숙종실록』, 8권, 숙종 5년 5월 22일 을묘 4번째 기사
  21.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1월 27일 임자 2번째 기사
  22. 『영조실록』 113권, 영조 45년 11월 2일 경진 3번째 기사
  23. 『영조실록』 116권, 영조 47년 1월 16일 무오 2번째 기사
  24. 『고종실록』 30권, 고종 30년 10월 4일 임자 1번째 기사
  25.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2월 11일 양력 1번째 기사
  26.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2월 20일 양력 1번째 기사
  27. 『고종실록』 48권, 고종 44년 7월 19일 양력 3번째기사
  28.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일 양력 1번째기사
  29.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11월 13일 양력 1번째기사
  30. 『순종실록부록』 10권, 순종 12년 1월 21일 양력 2번째기사
  31.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덕수궁 이야기-주요전각
  32. 『고종실록』 1893년(고종 30) 10월 4일
  33.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덕수궁 이야기
  34. 안창모,『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동녘, 2009, 29쪽
  3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아관파천
  36. 『고종실록』 34년 2월 20일
  37. 『고종실록』 34년 10월 12일
  38. 『고종실록』 34년 10월 13일
  39. 안창모,『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동녘, 2009, 61-62쪽
  4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사조약
  41. 『고종실록』42년 11월 17일
  42. 우리 궁궐 이야기, 홍순민, 250페이지
  43.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덕수궁 이야기, 중명전
  44. 『고종실록』44권, 고종 41년 4월 14일 양력 1번째기사
  4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덕수궁 함녕전
  46. 덕수궁 문화재청-덕수궁 복원장비 기본계획
  4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미소공동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