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김시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onthedh
이동: 둘러보기, 검색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20번째 줄: 20번째 줄:
 
<font color="blue"><big>'''웹툰'''</big></font>  
 
<font color="blue"><big>'''웹툰'''</big></font>  
 
<br>
 
<br>
등 모두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 웹툰, 웹드라마, 블로그 일기, 기타 콘텐츠 등은 모두 디지털기술을 활용한 온라인 네트워크 상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은 모두 ‘이야기’ 즉 스토리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인문학은 사람에 의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웹툰은 사람에 의한 작품이다. 사람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와 그림을 접목해 생성해 낸 콘텐츠이다. 웹드라마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드라마, 영화, 연극은 대본이라고 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토대로 창작되는 작품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웹드라마와 같은 것들 또한 '''디지털 인문학'''의 한 분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font color="red">'''우리가 평소에 온라인에서 접하는 모든 콘텐츠들을 다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font><br>
+
등 모두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 웹툰, 웹드라마, 블로그 일기, 기타 콘텐츠 등은 모두 디지털기술을 활용한 온라인 네트워크 상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은 모두 ‘이야기’ 즉 스토리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인문학은 사람에 의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웹툰은 사람에 의한 작품이다. 사람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와 그림을 접목해 생성해 낸 콘텐츠이다. 웹드라마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드라마, 영화, 연극은 대본이라고 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토대로 창작되는 작품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웹드라마와 같은 것들 또한 '''디지털 인문학'''의 한 분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font color="red">'''우리가 평소에 온라인에서 접하는 모든 콘텐츠들을 다 디지털 인문학'''</font>이라고 생각한다. <br>
 
<br>
 
<br>
 
<br>
 
<br>

2022년 4월 25일 (월) 12:16 판

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인문학을 전공한 4학년인 필자도 누군가 디지털 인문학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한 마디로 딱 떨어지게 대답하기 쉽지 않다. 인문학의 범주도 고전과 현대는 명백히 다르고 또 여기에다가 디지털로 이루어진 학문이기 때문이다.
학술적인 개념의 디지털 인문학이란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활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문학의 주제를 계승하면서 연구 방법면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연구, 그리고 예전에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시도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성격의 인문학 연구를 포함한다.
순수 인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디지털 인문학은 인문지식의 사회적 확산을 돕는 길이고, 인문콘텐츠학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문화산업에 응용할 방대한 인문학 지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획득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일이다. 미국과 유럽, 심지어는 가까운 일본과 대만의 상황을 보더라도 디지털 인문학의 육성은 범인문학계(인문학+인문콘텐츠학)의 자연스러운 발전 궤도상에 있는 과제이다.[1]

좁은 범위에서 보면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정의를 한정할 수도 있지만, 대중적인 범위에서, 보다 넓은 범위에서 바라보자면 디지털 인문학은 우리의 실생활에 밀접하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 </font> 등하굣길 혹은 출퇴근길에 스마트폰을 통해 간간히 접하는 콘텐츠들,


웹드라마
캡션1
웹툰
등 모두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 웹툰, 웹드라마, 블로그 일기, 기타 콘텐츠 등은 모두 디지털기술을 활용한 온라인 네트워크 상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은 모두 ‘이야기’ 즉 스토리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인문학은 사람에 의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웹툰은 사람에 의한 작품이다. 사람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와 그림을 접목해 생성해 낸 콘텐츠이다. 웹드라마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드라마, 영화, 연극은 대본이라고 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토대로 창작되는 작품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웹드라마와 같은 것들 또한 디지털 인문학의 한 분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평소에 온라인에서 접하는 모든 콘텐츠들을 다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경희궁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이다. 광해군 시대 1617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희궁의 첫 명칭은 바로 경덕궁이었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알려진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맞이했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지금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2]






오늘날 경희궁


흥화문 금천교.png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떼어갔었습니다. 광복 이후 박문사가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남아있었습니다.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습니다.[3]

금천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들어서면 궁내의 전각에 들어서기 전에 흐르던 금천에 놓여진 돌다리입니다.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띠는 것입니다. 1619년(광해군 11)에 건립되었던 것을 일제가 매몰시켰지만, 서울시에서는 2001년 발굴을 통하여 발견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습니다.[4]

숭정전 자정전.png

숭정전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입니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숭정전은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건물을 일본인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습니다.[5]

자정전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서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입니다.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습니다. 1617~20년(광해군 9~12) 사이에 건립되었으나, 일제가 훼손하였습니다. 서울시에서는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자리에 <서궐도안>에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습니다. 자정전 서쪽에는 발굴을 통하여 행랑의 바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돌이 발견되었기에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여 복원하였습니다.[6]

태령전 서암.png

태령전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 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흔적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던 태령전을 서울시에서는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습니다.[7]

서암

경희궁 터에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이용한 시설들도 많이 있었는데, 현재는 서암과 영렬천만이 그 흔적을 말해줍니다.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습니다. 이 바위는 임금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이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습니다.[8]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환관(내시)


  • 어떤 사람이 환관(내시)이 될 수 있었을까?

환관, 즉 내시가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은 바로 거세한 남성이다. 환관(내시)의 경우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파악할 수 있다. 고려시대 때 환관은 궁에서 일하는 거세한 남성이라면, 조선시대 때 내시는 국왕을 측근에서 시종하는 남성을 의미한다. 다만 고려시대 말기에 환관들이 내시직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후에는 의미 차이가 많이 없어졌다.

선천적 환자(고자를 의미)가 아닌 이상 음경이나 고환이 있었는데 없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 대한 자세한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논문[9]을 보면 고려시대의 환자(고자)는 크게 네 가지의 경우에서 선발했다고 한다. 첫째, 특수사정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거세한 자이다. 둘째, 우연적 사고로 인해 환자가 된 자이다. 셋째, 선천적인 환자인 자이다. 넷째, 스스로 자르거나 남의 종용으로 자른 자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는 스스로 거세했다는 사료가 없으며, 조선 건국 직전에 명나라에서 고려 조정에 강제로 거세해 명나라로 환관을 차출하는 방식을 금하라는 명령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때는 후천적으로 거세를 한 자보다는 선천적으로 혹은 사고로 환자가 된 자를 환관으로 임명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왜 환관(내시)는 반드시 환자(고자)여야 했을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황제의 후궁을 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음과 양의 관점의 이유도 있다. 음은 여성성을 상징하고 양은 남성성을 상징한다. 황제는 강력한 양의 기운을 가졌으므로, 음과 양의 조화를 위해 황제를 보좌하는 자들은 음의 기운을 충만하게 가지고 있도록 했던 것이다.

  • 환관들은 결혼을 하여 가족을 꾸릴 수 있었을까?

한 논문[10]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환관 2명 중에 1명 이상은 혼인을 했다고 한다. 물론 환자(고자)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부부생활은 어려웠으나, 그럼에도 혼인을 했던 이유는 환관이 궁궐업무를 볼 때 집안일을 할 집안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연려실기술 별집 제 10권 <관직전고>의 <환관>에 따르면, 환관은 선천적 환자를 데려다 양자를 삼기도 했는데 이 경우 환자는 친족과 연을 끊어야 했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 1.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사이트 첫 화면에 자동으로 영상이 재생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현재 첫 화면에는 영상이 아닌 사진이 슬라이드 되어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 부분에 사진 대신에 국채보상운동을 묘사한 영상이나 남아있는 영상 등을 제시하면 더 좋을 것 같다. 꼭 영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첫 페이지가 조금 더 접속자들의 흥미를 유발할 만한 콘텐츠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노이미지사진.png

  • 2.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검색을 할 때 이미지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 현재는 NO IMAGE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접속자의 입장에서NO IMAGE라는 문구를 봤을 때는 사이트의 완성도가 떨어져 보이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사진과 같은 시각적 자료가 현재 없다고 할지라도 묘사한 이미지나 일러스트 등을 탑재하는 것이 사이트의 완성도에 좋을 것 같다.



  • 3. 아카이브 설명이 조금 더 구체적이었으면 좋겠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살펴봤을 때 ‘아카이브 검색’이 정확히 무엇을 검색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안내가 부족한 것 같다. 물론 사이트를 잘 살펴보면 관련한 설명을 찾을 수 있지만, 이 부분은 접속자가 주의를 기울여서 찾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조금 더 명확하고 편리하게 설명을 배치하면 좋을 것 같다.



  • 4. 과거와 달리 현재 대부분의 학생들은 한문에 익숙하지 않다. 물론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는 이를 감안하여 원문과 해석본을 동시에 탑재하고 있다. 하지만 원문을 하나하나 해석하기 위해서는 페이지를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원문 한자에 마우스 커서를 가져다 대면 한글로 변환하여 보여주거나, 해석된 한글에 마우스 커서를 가져다 대면 원문한자를 보여주는 식으로 비교할 수 있도록 개선하면 좋을 것 같다.



캡션1

  • 5. 사이트의 글자들이 지나치게 큰 감이 있다. 이 사이트를 모바일로 접속하면 글씨가 크게 써져 있는 것이 편리할 수 있으나, 노트북이나 컴퓨터로 접속할 때는 과한 측면이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의 활용은 대부분 모바일보다는 컴퓨터를 통해 접속할 것 같기 때문에 글씨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각주

  1. 김현, “디지털 인문학_인문학과 문화콘텐츠의 상생 구도에 관한 구상”, 2013, 4쪽
  2.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3. 경희궁전각소개_경희궁_서울역사박물관
  4. 경희궁전각소개_경희궁_서울역사박물관
  5. 경희궁전각소개_경희궁_서울역사박물관
  6. 경희궁전각소개_경희궁_서울역사박물관
  7. 경희궁전각소개_경희궁_서울역사박물관
  8. 경희궁전각소개_경희궁_서울역사박물관
  9. 이우철. "고려시대의 환관에 대하여." 사학연구 1 (1958): 18-44.
  10. 신명호. "조선시대 환관가족의 구성과 기능." 古文書硏究 26 (2005): 123-142.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