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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제건축)
(덕수궁 관람 루트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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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관람 루트 추천==
 
==덕수궁 관람 루트 추천==
  
[[KHU구본규#목제건축 | 건축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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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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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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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이란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 활동을 일컫는 말이다.<ref>김현, 「디지털 인문학: 인문학과 문화콘텐츠의 상생 구도에 관한 구상」, 『인문콘텐츠』 29, 2013. 6.</ref>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아카이브 구축을 보다 손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실 혹은 지식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해오곤 했다. 팔만대장경,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등 목판, 금속 활자, 친필 등의 필요에 맞게 수단을 변경하여 기록을 이어갔다. 어떤 사실에 대해 연구하고 기록하고 아카이브하는 것. 그것을 이제는 디지털 세계 속에서 하는 것이다. 텍스트로만 이루어져 있던, 혹은 사진이 첨부되어 있던 정도의 아카이브에서 이제는 텍스트, 이미지, 음성, 동영상, 하이퍼링크 등의 모든 방식에서의 아카이브가 가능하게 되었다. 정보학과 인문학이 학문적 경계를 넘어 디지털 환경에서 통합하여 우리가 연구한, 보존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학문 분야인 디지털 인문학으로 발전했다. 모든 자료가 정보화된 이 사회에서 우리는 정확한 자료만을 아카이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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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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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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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은 선조 임금이 선조 26년<sup>1593</sup> 10월 서울로 돌아올 때<ref>[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0001_002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2번째기사]</ref>, 정릉동의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으며”<ref>[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00A_0180_010_0090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고사본말]</ref>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월산대군의 집은 왕의 거처로 삼기에 너무 작았기 때문에 주변의 집들을 순차적으로 궐내로 포함시키며 그 영역을 넓혀갔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0003_007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3일 계미 7번째기사] </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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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승하 이후 광해군은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했다.<ref>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310011_001 『광해군일기』 46권, 광해 3년 10월 11일 정축 1번째 기사] </ref> <ref>본래 흥경궁으로 명명하려고 했다가 전대의 궁호이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고쳐 썼다.</ref> 광해군은 창덕궁이 중건되었지만 이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 반 동안 경운궁에서 머무르다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4002_001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2일 무인 1번째 기사]</ref> 이후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였고<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3_001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ref> ,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7012_003 『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7월 12일 경자 3번째 기사]</ref> 이 후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402020_001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2월 20일 양력 1번째 기사]</ref>하는 1897년까지 약 250년 동안 경운궁은 조선 역사에서 큰 기능을 하지 못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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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일본의 압박을 받아 퇴위하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4407019_003 『고종실록』  48권, 고종 44년 7월 19일 양력 3번째기사]</ref> 이후, 순종은 고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궁호를 고종이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덕수’로 칭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08002_001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일 양력 1번째기사]</ref>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ref>[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11013_001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11월 13일 양력 1번째기사]</ref> 경운궁은 자연스럽게 고종의 궁호를 따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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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의 사무소와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장으로 석조전(石造殿)이 사용되었으며, 1948년에는 정부 수립과 광복 3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이 거행되는 등 정치의 중심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통칭되며 시민공원으로 활용되거나 음악공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석조전과 그 별관은 국립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이용되면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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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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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현판의 종류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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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옛 건축물들에는 대부분 건물의 이름이나 성격을 나타내는 현판<sup>懸板</sup>이 걸려 있다. 수많은 전각들이 밀집되어 있는 궁궐은 현판의 경연장<sup>競演場</sup>이라고 할 정도로 각양각색의 현판들이 즐비하다. 궁궐의 현판은 해당 건축물의 기능이나 성격 등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궁궐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 현판<sup>懸板</sup>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어 있지만, 그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담고 있는 말은 편액<sup>扁額</sup>이다. 현판은 ‘글씨를 쓴 널빤지[板]를 걸었다[懸]’는 단순한 뜻이고, 편액은 ‘건물의 문 위 이마 부분에 써 놓은 글씨’라는 뜻이다. 편<sup>扁</sup>은 호<sup>戶</sup>와 책<sup>冊</sup>이 합쳐진 글자로 ‘문 위에 써 놓은 글’을 뜻하고, 액<sup>額</sup>은 이마라는 뜻이다.<br> 궁궐의 현판은 건물의 용도와 성격에 맞추어 지은 것이 상당수인데, 대표적인 방법이 경전<sup>經典</sup>이나 기타 문헌에서 따온 것과 오행<sup>五行</sup>의 원리에 맞추어 지은 것이다. 물론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순수하게 글자의 의미를 조합하여 지은 것이다. 각 궁의 정문은 공통적으로 ‘화<sup>化</sup>’자가 들어간다. 경복궁의 [[광화문 | '''''광화문''''']]<sup>光化門</sup>, 창덕궁의 '''''돈화문'''''<sup>敦化門</sup>, 창경궁의 '''''홍화문'''''<sup>弘化門</sup>, 경희궁의 '''''흥화문'''''<sup>興化門</sup>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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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광화문.jpg |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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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창덕궁_돈화문_01.JPG | 홍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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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흥화문.jpg | 흥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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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창경궁_홍화문.JPG | 홍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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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문의 이름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것이 각 궁의 정전<sup>正殿</sup> 이름이다. 정전의 이름은 공통적으로 ‘정<sup>政</sup>’자가 들어간다. 경복궁은 [[근정전 | '''''근정전''''']]<sup>勤政殿</sup>, 창덕궁은 '''''인정전'''''<sup>仁政殿</sup>, 창경궁은 '''''명정전'''''<sup>明政殿</sup>, 경희궁은 '''''숭정전'''''<sup>崇政殿</sup>이다. 여기에는 유교 국가로서 조선의 정치 철학이 담겨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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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근정전.jpg | 근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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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인정전.jpg |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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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정전.jpg | 명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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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숭정전.jpg | 숭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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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의 이름에 ‘정<sup>政</sup>’자가 들어간 것은 금방 수긍이 간다. 그런데 정문에 쓰인 ‘화<sup>化</sup>’자도 결국 바른 정치와 관련된 말이다. 지금은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다 워낙 가치를 높게 두어서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식의 논리가 횡행하고 있지만, 유가적 관점에서의 정치는 먹고 사는 문제를 포함하면서도 그보다 먼저 올바른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정신적인 교화<sup>敎化</sup>를 더 우선시하였다. 그래서 각 궁의 정문 이름에 교화를 뜻하는 ‘화化’자를 넣은 것이다. <br> 근래에 동대문을 현판에 쓰인 대로 ‘흥인지문<sup>興仁之門</sup>’으로 부르는 경향이 많으나 원 이름인 ‘흥인문’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속설에는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sup>地氣</sup>가 약하다고 하여 ‘지<sup>之</sup>’자를 넣어 보완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이름을 그렇게 고쳐 부른 것이 아니고 현판을 쓸 때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고종 때까지 줄곧 속칭인 동대문으로 부르거나 원 이름인 ‘흥인문’으로 부른 예가 수백 개나 나타난다. ‘지<sup>之</sup>’자는 어조사로 넣어준 것이지 이름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한문에서는 이러한 용례가 흔하다. <br> 궁궐은 우리 전통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궁궐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공간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눈에 보이게 존재하는 유형의 문화재인 건축물 자체에 대한 이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건축물에 대한 이해의 방편으로 각 건물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에 대한 이해가 첩경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의 기호로만 스쳐 지나가던 현판을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고 해석해 보면 궁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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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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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연금 검색 시스템 중 직업으로 검색하기<ref>[http://www.gukchae-archive.org/gp/page/contributionPeopleJob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직업으로 검색하기]</ref> 부분에서 개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이트에는 ‘신분과 관계없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인물을 이곳에서 찾아보세요’, ‘조직, 관직, 직업으로 세부 내용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있지만 세부 탭에선 지역, 가족 정보확인 등 관련이 없는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각 항목에 맞는 새로운 탭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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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검색 시스템 중 아카이브 검색하기 탭<ref>[http://www.gukchae-archive.org/gp/page/itemList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아카이브 검색하기]</ref>에서 문집 항목을 선택해서 검색해보았더니 문집 자료들은 이미지가 없이 ‘상세보기’ 서비스만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문집의 이미지나 원문을 볼 수 있도록 콘텐츠 혹은 링크를 추가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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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검색 탭<ref>[http://www.gukchae-archive.org/gp/page/itemList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아카이브 검색하기]</ref>의 상세 검색 항목에서 사진필름, 녹음동영상, 박물, 도면/지도, 기타를 선택 후 검색하면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라는 창이 나옵니다. 자료가 없는 항목은 상세 검색 탭에서 삭제하여 이용자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전문 검색 페이지<ref>[http://www.gukchae-archive.org/gp/page/fullText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전문 검색]</ref>에서도 위와 같은 오류를 발견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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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검색 페이지<ref>[http://www.gukchae-archive.org/gp/page/fullText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전문 검색]</ref>의 문서 유형 목록에서 연설문, 격려문, 발표문, 청구서, 임명장의 항목을 선택하고 검색을 하면 자료가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또한, 자료가 없는 항목들이므로 문서 유형 목록에서 삭제하는 것이 좋아보입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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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검색 페이지<ref>[http://www.gukchae-archive.org/gp/page/itemList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아카이브 검색하기]</ref>에서 형태와 유형을 동시에 고르지 않고 유형만 고르고 검색하는 것에 오류가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형태를 고르지 않고 유형만 선택해서 검색을 할 시 처음 한 번만 검색이 되고 그 뒤 다른 유형을 골라서 검색을 할 시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형태와 상관 없이 유형만 선택해서 검색을 하고 싶은 이용자들은 불편을 느낄 사항입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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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검색하기 페이지<ref>[http://www.gukchae-archive.org/gp/page/eBookList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eBook 검색하기]</ref>에서 eBook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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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클릭 시 보안 문서 변환 및 보안 뷰어 설치를 하라는 페이지가 뜹니다. 원본 이미지 이용 시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각주==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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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4일 (일) 01:28 판

덕수궁 소개

덕수궁의 위치와 역할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 선조가 피난지인 의주에서 서울로 돌아와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에 머물면서 행궁으로 사용하던 곳을 1611년광해군 3에 광해군이 처음 경운궁이라 이름 붙였다[1]. 1623년인조 1에는 인조반정 뒤에 인조가 경운궁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하였으며(인조실록 1년 3월 13일), 이후 1748년영조 24에는 영조가 인조의 즉위처를 확인하기 위해 경운궁에 임어하기도 했다[2]. 고종 이전까지 명례궁(明禮宮)이 자리하기도 했다.
고종대 황폐한 이곳에 새롭게 궁궐을 조성했다. 1893년고종 30에는 고종이 즉조당에서 선조 환도 300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을 치렀다(『고종실록』 30년 10월 4일). 1896년고종 33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는 을미사변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한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정궁으로 삼고자 경운궁을 영건하였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경운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자 경운궁은 황궁(皇宮)으로 격상되었다. 1907년융희 1 고종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된 이후 고종의 호를 덕수(德壽)로 하였기 때문에 경운궁은 덕수궁(德壽宮)으로 불렸다. 속칭 정릉동 황궁(皇宮)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고종 사후인 1921년에는 경운궁선원전(璿源殿), 순종 비의 혼전인 의효전(懿孝殿)을 창덕궁으로 이건한 뒤, 궁역 서북부가 분할·매각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의 사무소와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장으로 석조전(石造殿)이 사용되었으며, 1948년에는 정부 수립과 광복 3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이 거행되는 등 정치의 중심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통칭되며 시민공원으로 활용되거나 음악공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석조전과 그 별관은 국립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이용되면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하며 임진왜란기와 광해군대 임시 궁궐인 행궁으로 사용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폐기되었다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궁으로 이용되었다.

덕수궁의 역사

정릉동행궁

선조 임금은 1593년선조 26 10월 서울로 돌아왔다. “상이 아침에 벽제역(碧蹄驛)을 출발하여 미륵원(彌勒院)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 정릉동(貞陵洞)[3]의 행궁(行官)으로 들어갔다.”[4] 고 『선조실록』은 10월 1일자 기사로 전한다.(선조수정실록에서 4일로 수정함. [5])
정릉동의 집들을 행궁 터로 선택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왜군들이 주둔했던 곳이라 기거할 만한 집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정릉동의 행궁은 흉악한 적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므로 비린내 나고 더러워서 임금의 처소로 적당하지는 못하였으나, 거처할 곳이 없어서 우선 거처하신 것이다.” [6] 라고 적혀있다. 이때 선조가 행궁으로 삼았던 집은 월산대군의 집으로 “정릉동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옛집을 행궁(行宮)으로 삼았다.”[7] 라고 『연려실기술』은 기술한다. 『선조수정실록』에도 “고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았다.”고 기술되어 있다.[8]
월산대군의 집은 궁궐로 삼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이에 선조는 관서들을 궁 밖으로 이전시키고 순차적으로 궐내로 포함시키게 하였다.[9] 이렇게 주변의 집들을 이용하여 정릉동행궁을 꾸렸지만 임금의 거처로서 짜임새를 갖추기가 어려웠다. 이에 본래의 법궁을 중건하여 이어하려고 했지만 중건 공사가 끝나기 전 1608년 2월 1일 정릉동행궁 정침에서 승하하였다.[10] 선조 승하 다음날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정릉동행궁 서청에서 즉위하였다.[11]

경운궁

광해군은 정릉동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했다.[12] [13] 광해군은 경운궁에 길한 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또, 창덕궁은 일찍이 내변을 겪었으므로 창덕궁이 비록 중건되었지만 법궁에 거처하려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이렇게 약 3년 반 동안 경운궁에서 머물다가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14] 이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해군은 병조판서 이하에게 경운궁에 가서 감찰하라고 전교한다. 실록에는 “모후를 유폐하여 문을 폐쇄하고 겹겹이 자물쇠를 채워놓고 분병조와 분총부를 이미 두어서 숙직하여 지키는 것을 엄하게 했는데, 또 판서 이하로 하여금 직접 가서 검찰하게 하였다. 이후에 또 헌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고 또 간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여서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번갈아 서로 교대하게 하였다. 〈구금하고 곤궁하게 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으니, 다만 ‘폐한다[廢]’는 한 글자만 아직 가하지 않았을 뿐이다.〉”[15] 라고 적혀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게 되었다.[16] 후에 인조는 경운궁에 딸린 가옥을 그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게 하였다. “선조가 침전으로 쓰던 두 군데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본주에게 되돌려주라고 하교하였다.”[17] 이 후 경운궁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는 1897년까지 조선 역사에서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다. 또한, 실록을 찾아보면 명례궁과 경운궁 두 이름으로 혼용되어 불렸다. 1679년 숙종 때 개수 공사를 했다는 기록[18]과 1748년 영조가 경운궁에 임어하여 어제를 게판했다는 기록이 있다[19]. 영조 대에 경운궁에 대한 기록이 특이하게 많이 있다. 영조 45년1769, 영조는 경운궁에 임어하여 양조개어兩朝皆御, 계해즉조당癸亥卽阼堂이라는 글을 친히 쓰고, 게판하도록 명하였다[20]. 또한 영조 47년1771 경운궁에 들러 궁호를 친히 써서 걸도록 하였다. 영조 49년1773 영조가 ‘석어당’ 세 글자를 써서 즉조당에 현판을 걸게 하였다[21]. 이렇게 약 1년 반마다 한 번씩 들려 직접 글씨를 써 경운궁에 걸게 하였다.
시간이 흘러, 고종 30년1893 10월 4일 고종과 신하들은 경운궁 즉조당에 나아가 선조가 수도에 환궁한 300년이 지난 것에 대해 예를 행하였다.[22] 이후,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태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고, 왕태후와 왕태자비는 경운궁으로 이어하는 사건 이 일어나고[23], 고종 34년1897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 지 1년만에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어하였다.[24]

덕수궁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일본의 압박을 받아 퇴위하게 되었다.[25] 이후, 순종은 고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궁호를 고종이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덕수'로 칭하게 하였다.[26] 순종 즉위년1907 11월,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27] 경운궁은 자연스럽게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순종 12년1919,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이 승하하였다.[28]


왕조와의 관계(선조, 광해군, 인조, 고종, 영조+계축일기)

  1. 관련 인물
    1. 월산대군
    2. 선조
    3. 광해군
    4. 인조
    5. 숙종
    6. 영조
    7. 고종
    8. 순종

덕수궁 건물별 소개(주요 전각들)

각 건물의 이름 유래

각 건물의 역할과 의미

각 건물의 완공과 훼손, 복원의 시기(연표)

좌구명 국어(國語)
공자 춘추시대 춘추(春秋)
사마천 전한 사기(史記)
반고 후한 한서(漢書)


역사서
이름 시대 저서
사마천 전한 사기(史記)
공자 춘추시대 춘추(春秋)
좌구명 국어(國語)
반고 후한 한서(漢書)
사기
구분 목록 한자
본기 오제본기 五帝本紀
하제본기 夏帝本紀
은본기 殷本紀
10권
8권
세가 30권
열전 70권
사기
구분 목록 한자
본기 오제본기 五帝本紀
하제본기 夏帝本紀
은본기 殷本紀
10권
8권
세가 30권
열전 70권

각 건물의 건축 방법 및 특징

목제건축

석제건축

덕수궁에서 일어난 사건

아관파천(1896년)

대한제국 선포(1897년)

을사늑약(1905년)

고종황제 강제 퇴위(1907년)

고종황제 승하(1919년)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1946년)

덕수궁 관람 루트 추천

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이란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 활동을 일컫는 말이다.[29]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아카이브 구축을 보다 손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실 혹은 지식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해오곤 했다. 팔만대장경,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등 목판, 금속 활자, 친필 등의 필요에 맞게 수단을 변경하여 기록을 이어갔다. 어떤 사실에 대해 연구하고 기록하고 아카이브하는 것. 그것을 이제는 디지털 세계 속에서 하는 것이다. 텍스트로만 이루어져 있던, 혹은 사진이 첨부되어 있던 정도의 아카이브에서 이제는 텍스트, 이미지, 음성, 동영상, 하이퍼링크 등의 모든 방식에서의 아카이브가 가능하게 되었다. 정보학과 인문학이 학문적 경계를 넘어 디지털 환경에서 통합하여 우리가 연구한, 보존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학문 분야인 디지털 인문학으로 발전했다. 모든 자료가 정보화된 이 사회에서 우리는 정확한 자료만을 아카이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덕수궁

덕수궁은 선조 임금이 선조 26년1593 10월 서울로 돌아올 때[30], 정릉동의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으며”[31]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월산대군의 집은 왕의 거처로 삼기에 너무 작았기 때문에 주변의 집들을 순차적으로 궐내로 포함시키며 그 영역을 넓혀갔다.[32]
선조 승하 이후 광해군은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했다.[33] [34] 광해군은 창덕궁이 중건되었지만 이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 반 동안 경운궁에서 머무르다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35] 이후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였고[36] ,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37] 이 후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38]하는 1897년까지 약 250년 동안 경운궁은 조선 역사에서 큰 기능을 하지 못했다.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일본의 압박을 받아 퇴위하게 되었다.[39] 이후, 순종은 고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궁호를 고종이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덕수’로 칭하였다.[40]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41] 경운궁은 자연스럽게 고종의 궁호를 따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의 사무소와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장으로 석조전(石造殿)이 사용되었으며, 1948년에는 정부 수립과 광복 3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이 거행되는 등 정치의 중심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통칭되며 시민공원으로 활용되거나 음악공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석조전과 그 별관은 국립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이용되면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궁궐의 현판의 종류와 의미

우리의 옛 건축물들에는 대부분 건물의 이름이나 성격을 나타내는 현판懸板이 걸려 있다. 수많은 전각들이 밀집되어 있는 궁궐은 현판의 경연장競演場이라고 할 정도로 각양각색의 현판들이 즐비하다. 궁궐의 현판은 해당 건축물의 기능이나 성격 등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궁궐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 현판懸板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어 있지만, 그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담고 있는 말은 편액扁額이다. 현판은 ‘글씨를 쓴 널빤지[板]를 걸었다[懸]’는 단순한 뜻이고, 편액은 ‘건물의 문 위 이마 부분에 써 놓은 글씨’라는 뜻이다. 편은 호와 책이 합쳐진 글자로 ‘문 위에 써 놓은 글’을 뜻하고, 액은 이마라는 뜻이다.
궁궐의 현판은 건물의 용도와 성격에 맞추어 지은 것이 상당수인데, 대표적인 방법이 경전經典이나 기타 문헌에서 따온 것과 오행五行의 원리에 맞추어 지은 것이다. 물론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순수하게 글자의 의미를 조합하여 지은 것이다. 각 궁의 정문은 공통적으로 ‘화’자가 들어간다.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이 그것이다.

이 정문의 이름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것이 각 궁의 정전正殿 이름이다. 정전의 이름은 공통적으로 ‘정’자가 들어간다. 경복궁은 근정전勤政殿, 창덕궁은 인정전仁政殿, 창경궁은 명정전明政殿, 경희궁은 숭정전崇政殿이다. 여기에는 유교 국가로서 조선의 정치 철학이 담겨 있다.

정전의 이름에 ‘정’자가 들어간 것은 금방 수긍이 간다. 그런데 정문에 쓰인 ‘화’자도 결국 바른 정치와 관련된 말이다. 지금은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다 워낙 가치를 높게 두어서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식의 논리가 횡행하고 있지만, 유가적 관점에서의 정치는 먹고 사는 문제를 포함하면서도 그보다 먼저 올바른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정신적인 교화敎化를 더 우선시하였다. 그래서 각 궁의 정문 이름에 교화를 뜻하는 ‘화化’자를 넣은 것이다.
근래에 동대문을 현판에 쓰인 대로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부르는 경향이 많으나 원 이름인 ‘흥인문’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속설에는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地氣가 약하다고 하여 ‘지’자를 넣어 보완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이름을 그렇게 고쳐 부른 것이 아니고 현판을 쓸 때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고종 때까지 줄곧 속칭인 동대문으로 부르거나 원 이름인 ‘흥인문’으로 부른 예가 수백 개나 나타난다. ‘지’자는 어조사로 넣어준 것이지 이름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한문에서는 이러한 용례가 흔하다.
궁궐은 우리 전통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궁궐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공간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눈에 보이게 존재하는 유형의 문화재인 건축물 자체에 대한 이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건축물에 대한 이해의 방편으로 각 건물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에 대한 이해가 첩경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의 기호로만 스쳐 지나가던 현판을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고 해석해 보면 궁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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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광해군일기』 3년 10월 11일
  2. 『영조실록』 24년 1월 27일
  3. 정릉동이라는 지역 이름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있었기 때문에 붙었다. 태종 연간에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긴 뒤에도 정릉동이라는 지명은 이어져 내려왔다.
  4.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2번째기사
  5.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6.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고사본말
  7.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고사본말
  8.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9.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3일 계미 7번째기사
  10. 『광해군일기(중초본)』 1권 광해 즉위년 2월 1일 무오 15번째 기사
  11. 『광해군일기』 1권 광해 즉위년 2월 2일 기미 9번째기사
  12. 『광해군일기』 46권, 광해 3년 10월 11일 정축 1번째 기사
  13. 본래 흥경궁으로 명명하려고 했다가 전대의 궁호이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고쳐 썼다.
  14.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2일 무인 1번째 기사
  15.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8일 갑신 1번째 기사
  16.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
  17. 『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7월 12일 경자 3번째 기사
  18. 『숙종실록』, 8권, 숙종 5년 5월 22일 을묘 4번째 기사
  19.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1월 27일 임자 2번째 기사
  20. 『영조실록』 113권, 영조 45년 11월 2일 경진 3번째 기사
  21. 『영조실록』 116권, 영조 47년 1월 16일 무오 2번째 기사
  22. 『고종실록』 30권, 고종 30년 10월 4일 임자 1번째 기사
  23.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2월 11일 양력 1번째 기사
  24.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2월 20일 양력 1번째 기사
  25. 『고종실록』 48권, 고종 44년 7월 19일 양력 3번째기사
  26.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일 양력 1번째기사
  27.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11월 13일 양력 1번째기사
  28. 『순종실록부록』 10권, 순종 12년 1월 21일 양력 2번째기사
  29. 김현, 「디지털 인문학: 인문학과 문화콘텐츠의 상생 구도에 관한 구상」, 『인문콘텐츠』 29, 2013. 6.
  30.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2번째기사
  31.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고사본말
  32.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3일 계미 7번째기사
  33. 『광해군일기』 46권, 광해 3년 10월 11일 정축 1번째 기사
  34. 본래 흥경궁으로 명명하려고 했다가 전대의 궁호이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고쳐 썼다.
  35. 『광해군일기』 89권, 광해 7년 4월 2일 무인 1번째 기사
  36.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
  37. 『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7월 12일 경자 3번째 기사
  38.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2월 20일 양력 1번째 기사
  39. 『고종실록』 48권, 고종 44년 7월 19일 양력 3번째기사
  40.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일 양력 1번째기사
  41.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11월 13일 양력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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